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 : 요한적 신앙의 빛

사도 요한의 영을 비추었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

by 생명의 언어

요한복음 이야기는 이전부터 무척 다루고 싶었던 주제였다. 그리고 가장 쓰기가 떨리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저 열망만으로 이토록 귀중한 진리를 다루는 것이 가당한 일인지에 대한 망설임도 있었고, 또한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에 대한 자신의 문제도 있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나는 요한복음의 특별한 "빛"에 빠져들었다는 것이었따.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제대로 된 의미나 개념 등을 미처 알기도 전부터, 나는 비언어적으로 신성과 교감하는 내적 체험에 몰입했으며, 내 안에서 진리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시기 시작한 즈음부터의 나의 영성은 오직 요한적 영성이었고, 지금의 나의 신앙 역시도 결국 요한적 신앙이라는 말로써 단순하게 귀결된다. 요한적 정체성이란, 결국 "하나됨"에 있다. 그분의 신성과 하나되는 것, 그분을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하나님)와 하나되는 것. 그분께서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 안에 아버지께서 거하심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께만 그 아들됨의 권세와 영광이 주어졌던 바로 그 하늘나라의 가장 귀중한 은혜와 축복을, 그분을 믿는 누구에게라도 다 공유해주겠노라 만천하에 선언하신, 바로 그 하나됨, "내주성" 말이다. 내가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성령과 교감하는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신앙의 본질이 너무나도 요한적 정체성과 깊이 닮아 있었고, 나는 이것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이제는 내게 허락하신 이 "매력"을, "기쁨"을, 인연이 닿는 영혼들에게 나누고 싶은 열망으로, 부족하고 가난하지만 요한복음 이야기를 써야겠다, 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내맡기며, 그저 내 안의 이 감동과 경외를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는 기쁨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책의 제목을 요한복음 "해설"이 아닌, 요한복음 "이야기"라고 붙인 것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이 작업은 정교한 신학적, 교리적 논증이나 해명이 주된 목적이 아니며 또한 저자로서 나는 그럴만한 객관적인 능력도 지식도 경험도 자격도 없다. 나의 주관적 체험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본문을 풀이한다는 것은 내게 허락된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야기"라고 붙인 것은 문자 그대로, 요한복음의 말씀들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그분의 신성을 영접하였던" 한 영혼의 깊고 진실한 체험과 교감들을 나누고 공유하는 순수한 이야기, 체험담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 은유"로써, 원형적 신화로서의 감동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공유함으로써 받아들이는 이의 내면에서도 동일한 영적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기도 하다. 세속에서는 신화(은유)보다 사실(fact)이 더 높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그 위계가 명백히 역전된다. 영적 세계에서, 은유는 명백히 사실(fact)보다 "높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사실이냐, 아니냐?"의 관점이 아니라, "그 말씀을 영으로써(은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쓸 때에 가능한 한 말씀들의 구조적 본질적 의미 따위를 이성적, 논리적, 신학적, 교리적인 관점에서 풀이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여서 내 안에서 실재가 되게 할 수 있는가, 의 철저한 신앙적, 내재적, 초월적 관점에서만 쓸 것이다. 제목에 대한 저자로서 나의 해명은 이러하다.


미래의 독자분들께 조심스레 요청드리고 싶은 것은, 글쓴이로서의 "나"라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아주시되, 그저 나를 통하여 체험과 교감을 일으키신 "신성(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주십사, 하는 것이다. 글을 쓴 자의 관점이 어떠하며 생각이 어떠하며 논리가 옳은지 틀린지를 논하는 것은, 비록 합리적이기는 하더라도, 한 영혼을 일깨우고 성장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글쓴이로 하여금 이러한 체험과 변화를 일으키게 한 신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면서 읽는다면, 그에게 이루어진 것은 또한 나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써 동일한 "실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전달자요, 통로일 뿐이다.




다만 그럼에도 글쓴이로서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다만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나, 라기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나, 영적 성장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로서의 나, 그리고 이러한 미약한 수준에서나마 나름대로의 '사명'을 수행하는 공적(公的) 입장으로서의 나, 에 대한 해명이다.


