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나가르 이야기 2_1500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성소피아 성당은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바뀌게 된다. 성소피아 성당처럼 웅장하거나 유명한 유적지는 아니지만, 15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낸 포나가르는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이제 포나가르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첫 번째 이야기, 힌두교의 바가바티 여신
서기 500년 경, 베트남 남쪽의 주인은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힌두교의 나라, 참파왕국이었다 (중국역사서에는 임읍, 점성으로 소개되어 있다.). 포나가르사원은 힌두교 사원이다. 언제 건축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747년 목조로 된 사원이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에 건축되었을 것이다.
다신교인 힌두교에서 그 중심이 되는 3 대신이 있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 세계질서의 유지자 비슈누신, 풍요와 번영의 신 시바신이다. 그중에서도 권위나 인기면에서 시바신이 대체로 대세를 이루는 것 같다. 시바신은 신화 속에서 브라흐마와 비슈누신을 제압한 바 있으며, 창조를 위해 파괴가 필요하다는 논리에서 파괴의 신이기도 한 시바신의 특징이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이미 끝나버려서 브라흐마 신은 별 볼일이 없게 되었고, 질서유지의 신, 비슈누는 기득권자인 부자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힌두교의 신들에게는 배우자신들이 존재한다. 바가바티는 시바의 아내다. 바가바티는 우마, 데비, 마하데비, 두루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참파에서는 악마를 정복한 자라는 의미에서 미히샤마르디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이와 관련된 조각들도 많이 존재한다. 포나가르 사원은 시바신의 아내 바가바티에게 바쳐진 사원이다.
서기 774년경 참족의 오랜 고향 자바(인도네시아지역)의 침략으로 포나가르는 파괴되었다. 그 후에 목재로 되어 있었던 사원은 석재로 다시 건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17년에는 여신상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즉, 바가바티는 이 사원의 주인이 된 것은 그 이후 겠지?
베트남이 아직 중국에서 독립하기 전인 700년대와 800년대에 이렇게 자바로부터 수차례 침략을 당하였고,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지역의 패권을 다투는 경쟁국이자 같은 힌두교를 숭상하는 캄보디아와의 전쟁도 추가로 겪은 참족은 주변 힌두교인과는 구별되는 그들만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자바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땅 위해 새로이 석재건축물로 재탄생한 포나가르사원에는 참족 그들의 이야기가 덧입혀지기 시작한다.
두 번째 이야기, 참파의 포나가르 여신
힌두교에서 부처는 질서유지의 신 비슈누의 9번째 화신으로 여겨진다. 힌두교에는 신이 많다. 그 말은 없었던 신이 생겨나도 전혀 믿음에 오류가 생기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참파는 그들만의 원하는 그들의 신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1050년 참파의 왕은 사원의 여신을 '양 푸나 가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그 이후로 이곳의 주인은 바가바티보다 양 푸나 가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다.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새로운 주인에 대한 새로운 서사도 생겨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예쁜 소녀가 홍수를 만났는데, 그때 그녀는 침향나무로 변하여 북쪽으로 떠내려 갔다. 이나무는 북쪽 나라의 왕자에게 바쳐졌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어느 밤 그녀는 다시 사람으로 변했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본 왕자는 그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그 사이 아이도 둘을 가지게 되었다. 문득 고향이 그리워진 그녀는 두 자녀와 함께 침향나무로 변하여 다시 남쪽으로 떠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사람들에게 벼를 재배하고, 옷감 짜는 법을 가르쳤다.
왕자는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것을 알고, 부하들을 시켜 그들을 찾도록 했다. 그런데, 남쪽으로 온 왕자의 부하들이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이를 안 그녀는 마법을 써서 왕자의 군대를 물리치고. 남아있는 군인들을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 신화 속 그녀가 포나가르이고, 그녀는 지상의 창조자, 침향나무, 쌀의 창조자로 여겨졌다. 그녀에 대한 존경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포나가르 사원을 짓고, 그녀와 그 자녀들을 숭배하게 되었다.
신화의 배경을 살펴보며, 가볍게 한 걸음만 더 나가보자. 포나가르는 참파왕국에서 남쪽을 대표하는 신었다. 그 말은 북쪽을 대표하는 신도 있어다는 말이겠지?
