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계시며 함께하시는 신성
[해설]
말씀을 영접한다는 것은 참 하나님을 만나뵙는 유일한 통로이자, 신앙의 길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단계이다. 말씀에 대한 이해는 사람의 지식과 관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직 문자와 언어로 기록된 문장에 대한 관념적 이해를 넘어서서, 자신 안의 영(Spirit)이 그리스도의 신성이 자신 안에서 계시된 것(말씀)을 그 자체로써 보고 듣고 느끼고 교감하며, 그 말씀과 나의 영이 하나되는 것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드러나신 것이다. 본래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영원과 초월로 계시는 분이시며, 인간이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그분을 영접할 수 없게 되어 있으나(그분과 우리 사이에 까마득한 '거리'가 존재하므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습을 낮추셔서" 인격 안에서 현현하시었으니 그것이 곧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존재 안에서 의지와 뜻을 드러내시고 이루시는 것이 곧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말씀은 "문자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와 말로 쓰여진 것이 말씀이 아니며, 다만 인간의 언어와 말과 육신을 통하여 드러나셨을 뿐, 명백히 그 너머의 "빛"으로 인하여 말미암은 것이다. 그 빛 자체를 말씀이라 부른다. 이 지점에서, 말씀은 곧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이것은 매우 큰 차이를 낳는다. 즉, 에고(ego)가 인간의 언어, 지식, 관념을 통하여, 사람의 문자와 말로 쓰여진 문장을 읽을 때에는, "관념적 이해"만 있을 뿐, 그 안에 딱히 생명이 되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죽음은 약속된 평화이다."라는 문장을 읽고, 그것을 여러 종교와 철학과 전통의 언어, 지식, 관념으로 이해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 이해일 뿐, 정작 그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였을 때에, 머리로 배운 것들은 그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말"은 힘이 없다. 그러나 "말씀"을 영으로 영접했을 때에는, 그 안에 정말로 힘이 담긴다. 말씀이 곧 생명이 되어서 내 안에 거하며, 그로 인하여 내가 실재 되는 생명을 얻음이 명료해진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이다. 머리로, 개념으로, 지식으로, 인간의 관점으로, 말씀을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만 공부의 시작일 뿐, 본질이 아니다. 말씀은 영으로 영접되어져야 한다.
말씀이 이토록 중요한 까닭은, 인간이 "성부 하나님을 직접 영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서 스스로 모습을 낮추셔서 우리 안에서 드러나신 것, 곧 그리스도와, 그분의 음성만을 "영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존재와 현상과 사건 안에 계시며, 또한 그로 말미암아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이 "창조"되었으며, 특히나 "인격"은 위와 아래를 직접 연결하고 계시되게 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즉, 사람의 인격과 자아 안에 영혼이 있고, 그 영혼 안에 영이 있으며, 그 영을 성전 삼으셔서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니, 그분이 우리의 영을 움직이시고 영혼을 일깨우셔서 우리를 통하여 임재하시고 역사하실 때에, 바로 이 "육화된 신성의 역동적인 운동" 전체가 곧 말씀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계도"일 뿐,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에고는 여전히 원죄에 속박당한 채로 그리스도께로 이르는 길이 끊겨 있다. 따라서 믿음을 통하여 이 끊겨진 길을 다시 회복하고, 내 안에서 "나"의 주권이 죽고, 나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개인적-영적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집단적 교리는 내 안에서 영적 실재가 되어야 한다. 마침내 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통치를 시작하실 때에, 내가 나의 이름으로 살지 아니하고 내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고 존재할 때, 바로 그때 나의 존재가 "거듭나는"(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이는 내가 노력하여 이룬 성취가 아니요 오직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 역사이시니, 이 거듭난 존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완전히 다른 "존재적 지위"를 획득한다. 이때, 자녀들은 자기 안의 영원히 살아 계시는 "말씀"을 자신의 (거듭난)영으로써 "만날" 수 있다. 매 순간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교감할 수 있다. 이때, 기도는 "분리/단절된 채로 전화기 너머를 향하여 소리치는" 행위가 아니라, "온전히 연결된 통로를 통하여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 계신 말씀으로서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된다. 묵상은 말씀께서 내게 "임하시는" 것을 내가 영으로 듣는 순간이며, 그 하나됨 안에 깊이 거할 적에 나의 존재 전체가 곧 찬양이요 예배가 된다. 