첫째,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나는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그리스도(신성)를 누구보다도 더 깊이, 진실하게 사랑한다. 나의 다른 브런치북, <신성한 수동태>를 보면, 신앙인으로서의 나의 진심에 대해서 누구라도 다 들여다볼 수 있도록 공개해놓았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에 속할 수 없는 까닭은,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교회의 시스템과 제도의 틀 안에서는 상당 부분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며, 이는 내 뜻을 위하여 교회를 무시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나로 인하여 기존의 종교로서 그 책임과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왔던 교회와 기독교가 오해를 사는 등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존중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내부자의 위치에 두지 않고, 외부자로써 "기독교와 친화적이지만,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존재로써 나 자신을 위치시키고자 한다.


둘째, 나는 "보편적 복음주의자"이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신앙인일 뿐이다. 복음주의는 특정한 종교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라도 다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신성)를 통하여, 아버지(하나님, 신)와 하나되는 것,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복음적 진리와 성육신(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교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닌, 모든 영혼들에게 평등하게 열린 보편적, 원형적 영적 진리로써 오늘날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또 다른 브런치북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에 좀 더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셋째, 나는 "실천적 신비주의자"이다. 나는 이 하나됨의 진리를 특수한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됨을 체험하기 위하여 기도원이나 깊은 산 속에 들어가야 할 필요도 없고, 굳이 특별한 신비 체험 같은 게 있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다만 나 자신의 의식과 정신과 내면 안에서, 그리고 나의 존재와 삶과 일상 속에서, 문자 그대로의 실천적인 방법론으로써 누구나 쉽게 신성과 교감하고 신과 하나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나의 순결한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원칙이 오늘날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누구나 자신의 일상과 내면에서 신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한 영혼으로서의 나의 영적 정체성이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요한복음을 읽고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너무도 큰 감동과 기쁨을 허락받았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한 영혼으로서 요한복음을 통하여 계시된 그분의 신성과 교감하였던 그 순결한 체험을 가능한 한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공유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오늘날의 시대에서, 유감스럽게도 갈수록 점점 더 종교는 그 빛을 잃어만 가고 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종교 개혁의 기치가 올려세워진 이래로 "누구라도 다 개인으로서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 순수한 이상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다시 기존의 집단에서 새로운 집단으로의 세대 교체만을 이루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 상당수의 성도들은 교회에 의존하고 목회자에 의존하며 형식과 의례와 제도에만 의존할 뿐,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과 일상과 내면 속에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고 있지 못하다. 성령께 내맡긴 채로 인도받는 기쁨을 알지 못하다.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감동을 알지 못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 하나님이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내 아버지가 되시는 영광을 알지 못하다. 나는 이것을 매우 안타깝고 슬프게 느낀다. 내게 허락하신 이것이 너무도 큰 감동이자 기쁨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분께서 그토록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그 의도,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그분의 심장 소리와 숨결을 느꼈던 사도 요한이 증언하고자 하였던 바로 그 의도, 그것이 "아버지와의 하나됨"이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요한적 신앙을 추구하고 지향하는 영혼들이 오늘날 냉정히 보아도 많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기존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교회의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지난 수 천년간 베드로를 반석 삼아 그 틀을 세우사,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왔고, 또한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외부세계가 매우 험난하고 위험한 것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개인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는 집단으로서의 교회의 권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음을, "안전한 집"을 올바르게 구축하고 세우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음을 이해하고 또한 존중한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여전히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부름 받은 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진실로 수행해나가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자격 없는 자가 감히 말하건대, "나는 내 크리스천 형제들을 믿는다." 그러나 이것과는 반대로, 결국 현대에 들어서 집단주의적 관점이 (거시적 구조의 붕괴, 해체와 더불어 필연적으로)붕괴하고, 각 개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개인주의화되고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제공해왔던 형식과 의례와 전통으로서의 신앙의 방법론이 더 이상 각 개인들에게 실질적인 희망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나는 오늘날의 시대야말로 "요한적 신앙"이 그 유일하고 참된 대안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외부적 권위에 근거한 설교나 가르침이나 율법이나 교리보다는, 각 개인들이 자신의 삶과 일상과 내면 안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이로써 "은총"을 체험하며, 믿음을 키워나가며, 이로써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결국 요한적 정체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내가 이러한 길을 본능적으로 걸어왔고, 또한 지금도 걷고 있으며, 나는 지금 혼자이며 육적인 삶이 여전히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그분과 홀로 함께하고 있음"에 깊은 영혼의 자유와 평화, 기쁨을 느낀다. 요한적 신앙은 그저 나약하고 주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신성에 가장 깊고 순수하게 의지함으로써, 내 존재와 삶과 일상 속에서 그분께서 직접 드러나시고 통치하시게 하기 위한 길이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이것이 가장 필요한 때임을 믿으며, 요한복음 이야기를 통하여 "참된 복음의 빛"으로, 각 사람들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교리적, 신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내가 스스로를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데는 주요한 이유가 있다. 우선, 나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정경들이 동등한 영적 권위(평등한 위계)를 갖는다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꽤 용기를 낸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이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 무엇도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이것을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이단(진리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사이비(진리를 이용함으로써 욕망을 편취하고 악행을 퍼뜨리는 것)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예수님의 인성으로 인하여 가장 최초로, 가장 높게, 가장 완전하게 현현하셨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의 영적 권위는, 여타의 사도들(예: 바울 등)에 의하여 선포된 말씀들보다도 명백히 더 "높은" 위치에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도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들은 매우 가치 있는 책들이지만,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인격에 의하여 계시된 것과, 창세 이전부터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류 대속의 역사를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의 뜻의 핵심이자 주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현현체로 인하여 직접 계시된 것 사이에는, 명백하게 "서열"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모든 정경들의 영적 권위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굳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도 그만큼 완전하게 현현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된다. 말씀은 곧 신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들에 비해 명백히 "더 높은 위계"를 거느리신다고 믿는다.


