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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크 Jan 23. 2023

서른셋 겨울, 고려장을 당하다

Ep2 / 날카로운 첫 독립의 추억

“돼지 새끼.”


3.5평 남짓한 단칸방 안에 낯선 남자의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순간 오싹한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람은 벌써 수도 없이 울린 지 오래. 이 방 안에 있는 것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니. 방금 전까지도 꿈나라에 빠져 있던 내가 말을 했을 리도, 꿈속에서 들린 것도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귀신이 내게 한 소리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순간 울컥한 마음이 들어 벌떡 일어나 이불을 개며 귀신인지 조상신인지 잡귀인지 모를 미지의 존재를 향해 쫑알거렸다. 


“... 그런다고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나는 혼자 살고 있다. 아니 살게 됐다. 

이렇게 된 지 이제 겨우 1주일. 25년은 엄마 아빠의 품에서, 7년 하고도 반은 셋째 언니의 품에서. 도합 32년 남짓한 시간 끝에 이제 막 누군가의 품을 떠나 온전히 마련한 나만의 보금자리. 


나의 독립은 만해 한용운의 시 속에 등장하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는 문구처럼 별안간 이루어졌다. 

셋째 언니와 함께 살던 나는 언니와 이야기를 하다 내년쯤 돈을 모아서 독립을 하겠다고 가볍게 이야길 했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건넨 말이 그녀에겐 절호의 기회였나 보다. 평소 실행력과 추진력이 상위 0.0001%에 달하는 언니가 말이 나온 김에 나가라며 눈을 부라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친구를 만나고 들어온 나는 신발장 앞에 일렬종대로 늘어선 내 옷과 책더미들을 보고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날 내보낸다고?


독립하다는 말을 꺼낸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언니의 작은 차에 백미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짐을 산더미로 올려 싣고 흡사 야반도주를 연상케 하는 이사를 했다. 이런 걸 이사라고 하나... 쫓겨난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고려장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 배신감까지 들었다. 아무런 준비도 사전 예고도 없이 나의 1인 가구의 삶이 열린 것이다. 


유튜브에서 룸투어니 집 꾸미기니 하는 것들을 보며 독립의 단 꿈에 젖어 있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하기에 지금의 집은 너무나 비좁다는 걸 알게 됐다. 침실이 주방이요 책상이 식탁인 집에선 다리를 온전히 펴고 잘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매일의 과제다. 서글픈 것은 세탁기를 넣어두는 창고가 내 방만하다는 거다. 과거 이 집을 설계할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곳은 서울 미아동에 있는 한 동네. 

집 뒤로는 북한산이 보이니 숲세권이요, 걸어 1분 거리에 초등학교가 있으니 학세권이고, 길 건너엔 도서관이 있으니 도세권, 멀지 않은 거리에 맥도날드가 있으니 맥세권, 스타벅스도 있으니 스세권, 심지어 바로 집 앞 1분 거리에 원하는 손님들은 고기를 직접 구워서 포장도 해주는 정육점도 있으니 육세권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빌라 양 옆으로는 점집이 있으니… 귀신들이 들락날락 하는 '귀세권'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얼토당토않는 소리라 하겠지만 이렇게 믿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사를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꾼 이상한 꿈 때문이다.


꿈속에서 한 남자가 강가 앞을 서성이고 있길래 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하는 말이, 저승으로 가려면 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가지 못한다며 저승으로 가는 절차를 한자까지 섞어가며 친절히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한자라고는 내 이름 석자나 숫자 몇 개, 대한민국 밖에 모르던 나는 꿈속에서도 그 말을 매우 흥미롭게 들었던 터. 꿈에서 깨고 보니 이건 예사스러운 꿈이 아니다 싶어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일어나자마자 로또를 샀다. 결과는 낙첨이다.)


그리고 오늘. 

새벽 6시부터 일어나서 글을 써보려던 나는 전날 밤 호기롭게 핸드폰 알람을 맞췄다. 막상 아침이 되니 좀처럼 일어나기가 쉽지 않아 알람이 울리면 꺼 버리고, 울리면 꺼 버리기를 반복하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하기를 1시간이 지나던 때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에서 한 남자 귀신에게서 이런 욕지거리까지 들은 거다. 


둘째 언니는 전화 통화를 하며 내게 무섭지 않냐고 했지만 어쩐지 이 귀신은 무서운 귀신이 아닌 것 같다. 나를 도와주려고 부단히 애쓰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오늘 아침을 일찍 일어나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제 정말 일어나야 할 때다. 

오늘 하루를 보내기 위해선, 오늘의 일을 해야 한다. 




“얜 왜 안 나와?”


생전 처음 와 본 고등학교 앞을 서성대며 생전 본 적 없는 남자를 기다렸다. 

이 사람이 나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 심부름 어플의 자기소개 자격증 란에 '중등 정교사 2급 자격증 보유'라고 쓴 문구가 먹혔기 때문 아닐까? 한때 선생님을 지망했고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지금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지금 선생님이 된 사람의 심부름을 한다는 이 오묘한 아이러니. 


괜히 파우더를 꺼내 얼굴을 퍽퍽퍽 두드려댔다. 평소엔 잘하지도 않던 화장을, 심부름 일을 하는 와중에 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 불쌍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 그 마음 한 조각이 내 팔을 맘껏 움직여 신나게 분칠을 하게 만드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의 나를 고용한 ‘사용자’가 나왔다. 앳된 얼굴에 허둥지둥 급하게 구는 태도. 손에는 노란색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직 어리숙하군. 정장을 입고 있지만 어린 테가 나.’ 

