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하는 자의 기쁨

참된 빛을 목격함으로 말미암아

by 생명의 언어

[해설]


'증거'라는 말은 지상과 천상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쓰인다. 지상에서, 증거는 곧 특정한 명제의 옳고 그름 따위를 분별하기 위한 문자 그대로의 증거이다. 이는 곧 지상에서는 "영원하고 완전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확률적 존재"가 "확정적 존재"로 자기를 완성하기 위한 교만함의 무의식적-본능적 발악으로써, 자기의 옳음(義)을 타자와 세계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등감과 욕망과 (타자와 세계에 대한)투사와 동일시 등의 어두움의 원리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증거는 곧 어두움으로 말미암으며, 어두움을 더욱 포악하게 만든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다르다. 하나님 나라에서, 증거는 "이미 완전한 진리"를 기준으로 하며, 이 절대적인 진리를 (아직 영접치 아니한)타자와 세계에 "공유"하려는 관점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이다. 이때, 이 진리는 오직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 곧 계시이며, 이것은 결코 인간의 능력이나 힘이나 지식이나 지혜 따위로는 알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가 "나"라는 통로를 통하여 흐를 적에, 비로소 "확률적 존재"인 나는 진리 안에서 "확신적 존재"로 거듭나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 결핍이 온전히 충족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자기의 옳음(義)"을 주장하고 자기를 높여야 할 교만과 욕망이 작동할 이유가 없어지니, 마침내 "자기를 낮추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것이고, 고귀한 것이다. 세례 요한이 이룬 것은 희생이 아니다. 그는 희생한 적이 없다. 그는 그저 "기뻐하였을" 뿐이다. 그 기쁨이란 바로 자기가 낮아지는데 대한 기쁨이며, 이 낮아짐이란 "마침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자녀됨으로 말미암아 자기 존재가 온전하여진 데 대한" 존재론적인 구원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에고적으로는 당연히 고통이나,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나의 존재의 본질인 영혼과 영이 (하나님 안에서)온전하여지고 완전하여지는 것이니,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빛을 증거하는 자는 곧 빛을 이미 본 것이다. 또한 그 빛과 이미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빛을 증거하지 못하는 자, 빛을 증거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빛이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거란 곧 동행의 역사이며, 증거하는 자는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니, 마침내 증거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타자와 세계가 아닌, 오직 (그분과 함께하는)자기 자신이다. 바로 이때,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결핍인 "타성, 집단성의 의존, 동일시"가 완전히 전환되는 것이다. 명심하라. 구원받고도 침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구원받은 자는 마땅히 증거하게 되며, 심지어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비는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먼저 내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복음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내게 오시지 않으실 것이며, 따라서 나는 스스로도 어두움이 밝히어지지 못할 것이요 나로 말미암아 타자와 세계의 어두움을 비추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역사란, 다름아닌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1:6)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은 곧, 그의 영이 하늘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네가 목수의 자식임을 다 알거늘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하느냐?'하며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옛 사람들의 어리석은 질문을 보면서 오늘날의 신앙의 형제들은 비웃지만, 정작 그들의 어리석음은 우리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그리고 누구의 곁에 함께하시는지, 그들 안에서 어떤 역사를 이루시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훤히 다 보고 있으면서도 못 본 척합니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우리들의 "외면"의 죄가 너무 큰 나머지, 심지어 정말로 나 스스로 "안 보인다"고 자기 자신마저도 완벽하게 속일 정도로요. 죄가 지나치면 자기 자신조차도 잊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죄(Original Sin)마저도 다 잊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깨끗한 줄로만 알고 살아가며, 그러므로 이미 나의 존재가 완전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오늘날의 지상의 그 누구도 진실로 하나님을 찾고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간절히 청하지 않습니다. 