이것을 단순화하여 나열한다면 다음과 같다 :


1.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이다.

2.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현하신 것은 창세 이전부터 정해진 그분의 뜻이셨다.

4. 그러므로 여타의 통로들에 의하여 계시된 것에 비해,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들은 명백하게 더 높은 위계를 지닌다.

5.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과 다른 통로들에 의하여 계시된 말씀 간의 위계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곧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전하게 현현하셨다는 성육신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부정할 수 있는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도 하나님은 현현하실 수 있다, 는 뜻이 되기에)


사실, 이런 식의 논리는 기존의 신학이나 교리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너무 과장된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이를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은 오직 "4대 복음서"로 축약된다. 그리고 이 복음서들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서로써 예수님의 역사적 행보와 가르침 등에 집중하지만, 오직 한 권, 요한복음만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가장 세밀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태초부터 계신 것"(요1:1)으로써 신성한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신성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므로,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 중에서도 그분의 참된 신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유일한) 열쇠이다. 따라서, 나는 요한복음이야말로 성경 전체 중에서도 더욱 특별한 영적 권위를 지니는 책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나의 신앙적 믿음이다.


오늘날, 시대가 혼란스러울 수록 주술과 예언과 사이비가 판을 치는 것은 굳이 특별한 일이 아니요, 역사 이래로 반복되어져 왔던 일이었다. 자기가 "재림 예수"라느니, 특정 집단/교단에 속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느니, 이단의 범주를 넘어서 명백히 사이비에 속함으로써 세상을 기만하고 현혹하며 여러 성도들과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가는 어두움들이 넘쳐난다. 내가 요한복음의 영적 권위를 더욱 높이고자 하는 데에는, 바로 이 어두움과 맞서 싸울 유일한 "참된 빛"이야말로 요한복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분은 명백히 "나를 믿는 누구라도 다 (나를 통해서)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다"고 하셨다. "누구라도" 다, "그 이름(신성)을 믿기만(영접하기만) 하면" 말이다. 이것은 육적인 것(특정 인격, 집단, 세력, 의례, 형식 등 - 전형적인 사이비 논리)을 그 자체로 신격화하는 사이비와 거짓 선지자들에 맞서는데 매우 중요한 신학적, 교리적 토대가 된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그 모든 과정은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시며", 이 모든 과정들에 동참하는 것은 모든 영혼들에게 평등하게 열린 길이라는 것, 이 원칙이 오늘날 다시 한 번 높이 바로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참된 빛"의 칼날이 찬란하게 번뜩여야만 한다. 모든 성도들이 요한적 신앙의 토대가 가장 확실하게 내면의 중심에서 정렬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나의 신앙적 믿음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동등하며 완전하게 하나되어 있다"는 교리에 대해서도, 이것은 자칫 "육적인 것"(예수님의 인격)을 영적인 것(그분의 신성)보다 더 우선시하고 집착하게 만들 위험을 낳을 수 있다고 보며, 육적인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곧 배타성과 특수성이라는 죄성의 작동이므로, 본래의 의미와 달리, 결국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이러한 "인격적인" 신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게 변화해야 한다고 본다. 즉, 요한복음의 여러 본문들에서 직접 말씀된 것들만 보더라도, 그분 자신조차도 그분 스스로를 "통로"에 불과하다("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19,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요10:37-38 등)고 여러 차례 증언하셨으며, 이는 곧 예수님의 인격은 '통로'이며, 그 통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나신 것, 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 본인께서 증언하신 것이다. 인성은 곧 신성이 드러나는 통로이다. 