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vs 스타트업, 내 취향은?
#38 스타트업은 처음이라서
외국계에서 스타트업으로-, 진보일지 퇴보 일지 모를 한 걸음이 내디뎌졌다.
새로 옮긴 회사는 종로 한복판 높디높은 빌딩의 공유 오피스에 들어가 있었고, 10시 출근 7시 퇴근이었으며, 점심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업무 내용은 SCM에서 마케팅으로 180도 바뀌었고, 근소한 차이로 월급 실수령액이 더 높았다. 그러니 어느 쪽으로 보나 이건 제법 성공적인 레벨업이지-, 나는 확신했다.
아직 서비스 론칭도 되지 않은 직원수 4-5명 남짓의 작은 스타트업. 그곳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마케팅, 그러니까 말 그대로 포괄적인 모든 분야의 마케팅 전부였다. 거의 나 홀로 모든 종류의 마케팅 전략을 수립 및 실행해야 했는데, 자율성이 높다는 건 큰 장점이지만 그만큼 뒤따라오는 부담감도 엄청났다. 평소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하고 감 놔라 배 놔라는 질색하는 나였지만 대표가 기대하는 대로 마음껏 역량을 펼치기에는 그야말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했던 업무적 마케팅이라고는 영화 수입사 새내기 시절, 1년간 어깨너머로 배웠던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대행사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막내인 나의 실무는 상사 분들이 세워 놓은 계획과 일정에 맞춰 업체와 컨택하거나, 행사를 진행하거나, 기사를 쓰거나 하는 것들이 전부였다. 물론 대표님이 나를 뽑은 이유는 그 경력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직접 운영하는 셰어하우스 선녀방과, 무엇보다도 브런치에 연재한 글들을 보고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 주셨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 내 입맛대로, 내 취향대로 탄생한 결과물이기에 생판 남의 회사에 무작정 적용하기에는 큰 괴리감이 있었다. 적어도 위에서 큰 틀을 잡아주고 방향성을 지시해줄, 숙련된 선임 마케터 한 명정도는 있어야 내 능력이 빛을 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스타트업. 지금 상황에서 마케터는 오직 나 한 명뿐이고, 어떻게든 회사는 굴러가야 하니 당장이라도 공부를 하는 수밖에.
점심시간, 대표님께 말씀드려 법인 카드를 손에 쥐고 교보문고로 향했다. 나와 동갑내기인 디자이너(이지만 마케팅도 함께 해야 하는 동지가 된...) 분과 함께 거의 모든 마케팅 관련 책자를 뒤적거렸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들고 올 수 있을 만큼의 책들을 한 보따리 안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학 전공서적이지 싶은 두툼한 이론서부터, 실무 관련 팁이 실린 얇은 책자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매일 한 권 씩 집에 가져가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동시에 인터넷으로 온갖 유튜브와 사이트를 섭렵했고, 이걸로도 모자라다 싶어 실무교육 몇 가지를 골라 오프라인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신 대표님 덕에 빠른 시일 내에 어느 정도 기본 틀이 갖춰져 갔다. 희뿌옇게 떠다니던 용어나 이론들이 하나 둘 손에 잡히기 시작했고, 그 뼈대에 맞춰 우리만의 전략을 탄탄히 쌓아가는 일이 제법 흥미로웠다.
매뉴얼대로 따라가는 게 대부분인 물류 관리보다는 기획과 창작의 여지가 많은 마케팅이 훨씬 재미있고 보람찼다. 진작 이런 일을 할 걸 왜 3년이나 적성도 아닌 일에 머물러 있었을까, 더 빨리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으니. 업무뿐 아니라 외국계와 스타트업이라는 회사 형태도 그랬다. 이전 회사에 있을 때도 사내 규정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스타트업의 자유로움에 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츄리닝과 슬리퍼는 기본에 언제든 푹신한 소파와 바람이 선선한 테라스에서 혼자 일할 수 있고, 화장을 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새로운 세계...!
내가 보석 박힌 공주 드레스를 입든, 떡진 머리에 잠옷 차림이든 그야말로 이들은 나의 외적인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각자 맡은 일이 있고 그 일만 잘하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원래도 그리 꾸미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 회사에서야 나는 진정한 탈코르셋을 실현할 수 있었다. 부스스한 맨얼굴, 헐렁한 법복 바지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약 3개월 차까지, 새로운 회사에 대한 내 만족도는 대단히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