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애사심은 통장에 찍히는 금액과 비례한다
저에게 최고의 찬사는 ‘역시’입니다. 단 두 글자 안에 과거에도 잘 해왔으며, 현재도 훌륭하다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곳에서도 “역시 000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숱한 자소서와 면접에 써먹은 터라 완전히 입에 붙어 버린 나의 단골 멘트이다. 입 발린 소리처럼 들리긴 하지만 이만한 진심도 없는 것이, 저 세 문장은 꽤나 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기 싫어하고, 어디서든 어떻게든 인정받아야 한다. 나는 ‘갑자기’ 혹은 ‘웬일로’가 아닌, ‘역시’ 잘하는 사람이고 싶은 것이다. 다행히 나는 제법 일 머리가 있는 것으로 판명이 되었는데, 계획 짜기 좋아하고 미루기 싫어하는 타고난 성격이 사무직에 그럭저럭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성질이 워낙 급해 밥도 빨리 먹고, 말도 빨리 하고, 걸음도 빨리 걷는데 이런 특성은 내 업무 역량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이 되었다. 빨리 배우고 업무 처리도 빠른데, 간혹 빼먹는 게 하나씩 있는 것이다. 나는 큰 그림에 강하고 디테일에 약했다. 그걸 스스로 잘 아는 터라 늘 두세 번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지만, 타고나길 꼼꼼한 사람을 따라 잡기란 쉽지 않았다.
새 직장에서 맡게 된 일은 서류 관리로, 내 특유의 덜렁댐이 발동하지 않도록 많은 애를 써야 했다. 일이 많이 밀려있던 터라 여러 명에게 동시에 인수인계를 받았는데, 한 번 들은 건 되묻고 싶지 않아 모든 말을 받아 적었다. 설명을 들을 땐 영 헷갈렸지만 수첩을 펼쳐 놓고 하나하나 해보면 대부분 해결되었다. 보조 역할이다 보니 업무 내용이 가지각색이었지만 역시 어려운 일은 없었다.
우리 팀은 일곱 명쯤 되었는데, 놀랍게도 100% 여자였다. 인터넷에 ‘여초 직장’을 검색해보면 좋은 이야기가 반, 나쁜 이야기가 반이었다. 다행히도 우리 팀은 굉장히 좋은 편에 속했다. 반 이상이 내 또래이고, 팀장님도 40대 초반이니 팀 분위기도 젊었다. 직함에 관계없이 모두들 서로를 ‘00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빠르게 회사에 적응해갔다.
매주 월요일 오전에 팀 회의를 했는데, 초대장을 받은 첫 회의에 참석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계약직인 내가 꼭 필요한 자리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다음 월요일 아침, 일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팀원들이 아무도 없다. 생각해보니 회의 시간인 것이다. 나도 참석해야 하는 건가 싶어 메일을 확인하지만 잡힌 일정은 없다. 그래, 나는 계약직이니까. 그렇게 몇 주쯤 흘렀을까, 조심스럽게 팀원 한 명이 말을 꺼낸다.
“저, 혹시 팀 미팅에 참석하는 거 괜찮으신가요? 팀장님이 00님도 꼭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요.”
알고 보니 실수로 초대장에서 내 메일 주소가 빠져 있었고, 그 사실을 모르는 팀원들은 내가 일부러 회의에 들어오지 않는 줄 알고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팀 회의는 다소 귀찮은 일이지만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이 곳은 이전 회사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들어와 보니 국내 대기업 파견직과 외국계 파견직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이었다. 매년 공채로 신입을 대규모 채용하는 대기업과 달리 외국계는 소수 경력직 위주로 뽑으며 신입을 뽑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자리가 난다 해도 일단 파견 계약직으로 뽑은 다음 자체 계약직으로 변경, 최종적으로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처음부터 정규직 신입을 뽑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아무리 보조 자리라 한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면접에서 작가니 어쩌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 내가 어떻게 뽑힌 건지 아찔하다.
