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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크 Jan 17. 2023

봉준호 같은 영화감독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Ep1

"감독님 영화는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처음 받는 질문도 아니건만. 

찰나의 순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네이버 시리즈온에 가면 있다고 할까?' 

'아님 웨이브? 아냐. 가입 안 했으면 어떻게 해.'

'역시 네이번가?'

'그건 돈 내야 되잖아. 돈 내고 보라는 것처럼 들릴래나?'

'그러다가 기분 나빠져서 안 보면 어떻게 해?'


짧은 순간 내면과 내면의 목소리들이 부딪치던 것도 잠시. 

자본주의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말했다. 


"영화 보실 수 있는 유튜브 비공개 링크 보내드릴게요.^^"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만든 장편영화가 국내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해외영화제들로부터 초청을 받기도 했다. 

개봉을 하고 난 뒤에도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이 이어졌고

뉴스에 출연해 부모님에게 '우리 딸이 출세했다.'며 둥실둥실 기쁨을 안겨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개봉 이후 연락 온 영화 제작사들과 미팅을 할 때면 나는 여지없이 쪼그라든다. 


'아카데미나 한예종 출신 아닌 감독님이랑 미팅하는 건 처음이에요.'

- 넙죽 절이라도 해야 한단 소리?


'감독님도 이제 진짜 영화 만드셔야죠.'

- 그럼 이전에 내가 만든 건 가짜 영화란 말인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은 역시 나의 영화는 어디에서 볼 수 있냐는 것이다.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이지만 OTT로도, 

심지어 올레 tv 영화 채널에서 유료로 결제해서 볼 수도 있단 말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나는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고? 

그야, 나는 이제 막 독립영화를 하나 끝낸 신인 감독이니까. 


독립영화는 흔히 상업 영화판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온전한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쩜오'의 경력에 해당한다는 슬픈 현실.

이는 곧 내가 '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근데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내가 어떻게 하다 영화를 시작했더라?




“자, 지금부터 신입생 자기소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월,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겨울의 막바지. 

나는 강의실 안에서 한 무리의 신입생들 속에 섞여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전운이 감돌만큼 비장한 우리들 틈으로 각자 한 명씩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듯 다들 앳되고 상큼하다. 

괜한 열등감에 주변을 쓱 돌아보지만 당최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은 없다. 


나는 4수를 했다. 

첫 번째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후회와 진학한 대학에 대한 불만족 때문에, 

두 번째는 독학을 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오른 성적을 보며 

소위 말하는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세 번째는 수능 전날 불면증에 시달리다 먹은 초코 우유가 일으킨 배탈 때문에, 

네 번째는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해서. 


곧이어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뜨고 사회자가 내 이름을 호명했다. 

주뼛대며 밖으로 나가 뭔가에 홀린 듯 말했다. 

“제 이름은 ooo구요. 3수 했습니다.” 


개강 첫 주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날,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 '4수'를 '3수'라 속인 인사말과 궤를 맞추듯 

1, 2학년의 시간은 타인의 시선에 맞추며 살아가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늦었다는 생각에 무작정 내달리기만 했다. 

모두가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말하는데, 2학년이 되면서부터 

자꾸만 딴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긴 수험생 시절에는 대학이라는 큰 목표 아래에서 

오직 그것만을 보고 내달리는 패턴만을 반복했기에 

스스로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입학 후에도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것에 급급해 들어오기 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부유하듯 붕 떠있던 1년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난 시간은 평점들이 기록된 숫자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사실 4년간의 수험생활을 거치며 나는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았었다. 

10대의 끝자락부터 20대 초까지 나의 4년은 결코 쉽지 않았기에 

다시는 내 생애 모험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용하다는 한 무당은 내가 관운이 좋아 선생이나 교수가 되면 딱일 팔자라고 했고 

당시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싶었다. 


‘주름 진 내 삶도 대림질 한 것처럼 빳빳하게 대려 보자.’ 

그래서 택한 것이 사범대였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내게 평안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판이었다. 

나와 사범대는 맞지 않았다. 


뒤숭숭한 2학년 생활을 보내고 내가 선택한 결정은 2년의 휴학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 1년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 그리고 나머지 1년은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내가 속한 곳, 서있는 길에서 잠시 벗어나 나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특기였던 영어를 살려 유명 일타 강사의 영어 연구소에 들어가 조교 업무를 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1년 동안 무턱대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일본, 중국, 홍콩, 마카오, 대만,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호주까지. 