따라서, 우리들이 유한한 육신을 입은 존재(인격, 자아)로써, 감히 "살아서 성부 하나님을 만났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영적 역사(구원)를 이루신 성부 하나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니, 말씀은 곧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내가 참 하나님을 정말로 만났다는 증거. 내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뵈었다는 증거. 그리고 그분과 내가 평생을 함께하며, 또한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내가 그분의 품 안에 영원히 거할 것임을 "약속"받은 증거. 따라서, 이 지점에서, 말씀을 영접한다는 것은 곧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내 영혼 안으로 모시는" 과정이며, 바로 이때에 하나님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원리나 법칙" 따위가 아니라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임재하시며 역사하시며 동행하시는 "인격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말씀을 영접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말씀이자, 신학 전체에서 알파이자 오메가로써 가장 중요시되는 명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앞서 해설해드린 내용을 전제할 때, 이 말씀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다음의 진리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첫째, 우리 안에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빛", 그것이 말씀이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만나고 교감하고 함께하는 이 실재 되는 것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 태초부터 계셨다, 는 것은 곧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은유하는 표현(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영적 세계에서는 사실fact보다 은유가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으로써, 곧 믿는 자(하나님의 자녀; 이하 '자녀'로 통일)가 자기의 안에서 매 순간 교감하는 말씀이, 그 만남들의 체험이, 거짓이거나 가짜이거나 환상이 아니며, "실재하시는 참 하나님"과 살아서 연결되는 체험이자 연합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계신 말씀이 곧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 한 말씀이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둘째, 이 말씀을 믿음으로써, 자녀는 자기 안에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됩니다(요14:23). 이 믿음으로, "(내가 만나뵐 수 없는)초월과 영원으로서의 성부 하나님"은 그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실제로 살아 계시며, 영원히 나와 함께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됩니다. 이 믿음 하나로, 자녀의 모든 삶은 곧 그분과의 동행이 되며, 자녀의 모든 삶과 일상의 사건, 현상들은 곧 그분의 말씀을 듣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께서 태초부터 계셨다"는 믿음은 곧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는 믿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요한적 신앙의 시작점이자, 최종 결론입니다.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영접할 때, 나의 존재 전체를 완전히 압도하는 경외와 경이로움, 감동과 기쁨, 열망들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빛이 내 삶 전체에서 "고요한 평화"로써 물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 실재가 되는 것은 말씀으로 인한 것이며, 말씀이 실재가 되는 것은 결국 믿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 앞에서 변명할 수 없습니다. 자녀로서 내가 성화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는다고 애를 썼음에도 아직 나의 영이 그분 안에서 영원히 거하지 못할 뿐입니다. 변명할 수 없습니다. 직시해야 합니다. 직시하여, 건너가야 합니다. 자녀들은 언젠가 한 번은 자신에게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시험을 온전히 끝까지 통과하여야 합니다. 그 시험은 오직 그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며, 자신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누구도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 걸어가는 과정에서, 내가 믿음을 잃지만 않는다면, 다른 말로 포기하거나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그 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축복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생명을 채우셔서, 그 시험을 끝까지 통과하실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 시험의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 역사가 실재가 되어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 꽃의 향기는, 우리들만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향(香)입니다.