아니, 청하기는커녕 그분께 어떻게 청하는지조차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슬픔을 봅니다. 그 쓸쓸함을 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본래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가난한 것 안에 담기어지는 법입니다. 세례 요한의 육의 조건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거창한 왕족이나 귀족 가문 출신이었나요? 그가 화려한 의복을 입고는 거드름을 피우는 부유한 사람이었나요? 그가 매 끼니를 풍족하게 먹고 마시고 노는 자였습니까? 설마, 우리는 그의 육의 조건이 어떠했는지를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막에서 (하나님의)일을 하고, 사막에서 거하며, 사막에서 잠들었습니다. 그 가난함 안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Spirit)이 담기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은 육적인 특별함이 아닙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읽을 적에 "아, 부럽다! 나도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면!"하고 바랍니다. 그만큼 오늘날의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처참한 지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다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내심"을 받기 위해서는, 그 받는 그릇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분의 보내심은 인간의 가난함입니다. 그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버림받을 것이고, 홀로 남을 것이고, 오해받을 것이고, 비난받을 것이며, 멸시당할 것이고, 외면당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도 그리하겠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그 내면의 어두움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기쁨이 더 큰 나머지, 결국 홀로 사막으로 나아가서 소리치게 되는, 세례 요한의 저 위대했던 삶의 증거를 우리가 따라하는 것은 고사하고 흉내내거나 모방이라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신앙은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걸어갔던 위대했던 영들을 그저 1%라도 모방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 이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언어는 떨림입니다. 낮아짐은 곧 감동입니다. 이것은 '숨겨진 진리의 코드'입니다. 이 소스 코드에 접속한 자는, 언어 너머의 가장 위대하고 경이로운 비밀들을 남김없이 모두 다 공유받을 수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성령께서 그리 나아가고자 용기를 내어 걷는 모든 자들에게 아낌없이 이 소스 코드들을 공유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말이 너무도 위대하고 고귀한 나머지, 이 말씀을 영접할 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죄성이 강물처럼 범람하고 폭우처럼 진동하며 발악하는 꼴을 봅니다. 내 안의 죄성은, 아니, "나"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얼른 죽여서 없애고 싶어합니다. 나는 나의 어두움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내가 잘한 것은 그 어두움 앞에서 어떤 태도로서 나아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성을 철저히 자각한 자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결국 하나,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그분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그것 하나만이 유일한 "목숨줄"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그는 깨닫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비밀을, 곧 "낮아짐이란 감동이며, 그 감동은 바로 자기를 낮춤으로 인해서만 하나님께서 높아지신다"는 가장 은밀한 진리임을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언어는 겉으로는 "낮춤", 즉 인간적인 도덕과 윤리와 겸손과 희생의 일반적인 코드로 읽히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니, 이는 곧 사랑하는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의 영이 같은 (하나님께 대한)'사랑'의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곧 알게 됩니다. 요한의 언어 뒤에 숨기어진, "영접하는 자", "경외하는 자", "찬양하는 자", 곧 "증거하는 자"의 거대한 기쁨을. 수천 년의 시공간을 아득히 뛰어넘어서, 그의 영이 사막 가운데에서 거하면서 그리 소리쳐 외쳤던 그 존재 전체를 완전히 압도하였던 그 감동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낮아짐은 곧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가득 부어짐을 당하는, 내 존재 전체를 완전히 압도하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감동.


