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으신 이께서 가장 낮은 곳에 거하심으로
[해설]
존재는 수평선 상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다. 어디에(Where)라는 질문은, 믿는 자에게 있어서 매우 고통스럽고도 진실한 물음이었다. "나의 아버지, 어디에 계십니까......" 그것은 곧 3차원 시공간의 물질세계 안에 갇혀서 육신과 자아와 마음이라는 불안정하고 거칠고 열등한 진동수의 육의 몸을 입어야만 하는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질문이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요14:8)은 곧 물질세계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이것이 반드시 언젠가는 소멸하고 사라지고 없어질 것임을 직감한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그 근원적인 뿌리 깊은 공포를 숨기기 위한 어떤 무의식적인 발버둥, 발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포와 욕망은 서로 다른 하나의 본질을 가리킨다. 그것은 어두움에서 비롯하며, 어두움이란 "빛이 잠시 가리워진 것"을 의미하니, 이는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대신 "보이는 세계"만을 집착하는 의식 구조를 뜻한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질문들을 마주할 적에, 나는 감히 그분 앞에서 고백하건대, 진실로 그 질문들을 어리석다고 비웃고 모욕하는 심정으로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내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러했더라면, 나는 의지적으로 이것을 크게 반성하고 회개하며 뉘우칠 것이다. 그만큼 그 질문은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며,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절실하고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저 빌립조차도 끝내는 주님께서 떠나시는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저리도 어리석고도 유치하나 그만큼 그의 가슴에서 절실한 것이었을 그 질문을 드렸건대, 그분께서 그의 절실함을 알아보시고는 자비로운 말씀으로 그를 깨우치게 하셨나니 : "네가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하였거늘 어찌하여 나를 모른다 하느냐?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요14:9)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삼위일체의 교리가 어찌하여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진리의 실재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본래 성부 하나님은 영원과 초월 너머에 계시는 바, 인간이 결코 만나뵐 수가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의 권좌를 비우시고 미천한 종의 육신을 입으시는 치욕과 모욕을 당하심을 주저치 않으시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곁으로 오매,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매 순간 만나뵙고 교감하고 연결되고 연합될 수 있게 하신 것이었다. 이른바 "인격적 만남"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을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분의 신성(그리스도)"을 우리가 영접하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니, 이 길은 오직 성령께서만 인도하실 수 있는 것이다. 보라,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복음의 진리가 다 하나이다. 이러니, 세상 사람들은 다 그 외아들의 아버지이신 그분을 오해하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그렇다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때에 맞춰서 인도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어찌하여 믿는 자들마저도 "아버지"에 대해서 그토록이나 오해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자신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며, 설령 알게 된다 한들 오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내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이것을 매우 슬퍼한다. "진실로 아버지께 가까워지고자 하는 열망", 그것은 영혼 깊은 곳의 울림이자 본능이며, 타고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크리스천"이라 칭하는 자라면, 이것이 늘 내 가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언제라도 증언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버지에 대해서 믿는 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그분은 천상의 권좌에 앉아서 근엄하게 세상을 통치하시고 영혼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 또한 옳다. 그러나 그분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바로 그것이다. 사랑, 그 하나란 말이다. 나는 거듭하여 강조하고자 한다. 후에 자세히 쓰겠지만, 성부 하나님께 있어서 "인간의 형상"을 입으신 것 자체가, 그분께 지독한 모욕당하심과 치욕당하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께서 천상의 권좌에 앉아 계시기만 하여도 현현우주의 그 누구도 감히 그분께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모든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분께서, 친히 그리도 절실하게 자기를 낮추사, 종의 형체를 지니시고 세상에 가까이 오셨고 자녀들의 곁으로 오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의 의로우심과 그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짐작조차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디에라도" 계신다. 주님께서는 "어느 때에, 어느 곳에라도" 다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곧 물질세계 전체보다도 압도적으로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언제 어디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음이다. 믿는 자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하나님을 만나뵙지 못해서,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지 못해서 고민인가? 그 이유가 궁금한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 겉으로는 그분을 믿을지 몰라도, 영혼 깊은 곳에서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보다도 세상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대 심장 안에서, 그분이 소외되어 앉아 계실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기도는 사람의 통제 하에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지기에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불현듯 오셔서 이루시는 기도, 즉 "관상기도"는 사람이 결코 통제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기에 불안정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깊은 감동과 기쁨과 열망을 영혼 안에서 일으키시고는, 예고 없이 순식간에 떠나십니다. 