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차주가 되었다

#34 운전은 진정한 어른의 권력

by 신재

운전면허를 딴 건 열아홉 살 때였다. 수시 합격이라 수능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나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야자 대신 노란색 운전면허학원 차에 올라탔다. 교복 소매를 걷어 올린 팔 한쪽을 창문에 턱 걸치고 하얀 트럭을 운전할 때면, 사회의 맵고 쓴 맛에 통달한 어른이라도 된 듯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싶어 졌다. 여기에 필기부터 도로주행까지 단숨에 합격한 덕에 ‘고딩 때 교복 입고 트럭 몰았는데, 그거 뭐 한 번에 합격했지. 완전 쉽던데?’ 하는, 허세 충만 풀 스토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잘난 1종 보통 운전면허증은 10년 동안 오직 신분증 목적으로만 활용되었다. 서울에서는 트럭은 고사하고 경차를 몰 일도 없었던 것이다. 브레이크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가물가물할 정도였으니, 사실 아예 운전을 못한다고 보는 게 맞았으리라. 그런 나에게 운전을 잘하느냐 못 하느냐의 여부는 진정한 어른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친구 입에서 “너 어디 살아? 데리러 갈게” 같은 말이 나오는 순간, 나보다 한참 레벨이 높은 멋진 어른으로 분류가 되는 것이다. 자차가 있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권력이었다.




내가 그 권력을 가질 엄두를 쉽사리 내지 못했던 건 사실 과거에 제법 큰 사고를 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때는 2011년, 일 년 간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을 때였다. 브리즈번 근교의 부잣집에서 아이를 돌봐주는 오페어 일을 시작한 나는 친절한 주인집 아저씨의 레슨을 받아 막 운전을 시작했었다. 그래 봐야 신호등 하나 없는 주택가에서 우회전 좌회전만 하면 되는 쉬운 코스였고 나의 임무는 아이를 등하교시켜주는 것이었다. 거의 처음으로 면허를 써먹을 일이 생겼으니 잔뜩 신나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그런데 불과 몇 주 되지 않아 사건이 터진 것이다.


“오늘은 정문으로 가면 안 될까? 후문은 너무 멀어..”

“정문? 나 정문 가는 길은 모르는데?”

“괜찮아! 내가 알려줄게!”

“… 그래? 그럼 가볼까~?”


초심자의 자신감이 듬뿍 붙은 시기, 아이의 말을 따라 새로운 길에 도전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이가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차들이 가득한 4차선 도로가 나온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아이를 내려 주고 어찌어찌 돌아서 나왔는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온 그대로 돌아가면 되겠지 싶었는데, 일방통행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턴 내비게이션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바로 옆 골목의 주택가로 들어왔다. 한 손으로 목적지를 입력하며 ‘그래, 주소를 아는 데 뭐가 걱정이야~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굉음, 그리고 진동과 함께 차가 멈췄다. 내비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주차된 차와의 거리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주행 속도는 고작 10, 20 정도였을 텐데 얼마나 제대로 박았는지 사이드 미러가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당황해서 일단 뒤로 빼보려 했지만 앞바퀴의 펜더 부분이 서로 단단히 끼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심지어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단 차에서 내리긴 했는데 집들이 양 옆으로 나란히 늘어선 평화로운 길가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부딪힌 차의 주인집으로 추정되는 현관문을 두드리지만 아무도 없나 보다. 차 안에 있던 종이로 메모라도 남기고 돌아서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린다.


“도움이 필요하니..?”


올려다보자 옆 집 발코니에서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야말로 천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차를 분리시켰지만 운전해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근방에 주차를 해 두고, 집까지 차를 얻어 탔다. 잔뜩 풀이 죽어 꾸벅 감사 인사를 전하고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진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나 다 한 번쯤 겪는 일이야. 괜찮아.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서 진정하렴.”


결국 생판 모르는 어느 서양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 또 눈물을 쏟아냈다. 어수룩해 보이는 동양 여자애가 영 걱정되었는지, 아주머니는 집주인 분께 대신 전화를 걸어 자세한 상황 설명까지 해주고 나서야 자리를 뜨셨다.




다행히 나의 큰 실수는 먼 타국에서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 준 미담으로 완성되었지만, 트라우마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운전은 너무나 무서운 것,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이 콱 박힌 것이다. 물론 너무 쪽팔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 탓에 우리 가족들은 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2019년, 트라우마에 맞서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언니네가 타던 오래된 차를 나에게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 차는 그야말로 우리 가족의 역사 그 자체였는데, 내가 중학생 때쯤 엄마가 새로 뽑은 차였다. 엄마가 한참을 타다가 언니가 결혼할 때 물려주었고, 이제는 언니가 나에게 또 물려줄 차례가 된 것이다. 내가 조수석에 앉아 등하교를 했는데 이제는 운전자석에 앉게 되다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 차에는 엄마, 아빠를 비롯해 언니, 형부, 조카, 그리고 모모와 호동이까지 그야말로 가족 모두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열다섯 살 된 차의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영광이라 해야 할까. 고민 끝에 차종인 ‘베르나’와 첫 주인인 엄마의 성 ‘배’에서 따와 ‘배 씨’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읽을 때는 가득 애정을 담아 ‘뱃찌’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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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찌야 우리 오래가자

다시 연수를 받고 도로로 나오긴 했는데,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운전대만 잡으면 귀 뒤부터 목덜미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과거의 참패를 떠올리며 나에게 초보 딱지를 떼는 날이란 없다, 언제나 첫날처럼 운전하자- 매 순간 되뇐다. 그래도 일 년쯤 지나니 이젠 하이패스를 달고 고속도로도 달리고 깜빡이 없이 끼어든 앞차에게 빵빵거릴 줄도 안다. 스물이 아닌 서른이 되어서야 진짜 어른이 되는 조건을 하나 더 달성한 것이다.




운전을 하며 느낀 것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컴컴한 터널도 막상 들어가 보면 생각만큼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는 많은 것들도 겪기 전까지는 거대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막상 부딪히면 꽤 해 볼만하다. 그러니 미리부터 잔뜩 겁이 날 때면 터널의 입구를 떠올리며 용기를 얻자, 그런 교훈을 얻었다.


다른 한 가지는 세상에는 안전 운전을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운전이란 사실 엄청난 전문성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고, 마음만 먹으면 여러 명의 목숨을 빼앗는 건 일도 아니다. 그렇게 엄청난 살상 무기를 모든 가정이 한 대씩은 갖추고 있는 셈인데 악의적으로 활용되는 비율은 극히 낮다.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도로 위에 있는 대다수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모든 신호와 규칙을 순순히 따르고 있다니, 이게 왜 이렇게 신기하고 아름다운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운전할 수 있다는 것, 그 당연한 사실이 어쩌면 세상에는 악보다 선이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