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당신의 몇 %를 쓰시나요
#39 회사원으로 살아남기 위한 조건
ㅇㅇ님은 참 잘하는데... 능력의 100%를 쓰지는 않는 것 같아.
파견직일 때도, 계약직일 때도, 정규직일 때도- 한결같이 상사에게 들었던 그 말. 이런 말을 들으면 그저 속으로 '내가 또...'를 읊조리며 헛헛,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딱히 대답은 하지 않는다. 너무나 사실이니까.
회사 생활의 진정한 승자는 일을 잘하는 사람도, 눈치 빠른 사람도 아닌 '능력의 50%만 쓰면서도 200%를 쓰는 것처럼 잘 포장하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확실히 그런 면에서 한참 덜떨어진 모양인지 매번 팩트를 들키고 말았다. 사실 회사에 오래 남고 싶었던 적도 없으니, 애초에 숨길 의지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새로 옮긴 스타트업에서 약 3개월 간의 달콤한 적응 기간이 끝나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표와의 면담이었다. 교탁 앞의 교사가 누가 책상 밑으로 폰을 만지작거리고 칠판을 바라보며 딴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상사 눈에도 직원들의 능력치와 헌신도가 그래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모양이다.
이번 면담의 분위기는 긍정으로만 가득했던 이전의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정확한 단어나 문장은 흐릿해졌지만 결국 요지는 그랬다.
'충분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적당히 타협하는 것 같다'
'포트폴리오만큼 퀄리티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쉽다'
여기까지는 뭐 충분히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였기에 큰 타격은 없었다. 그런데 진정한 핵심 문장은 가장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 그래도 월급값은 충분히 하잖아-, 알량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내게 꽤나 충격적이었던 한마디.
'이대로라면 함께 가기 어려울 것 같다'
아직 수익 한 푼 없는 스타트업이고, 그런 만큼 소수 최정예 팀을 꾸려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야 할 시기. 모두가 밥 먹듯 야근을 해가며 전력을 다하는 이때 '적당히' 제 업무만 마치고 매일 칼퇴를 하다시피 하는 나는, 어느새 월급값도 하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직원이 되어 있었다. 불과 몇 주 전 업무 능력 때문에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개발자가 떠올랐다. 내가 지금, 그 사람이랑 같은 취급을 받게 된 거야..? 비로소 얄팍한 오만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돌아본다. 내가, 그 정도라고..?
그래, 나는 그 정도였다. 권고사직을 당할 정도로 업무 태도가 불량하거나 혹은 성과가 미진한 직원.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회사의 현 상황을 기반으로 그간의 내 행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오히려 대표님한테 감정이입이 되었다. 이제까지라도 나를 데리고 있어 주신 것에 그저 감사할 뿐. 그래도 나를 위해 한마디 변을 남기자면, 사실 나는 이미 이 일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언제나 처음 업무를 알아가고 적응해가는 그 좌충우돌의 시간이 내게는 가장 흥미로운데, 그 시기가 지난 다음에도 열정이 이어지려면 어떤 선명한 촉매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가령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자부심이라든가, 하다못해 정말 좋은 상품을 팔고 있다든가 하는 사명감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제법 세속적인 사람이지만 의외로 금전적인 보상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데, 뭐 어떻게든 먹고살 수는 있겠거니 싶어 일을 그만두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첫 회사인 영화사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내가 왜 이 영화를 좋다고 홍보해야 하는지(사실 겁나 구린데), 이건 포장보다는 과장에 가까운 게 아닌지(초월 번역도 정도가 있지), 부정적인 면을 숨기는 건 정말 거짓말이 아닌지(그럼 악플이 왜 달리겠어)... 그런 무수한 고민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좋은 작품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라도 어떻게든 제대로 팔고 싶을 텐데. 단지 회사의 배를 불려줘야 된다는 이유, 내가 그 대가로 몇 푼의 월급을 받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열정이 영 불타오르지 않았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 곳에서 내가 느꼈던 회의감은, 내가 생산해 내야 하는 콘텐츠들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회사가 바라는 것은 내 브런치에 기록된 에세이들과 흡사한, 아주 솔직하고 내밀하며 누구나 공감하기 쉬운- 그런 감성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사무실에 앉아 겪어보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줄줄이 나열해야 하니, 피땀 눈물이 담긴 실제 경험담과 비슷한 퀄리티가 나올 리가 만무했다. 당시 내 능력으로는 아주 실감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거나, 혹은 그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해 보든가- 둘 중 하나밖에는 답이 없어 보였고 물론 둘 다 실현 불가능했다. 물론 그 거짓말을 멋지게 헤내는 것이 일류 마케터의 역할일 것이다. 돈을 주면, 뭐든 그럴듯하게 포장해내는 능력. 그저 나는 형편없는 마케터이자 직원이었을 뿐이다.
"100%를 다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사실 적나라할 정도로 의도가 선명한, 일종의 경고이다. 어리석게도 오랜 시간 나는 그 말을 오히려 '적당히 대충 일해도 늘 인정받는 내 유능함'에 대한 반증 같은 것으로 치부해 왔다. '돈 받는 만큼만 하면 됐지, 뭘 더 바래? 싫으면 자르든가,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뽑든가-' 하는 건방짐으로 대응해 왔던 것이다. 마지막 회사에 다다라서야 나는 이제껏 거쳐온 그 어느 곳에서도 사실 내 존재는 그리 소중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았음을 깨닫는다. 내가 대표라도 나 같은 직원은 뽑지 않을 것이며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내보낼 것이다. 나는 그 모든 회사에서 언제나, 딱 50% 짜리의 직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님은 나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다. 나를 마케터로 잘 키워보고 싶다고, 함께 성장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고민해보라고 하루를 주셨지만 이미 나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게는 마케터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심도, 이 커리어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에 도약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이 곳에 들어왔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저 스타트업을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었나 보다. 그 목표는 일단 이루었으니, 길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반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실로 나는 스타트업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소규모의 회사는 어떤 체제로 돌아가는지, 개발자와 디자이너, 마케터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협업을 하는지, 대표의 역할이 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절대 회사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 회사를 마냥 행복하게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번 천번 상사 욕, 회사 욕을 하더라도 나처럼 픽픽 쉽게 회사를 관두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속마음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면밀함,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성실함, 월요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출근을 해내는 근성.. 내게 결여된 그 수많은 능력들을 지닌 세상 모든 직장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인생의 방향성에 묵직한 확신을 얹어준 마지막 회사에 깊이 감사하고, 누군가에겐 사활이 걸린 그 간절함에 얄팍한 마음으로 감히 숟가락을 얹으려 했던 것에 죄송하다. 이로써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회사원은 없을 것이라 다짐한다. 만일 돌아간다면, '대표'만이 유일한 선택지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