그리하여 남은 영혼은 그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그 임재의 소중한 기억들을 자신의 영혼의 깊은 성소의 은밀한 함에 보관하니, 그곳에서 그 기억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며, 또한 영혼을 살게 합니다. 이렇게 하여 모인 "보석함"이, 자녀들에게는 각자 하나씩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집단적으로" 만나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시대가 시작된 본질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요. 더 쉽게 말해서, 오직 "믿음과 은혜"를 통해서요.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역사가 세상이 다 모르지만, 더욱이 세상에서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그분을 믿는 자, 그분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너무도 귀중한 보물이어서, 그리 한평생을 소중히 간직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보물"의 크기와 깊이야말로, 각 사람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매, 하늘로 돌아가서 그분 앞에 섰을 적에, 유일한 기준이자 근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상의 보물은 다 부질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부질없고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서 하나님을 사랑한 것, 그분과 교제한 것, 그분과 함께 손잡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간 순간들, 그러한 것들은 죽음조차도 감히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더욱 크게 기뻐하는 영화로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육적인 것을 바라면서 한평생을 허망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살아서의 잠시의 삶은 비록 내려놓더라도 "영원히 살 것"을 구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각 영혼들에게 주어진 실존적인 결단의 과제인 것입니다.
글쓴이에게는 이러한 관상적 원형들이 매우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것들 중 하나는 바로 성육신 사건 자체에 대한 슬픔과 감동, 기쁨...... 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언어로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지어 믿는 자들마저도, 성육신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자체가 안일한 신앙의 경계입니다. "크리스천", 그러니까 자신을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 길을 따르는 자"라고 칭한다면, "그리스도 중심성"이 그의 신앙에서 매우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이것은 결국 성육신의 신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래,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성부 하나님께서는 영원과 초월 너머에 계시는 분이신 고로, 우리들이 결코 어떠한 방법으로도 직접 만나뵐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그만큼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을, "신"을, 그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 그렇게만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절대자, 초월자. 그 말 자체에 "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온 세상이, 특히 믿는 자들일수록 더더욱 아버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본질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비록 영원과 초월로 계시는 분이나, 그분의 "본심"이 어떠하신지를 우리가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곧 성육신입니다. 그분께서 스스로 "죄 많은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2:7) 자기를 낮추셔서 사람 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셨을 적에, 저는 처음으로 매우 낯선 감각을, 느낌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내려오신 일 자체가, 그분께 "슬픔"이었구나...... 하는, 그러한 이질적인 느낌, 그러나 너무도 선명한 그 느낌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쉽게 생각하고 맙니다 :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뭐든 하실 수 있으실 테고, 인간으로 내려오실 수 있겠지."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내려오신 것 자체가, 인간 "안에" 거하신 것 자체가, 그분께 매우 큰 모욕이고, 치욕이십니다. 그것은 마치 왕이나 황제가 백성들을 너무도 사랑하여, 자기의 정체를 감추시고는 평범한 백성들의 종이나 하인이나 노예가 되어서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과, 아니 그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더 높은 슬픔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할지 몰라도, 그분께서는 천상의 권좌에 앉아서 온 세계를 심판하고 계셔도 현현우주의 그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모든 권세와 영광을 고스란히 거느리신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스스로" 그리 치욕당하시고 모욕당하시는 길을 주저치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바를 그분의 때가 되었을 적에 정말로 이루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성육신의 진리는 자연스럽게 십자가 부활의 진리와 이어집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 탓인지, "치욕과 모욕을 감수하고 종의 형체를 입으셔서 자녀들 곁으로 오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아이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니 "모든 귀중한 말씀들을 다 선포하셔서 그분께로 올 수 있도록 길을 여셨으며", 그럼에도 그 말씀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니, 마침내는 모든 인류의 죄를 홀로 대신 끌어안으시고는 대부분의 제자들마저도 떠난 그 언덕에서 홀로 쓸쓸히 십자가에 메달리셨습니다. 이것은 이성의 언어가 아닙니다. 합리성과 논리의 언어가 아닙니다. 신앙의 언어, 믿음의 언어, 영혼의 언어입니다.