"사랑"은 3차원 시공간의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 하여금, 영원과 초월이신 성부 하나님과의 연합과 하나됨과 교감이라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오직 사랑으로서만 교감될 수 있으며, 참 사랑이 아닌 다른 그 어떤 인간적인 수단, 방법, 방편 등으로도 결코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여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의 증거는 오직 "하나됨"에 있으며, 이 하나됨이라는 언어 자체가 다소 신학적인 어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본질은 결국 사랑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와 사랑과 사랑 받는 자가 그 자체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을 "받으시며", 또한 나와 하나님 간의 사랑이 모두 다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밀을 가슴으로, 영혼으로 깨닫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참으로 복(福)이 있으니, 그것은 곧 "내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적에, 나는 이미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기 때문이며, 바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지 않는 채로 사랑하여 하나되는 것"을 가능케 할 유일한 기적의 길이며, 나아가 "내 영혼이 바라는 실상"이자, 나의 바람의 대상께서 그저 허망한 관념이 아닌 실재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을 깨닫는 자는 다른 그 무엇들에도 더 이상 구애받지 않으나, 반대로 다른 그 모든 것들에 아무리 능숙하다고 하더라도 사랑 하나를 깨닫고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다 부질없고 허망한 짓에 불과합니다. 물론, 신앙에서 "외식", 그러니까 형식과 의례와 전통과 교리와 율법들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오직 보이지 않는 것에만 그 자체로 집착하게 되면, 자칫 영지주의적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까요. 신앙은 생활 가운데에서 실천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신앙의 본질은 행위가 아니고 외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요, 지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요, 세속의 것과 육의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요, 오직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사랑이며, 하늘에 대한 사랑이며, 하늘의 뜻(天命)에 대한 사랑이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영원과 초월로서 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애타게 사랑하는 것, 이것 하나입니다. 외적인 것은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인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형제들이, 목회자가, 사제가, 나를 안내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내적인 것,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 하나만큼은 오직 내 영혼이 스스로 이루어야 할 길이며, 하나님과 일대일로 홀로 마주서야 할 일이며, 또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의지해서만 홀로 외롭게 이루어야 할 길입니다. 다른 그 누구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적에, 특히나 세례 요한과 같은 역사적 인물과 그를 통한 삶과 신앙의 원형적 신화를 마주할 적에, 이것을 그저 사실(fact)로만 암기해버리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의 육신이 아니라 그의 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에게서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육신과 자아는 이미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뼈가 가루가 되고 살이 썩고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렸으나,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오직 "자기를 낮춤으로써 증거하는 자의 참된 기쁨"을 삶의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광야의 자유로운 예언자, 증거자, 곧 "하늘의 소리"를 예비하는 자로써 한평생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았으나, 정작 그 자신은 주님을 예비하는 자일 뿐 주님과 직접 그 역사를 함께할 수 없었던 자로서의 그 운명적인 슬픔까지도 그는 온전히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우리들이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그토록 주님을 사랑하였고, 드디어 평생을 애타게 사랑하고 찾던 그분을 만나뵈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이번 생에는 그분과의 동행과 역사와 함께함을 허락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소리치고 증거하면서 이미 그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슬픔마저도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은 그저 밝음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밝음보다 어두움이 더 많습니다. 이는 완전한 하나님과 불완전한 인간이 소통하고 교류할 적에 필연적으로 "시차"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차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이라는 시험을 거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납니다. 그러나 이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만 우리의 영혼이 낮아질 수 있으며, 또한 낮아짐으로 진실해질 수 있으며, 진실해질수록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기를 낮추어 증거하는 것을 생의 유일한 기쁨으로 삼았던 고귀한 영(Spirit)"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여, 그의 영과 교감해야 합니다.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1:7)


