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맞아요.
세상의 모형을 축구 세계에서 본다. 인간사의 모델하우스를 보는 느낌이다. 손흥민 선수는 축구가 감성적이라서 득점 기록보다 감동을 준 선수에게 상을 준다고 한다.
“런던 풋볼 어워즈 2019에서 나는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기록 면에서는 나보다 앞서는 선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심사위원단은 내게 표를 던졌다. 축구 종목에서만 가능한 역설일지 모른다. 보기와 다르게 축구는 감성이 지배하는 스포츠다. 몇 골을 넣었는지만큼이나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도 중요하다.”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손흥민, 2019)
디자이너 배상민 교수님은 디자인이 감성적이라고 했다. 교육도 감성적이다. 공감과 감동을 주어야 변화가 일어난다. 공감 생존 시대다. 공감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어떻게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나? 공감하는 말로 성공을 도와야 한다.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의 성공을 돕고 싶다. 내가 배운 모든 것으로 학생들의 성공을 돕고 싶다. 독서와 글쓰기. 그림책 등으로 말이다.
수업이나 강의를 할 때 나는 질문한다. 고맙게도 질문에 대답하는 학생이나 수강생이 있다. 올여름에 경로당 어르신들과 그림책 재능기부 수업할 때도, 나의 질문에 한 어르신이 대답하셨다.
“두 명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성실한 것이 달랐어요.”
이 답이 틀린 거는 아니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였거나 확장된 의미를 말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려운 데, 용기를 내어 대답하신 어르신께 감사했다. 그런데 어르신의 대답에 대한 공감 없이 지나갔다.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말했다.
“두 명은 말이 달랐죠.”
이렇게 말해도 좋았다.
"그래요, 맞습니다. 두 명은 성실함에서 차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말이 달랐고 행동의 차이가 났어요.“
공감이 확 느껴지면서 감동까지 오는 대답이다. 대답하신 분에 대한 예의를 다할 필요가 있었다. 어르신의 대답에 공감의 표현을 하는 것이 교육에서 실천하고 싶은 점이다. 공감을 잘 표현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공감도 연습이 필요하고 계속 훈련해야 한다.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영어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어요.”라고 했다.
“할 수 있어. 영어만 어려운 게 아니란다.”라고 내가 반응했다.
이 대답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응, 그렇구나. 영어가 어렵나 보네. 뭐가 어렵게 여겨지니?”
"그래요, 맞아요."라고 공감하지 못해서 늘 뒤돌아서서 아쉬워한다.
공감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먼저 감정에 공감을 해주어야 한다.
“그랬구나. 어떠니? 괜찮니? 힘들구나. 아팠구나.”
이런 공감의 말이 입에서 잘 안 나온다. 연습해야겠다. 이제 계속해 보고 싶다.
"그래, 맞아!“
“응응, 그래.”
수업 시간에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에 맞장구를 쳐준다. 이렇게 공감을 먼저 하고, 해결책이나 제안 등을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교사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말로 드러난다. 공감하는 말을 하면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공감이 깔린 소통은 가르치려는 태도보다는 집중해서 남의 말에 경청하려는 자세에서 나온다. 빠르고 급한 마음이 아니라 차분하고 여유 있게 상대방의 눈을 맞추면서 음미하듯이 대화를 나누면 친밀감이 온다. 공감은 통제나 분석과는 다르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감정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공감은 통제나 분석, 판단, 가르침이 아니다. 공감은 소통의 기반이 되나 자기주장 내세우기, 통제나 분석, 판단, 가르치는 자세는 소통의 장애물이다.
공감은 대상의 특성이나 상태를 고려해서 감정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80대 할머니에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가 안돼서 때가 묻었다고 말하면 어떨까? ADHD 증세를 보이는 학생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잔소리하는 건 어떤가? 마음이 상해 있는데 미소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건 어떤가?
“뭐가 그래? 그래서 어쨌다고? 왜 그래? 뭐가 힘들어? 너보다 더한 사람도 많아.”
이런 말들은 상대에게 이해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들어서 상처가 될 수 있다. 공감받지 못하니 자살을 하기도 한다. 세상이 시기하고 비교하면서 경쟁으로 달려가도 공감이라는 자비를 잃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