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도 알아야 할 나짱이야기 8

포나가르 이야기 3- 잊혀진 문명 참파

by 나짱임

포나가르 사원은 참파왕국의 국가사원이었다. 그렇다면, 참파왕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놀랍게도 참파왕국은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16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존재했던 나라다. 비록 지금은 역사에서 사라진 문명이 되었지만.....




베트남 이전에 존재하였던 참파왕국


참파왕국은 임읍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역사에 등장한다. 임읍은 192년에 건국되었는데, 이 때는 베트남이 독립 이전으로 중국 한나라의 지방정부에 교주에 속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베트남의 왕조가 역사상 등장하기 않았기에, 베트남땅에 베트남보다 먼저 자리 잡은 참파왕국은 중국의 변방에 접한 나라이자 지역 패권을 놓고 중국에 수시로 도전하는 나라였다. 중국의 확장을 저지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지 부족으로 인한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약탈에 의존해야 했기 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 참파는 중국으로부터 영토를 방어하는 소극적 대외정책이 아니라, 수시로 접경지역인 일남 군뿐만 아니라 하노이 인근 구진군까지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육하는 등 적극적으로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듯하다. 주변국인 푸난과 함께 교주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푸난의 거절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433년에는 송에 사절을 보내서 교주의 할양을 요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방국가의 강대국에 대한 패기는 때로는 두 세 곱절의 피해로 돌아오곤 했다. 446년 참파는 송나라의 군대에 의해 수도까지 함락되었고, 수많은 보물과 황금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수도가 폐허로 변하게 되었다. 이를 본 참파의 왕은 충격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605년 수나라도 참파의 수도 짜 끼에 우 (후에 혹은 호이안인근으로 추정) 약탈하였고, 서류상 수나라의 일개 군에 편입되었던 적도 있다.(실제로 지배가 이루어졌는지는 의문.)


베트남이라는 국가는 없었지만, 참파의 약탈의 무대가 되었던 교주는 베트남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주민들이 살던 지역이었고, 따라서 참파의 북진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 또한 베트남 사람들이 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정부가 없었기에 참파의 침략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이 없었다. 그들만의 나라가 세워지기까지는.....



베트남의 남진 정책, 참파왕국을 겨냥하다.


서기 192년 경 후에•다낭 지방에서 발생한 참파왕국은 더 남쪽인 나짱과 판랑에 까지 그 영토가 이르게 되었다. 참파왕국이 임읍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이 훨씬 이전이었고,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응오왕조를 세운 것이 그 이후이니, 참족이야 말로 베트남 영토의 오랜 주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지금의 하노이를 주변으로 하는 지역에는 중국의 지배 하에서도 중원과는 구별되는 교주(지금의 하노이 및 인근지방) 사람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서기 939년 박당강 전투에서 남한을 물리친 응오꾸엔은 스스로 왕을 칭하였고, 중국 지방정부의 수장에 해당하는 절도사라는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베트남의 왕조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제 참파왕국의 지역 패권 경쟁 파트너는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변경되었다. 중앙의 입김이 미치기 어려운 중국 변방의 외곽에 위치한 나라에서 베트남이라는 다이내믹한 신생국과 경계를 접하게 된 것이다.


오랜 기간 중국에 저항하면서도 그들을 모방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베트남 사람들은 신생국의 역동성과 중국문화흡수를 통한 선진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이었음이 곧 증명된다. 베트남은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하에서 그들의 제도를 학습하고, 독립한 후에도 꾸준히 그 제도를 모방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반면 참파왕국은 시대에 따라 부침이 있었지만, 참족의 5 세력과 중부산간지역의 또 다른 소수부족이 느슨하게 연합한 국가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어, 세력 간 파워게임에 따라 왕조가 빈번하게 바뀌었고, 왕권에 의해 국가 전체적으로 큰 힘을 모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립하자마자 베트남의 힘은 참파와 대등한 정도에 이르렀고, 중국과, 쯔엉 선 산맥과 바다에 북서동이 막혀 있던 냄비엣은 그들의 민족적 역량과 에너지를 남쪽으로 진출하는데 쏟아부었다. 그 남쪽에 있었던 나라가 바로 참파왕국이다. 이를 베트남의 남진이라고 하는데, 베트남의 남진은 사실상 참파왕국 정복의 역사에 해당한고 볼 수 있다.