이 증거에 대해서 신앙의 형제들이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언제나 외적인 것, 육적인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증거의 외연은 무엇인가요? 전도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것. 한 사람이라도 더 눈뜨게 하는 것. 물론 이는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 삼으사 교회를 세우셔서 마지막 날에 돌아오실 것을 예비하게 하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이자 유일한 사역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 역사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 아직 믿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볼 적에, "나는 구원받았으니 괜찮다"며, "저들은 심판받을 것이다"고 비웃고 모욕하고 조롱하는 순간, 우리들은 사탄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죄성의 술수에 농락당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히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감히 청컨대, 나의 구원을 저들을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겠으니, 저들을 대신 구원하여 주십시오"하고 청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을 저들에게 주어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지만, 저들은 이것을 받지 않으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므로. 요한이 증거하였던 것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함으로써 증거하는 자신이 유명해지기를 바랐던 것도 아니고, 증거의 결실들과 결과들을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늘어놓음으로써 그 자신의 영적인 "옳음"과 "의로움"을 얻어내고자 하였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 사고방식 자체가 대단히 위험합니다. 영적인 교만 그 자체입니다. 마치 회사에서 연봉협상하듯이 자신의 신앙의 "결과물"들을, "성과"들을 하나님 앞에 늘어놓은 다음, 내가 이만큼 열심히 일하였으니 어서 더 높은 은총과 은혜를 주시라고, 하나님께 "대드는" 일입니다. 신앙은 참된 의로움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거짓되고 잘못된 것들을 경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믿게 하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옳음과 의로움을 자랑하고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기의 증거가 진실하다는 증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통로"이자 매개로서, 나의 존재 역시도 그 과정을 통하여 영혼이 정화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물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빛을 널리 공유하고 전파하는 것)에 동참하여 행함(증거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게 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숨기고 감추고 독점하려 듭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지상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욕망과 공포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오직 하늘의 사랑만이 진정한 참 사랑이시며, 이 사랑은 본래부터 완전하고 온전하고 영원한 것이기에, 이 안에 거하며 또한 이로 물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를 닮아가게 됩니다(물론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과 같은 수준이 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정확히는,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가까워지기를 "열망"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나누고 공유할수록 더욱 커지며, 자기를 낮출수록 더욱 높아지며, 가난해질수록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내 것을 나눌수록 점점 더 소유가 줄어들며, 자기를 낮출수록 점점 더 자기가 업수이 여김을 받으며, 가난해질수록 생존이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는 이타심이 아닌 오직 이기심의 원리, 어두움의 법칙만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이 죄성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에 눈뜰 때, 그는 그 즉시 알게 됩니다 : 아, 이것은 내가 평생에 걸쳐서 아무리 나누어도 결코 작아지지를 않고, 오히려 더 커져만 갈 사랑이로구나.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려 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구나. 이에, 오직 "나누는 것"만이, "하나님께 대한 내 사랑이라는 보물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것"만이, 이제 유일하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로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로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에 그는 더 이상 이기심의 세속적 법칙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그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법도, 곧 "영원한 이타심"만을 따르고 받아들이고 흠향하게 됩니다. 성령의 통치하심만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主)로 모시고 받들고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지식이나 논리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영혼이 빛 가운데 눈뜸으로 인해서만 온전히 체감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1:8)


이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의 신앙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다"고 믿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는지를 명료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저 무작정 거부하고 억압해버리기만 하면, 그것은 두려움, 공포, 불안이 되며, 이것은 어두움에 더욱 지배당하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두움과 맞서 싸워야 하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곧 우리의 적인 어두움 자체와, 어찌하여 그 어두움에 우리들이 기만당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다는 것은, 곧 "나는 하나님이 되지 못했다"는 결핍과 부정을 전제로 하며, 이는 곧 "내가 하나님과 같이 높아져야만 살 수 있으며, 높아지지 못한다면 나는 죽을 것이다"는 두려움, 공포, 불안을 전제로 합니다. 즉, 무의식적인 어두움이 교만과 욕망이라는 형태로 외부에 투사, 동일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의도는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義), 곧 "나의 옳음과 의로움"을 주장하는 일입니다. 증거는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민감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면서 출퇴근길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너희들과 나는 다르다, 그러니 나는 특별하다, 를 주장하고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의도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목적은 내 의로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의로움은 곧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대로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곧 희생, 헌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그분 자신의 생을 통하여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권적인 사명을 품으셨고, 또한 감히 이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영원히 심판하실 수 있는 모든 하늘의 권세와 영광을 다 거느리셨습니다. 