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가 불어닥치던 즈음 내게 닥친 또 다른 태풍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거세게 덮쳐왔다. 드센 손아귀로 내 목을 한 움큼 쥐었기에 난 기침조차 할 수 없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와 함께 불어오던 바람은 이름 그대로의 또 다른 의미를 부각시키고 보란 듯 더욱 세차게 티를 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뚜렷한 답이 없는 질문과 일단 누구의 잘못이 우선순위에 오르느냐 하는 것을 용의선상에 올렸을 때 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다. 교통사고로 비유한다면 이 사고의 과실은 9:1 아니면 많이 쳐줘봐야 8:2임에 여지가 없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위는 인간의 직관적인 감과 욕심, 그리고 의심과 앞으로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한 자신감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단 걸 난 알면서도 알지 못하였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외로움도 많이 타는 사람. 이해와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그 이상 앞으로 외로울 사람. 웃고 있는 얼굴과 가식적인 만남, 그 만남을 조각 내 펼쳐보면 부서진 표정과 말투와 행동의 부스러기가 조각의 언저리에 떨어진다. 목적이 뚜렷한 발걸음은 마냥 앞으로만 걷지 않는다는 것. 종종 뒷걸음을 치기도 주위를 맴돌기도 하며 사정거리 안에서 배회하지만 앞으로 걷는 보폭은 꽤나 크다는 것.
알면서 묵인하는 특별한 밤은 길고도 긴 새까만 밤. 아침이 밝았지만 해는 보이지 않고 달빛조차 흐릿해지는 그런 하늘. 믿음이 최우선인 이는 이명증과 이석증에 고통스러워하고 머릿속 시끄러운 잡음과 어지럼증에 무기력해져만 간다. 쌓여가는 노폐물에선 악취가 풍기고 잔 벌레들이 꼬인다.
신뢰를 잃어버린 둘, 돌이킬 수 없는 하나. 터덜터덜 걷다 보면 머지않아 보이게 되는 벽. 가로막힌 관계는 쏟아지는 비와 함께 어느 아스팔트 웅덩이에 고여가는 썩은 빗물과도 같다. 음지에도 식물은 자라나지만 내가 키울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