"함께"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인식, 관념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결국 무용하고 부질없고 허망한 짓입니다. 인간의 관념은 분리, 단절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 욕망과 공포를 나누고, 자유와 평화를 나누고, 원죄와 구원을 나눕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을 나눔으로써, 후자를 부정함으로써 전자에 집착하려 합니다. 사람은 눈 앞의 단일한 "하나의 개체"에만 집착합니다. 그러나 사실, 존재는 "다층적-수직적" 차원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로 "낮추셔서" 오셨지만, 그럼에도 "우리 수준"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교리와 매우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모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는 하나이시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독립적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독립성이 하나됨을 해치지 않으며, "하나이신 채로" 셋으로 나뉘어 계시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결국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말장난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영으로 영접할 때, 이것은 나의 인식과 관념을 초월하여 그저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관점으로 본다면, 말씀 전체가 다 모순입니다.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신 분께서 나보다 먼저 계셨다"고 증거한 것 자체가 사람의 이해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영으로 영접하면,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셨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 곧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결국, "믿음"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믿음은 곧 "보이지 않는 영을 보이는 육으로 현현"케 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말(지식)로는 우리의 영혼을 변성(變性)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신"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임하실 때에만, 우리의 영혼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모습을 낮추셔서 우리 안에서 "친히" 현현하신 것이 곧 그리스도이시니,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결국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영적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그저 관념적이고 관습적으로만 믿으면 안 됩니다. 교리를 "왜" 믿어야 하는지, 믿음을 통하여 교리가 어떻게 내 안에서 실재가 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앎은 목적이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보편적, 내재적, 초월적으로 우리 안에 임하신다는 진리의 근간이 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사건/현상 안에 계신다"는 것이며, 내재적이라는 것은 "나의 내면에 직접 나타나신다"는 것이며, 초월적이라는 것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육적인 요소들(예: 시간, 공간, 장소 등)을 초월하여 계신다(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계시고 임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신앙은 지적 이해가 아닙니다. 지적 이해가 부분적으로 필요하기는 하되, 지적 이해를 쌓을수록 결국 자기 의(義)라는 죄성을 더 높이는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내주성(~안에)"의 은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마음", 그러니까 주관과 객관을 나뉘어 주관성을 그저 객관성보다 열등한 것으로서 취급하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현상계적 개념으로서의 마음이나 의식 따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의 내주는 "영혼"과 "신성"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하나가 된다(연합)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보다 "못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며, 더 나아가서 내 마음 안에 "갇혀" 계신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문자 그대로, 이 세상 모든 존재, 사건, 현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창조된 것이니까요. 창조된 것이 창조자와 분리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때,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딱히 대단한 성지순례를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삶과 일상 전체에서, 마주하는 모든 존재들과, 경험하는 모든 사건과 현상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나뭇잎 하나, 그 나뭇잎에 일렁이는 햇빛들을 보는 사소한 일상적 체험조차도, "영접하는" 자세로 마주한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됩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잘 안 됩니다. 영접보다 관념이 더 지배적이거든요. "저것은 그저 3차원 시공간에서의 물리적인 감각 경험일 뿐이다"라는 나의 무의식적인 관념(義; 옳음에 대한 집착)이, 내 안에서 말씀보다 더 "높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인식이 투영된 결과, 현상 안에 계시는(현상을 통하여 임하시는) 그분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거듭난 자녀들은 모두 만물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렇기 때문에 회개(거듭남) 없이는 절대로 그분을 만나뵐 수 없습니다. "내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오만함, 교만함이 무의식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처음에는 고통스럽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지 않으면,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지 않으십니다.
