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정규직 자리를 빼앗겼다

#35 좋은 회사도 결국은 회사일 뿐

by 신재

입사한 지 햇수로 벌써 4년 차. 크고 작은 프로젝트도 여럿 맡고 홍콩, 중국, 베트남 등 해외로 부지런히 출장도 다니는 나는 어엿한 대리가 되어 있었다. 길게만 느껴지던 2년의 계약 기간도 어느새 끝이 보이고 있었다.


“00님, 너무 잘해주고 있으니까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사실 정규직 전환에 대한 나의 입장은 모호했다. 연봉도 더 오를 테고 선택의 여지가 늘어나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이대로 안주한 채 평생 회사원의 길을 걷게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 발로 박차고 나오기에 그곳은 너무나 달콤했다. 사람들, 연봉, 복지, 커리어, 워라벨…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것이다. 물론 맡은 일 자체가 즐거운 건 아니었지만 딱히 괴로운 적도 없을 만큼 충분히 견딜 만했고, 연차가 오를수록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도 늘어나 나름의 보람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해외의 본사 사정은 좋지 않았던 터라 대규모 정리해고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중 한국 지사의 비중은 워낙 작기도 하고 모두가 내 정규직 전환이 확실한 것처럼 말해왔기에 그 영향이 나에게까지 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금 낌새가 이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의 내 업무 내용을 논의하며 곧 계약서 쓰자던 팀장님이, 계속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이다. 팀 분위기도 묘하게 뒤숭숭해지고 윗 분들끼리의 회의가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슬쩍 내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다.


“혹시 홍콩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어때..? 가고 싶지 않아?”


홍콩 지사는 APAC의 헤드쿼터인지라 한국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회였다. 하지만 해외에 살고 싶지도 않고 그 정도로 커리어에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닌 내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게다가 나이가 많아 함께 가기 어려운 호동이, 이제 막 시작한 선녀방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단번에 한국이 좋다며 거절 의사를 밝히자 팀장님은 내 성격상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며 어쩐지 난감한 기색이다. ‘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 그때부터 나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회사 상황이 안 좋아서 내 자리가 없나 보지 뭐, 별다른 위기의식과 불안감도 없이 그냥 그런가 보다 체념하고 있던 차인데 얼마 후 회의실에서 후배가 어렵게 털어놓은 말은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저.. 사실 저 이번 달부터 정규직 전환됐어요.


위에서는 나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아도 이보다 얼얼하지는 않으리라. 아, 그랬구나..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 대충 마무리를 짓고 회의실을 나왔다. 퇴근 전까지 꽁꽁 묶어놓고 있던 감정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터져 나왔다. 이럴 때는 혼자 사는 게 좋았는데. 맘 편히 울 곳도 없어 주차장의 차 안에서야 두 손바닥에 눈물을 쏟았다.


아, 이건 내 인생 가장 큰 실연이었다. 이제껏 그 어떤 남자가 내게 남긴 상처들보다도 더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회사이고, 진심으로 존경하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바로 다음 날은 주말이었지만 나는 중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짐을 싸고, 새벽같이 캐리어를 끌고 나가며 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출장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이어 나갔다. 이제는 팀원들의 웃는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다들 친절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팀장님에게 그 사실을 바로 말하지 않았던 건 그래도 이게 다가 아닐 거라는 일말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꼬인 상황을 바로 잡느라 뒤에서 바쁘게 뛰어다니시는 거겠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때가 되면 나한테 다 말씀해 주시겠지… 그래서 하루하루 썩어 문드러져가는 속을 붙들고 가만히 기다렸다. 팀장님이 나를 먼저 부를 때까지.


한 달 쯤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팀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팀장님은 안타까움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해 보았으나 도저히 방도가 없다고. 대신 홍콩에서 나를 데려가고 싶다는데, 그때 거절한 건 알지만 한 번 미팅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팀장님, 저 사실 알아요…”

“응?”

“제 후배 정규직 된 거 알아요..”


슬픔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크게 당황한 팀장님은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압박이 들어와서 원래 예정된 내 자리는 없어졌고, 그 후배는 이번에 전담하게 된 업무 특성상 정규직 전환이 불가피했다고. 둘 사이에는 결코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다고 말이다.


나는 그때 막 새로운 업무를 인계받아 과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랬기에 원래 내 자리는 기정사실이었다는 걸 안다. 곧 나갈 사람에게 새 일을 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인 끝에 내 자리가 없어진 것도, 정황상 그 후배는 정규직이 되는 게 맞았다는 사실도 안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정규직이 그렇게 간절했던 것도 아니었다. 만약 내게 너 아니면 쟤 둘 중 하나만 정규직이 될 수 있는데, 누가 할래?라고 물어봤더라면 선뜻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었을 것이다.


다만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 물음의 답은 사실 간단했다. 회사니까 이럴 수 있지. 우정이나 사랑을 쌓는 곳이 아니라 철저히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니까, 회사니까 당연히 그러지.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이 회사는 다를 것이라는, 이 사람들은 특별하다는 믿음. 나 역시 회사를 그저 회사로만, 돈을 벌고 커리어를 쌓는 곳으로만 대했어야 한다.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먼저 버리고 떠날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나는 그동안 회사에게 받은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는 철저한 이해관계 아래 있었다. 내가 잘했으니 회사도 내게 잘해줬던 거고, 이제는 딱히 필요가 없어졌으니 내보내는 것뿐. 그 당연하고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대로인데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를 맞이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내가 작가의 꿈을 놓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그들은 항상 이렇게 나를 설득해 왔다.


“작가? 그걸로 어떻게 먹고살아. 취미로도 할 수 있잖아. 회사는 계속 다녀야지.”


그런데 내 퇴사가 확정되자 모두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꿈이 있다니 얼마나 멋져. 도전해 보는 것도 좋지. 책 나오면 사인해 줄 거지?”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회사를 떠났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그러냐며 자기 같으면 책상을 몇 번 뒤엎었을 거라는데, 나는 결국 그들이 미워지진 않았다. 떠나는 날 팀원 한 명 한 명에게 긴 편지와 선물을 건넸고 물론 나도 꽃다발과 손편지, 여러 개의 케이크, 이북리더기, 에어팟 같은 화려한 이별 선물들을 돌려받았다.


팀원들의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눈물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