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 영화를 개봉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영화에 출연해 주신 배우분들을 만났다. 이번 영화가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이야기하던 중 주연을 맡은 한 선배님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감독님.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 미안합니다. 우리가 이름도 있고 그랬으면 감독님이 훨씬 더 주목받고 일이 잘 풀렸을 텐데..."
농담이라 생각해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는데 그녀가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울컥. 가슴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정말로 미안하다고 생각하시는구나. 그 말에 답했다.
"선배님. 유명한 감독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제가 이름도 있고 잘 나가는 사람이었으면 선배님들이 훨씬 더 주목받으셨을 거예요."
장편 영화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예산. 대학원생. 눈에 돋보일만한 필모그래피가 없는 연출자의 작품에 경력 20년이 넘는 중견 배우가 출연해 준 것만으로도 영화는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녀는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지금도 확신한다.
그래서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게 죄스러웠다.
또 다른 일화.
얼마 전 짧은 숏폼 영상을 찍게 됐다.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한 선배님께 연락을 드렸다. 부족한 예산에 교통비 정도밖에 못 되는 출연료 밖에 책정할 수 없어 연락을 드릴까 망설여졌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허무맹랑한 출연료에 자칫 '어사'가 될 수 있다. 고심 끝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연락을 드렸다. 말을 꺼내자마자 너무나도 흔쾌히 함께 하겠다고 말씀을 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구체적인 일정과 관련 내용을 전달드리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그가 말했다.
"OO야! 연락해 줘서 고마워."
"아유 선배님 무슨..."
"아니야. 진짜로 연락해 줘서 고마워. 고마워!"
언제부터였을까. 줄기차게 하던 SNS를 끊었던 것은.
싸이월드니 페이스북이니 같은 것들이 한창 유행했을 땐 도토리도 사고 프로필 문구를 뭘로 할까 진지한 고민에 휩싸일 정도로 열렬히 빠져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모든 게 번거롭고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올리는 일도 웬만해선 하질 않았다. 진정한 고수는 재야에 있는 법. 나만의 길을 가겠어. 조용히 내 자리에서 몫의 일만 하면 그만이지 여기저기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흔적을 남길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두 선배님과의 일이 그런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어서 사람들에게 내 이름 석자를 알려서 다시는 영화에 출연해 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들고 싶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게 하고 싶지 않다.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 미안하다'던 선배님과 헤어지고 집에 오던 길.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다시 살려 글을 썼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뒤에서 묵묵히 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내가 지금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야겠다.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멀리 있는 곳까지. 차근차근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