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 속 크루엘라는 전형적인 악당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당연하게 '빌런'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폭한 성격과 고약한 성질머리 등도 한몫하겠지만, 무엇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의 가죽을 벗겨 모피 코트를 만들려 한다는 이유가 압도적일 것이다.
영화 <크루엘라> 속 크루엘라는 어떨까? 난폭한 성격과 고약한 성질머리라면 원작 캐릭터에게 뒤질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이 다르다. 그녀는 달마시안을 죽이지 않는다.
영화 시나리오계에 'SAVE THE CAT(고양이를 구하라)'는 유명한 이론이 있다. 주인공이 관객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위험에 처한 고양이를 구하는 것과 같이 인간적이면서 극적인 장면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같은 맥락에서 불쌍한 아이를 거두거나 살뜰히 식물을 돌보는 인물도 영 악역이기는 어렵다. 어느 부분에서 악역의 형태를 띨 수는 있지만 분명 그에 대응하는 서사가 있거나, 나중에 교화되어 주인공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건넬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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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 속 크루엘라가 결코 빌런이 아닌 명백한 이유이다. <조커>처럼 빌런의 탄생 서사에 집중한 영화를 만들려는 의도였다면, 크루엘라가 왜 강아지 가죽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당연히 강아지들을 죽이고 가죽을 벗겨 멋들어진 첫 번째 코트를 만드는 장면이 포함되었을 것이고.
영화는 사실 그가 충분히 '악당이 될 법한' 서사를 부여해주고 있다. 가령 자신에게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을뿐더러 직접적으로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 마리의 달마시안들. 아무리 동물에게는 죄가 없다 한들, 엄마를 죽인 건 사실이니 설사 개가죽으로 코트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관객들은 그럭저럭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 엄마한테 그랬으면 나라도 그러지' 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크루엘라는 그 개들을 구했다. 뿐만 아니라 최소 살인1 살인미수1 화려한 전적의 사이코패스 친엄마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잔인한 복수극이 펼쳐지더라도 관객들은 여전히 그의 편을 들어줄 법한데도. 이유는 간단하다. 디즈니가 크루엘라를 빌런이 아닌, 진짜 주인공으로 재탄생시키고 싶었으니까.
시작은 비슷했으나 끝은 다르리라
사실 크루엘라가 정의로운 인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영화 극 초반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자신의 한쪽이 되어줄 강아지 '버디'를 구하지 않았는가. 버디뿐 아니라 유치장에 갇힌 동료 겸 가족들도 구했고,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고 헤매던 자기 자신도 구했다. 그러고 보면 그가 구하지 못한 것은 양어머니뿐인데, 가까운 주변 인물의 희생은 주인공의 각성 및 스토리 전개를 위해 필연적인 장치인지라 에스텔라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불가피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한편 크루엘라가 빌런을 벗어났다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새로운 악역이 필요한 법.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를 연상케 하는 남작 부인이 <크루엘라>의 진짜 빌런이다. 그가 악당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카리스마 넘치고, 천재적이며, 에스텔라를 시궁창에서 구해줄 귀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극 속에서 남작 부인이 빌런으로 확정 지어지는 장면은 과연 어디일까.
미란다 선생님 때문에 남작부인도 철썩같이 믿어버렷잖아요..
거침없고 제멋대로인 언행이 드러나는 장면일까? 가차 없이 인신공격을 퍼붓고, 말 한마디로 직원을 자르고, 나 때문에 타인이 다쳐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장면들. 아마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런 장면들에서 관객은 짜릿한 해방감과 대리 만족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요소들은 캐릭터를 살리는 강력한 개성이 되어 그의 천재성을 더욱 뒷받침해줄 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미 사랑에 빠진 주인공 에스텔라가 그녀의 이런 모습을 존경하고 선망했지 않은가. 이때 남작 부인은 에스텔라를 이끌어 줄 괴짜 롤모델로 보일 뿐이다.
처음으로 남작 부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어라?'라는 생각이 든 순간은 아주 짧고 단순한 장면이었다. 다 먹은 도시락을 아무렇지 않게 차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장면. 그에게 기본적인 도덕성이나 양심 따위가 없다는 것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행위였다. 하지만 물론 이제까지의 캐릭터를 뒤엎을 정도로 임팩트 있는 장면은 아니었기에 빌런이라 확정 짓기는 일렀지만, 적어도 마음속에서 조금씩 불편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괴짜 캐릭터라도 저렇게 막 쓰레기를 버려도 되나?'
'저런 캐릭터가 긍정적으로 그려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왜 매력적인 캐릭터에 굳이 불편한 요소를 집어넣었지? 마음껏 좋아할 수 없게..'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풀린다. 정말로 남작 부인이 도덕도 양심도 없는 빌런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빌드업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성격상 크루엘라도 충분히 길가에 쓰레기를 버릴 위인이긴 하다. 하지만 영화는 굳이 그런 장면에 컷을 할애하지 않는다. 관객이 마음 놓고 주인공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줘야 하니까. 우리의 주인공은 조금 까칠하고, 제멋대로고, 못났을 순 있지만 도덕적으로 결함은 없어야 하니까. 굳이 들어간다면 주인공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쓰일 수 있겠다. 가령 초반부 길거리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던 주인공이 후반부에는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쉽지만 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기는 많이 어렵다. 현실 속 인간들은 너무나 입체적이어서,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는 동시에 얼마든지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플 정책으로 인해 영화 속 아이폰을 쓰는 인물은 절대 악역일 수 없다는데, 그보다 더 선명한 악역 구분법이 있다면 고양이를 구하는 인물은 결코 악역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입이 험하고 무식하고 양심 없는 인물일지라도 차가 달리는 도로에서 목숨을 걸고 아기 고양이를 구한다? 우리는 그 순간 그와 사랑에 빠진다. '삶의 풍파 때문에 거칠어졌지만 실은 따뜻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주인공의 성장 드라마가 시작된다.
흥미로운 건 우리의 주인공은 사람은 죽여도 되지만(갱생의 여지가 없는 나쁜 놈이라는 전제하에) 동물은 죽이면 안 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악의를 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기에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을 적용할 수 없지 않은가. <크루엘라> 속 달마시안들도 악역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쁜 사람에게 이용을 당했을 뿐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 관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여러 면에서 크루엘라는 찝찝한 구석 없이 앞뒤 꽉꽉 막힌 해피 엔딩을 선사한다.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우리 팀'은 누구 하나 다치거나 희생되지 않았다. 약간의 불화와 의심은 있었지만 끝까지 배신은 없었고, 크루엘라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멋지게 살아남는다. 아 참, 이거 디즈니 영화였지. 당연한 소리를.
<크루엘라> 쿠키 영상은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의 스토리와 충실히 이어진다. 원래대로라면 노년의 크루엘라가 코트를 만들기 위해 달마시안 새끼들을 훔치려 고군분투하는 스토리가 이어졌겠지만, 빌런이 아닌 주인공으로 거듭난 지금이라면 어떨까? 크루엘라의 다음 행보를 과연 어떻게 풀어낼지 디즈니의 큰 그림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약 60년 만에 빌런의 틀을 깨고 나온 크루엘라의 변신이 반갑다. 핏빛 복수극을 치러낼 수 있었지만 기꺼이 이를 거부한 크루엘라는, 혼자서 당당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내는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그가 우리의 미래이기를 감히 바란다. 영화보다 더 끔찍한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 세계. 악당의 서사를 합리화하지 않는 작품들이 더 많아지기를, 악한 상황에서도 선한 선택을 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더 당연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