신앙의 핵심이자 목적, 곧 "유일무이한 중보자, 대속자"로서의 그리스도는 곧 "보이지 않는 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 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신성은 곧 "태초부터 계신 것"이며, "모든 것들 안에 내재하신"(요1:3), 원형적이고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신성 그 자체이신 것이다. 이 신성은 "살아서 아버지(성부 하나님)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것", 곧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되신 그 하나됨 자체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하게 드러나신 것"을 믿는 것이며, 이는 곧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신성, 곧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하신 성부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 요12:44)이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는 누구라도 다 그분처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이셨다. 믿음은 곧 이것을 향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신성과 교감하는 것을 더욱 사랑한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로서의 신성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 그분의 눈빛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나와 함께하시고, 내 귓가에 속삭이시며, 때로 나를 칭찬하고 때로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나는 사랑한다. 가슴 절절히 사랑한다. 그러나 복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특히나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그분의 인격은 통로에 불과하며, 통로를 통하여 현현하신 보이지 않는 신성을 믿는 것"이라는, 내재적, 초월적 해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하는 분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사랑하는 분을 낮추어야만 하는 슬픔을 늘 가슴에 품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인격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을 지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하여 누구라도 성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다"는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다.




사도 요한의 영을 비추었던, 그리스도의 신성은 이러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서 그분이 들었던 심장소리는, 그분의 숨결은, 그저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창세 이전부터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의 신성 그 자체가 가장 완전하고 아름답게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통해서 현현하셨으며, 그것을 사도 요한의 영이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내밀한 방식으로 교감하고 또한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 마가, 누가 등의 제자들이 증언하지 못한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진리를, '증언'을, 오직 사도 요한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나는 하나를 묻고 싶다. 이 물음은 내 자신을 향한 것이요, 또 이 글을 읽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는 것이 그분의 뜻임을 알고서도 기꺼이 순종하여 끝까지 따르셨을 만큼.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그분의 신성과 살아서 교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그분 품 안에 거하는 것을 오직 그만이 증언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신을 사랑하는가?

나는 신의 이름 앞에서 감동받고 기뻐하고 경외하는가?


신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품은 이는 이 길을 결국 끝까지 걸을 것이요, 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 길을 잠시 호기심에 걷더라도 결국 끝까지 걸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신을 사랑하는 나의 뜨거운 마음이 곧 신 앞에 섰을 적에도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늘 자신에게 돌이켜보아야 한다.


결국, 그 마음 하나가, 구원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편의 이야기로 찾아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