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약속

기본적인 약속

by 조이

‘내가 만난 꿈의 지도’ 그림책의 저자인 유리 슐레비츠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 책에 녹였다. 전쟁이 터져서 피난을 떠난 곳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시장에 빵을 사러 가셨다. 엄마와 유리 슐레비츠는 빵을 기다렸으나 아버지는 지도를 사 온다. 빵을 먹고 싶었던 유리 슐레비츠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유리 슐레비츠는 아버지가 빵을 사 오마고 하신 약속을 지키기를 기대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사회는 규칙과 약속이 있다. 약속은 기본으로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 있다.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끼우는 거라고나 할까. 사회의 약속은 존속하는 데 필요하다. 약속이라고 꼬리표를 일일이 붙이지 않아도 사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온라인으로 청소년 교육을 하고 있다. 온라인 수업의 약속은 과제 올리기, 지각 안 하기, 화면 켜기 등이다. 시간 관리가 안 되는 학생들은 과제를 잘 안 올린다. 과제를 안 올리면서 하는 3가지 말이 있다. “까먹었다”, “몰랐다”, “모르겠다”이다. 국회의원들이 공약을 안 지키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가벼운 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아는 선생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선생님이 지각했다. 나는 보통 정한 약속 시간에 도착을 못 하면 문자로 알리면서 사과한다. 상대방이 당황해하면서 무작정 기다리지 않도록 말이다. 선생님은 약속 시간에 늦으면서 문자를 안 보냈다. 어른들도 인간관계 안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약속을 한마디 사과도 없이 어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육 일을 같이하시는 선생님이 에니어그램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에니어그램을 배웠기에 3명의 선생님을 모아서 3차시로 재능기부를 했다. 3명인데도 모임 시간을 못 맞추고 안 나오는 선생님이 생겼다. 한 선생님은 마지막 모임에 별로 안 오고 싶다고 말하면서 불참했다. 모임 참석은 나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일종의 약속이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우유를 배달로 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우유가 6개가 들어 있었다. 평소에 매니저가 문자로 배달 안내를 했으나, 이날은 안 왔다. 다른 분이 배송 건으로 연락이 왔다. 담당 매니저가 실적이 좋아서 해외여행을 갔다고 한다. 해외여행은 축하할 일이나 그 순간에 놀랐다. 문자로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한마디만 해도 이해가 될 텐데. 일이 생겨서 배송이 달라지면 고객에게 알려야 한다. 이분은 다음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우유를 넣었다. 사전에 문자 연락도 없이 말이다.

사소한 약속을 안 지키면 신뢰감에 금이 간다. 나는 약속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다. 쉽게 약속을 깨는 사람들을 만나면 허탈해진다. 본인 중심으로 약속을 안 지키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관계는 결국 깨지고 만다.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선을 넘어가지 말라는 사회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약속을 안 지키는 줌 수업 수강생, 동아리 회원, 식당이나 지하철에서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류애가 떨어진다.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 올라가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는 한 사람이 지하철을 끝까지 타려고 만원 지하철을 억지로 타다가 지하철이 고장이 난 기사가 나왔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난 뒤 타기 안내 동영상이 나오고 글귀가 걸려있다. 지하철 안에서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지 마세요’라는 안내 방송을 들었다. 기본 규칙이 무너져가자 이제는 방송과 안내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줌 수업을 코로나 시기부터 참여하고 있다. 화면을 켜는 수강생이 손가락으로 셀 정도임을 보고 놀랐다. 원활한 수업 진행을 위해 화면을 켜달라는 공지가 있어도 효과가 없다. 선생님들도 화면을 켜라는 말을 처음에 하시지만, 나중에는 안 하신다.

도서관에서 좌석 발권을 하고 있었다. 기계가 천천히 작동했다. 그때 중년 아주머니가 나타나서 화면을 터치했다. “시간이 다 돼서.”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기계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본인 좌석 칸을 터치했다. 나에게 양해 한마디 하지 않고, 눈 하나 까딱 안 하는 표정이다. 미안한 빛도 없는 이 무례함은 어디서 올까?

도서관 카페테리아에서 간식을 먹고 있는데, 어른 네 명이 둘러앉아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공간이 협소해서 귀에 대고 하는 말처럼 다 들렸다. 공부하는 공간이 옆에 있어서 조용한 취식 공간이다.

인성 강의를 들었는데 강사님이 사회의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사례를 들었다. 버스에서 안쪽 좌석이 아닌 바깥쪽 좌석에 먼저 앉아서 다른 사람이 안쪽 좌석에 못앉고 서서 간다. 중국도 일본도 없는데 한국만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다리 꼬고 앉은 사람을 보는 것은 흔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나의 다리를 꼴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리를 꼰 사람의 옆자리에 앉기가 불편하고 가다가 걸린다. 다리를 꼬면 건강에도 안 좋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사회 안의 약속을 안 지키는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분노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괴로운 고역이다. 행복 지수는 반대로 떨어지고 있다. 화와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는 시간이 늘어난다. 표정이 굳고 무뚝뚝해진다.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 완고해지는 것 같다. 말랑말랑하기보다는 딱딱해진다고나 할까. 하나의 관점만 고집하기가 쉽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을 피하려면 지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정신 건강에도 안 좋다.

남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남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바꾸고 싶다. 나를 위해서라도 이해의 시선이 필요하다. ‘변화는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바꾸며 시작된다.’ 이 말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남이 아닌 나의 변화를 위해 수용하는 태도로 전환하고 싶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을 가볍게 넘기는 센스가 있다면 좋겠다. 분노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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