아마 그래서인지 내 첫 계약 기간은 3개월이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으니 일단 지켜봐야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주어진 임무를 곧잘 해냈고 팀원들과도 잘 어울렸다. 한 달 만에 팀장님은 1년 계약으로 연장해 주셨고, 조심스레 꺼낸 나의 요청에 따라 연봉도 올려 주셨다. 심지어 내가 말한 것보다 조금 더 얹어서. 이때 나는 무척 감격했다. 그저 하나의 소모품처럼 느껴졌던 대기업과 달리, 이 곳에서는 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허공에 흩날리는 말이 아니라, 통장에 찍히는 돈으로. 애사심이란 바로 이럴 때 퐁퐁 샘솟는 것이었다.
입사한 지 몇 개월 만에 커다란 장애물이 찾아왔다. 홍콩에서 파견된 독일인 상사가 약 3개월 동안 우리 팀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큰 키에 작은 얼굴, 훈훈한 외모의 그는 나보다 불과 두세 살 많은 엘리트였다. 여하튼 독일에서 오신 높은 분들을 위해 우리 팀은 각자 업무를 낱낱이 설명하는 영어 PT를 준비해야 했는데, 또 나에게 조심스러운 질문이 들어왔다.
“00님, 혹시.. 같이 준비하실 수 있겠어요? 부담스러우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부담스럽다, 엄청. 하지만 어떻게 감히 거절하겠는가. 난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흔쾌히 함께 하겠다고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큰 기회가 되었다. 팀원들을 실망시키거나 누구에게도 밀리기 싫었던 나는 매일 밤늦게까지 PPT를 만들고 영어 대본을 달달 외웠다. 긴장한 티야 낫겠지만 그럭저럭 내 몫을 다하고 나니, 메신저로 여러 팀원들에게서 달콤한 칭찬이 돌아왔다.
‘정말 너무 잘했어요! 내가 다 뿌듯하더라’
‘00님 숨겨진 능력자였네. PPT 진짜 짱!!’
발표도 그렇지만 내 평생 가장 공들인 PPT가 칭찬받으니 그렇게 뿌듯할 데가 없다. 팀원 조직도 PT를 준비하느라 끙끙대던 팀장님도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한마디를 던진다.
“아, 00님 이거도 좀 봐줄 수 없을까? 대체 어떻게 고쳐야 하나..”
그냥 웃음으로 넘겨도 될 만큼 별 무게는 없는 말이었지만, 잠시 동안 천근 같은 고민을 한다.
“.. 팀장님, 제 메일로 보내주시겠어요? 제가 집에 가서 수정해 볼게요.”
“어머, 정말? 너무 고마워~!”
그렇게 집에 가자마자 노트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맨다. 도형과 선이 몇 개 그려져 있는 뻔한 조직도 말고, 더 눈에 들어오고 효과적인 무언가 없을까…? 나는 ‘역시’라는 말이 듣고 싶단 말이다. 그렇게 한참 끙끙대다 간신히 완성된 조직도를 메일로 보낸다. 너무 실험적인 것 같기도 하고… 전전긍긍하며 손톱을 물어뜯는데 1분 만에 답장이 돌아온다.
‘대 to the 박입니다~~!!!!! 그대로 쓸께요~ 감사 해영!!!’
PPT에는 네모 박스 대신 우리 팀 한 명 한 명의 검은 실루엣이 들어가 있었다. 중심에는 팀장님이 서 있고, 나머지 여섯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마치 세상을 구하는 히로인들처럼, 스마트하고 유연하면서도 파워풀한 조직 문화를 한 장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그 조직도는 우리 팀의 공식 자료가 되었고 내가 퇴사할 때까지도 끝없이 활용되었다. 대표님의 눈에 들어 다른 부서의 조직도까지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전 회사 같으면 절대 나서지 않았겠지만 이 곳에서는 내 능력을 펼치는 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만큼 나를 인정해 주는 곳이니까.
채 1년도 되지 않아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은 갑절로 돌아왔다. 과장님이 갑작스레 팀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물론 사원이라는 직함은 그대로였지만 파견에서 자체 계약직으로 변경되고 연봉도 훌쩍 올랐다. 이제는 거의 세 달치 월급인 상여금도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이 변화가, 여태껏 내가 우리 엄마에게 한 것 중 가장 큰 효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