광빈성과 광찌성북부지역 할양


1068년경 리왕조 탄똥왕 시절 베트남은 후에 북쪽 200 km 지점에서 참파왕국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대규모 농경지가 없어 상시적 식량난에 시달리던 참파는 빈번하게, 베트남을 침범하고 약탈해 갔다. 단명한 응오•딘•레 왕조를 거쳐 리왕조는 베트남 최초로 장기집권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나라가 안정화되고 국력을 쌓아 나갈 수 있었다. 더 이상 참족의 노략질을 참고 방어만 해야 하는 세월은 지나간 것이다.


리 탄똥은 군대는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뀌년인근) 진격했고, 2달 만에 함락했다. 참파의 왕은 장수 리트엉끼엣에 포로로 잡혀, 북쪽으로 끌려왔다. 그렇게 잡혀간 왕은 석방을 위해 참파는 후에 북쪽 땅, 오늘날의 광빈성과 광찌성 지역을 베트남에게 내어주게 된다.




베트남 공주와 바꾼 광찌성과 후에성


베트남에 쩐왕조가 들어섰고, 중국에는 원나라가 자리 잡았다. 원나라는 전 세계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인접국인 베트남과 참파를 향해서도 3차례 출정하였으나, 결국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가나기 4) 참파왕국은 대몽골항쟁 당시 북쪽에서 들어오는 몽골군은 베트남을 장벽으로 삼을 수 있었지만, 남중국해를 통해 들어온 수군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3차례 원정이 끝난 후, 참파의 왕이었던 심하바르만 5 세는 약해진 국력을 추스르는 한번, 다시 있을지 몽골의 침략에도 대비해야만 했다. 이에 왕은 국가를 보호하고, 유사시 베트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편으로 베트남 쩐왕조의 공주와 혼인관계를 맺을 생각을 하고, 이에 쩐왕조 상왕인 년똥에게 요청하였고, 년똥은 그 결혼을 승낙한다. 후엔쩐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야만족에게 문명국의 공주를 시집보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면서, 쩐왕조의 문인들이 공주의 결혼을 극력 반대하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이에 심 하바르만 3세는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후에성을 포함한 북쪽 영토를 베트남에게 이양하게 된다.


심하바르만 3세는 후엔쩐 공주와 결혼하였지만 1년 만에 사망하게 된다. 왕이 죽으면, 왕후도 함께 죽는 참파의 풍습이 문제가 되었다. 쩐왕조는 사절을 보내 공주를 몰래 북쪽으로 다시 빼내게 된다.


후엔쩐 공주의 동상



참파의 소멸


1471년경 레탄통(후레왕조)은 비자야(뀌년)까지 점령한 후, 참파의 영토는 전성기의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수도를 나짱 남쪽 판랑으로 옮기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캄보디아 경계에 닿아있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최남단의 영토였다. 1653년에는 나짱을 내어주고, 판랑 부근에서만 세력을 유지하는 사실상 베트남의 속국에 머물렀으며, 이 시기 참족은 대부분 그들의 오랜 믿음인 힌두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된다. 1832년도 들어서 윙왕조의 민망황제는 참파의 영토를 베트남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게 됨으로 참파는 소멸한다. (가나기 9 예정)


각 시기별 베트남의 남진 진척을 보여주는 지도






에필로그


1832년 참파의 소멸 직후, 두 차례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는 단순이 차별과 불평등에 대항하는 성격이었지, 국가부흥운동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다.


국가를 잃은 참인들의 수난은 현대에 까지 이어졌다.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참족은 미국이 그들의 독립 또는 처우를 개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군에 협력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정치적 보복으로 이어졌으며, 그들을 살기 위해 태국, 캄보디아로 탈출하였다.


불행하게도 캄보디아에 정착하게 된 이들은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의 킬핑필드의 희생자가 되어 참인 50만 명이 학살당하게 되는 슬픈 역사를 가지게 된다. 오랜 기간 힌두문명을 꽃피운 참 인들은 근대 이후 소수민족으로 베트남판랑, 캄보디아, 대만 등으로 흩어져 살게 되는 운명이 되었다.


정말 쓸쓸한 장면이다.


참파인들의 전통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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