냐짱 북쪽에서 북쪽으로 약 450km 지점에 시바신이 주인이 국가중심사원(현재 미선유적지로 불림.)이 있었고, 참파왕국의 국토의 남쪽을 대표하는 위치인 냐짱에 지금의 포나가르 사원이 건축되었다. (북쪽 미선에는 포나가르보다 더 큰 규모의 힌두교 사원이 있었지만 세계 2차 대전,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상당수가 무너져 내렸다.)
후에에서 호찌민인근까지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참파왕국에는 남과 북에 각각 중심세력이 있었다. 북쪽은 빈랑나무 가문, 남쪽은 야자나무 가문이었다. 왕국의 통합은 두 가문의 결합으로 유지되었고, 세력이 우세한 쪽이 왕권을 가지게 되는 체제였다. 남과 북에 각각 미선과 포나가르가 필요했던 이유다.
세 번째 이야기, 베트남 선녀 천의 아나
서기 939년 중국 당나라에서 독립한 베트남이 참파의 위협으로 떠올랐다. 두 세력은 쯔엉 선 산맥을 서쪽에 두고 남북으로 대치하였다. 처음에는 대등하였지만, 점차 참파의 열세로 전환되고, 그들은 영토는 점점 베트남에 의해 잠식되기 시작한다. 이를 베트남의 역사에서는 남진이라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도 저 푸른 초원 위의 집을 꿈꾸었나 보다.)
1600년에 이르러서는 계속되는 베트남의 남진과, 참파의 후퇴로 냐짱을 베트남에 넘겨주고 만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이제 포나가르 사원의 운명도 풍전등화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정복자들은 이방 종교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베트남 대중의 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참파왕국에서도 힌두교와 불교는 공존관계에 있었으므로, 서로에 대한 이질감은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 대신 그 땅에 살던 참족이 더 이상 살지 않게 되어, 포나가르 여신에게 제사를 드릴 사람은 없었다. 반면, 나짱에 정착한 베트남 사람들은 포나가르 사원의 위엄과 독특함에 종교적 상상력과 경외심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대전산에 나이 든 부부가 참외를 재배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누가 몰래 참외를 따가는 일이 일어났다. 도둑을 잡기 위해 할아버지는 밤새 기다렸고, 10대 초반의 소녀가 달빛아래 참외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그 연약하고 조그만 소녀가 도둑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소녀를 데려다 친딸처럼 사랑하며 양육했다.
어느 날 큰 홍수가 났는데, 그 와중에 놀고 있던 소녀는 할아버지에 혼이 나서, 침향나무속으로 숨어버렸다. 이 침향나무는 북쪽으로 떠내려갔는데, 나무가 무거워서 아무도 들지 못하고 있던 중, 북쪽 나라의 태자가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게 된다.
어느 날 밤 침향에서 나온 소녀를 본 태자는 그 소녀와 결혼하게 되고, 오랜 시간 함께 살며 이들 부부는 치아, 계라고 불리는 두 딸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남쪽에 두고 온 노부부가 그리웠던, 그녀는 다시 침향나무로 변해서 남쪽 대전산으로 내려가 버린다. 그러나, 노부부는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선녀는 그곳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고 하늘로 날아가 벼렸다.
태자는 부인의 있는 곳을 알아내고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다. 그 사람들은 남쪽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세운 사원에서 불경을 저질렀다. 이때 홀연히 바람이 일어나 배를 전복시키고 그들을 거대한 돌덩어리로 변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에게 존경을 표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어 신성한 여신으로 경배하게 되었다. 베트남들은 음력 첫째 날과 보름에 그녀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그녀에게 참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천의선녀(Thien-y Thanh-Mau)라고 부른다. 지금 포나가르의 주인은 그녀이다. 왜냐하면, 주사원 건물에 있는 신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신이 바로 티엔이선녀 그녀이기 때문이다.
조그만 동산에 위치한 포나가르 사원에서 그 옆을 끼고 흐르는 까이강을 바라본다. 왠지, 저 다리 넘으로 보이는 바위들이 포나가르 여신이 바위로 만들었다는 그 군인들이 아닐까? 포나가르를 지었던 참파왕국은 어떤나라였을까?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