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소셜살롱 전성시대
백수 생활은 언제나 즐겁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회사를 그만두니 사람 만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면 우울감에 빠져버리는 극-외향 인간으로서 몹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사 다닐 땐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어 알아보기만 하다 말았던 소셜 모임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백수, 혹은 반백수 생활을 즐기며 약 1년 간 접해보았던 다양한 소셜 모임에 대한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 모든 내용은 2018~2019년 기준으로 현재는 운영 방식 및 모집 형태 등이 상이할 수 있음.
취향관
https://www.project-chwihyang.com/
취향관의 특징은 대부분 소셜 모임들과 달리 '공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로망으로 꿈꿀법한 정원이 있는 아늑한 2층 집. 그 집을 중심으로 취향관의 모든 활동들은 전개된다. 취향관의 멤버십 회원이 되면 이 공간을 카페나 서점처럼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결코 저렴하지 않은 멤버십 비용에는 음료 가격이 포함되어 있어 원하는 음료(커피와 차, 칵테일 등)를 바에서 주문할 수 있다. 물론 횟수 제한은 있지만 꽤 넉넉한 편이라 매월 다 소진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취향관에서는 매월 일정 달력이 오픈되는데,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마치 티켓팅처럼 치열하게 원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해야 한다. 멤버십과 프로그램 신청은 별개로, 멤버십은 그저 취향관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 이용권 정도에 불과하고 그 공간 안에서 진행되는 클래스, 강연, 영화 관람 등 다양한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면 선착순으로 프로그램 신청을 해야 한다. 인기가 많은 모임은 순식간에 마감되기 때문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고 모임 종류에 따라 몇만 원 상당의 참여비를 별도로 내야 하는 경우도 많아 이러한 점이 가장 아쉬웠다.
그렇다면 프로그램 신청에 실패하면 대체 멤버십 비용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간에 가기만 해도 일단 거실에 둘러앉아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안전하고 안락한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와 언제든 질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막상 이것도 쉽지가 않았는데, 거실에 상주하는 인원은 거의 NPC처럼 특정 고인물(?) 멤버들로 고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신참이 끼어들고 싶어 기웃거려 보아도 이미 그들 간의 친목이 단단히 형성되어 있어 영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고의적으로 새로운 멤버를 따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끈끈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대화의 장에 풍덩 뛰어드는 것은 나 같은 자칭/타칭 인싸에게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몇 번 옆에서 말을 얹어 보다가 별다른 수확 없이 집에 돌아가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취향관 자체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비싼 멤버십을 끊어놓고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공간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항상 위치가 합정으로 고정이 되어 있어 왕복 1~2시간 거리를 오가기 귀찮았던 것도 한몫했다. 당시 멤버십 주기가 3개월이었는데, 결국 3개월이 지난 이후에 재등록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누군가 물어본다면 딱히 비추천을 하고 싶진 않다. 해당 기간 동안 와인 클래스, 고전 영화 감상, 주제가 있는 대화 모임 등 나름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를 해보았는데 각각의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높기도 했고, 깊이 있게 친해지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말 좋은, 멋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취향관은 자체 콘셉트가 확고하고 멤버십 비용이 어느 정도 있는 만큼 내가 참여했던 소셜 모임 중 가장 문턱이 높게 느껴졌는데, 그 덕분에 비슷한 취향을 지니고 저마다 깊이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면 멋진 인생 친구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 취향관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 취향관에 처음 들어오게 되면 저마다 닉네임을 짓게 되는데, 본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하고 싶은 닉네임을 정해 오는 경우도, 멤버들이 함께 지어주는 경우도 있다.
나는 '신재'라는 닉네임을 사용했는데 사람들이 어떤 뜻이냐고 물어보면 본명이라고 하는 대신 <젊은 느티나무>의 강신재 작가님에게서 따왔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이기도 하고, 그와는 별개로 내가 신재라는 두 글자를 참 좋아해서 그렇기도 했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에는 본인의 얼굴과 똑같은 가면을 쓰고 다니는 악동들이 나온다. 당연히 가짜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본질이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충격적이고 섬찟한 포인트인데, 물론 내가 이런 반전을 그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재'라는 가면을 쓰고 '신재'로서 비밀스럽지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 짜릿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언젠가 또 아무도 나를 모르고, 본명을 밝힐 필요도 없는 곳에 가게 된다면 꼭 다시 '신재'라는 닉네임을 쓰리라.