그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매일 하굣길에 대여점에 들러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적게는 3번, 많게는 20번도 더 돌려보던 기억들. 

중학생 때부터 취미로 시작한 영화 감상 노트 쓰기. 

길고 긴 수험생 시절, 공부를 하다가도 홀로 극장에 가서 맨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던 시간들. 

수능이 끝나고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을 물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영화만 보고 싶다던 대답까지. 


현실적인 제약, 불안감, 주변의 반대 그 모든 것을 걷어내니 이 물음표의 끝에 영화가 서 있었다.

25살이 되던 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일은 복학 신청을 하면서 

부모님 몰래 영화과에 복수 전공 신청을 한 일이었다. 


다시는 모험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사범대에 진학했던 내가 

4년의 수험 생활과 2년의 휴학을 거치며 돌고 돌아 

결국, 영화과를 택한 것이다.




영화과 수업을 듣던 시절, 나의 별명은 ‘6두품’이었다. 

정시 혹은 수시로 영화과에 들어온 친구들은 ‘성골’, 

편입이나 전과를 통해 영화과에 들어온 친구들은 ‘진골’, 

나처럼 복수 전공 혹은 부전공으로 영화과 수업을 듣는 친구들은 ‘6두품’. 


겉으로는 그 별명이 재미있다며 웃었지만 

6두품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구분 짓기에 서러움이 있었던 걸까. 

나는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배움에 대한 갈증이 컸다. 


콘티니 씬 리스트니 그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영화 전공이 아닌 친구들과 어린이 대공원에 나가 첫 단편을 찍기도 했고, 

편집 프로그램을 다루지도 못한 때에 무작정 유튜브를 보며 배워 

각본, 연출, 제작, 편집, 색보정, 믹싱까지 홀로 해서 두 번째 단편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이후 1년에 두 편씩 꾸준히 영화를 찍으며 3년 동안 총 6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고, 

졸업을 한 이후엔 독립영화워크숍, 미디액트, 영상작가전문교육원, 마스터 클래스, 영화 관련 특강 등 

영화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6편의 영화를 만들며(비록 썩 잘 만들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야말로 신명이 났다. 

마침 이 시기에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단편이 서울독립영화제에 진출하게 되면서 

큰 용기를 얻기도 했다. 

당시에는 영화계가 내게 영화를 계속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발급해 준 듯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영화를 하는 사실을 모르던 가족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저 영화할 겁니다.”

그 뒤 곧바로 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졸업작품이자 첫 장편영화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믿을 수 없었다. 

녹록지 않은 여건 속에서 누가 이기나 해보자 라며 오기에 가까운 마음으로 만들었던 작품이 

너무나도 큰 상을 받은 것이다. 


나는 왜 이토록 영화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일까? 


누군가 내게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물을 때면 

우스갯소리로 딸이 많은 집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자그마한 빵 하나를 먹어도 식구들이 많은 집에서는 무조건 정확하게 등분을 해서 나누어 먹어야 한다. 

싸움이 나지 않기 위해서.


농담으로 건넨 말인데도 문득 정말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복닥거리는 가족들과 함께 자란 나의 가정환경이 영화를 만드는 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덧대고, 나의 것을 고집하고, 또 꺾이기도 하며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 즐겁다. 평소 게임을 해도 솔로 게임은 하지 않고 팀 게임을 즐기는 것을 보니 

이것이 내 천성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드는 것임을 믿는다. 

나의 것과 다른 사람들의 것이 만나 영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온전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순탄치 않은 과정들을 연이어 겪음에도 

외려 영화를 향한 애착과 욕망이 더욱 커지는 것은 아닐까.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고, 후반 작업을 거쳐 

내 손을 떠나기까지. 

그 치열하고 뜨겁고 매운 과정에 정말로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말들에 힘이 빠지는 날이 있다. 

신인감독에게 오는 기회는 줄어들고 두 번째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지지부진하다.

무엇보다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날들에 

한숨이 푹 쉬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되뇌곤 한다. 

무엇이 됐든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는 그것이 영화였으면 좋겠다. 


먼 옛날 수렵 채집 생활을 살아갔던 조상들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영광의 그날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일감을 찾아 돌아다닌다. 


마침 심부름 어플의 알람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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