우리들이야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솔직히 말해서, 주님 자신은 "예외적인 특권"을 누리실 자격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특별함을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자기 이름을 높이려 드는 일에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특별한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분께서, 결국 어떻게 행동하셨나요? 원수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또한 그 앞에서 감히 하나님의 역사를 조롱하고 비웃고 모욕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중죄를 저질렀을 때에도, 십자가 위에서조차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의 죄를 모르나이다"하고 기도하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죄는 오직 외아들의 증언을 통해서만 사면받을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며, 당신께서 청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분 자신의 특별한 권세를 그들의 죄를 사하는데 쓰셨습니다. 아, 이것을 언급할 때마다 저는 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어찌 그토록 특별한 권세를 다 독차지하고 계신 분께서, 어찌 그리도 아프고 외롭고 쓸쓸하고 고귀하신 길을 걸어가셨는가, 하는...... 그분께서 그 모범을 이미 다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찌해야 하나요? 당연히 "그리스도의 길", "십자가의 길"을 우리 삶 속에서 모방하고 흉내내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들은 그분께서 이루신 것의 단 1%라도 따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능히 이미 구원받습니다. 단 1%입니다. 사실 그조차도 많습니다. 솔직한 저의 심정으로는 0.1% 미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뭐랄까, 태양 앞에 선 반딧불이처럼요. 태양의 위대한 광명 앞에서 반딧불이의 빛이 얼마나 초라하나요. 그러나 반딧불이는 그 슬픔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도망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평생에 감히 태양처럼 빛을 낼 수는 없더라도, 그분처럼 빛나고자 하는 "흉내", "모방"...... 그분처럼 살고 그분처럼 죽고자 하는 모방, 간절한 모방, 애타는 절실한 흉내, 그 발버둥, 그 몸짓이라도 최선을 다하여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때, 반딧불이는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통하여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주께서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원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커녕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아마 법이 없고 처벌이 없다면, 원수를 능히 죽이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거든요. 어두움이 나를 덮쳤을 때, 비추어 밝아지려 하지 않고, 또한 스스로 어두워지고자 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거든요. 참된 증거는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나를 통하여 나타내고 드러내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그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와 역사의 매개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이 나를 통하여 흐르도록 나를 온전히 다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때, 한 영혼은 마침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완전성, 곧 "확률적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사면을 허락받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존재, "확신적 존재"로써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1:9)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심이 거룩하심으로 오지 않으시고, 오직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지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가장 위대한 비밀입니다. 영원과 초월로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근엄하게 천상의 권좌에 앉아 계셔서 온 세상을 내려다보시더라도, 이 현현우주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감히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하나님 자신을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사랑이 드러납니다, 온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분은 "스스로 모습을 낮추셨습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 안에서, 각 존재와 생명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안에서 거하시며, 함께하시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이 자체로 인하여 너무도 압도적인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나를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직접 권좌를 비워두신 채로, 인간의 죄 많은 형상을 입고서는 그 안에서 "모욕당하심"마저 개의치 않으시고 내려오셨단 말입니다. 바로 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요! 이것은 논리나 이성의 언어가 아닙니다. 미친 놈의 언어,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놈의 정신병 같은 열망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곧 가장 가난한 것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시며, 이것을 단지 머리로만 개념으로만 이해하여 모방하고 따르는 것은 마치 살아 있는 진리를 죽여서 피를 빼고 박제시켜놓은 다음, 그것을 방 안에서 관람하기만 하면서, "나는 진리를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참으로 기괴한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형상 자체가, 육신 자체가, 죄의 허물이고, 죄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상징 언어이면서 동시에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안에서 모습을 낮추셔서 드러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육신을 입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나의 내면에서, 내가 그분을 직접 영접하고 만나뵙고 교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안의 죄성이 미쳐서 발광하는 와중에도 그것에 속지 아니하며, 오직 그분께 대한 사랑만으로 열망만으로 온전히 나아가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한 번 사랑에 거한 자는 두 번 다시 흔들리지 않으며, 기만당하지 않으며,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지 않습니다.