독서모임
내가 참여했던 독서 모임은 1회짜리 단기성 모임이었는데, 단기 모임이 괜찮으면 장기 모임에 참여할 계획이었으나 그 경험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관계로 다시 찾을 일이 없게 되었다. 독서 모임 중 가장 유명한 트레바리는 아니었고, 2군이나 3군 정도는 될법한 곳이었는데 그중 어디였는지 기억이 흐릿한 관계로 굳이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각자 원하는 책을 읽고 참석해 본인이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형태였고, 참여 인원은 6~7명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강신재 작가의 <젊은 느티나무>가 모든 인소와 로코, 막장 한국 드라마의 원조 of 원조나 다름없다며 열변을 토했는데(이 글을 읽는 분들도 꼭 한번 읽어보기를 바란다. 단편이라 매우 짧고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음) 다른 참여자들이 가져온 책들에 적잖이 실망했다. 우선 책을 아예 읽지 않고 참석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을뿐더러 대부분 경제, 재테크 관련 책을 가져온 것이다. 그나마 책을 다 읽어오고 심도 있는 추천 혹은 비추천을 해주면 또 모를까, 지금 읽고 있다거나 중간중간 필요한 부분만 보고 있다~ 와 같은 식으로 본인조차 그 책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연히 대화의 깊이는 너무나 얕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걸 과연 '독서' 모임이라 칭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나를 제외한 대다수 참석자의 목적은 좋은 책을 공유하거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가 아니라, 본인의 사업/영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인맥을 넓히고 싶어서였던 것으로 보였다. 넌지시 본인의 경력 자랑을 하거나, 명함을 뿌리는 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우리 옆쪽에서는 1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또 다른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지정 도서를 읽고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형태인 것으로 보였다. 저건 좀 나을까 싶어 지켜보는데 일단 책의 종류가 마찬가지로 경제/경영 쪽 인문 서적이라 구미가 당기지 않았고, 참여 인원이 많아서인지 한 마디씩 돌아가며 소감을 나눌 뿐 원활한 대화 혹은 토론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거리가 멀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결국 기대했던 첫 번째 독서 모임의 처참한 실패로 나는 다시는 독서 모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내가 접했던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원활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독서 모임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책이다 보니 그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아져 또다시 실망하고 싶지 않아 의도적으로 피하게 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인문/경영서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을 쌓는 것이 목적인 책은 사실 교과서나 교재, 매뉴얼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책과 독서의 범위는 상당히 편파적이다. '문학'이라는 한 분야만 인정하기 때문인데 생각보다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독서 모임은 많지 않은 듯하다. 진짜 책 덕후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 단어와 문장, 문단의 아름다움, 숭고함, 벅차오름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독서 모임이 있다면 제발 저에게 알려주세요.
오픈컬리지
오픈컬리지는 내가 현재까지 가장 오래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이다. '열린 대학'이라는 이름처럼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것을 설계하고 뜻 맞는 사람과 함께 모여 배움을 이어나가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오픈컬리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느슨함인데, 멤버십 비용이 월 1~2만 원일 정도로 상당히 저렴한 만큼 멤버들에게 관여하는 것이 없다. 취향관처럼 전용 공간을 내어주는 것도 아니고, 퀄리티 높은 프로그램을 열어주지도 않는다. 오픈컬리지의 모든 주체는 멤버들로, 가입 이후에 있는 OT 시간을 제외하면 딱히 오픈컬리지 운영진과 소통할 일이 없다. 대신 내가 원하는 다양한 주제와 콘셉트의 모임을 오픈컬리지 플랫폼을 통해 자유롭게 열 수 있고, 함께하고 싶은 다른 회원들을 모집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다. 전시회, 개발 공부, 책 만들기처럼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도 있고 1~2회로 끝나는 단발성 프로젝트도 부담 없이 열 수 있다.
나 역시 관심 분야와 관련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열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며 '오컬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어느덧 활동을 하지 못한 지 1~2년이 되어간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컬 활동을 할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정말 다양한 분야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취향관과 조금 다른 점은, 고정 멤버가 더 많아 새 멤버가 끼기 어려웠던 분위기와 달리 오컬은 훨씬 풀이 넓고 프로그램이 다양해 어떤 모임을 가든 고정 멤버보다 새로 온 사람들이 많아 적응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취향관이 정적이고 차분하다면 오컬은 훨씬 동적이고 쾌활한 느낌이라 해야 할까.
당시 활동을 꽤 열심히 했던지라 오픈컬리지를 통해 다양한 인맥들을 만들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이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타 소셜 모임에 비해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라 그만큼 조금 불쾌한 사람들(무례하거나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하는-)을 만날 확률도 올라가긴 하지만, 활동적이고 생산적이고 열정 넘치고 재미있고 의욕 넘치는, 삶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더 성취하고 이루려는 사람들을 잔뜩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주변에 추천도 열심히 하고 다녔고 코로나가 한창인 지금도 의리상 멤버십을 계속 유지는 하고 있으나, 크게 활용은 하지 못하고 있어 많이 아쉽다. 모든 소셜 모임의 적, 코로나는 대체 언제쯤 자취를 감출까.
생각보다 길어져 나머지 모임은 2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