저는 이것을 떠올릴 때마다 미천한 사람으로써 감히 "종의 형상 안으로 스스로 내려오신" 그분의 심정에 함께 아파하고, 깊이 슬퍼합니다. 온 세상이 다 모른다 할지라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셔봤자 아무도 알아주지를 않는데, 심지어 그 역사를 이루시는 절정의 순간에서조차도 인간들은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고 오만한 까닭에 십자가 위에 메달리신 그분을 비웃고 모욕하고 침을 뱉은 존재들인데, 그들을 향해서도 결국 그분은 자신의 권세와 영광을 그들을 심판하는데 쓰지 않으셨고,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의 죄를 모르나이다"(눅23:34)고, 죄인들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서만 쓰셨습니다. 그 홀로 짊어지신 아픔을, 슬픔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그분의 의로움과 고귀함을......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영혼들은 고스란히 함께 느끼고, 교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품에 의지하여,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그분의 심장 소리를 듣고, 그분의 숨결을 느끼며, 또한 함께 눈물흘리며 그분의 그토록 고통스러웠고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쓸쓸했던 그 영광의 길에 공감하며, 그 누구도 명령치 않으셨음에도 어찌 그리도 "모욕당하시고 치욕당하시는" 일을 주저함이 없으셨는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찌 그리도 의로움과 고귀함을 끝까지 이루시고 가셨는지를 또한 경외하고 기뻐하고 열망하면서...... 성육신의 교리 자체가 저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깊은 관상기도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육신 자체를 떠올릴 때마다 저는 성부 하나님께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모욕당하심을 감수하셨는지를, 그만큼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거대하고 압도적인지를, 그리고 주님께서 어찌 그리도 끝까지 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의로움과 고귀함의 길을 걸으셨는지를, 모든 순간마다 선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체험"을 은유적인 언어로 설명한 것입니다. 사실, 하늘나라에서는 은유가 곧 실재입니다. 사실(fact)보다 더 높습니다.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사실 따위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오직 은유만이 하늘의 진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인간적인 방편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래부터 "창조된 세계 어디에나, 어느 순간에나" 하나님은 계셨고, 또한 머무르셨습니다. 누구라도 그분을 만나뵙고자 한다면 언제나, 어디에서나, 변함없이 그분을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보다 죄를 더 사랑한 끝에,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과 공포가 도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 세상에 은밀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리 표현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온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 가운데에서 은밀히 거하시는 그분께서는, 오늘날 매우 "외로우십니다." 아무도 그분을 영접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 안에서 일하시며, 또한 "대신 십자가를 지시며", 영혼들을 인도하고 이끄시며,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셔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른바 "먹고 사는 일"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까닭에, 그분을 외면합니다. 아니, 외면의 죄가 너무 뼈에 사무친 나머지 스스로 외면하는 줄도 모릅니다. 무지가 곧 실체가 된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물질화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크리스천"이라 하는 사람이라면 -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과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다름"은 곧 증거요, 그 증거는 곧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어느 순간에나 계신다"는 고백이며,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의 임재와 역사의 소중한 체험과 기억으로 말미암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증거와 고백이 한 영혼을 "하나님을 통해서" 빛나게 만듭니다. 고귀하게 만듭니다. 의롭게 만듭니다. 이제, "어디에(Where)"라는 질문은 그만둬야 합니다. 그분은 어디든 다 계십니다. 다만 내가 그분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When)"라는 질문은 그만둬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든 만나뵐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께 관심이 없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한다 하더라도 "세상일보다 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How)"라는 질문은 더더욱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 하나로 인하여 그는 이미 그분 안에 거하며, 또한 그분께서 그의 안에 거하심을 매 순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질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질문이 많은 법입니다.