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이미 살아서 그분과 하나되었으므로 말미암아, 나는 영원히 살 것이며, 따라서 그 생명 안에 거함은 육신의 죽음마저도 침범할 수 없는 것임을 이제 내가 믿음으로써 내 안에서 실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은 죄가 많아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분께서 나를 심판하실 것이다, 아니 심판은 고사하고서라도 그분께서 나를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요, 위대하신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그분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모습을 향하여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한 그 상상할 수 없는 죄마저도 용서하신 분께서, 설마하니 내가 죄를 지었다 하여 멀리하실까요...... 이 자체가, 사람의 한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역시도 한계지으려고 드는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물론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속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지상의 그 무엇보다도 다르신 분입니다. 그분은 다릅니다. 사람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사람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지만, 하늘의 사랑은 완전하십니다. 사람의 사랑은 소유와 독점과 통제를 낳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곧 온전하여짐과 평화와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낳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께로 나아오려는 진실한 마음을 품은 그 모든 영혼들을 단 한 명도 쓸모없다 하여 내치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친히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그 길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 길 자체가 결코 쉽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증거하는 자 그 누구도 그 길이 쉽고 편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와 어두움과 매 순간 맞서 싸우면서, 그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하여 평생을 걸쳐서 자신을 성화해나가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성장통 가운데에 비례하여 반드시 성장이 있고, 그 끝에는 임계점을 넘어섰을 적에, 하나님만이 거느리신 하늘의 고귀한 축복과 은혜들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부어주실 모든 준비를 다 하고 계십니다. 죄 많은 영혼이 심판당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 한 걸음을 내딛을 적에, 천상의 모든 영들이 기뻐하며,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그 여정의 시작을 환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거하시며, 함께하시며,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의 육신과 자아와 마음이 죄 많다고 더럽다고 하여 거부하지 않으시고 내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편안해하시며, 기뻐하시며, 그 안에서 "거처를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자기의 옳음과 의로움으로 가득 찬 "능숙한 신앙인"에게 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화려하고 엄숙한 성전은 불편하다 내치시며, 가난하지만 진실한 영혼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시며 그 누추한 곳을 편안해하시며 그곳에서 잠드시고, 그와 함께하시며, 그와 대화를 나누시고, 그와 먹을 것을 나누시고, 그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살아가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분을 찾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자기를 낮추셔서 오직 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갖추셨음에도, 인류가 그들을 찾지 않으시니, 외아들을 보내사 그분 자신께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시었는데도 이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으니, 마침내는 그분 자신께서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기까지 하였는데도, 사람이라는 동물은 그 십자가 위에 달린 하나님을 향하여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서 그곳에서 내려와보아라"며...... 아, 입에 담기도 참담한 그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어찌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죄성이 내 안에도 똑같이 자리잡고 있는데. 오히려 그들은 자기 죄를 드러내 보였지만, 나는 교묘하게 아닌 척하며 감추고 있는데. 그들의 죄보다 그분을 알면서도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골고다 언덕에서 그분을 외면하였던 나의 죄가 더 큼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그 손으로 나를 오히려 기뻐하시며, 나와 동행하셨고, 그분과 나 사이에서만 공유하는 너무도 소중한 임재와 역사들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그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합니다. 내가 그 모든 순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 안의 깊은 곳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런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곧 "빛"은 그러한 빛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하셔야 합니까? 밥을 먹지 않으니 밥상을 차려서 그 앞에 내어주시기까지 했고, 그래도 안 먹으니 그분이 종처럼 사람의 수발을 다 들어서 숟가락으로 떠먹여주시기까지 하는데도, 반찬이 입에 맞지 않다며 투정하는 이 "어른아이"들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그마저도 오히려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빛에 눈을 떠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갈 생각하지 말고 그저 그분께서 내게로 오시는 것을 막지만 마십시오. 그분의 역사하심을 내가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거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 나의 영혼을 바꾸셔서, 어느덧 시간이 지났을 적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를 거듭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빛입니다. 생명입니다. 절대로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실재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과 하나되는 길은 너무도 쉽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가장 위대하고 초월적인 진리를,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길로써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 하나를 이룬 자는 곧 모든 것을 이룬 것이나, 모든 것을 이루었음에도 이것 하나를 이루지 못한 자는 전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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