'생명'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여기저기에서 참 많이 등장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때, 생명은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피와 살과 뼈로 된 이 물질적인 육신이 생명이 아니라, 생명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물질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신성한 것이자 신성 그 자체입니다. 애초에 말로 설명하면 죄다 관념이 될 뿐입니다. 생명은 곧 신성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시느냐, 의 관점의 차이라고 이해하면 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분의 본질 그 자체는 신성이시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말씀"이며, 또한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이 살게 되는 것을 말할 때는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생명은 곧 삶입니다(Life). 인생과 삶은 다릅니다. 인생은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세속의 법을 근거로 하여 사는 것이지만, 삶은 곧 자녀로서 하나님과 하나되어 동행하는 생명의 여정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없을 때, 인생은 여전히 흘러가지만, 인생은 허망한 것이며, 허망하고 또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며 나의 영혼을 거처 삼으셔서 언제나 함께하실 때"에, 그것은 곧 자녀로서의 삶이며, 그때에 인생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우리 영혼 깊은 곳에는 언제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빛이 생명이라면, 어두움은 곧 죽음입니다. "사망"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지요. 죽음은 "미래의 사건"이라기보다는(물론 그것도 포함되지만), 언젠가 지금 상태로서의 나의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는 존재론적-무의식적 공포와 불안입니다. 어두움은 곧 공포인 셈입니다. 거듭나지 못했을 때, 인간 존재는 언제나 빛이 아니라 어두움에 지배당한 채로 살아갑니다. 원죄는 곧 두려움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는, 사실 하나님께 이실직고하면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의도"는 행위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를 저지른 뒤에 "숨었던" 그 의도에는 두 가지의 죄가 있습니다 :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벌주실 것이라는 인식(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를 제멋대로 판단한 것), 그리고 둘째, 내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다는 착각(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교만)입니다. 뱀은 그저 트리거였을 뿐이죠. 설마하니 하나님께서 정말로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를 모르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3:9)고 물으셨을까요. "어디에"라는 것은, 곧 "숨어 있는 곳", 그러니까 숨는 의도 자체를 보라는 은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원죄는 인간 존재 안에 근원적인 어두움 중심적 구조로써 자리잡고 있습니다. "죄성"은 원죄의 작동이죠.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음이 무서운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도"에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보다, 죽음의 명령을 (하나님의 뜻보다)우선하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이것을 굳이 복잡하고 어려운 말로 설명하려고 하면 물론 그럴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복잡하고 어렵게 알 필요 없습니다. 빛보다 어두움에 더 굴복하고 지배당하도록 나의 존재가 구조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어두움보다 빛을 더 사랑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무엇이 어려울 일이 있습니까? 어려운 것은 실천이지 이해가 아닙니다.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빛을 더욱 사랑하고, 빛을 증거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어두움의 권세 아래에 놓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살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거든요. 결국, 어두움에 지배당한다는 것은, 나의 무의식적인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내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며,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빛보다 죄를 더 사랑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기 의(義)"로는 구원의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내가", "내 능력으로" 이루겠다, 는 것은 결국 어두움에 지배당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더러운 걸레로 바닥을 열심히 닦아봤자, 애를 쓸 수록 더 더러워지는 모순적인 결론에 이를 뿐입니다. 억울하지 않나요? 나는 애써 열심히 "수행"한답시고 걸레를 들고 열심히 닦았는데, 정말로 열심히 닦았는데, 자기 손에 든 걸레가 깨끗한 게 아니라 더러운 것인 줄 몰랐다구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믿는 자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그저 직시하고, 인정하고, 걸레를 바꾼 다음, 다시 하나씩 닦아나가면 될 뿐입니다.
나는 생명이 아닙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주권 하에 사는 삶은 잠시는 이익이 있을지언정 결국 죽음과 사망의 어두움 앞에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살지 아니하고 내 안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사는 자는, 살아서는 잠시 손해를 보는 듯하여도(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곧 희생과 섬김과 봉사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어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를 능히 이기신 바, 그 승리가 우리 안에서도 고스란히 생명이 되었으니, 마침내 우리들은 죽음과 사망의 어두움을 넘어설 것입니다.
말이 자꾸 길어지고, 지식과 개념이 자꾸 복잡해지는 까닭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품으로 뛰어들기가 두려우니까, 자꾸 변명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들은 다 이 죽음과 사망 앞에서의 변명을 늘어놓음입니다. 그 화려하고 웅장한 학문도 철학도 형이상학도 결국 다 변명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 오직 두려움 가운데에서 그분만을 진실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품으로 전적으로 뛰어들어본 자는, 이제 신앙이 갈수록 단순해집니다. 저는 비록 "증거"하는 사명을 받은 자로써 말과 언어를 도구 삼으나, 더 이상 사람의 말과 언어와 지식으로 인하여 나의 의식과 영혼이 구속받지 않습니다. 신앙으로서 저는 그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하나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사랑함으로 인하여 사랑 그 자체이신 분과 하나되며, 하나됨으로 인하여 나의 존재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며, 그리 나아가는 것, 이것이 저의 삶이고, 저의 삶의 방식이며, 저는 이것을 매우 사랑할 뿐입니다.
머리로 말씀을 이해하려고 분석하고 뜯어보는 것을 멈추십시오.
오직 나의 영에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고요한 가운데에서 들으십시오.
진심으로 듣고자 한다면, 반드시 듣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