이때의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현현우주 전체"가 그분의 통치 영역이 됩니다. 그리고 현현우주 전체의 모든 존재들, 천지만물들이 다 그분의 백성들이 됩니다. 다만 이것은 너무 초월적인 존재론적 관점이고, 실질적으로는 "믿는 자"들과 "믿는 자들의 연합으로서의 공동체", 즉 교회를 가리킬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임을 조심스레 밝히고자 합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경외"를 가리킵니다. 영접이라는 말은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영접이란, 한 영혼이 하나님을 대하는 근본 태도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스스로를 낮추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 성육신이라 하였는데, 이 성육신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사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께서 물질세계 안에서 "드러내시는" 원리 전체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진리이기도 합니다. 이때,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세속의 백성들", 그러니까 집단성 안에 갇힌 에고로서의 개체의식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상태의 의식 구조의 연합을 뜻하며, 이 상태에서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그저 3차원 시공간의 물질세계의 감각 경험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실재도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우리들은 아주 평범한 일상 속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분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접"입니다. 이 영접은 육신의 감각이 아니라,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의 감각입니다. 그 자체로는 특별한 어떤 신비 체험 같은 게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자칫 잘못한다면 "아버지를 눈으로 보여주소서" 했던 빌립의 어리석음의 실수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들은 여전히 이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햇빛, 바람, 구름, 나뭇잎, 꽃들, 풀들, 그 모든 것들이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마주할 적의 나의 "영혼의 본질적인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면, 바로 "경외"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경외 자체는 "상위 감정", 곧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서 '자기를 낮추셔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만,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영의 감각입니다(영의 차원에서는 엄밀히는 '감정'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경외의 기반, 토대, 마중물이 되는 것이 바로 "감동(기쁨)"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어느 장면에서, 희한한 평화를, 기쁨을, 감동을 느껴본 경험 말입니다. 차를 타고 창밖을 보는데 그저 그 일상적인 풍경 자체가 그날따라 너무도 평화롭고, 그 순간이 너무 기쁘고, 감동스러운, 그러한 순간들 말입니다. "지극히 평범함 가운데에서 지극히 특별함"이 현현하였던 그 순간. 바로 그때, 우리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시공간적 체험 안에서 현현하고 계신 것을 영의 감각으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의식적으로 "믿는 자"의 구조가 되지 못했기에, 그것을 그저 "감정"의 차원으로(mind) 소비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영이 깨어난 자, 거듭난 자, 내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한 바로 그 존재는, 영혼은, 이것을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이때, 감동이라는 감정(사실, 감동, 기쁨, 평화, 이것들도 상위 감정입니다; 다만 경외, 경이로움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열쇠'로써 가장 가까울 뿐입니다)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을 영으로써 영접하는 직접적인 코드, 곧 "경외(경이로움)"를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경외할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을 만나뵌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경외하는 유일한 절대적인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가 자기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영과 영혼은 오직 절대자를 영접하는 그 본질적인 "감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간직한 본능이거든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말씀이 가리키시는 인간 존재의 깊은 죄성을 보게 합니다. 이것은 나의 죄입니다. 평생에 걸쳐서 그분께 빚진 것을 갚아나가야 하는, 나의 죄입니다. 나는 이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관상적 체험은 오직 "회개", 곧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것"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결코 관상적, 신비적 체험 자체를 나의 특별함의 근거로 자랑하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내 안의 깊은 죄성은 끊임없이 그러라고 나를 유혹합니다. 그 음성도 내가 또한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때때로 예고 없이 임재하셔서 그분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때에, 나는 하나님을 말하나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나는 관상과 신비와 신학을 말하나 그들은 그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모름에도, 그들 안에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넘쳐 흐르며, 선(善)으로 그들의 존재 전체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봅니다. "감추어진 그들의 영혼"이 너무도 아름답게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을, 나는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때마다, 저는 너무도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설쳐대는 내 꼴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토록 이름 없이 평범한 자들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아는 자는, 감히 교만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나의 아득한 격차를. 