아닌 게 아니라 남자에게서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사람의 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에게서 일을 받아 시간당 만원을 받고 대리 접수 심부름을 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해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자 남자가 내게 노란색 서류 봉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사용자가 내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누군가에게 하는 이런 깍듯한 태도는 일본 만화에서나 본 적이 있지 내가 누군가에게 해본 적은 물론 누군가가 내게 해준 적도 없다. 경건함이 느껴지는 태도에 나도 모르게 함께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했다. 이상하게도 그 인사 때문인지 생판 처음 보는 남자와 나 사이에 동지애가 샘솟는 게 느껴졌다. 정해진 마감 시간 내에 이 서류를 무사히 접수해야 한다는. 

‘이 누나만 믿어라. 무수히 많은 경쟁자 중에서 나를 심부름꾼으로 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주갔어!’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저기요!”


서류 봉투를 받고 걸어가려는 데 그 남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보자 내 쪽으로 뛰어온 남자가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주민등록증이었다. 


“다른 사람이 대리 접수하는 거라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서.”

“아... 네.”


얼떨결에 주민등록증을 받아 봉투 안에 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주민등록증을 건네지? 내가 누군 줄 알고. 


지하철에 올라타 서류 봉투 안을 슬쩍 열어 확인했다. 지원서였다. 뒷장에는 자기소개서가 함께였다. 낯선 사람이 펼쳐놓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찰. 이 서너 장 안에 과연 한 사람의 삶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 일컫는 국립대학교의 사범대를 졸업했고 졸업 이후 기간제 교사를 거쳤다. 이번에 지원하는 학교는 그에게는 4번째 학교가 되는 셈이다. 


‘전진하는 벗을 위한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된 이유 란의 맨 첫 줄에 적힌 문장을 보며 잠시 내가 가지 않은 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그런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냥 했다. 얄팍하지만 진심인 응원을 담아서. 


한번 환승을 하고 역에서부터 10분을 걸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하던 찰나.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행정실까지 들어가서야 알아차렸다. 중학교에 갔어야 했는데 근처 초등학교에 온 거다. ‘마감이 11시까지라 그때까진 접수해야 하는데…’ 여유 있게 출발했다고 생각했건만 슬슬 압박이 들었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했건만... 뛸 수밖에. 한 겨울인데도 땀이 삐질 삐질 쏟아져 입고 있던 패딩을 길바닥에 내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머. 왜 이렇게 좋은 종이에 뽑아 오셨어요? 어머, 나 이런 종이 처음 봐! 안 그래도 되는데~”


접수처에 있던 여자가 서류들을 살피다 실실 쪼개며 말을 붙였다. 어설픈 우월감이 깃든 특유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욱 해서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왜요, 안. 됩. 니. 까?”


여자는 나의 날 선 반응에 놀랐는지 침을 꼴딱 삼키곤 눈을 옮겨 지원 서류들을 확인했다. 


“여기. 체크하는 걸 깜빡하셨나 보네요.”


여자는 내 쪽을 향해 서류를 돌렸다. 주 전공, 부 전공, 복수 전공 란에 체크를 하지 않았다. 국어 교육학과를 나왔으니 당연히 주 전공이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자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남자가 속삭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주 전공, 부 전공, 복수 전공 써있는데 주 전공에 체크하면 되죠?”

“아 제가 깜빡했나 보네요. 네, 주 전공으로 부탁드려요.”


나는 전화를 끊고 주 전공에 체크했다. 여자는 더 이상 내게 실없는 농담을 건넬 엄두가 나지 않는지 말없이 건네받아 접수 번호를 수험서에 옮겨 적었다. 그러더니 원서에 있던 수험서를 절취선에 맞게 자를 눌러 대고 부욱 찢어 내게 건넸다. 


수험서를 받아 든 나는 서류 봉투 안에 주민등록증과 함께 고이 넣고는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갔다. 이곳까지 온 시간만큼 다시 돌아가는 길 역시 길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안했다. 찰나지만 내가 잠시 맡은 누군가의 인생에 누가 되지는 않았다는 생각 때문일까. 




다시 정문 입구. 

4시간 만에 오늘 아침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전화를 걸어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혹시 몰라 주민등록증을 꺼내 사진을 찍어 뒀다. 4만 원이면 큰 건인데 그가 돈을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의 쓸데없는 상상력과 필요이상의 철두철미함에 나조차 질려 괜히 혀를 끌끌 찼다. 


“고생하셨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아침과 똑같이 앳된 얼굴의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새 내적 친밀감이라도 쌓였는지 할 말이 많았지만 괜히 주접을 떠는 양 보일까 싶어 말을 삼키고 서류 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건네는 깍듯한 인사에 나 역시 고개를 숙여 화답하고 뒤돌아 걸었다. 그리고 심부름 어플을 열어 심부름 끝내기 버튼을 눌렀다. 


오늘의 일당은 4만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시간당 만원 꼴이다. 교통비까지 치면 시간당 만원도 안 되는 건가 생각하던 찰나에 알람이 울렸다. 나의 사용자가 팁으로 3천원을 추가로 지불했다. 그 호의에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발걸음이 슬쩍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이걸로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 어쩌면 내일까지도. 


역사 시간에 줄곧 외워 댔던 수렵이니, 채집이니 하는 단어 따위가 생각났다. 만 년도 더 된 원시인의 삶이 지금의 나와 닮아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꼬르륵 배에서 신호가 왔다. 집에 도착해서 손과 발을 씻고 언 몸을 녹이고 지친 발을 달래리라. 그리고 따끈한 밥을 지어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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