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흔한 가족사진 한 장이 없다. 가족 구성원이 드문드문 모인 사진은 몇 장 있긴 하지만 가족사진이라고 할 만한 사진은 없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늦은 새벽 퇴근 후 새로 산 안마의자에 앉으니 사진 한 장이 눈에 띈다. 거실 소파 위 벽면에 걸려있는 액자 속 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속엔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매형과 어린 조카들이 둘째 조카의 돌을 맞아 푸른 잔디밭 위에 서서 웃음 짓고 있다. 일을 하느라 참석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사진을 보며 그때의 장면을 상상해 볼 뿐이다. 그러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사실은 내가 죽어서 돌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쓸모없고 부질없는 생각.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도 보았고, 나 자신을 죽음이란 늪에서 발악하다 놓아본 적도 있다. 삶과 죽음의 양면을 가까이서 느끼며 깨달은 사실은 그 양면의 틈은 정말이지 얇고 비좁다는 것이다. 그 아주 미세한 한끝 차이는 너무도 단순하여 어이가 없을 정도다. 25년의 시간을 함께 하였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헤어짐은 내게 현실을 고스란히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말 마지막이었는데 난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걸까. 그때의 그 행동과 그 이전의 어리석었던 나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럽다. 아마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난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이젠 가령 내가 없어진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또 보내게 되는 날에도 그 주변에서 난 항상 머물러있을 것이고, 그 슬픔과 공허함을 추억과 후회와 눈물로 메꾸어보려 하겠지만 이내 체념하고 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잊히는 게 아니라 그 흐른 시간 동안 조금씩 단단해진 내가 무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그 아픔을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중이다. 훗날 비슷한 실수를 했다며 자책하는 내 모습을 더는 용서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왜 어렴풋이 보이는 건지. 흐릿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피하려 하는지. 어쩌면 난 그저 영혼이고 싶은지도 모른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래도 가족사진을 찍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