혁명여전사 윙티민카이의 사랑
나짱 여행자가 윙티민카이길(DUONG NGUYEN THI MINH KHAI)을 피해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가성비 호텔, k-food 레스토랑 및 한국 슈퍼, 게다가 현지 맛집까지 이 길을 따라 쭉 늘어서있기 때문이다. 3일 이상의 일정을 모두 외국음식과 식품으로 채울 수는 없을 테니 이 거리에 위치한 한국식당을 이용하거나 한국슈퍼에 들러서 기념품을 사거나, 이 거리에서 제공하는 수많은 서비스 중 하나를 아마도 이용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응우엔이라고 발음하는 Nguyen은 베트남 남부에서는 윙이라고 발음하는 듯하여, 표기도 이에 따르겠다.)
윙티민카이는 중국 한나라의 지배에 저항해 3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일시적인 독립을 이루어 냈던 쯩자매와 더불어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 위인이다. 전국 각 도시에는 위인 또는 각 지방을 따라 명명한 거리나 학교가 많은데, 윙티민카이의 이름도 많은 도시에서 길과 학교에 명명되어 있다. 나짱에서는 침향탑이 있는 4월 2일 광장 건너편부터 시작하여 해변을 등지고 약 1.3 km 길이의 거리를 윙티민카이 길로 부른다.
윙티민카이는 1910년 태어나 32년의 길지 않은 삶을 살다 1942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짧은 시간을 살다 간 그녀가 조국 해방과 혁명의 격랑 속에서 꽃 피워 낸 사랑이야기가 있다.
윙티민카이는 호찌민의 고향이기도 한 응에안성에서 철도공무원인 아버지와 자영업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둘러간 그녀의 삶 만큼이나 그녀의 인생에서 이른 시기인 17세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초대 총서기가 될 쩐푸, 그의 동생 쩐옥단과 함께 혁명의 길로 투신했다. 프랑스 식민경찰은 반식민세력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했고, 쩐옥단과 윙티민카이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보았다고 한다. 윙티민카이가 쩐옥단에 보낸 편지를 확보했는데, 쩐옥단의 구혼을 거절하는 내용이 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신한다. "나는 남편과 자녀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혁명적 대의만이 나의 유일한 남편일 뿐입니다." 문서를 통해 확인되는 그녀의 첫 번째 사랑의 흔적이다.
1930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윙티민카이는 프랑스의 통제를 피해 홍콩으로 가게 된다.(코민테른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약칭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코민테른의 베트남 대표였던 호찌민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고, 나이 차이가 20년이나 났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1931년 봄 호찌민은 코민테른에 그녀와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얼마 후 윙티민카이와 호찌민이 홍콩에서 영국경찰에 체포되면서 더 이상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없게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끝나게 되었다. 윙티민카이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호찌민과 결혼관계에 있었음을 밝힌 것은 문서를 통해 확인된다. 1934년 말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당시 호찌민이 가명으로 썼던 "린"과 결혼했었다고, 말한데서 확인된다. 베트남 정부는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1945년 호찌민은 미국 기자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고 언급했고, 1930년대 후반 윙티민카이가 해외에 있던 노인 혁명가였던 남편과 헤어졌다는 언급도 했던 것으로 볼 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실제로 한동안 유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콩에서 석방된 이후 윙티민카이는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도부로 활동했고,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대표로 파견되었다. 당시 호찌민도 모스크바에 머무르고 있어, 그녀는 호찌민과 4년 만에 재회한다. 그러나, 이미 사랑은 움직인 뒤였였다. 윙티민카이는 호찌민의 동지였던 레홍퐁이라는 5살 연상의 인도차이나공산당 실세와 연인관계가 되어 있었고, 그들은 코민테른 대회가 끝난 후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혁명의 대의 앞에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 레홍퐁은 코민테른 대표로서 상하이, 홍콩, 사이공 등을 오가는 동안, 윙티민카이는 사이공에서 코친차이나 지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코친차이나는 사이공을 포함한 베트남 남부지역을 말한다.)
1940년 윙티민카이는 민중봉기를 준비하던 중 체포되고, 그해 11월 코친차이나 봉기가 실패로 끝나고 난 후, 1941년 3월 사이공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즉결처형 된다. 그녀의 남편 레홍퐁은 그 이후, 악명 높은 베트남 남쪽 꼰다오 섬에 있는 감옥에서 1942년 병사하게 된다. 죽기 전 부부는 프랑스경찰에 의해 죄수복을 입은 채 잠시나마 만날 수 있었지만, 조직의 내밀한 사정을 숨기기 위해 그들은 끝까지 서로 모르는 척을 해야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에게 혁명만큼이나 치열했던 사랑이야기.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리고, 결혼이란 무엇이었까? 그 당시 사랑과 결혼의 문제는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다루어지곤 했었다고 한다. 윙티민카이의 결혼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결혼은 정치 활동, 혁명가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포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서로 사랑은 했겠지?
" 나는 남편과 자녀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혁명적 대의만이 나의 유일한 남편일 뿐입니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이 1887년 이래 이어온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언했다.
(괄호 안은 번지)
Virgo Hotel과 Regalia Gold Hotel (39-41) : 나짱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조식과 루프탑수영장, 헬스장이 포함된 4만 원대 5성급 호텔 숙박경험
도야짬뽕(138) : 한국식 중국집
금돼지(71/5) : 한국인들이 베트남에서 시작한 프랜차이즈 숙성돼지집
본스치킨(109A) : 유투버 나트랑하엘이네 치킨가게
수원돼지갈비(109) : 수원보다 맛있다는 냐짱돼지갈빗집
제주가(171) : 냐짱에 "제주가?". 한정식집
하이카(156) : 오랫동안 여행객들에게 사랑받아온 오징어묵 쌀국수
반깐구어린(234): 12만 동에 작은 전복 2개가 들어가 있는 게살국수를 파는 집
K-Market(57) : 한국인을 위한 슈퍼마켓(한국제과/음료, 여행객들이 많이 사가는 물건 등)
ALOHA(81): 하와이안 셔츠가 필요하다면.(저자 P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