다만 그리하여 나는 이 부끄러움을 발판 삼아서, 더욱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기도하며, 한평생에 걸쳐서 그분과 동행하기를 열망함으로써, 겨우 이 빚을 하루하루 갚아나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죄입니다. 나의 죄, 바로 이 나의 죄 때문에, 그분이 그리도 처절하게 십자가를 지셨으며, 내가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인 까닭은, 정작 그 대속의 당사자였던 나는, 수천 년 전에 그분께서 골고다 언덕을 지나가고 계실 적에, 내 목숨이 아까워서 그분을 알고 있음에도 그분을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대중성 안에 자기를 감추고는 비겁하게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나는 보았습니다. 그 순간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우리 내면의 상태는 죄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지(will)는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내 마음은 오늘도 죄성으로 미쳐서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분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분을 끊임없이 원망하며,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 지시는 그분께 "조금만 더 짊어져주시라"며 흥정하려 드는, 차마 말로 다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처참한 나의 죄를 봅니다. 우리 "상태"는 그러할 수 있습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게 우리들의 실체니까요. 다만 우리들의 의지는 다릅니다. 그러한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나는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처참한 죄성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열망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기뻐하도록" 그리 마음을 품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는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사랑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우리들이 우리 안의 죄성과 맞서 싸우는 고귀한 영적 전쟁에서 유일한 승리의 길입니다. 어두움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부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 어두움을, 슬픔을, 부끄러움을,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자기의 처참한 실체를, 오직 그분께로 더욱 간절하고 절실하게 나아가려는 희생의 제물로 삼으십시오. 그때에, 그분을 통하여 나의 죄는 그분의 기쁨이 되는 위대한 변성(Transformation)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그리스도', '주님'...... 등의 단어를 자주 쓰지 않습니다. 그러한 단어들을 직접 언급할 적에는, 반드시 "공적으로" 의미 있고 중요한 순간에서뿐입니다. 그 외 나머지 대부분의 순간에서는, 그저 <그분>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분이라는 말이 제게 편안합니다. 제 영혼이 마땅히 그분 앞에서 무릎 꿇고 엎드려 영접하는 그러한 편안함으로 임합니다. 그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분의 존재는 그분의 영광이며,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으니, 그 이름은 결코 함부로 망령되이 불리어서는 안 되는 "신의 이름, 신의 언어"입니다.
이것을 모든 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나의 신앙의 방식일 뿐입니다. 이것은 기사로서 왕께 바치는 영원한 충성의 맹세입니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여도, 우리가 하나님을 "종처럼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자기를 낮추사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그분의 사랑과 은혜이시지,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우리보다 "작거나, 낮거나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외의 언어입니다. 이 경외의 마음,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것을 말할 적에, 저는 슬픔을 먼저 느낍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경외하는 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는 이 단순한 부름 자체만으로도 내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압도적인 감동과 경외와 기쁨을 모든 순간마다 절실히 느끼는 자...... 그러한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하는 슬픔입니다. 오늘날에는 믿음의 길을 가기가 너무도 편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신앙을 갖는다 하여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결코 가벼운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 형제들은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 신앙의 선배들에게 영원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예배에 참석하셨고, 또한 공부를 위하여 성경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매 순간 거대한 압도적인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맞서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그저 원한다면 도처에 말씀과 그 말씀들에 대한 해설과 풀이와 안내를 제공받을 길이 넘쳐 흐릅니다. 감히 말하건대, "전국의 편의점 분포도에 못지 않을 만큼"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편리함이, 곧 영접과 경외의 질적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며, 또한 그들이 걸어가야 할 그들 나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의 언젠가에서 그들은 반드시 그들만의 방식으로 신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믿는 자"라고 칭한다면, "크리스천"이라 칭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자녀"로 칭한다면, 자녀들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어떤 모범인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매 순간 나의 존재가 넘쳐흐르는 바로 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내 삶이 곧 예배가 되고, 내 일상의 모든 순간들이 기도와 묵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며, 그 빛에 그들은 물들어갈 것입니다. 한 명의 증거하는 자가 나머지 전체의 어두움을 능히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그저 관념적이거나 형식적인 가르침 가은 게 아닙니다. 진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영원히 살아서, 가장 귀중한 진리를, 가장 평범한 가운데에서, 가장 완전하게 이룰 수 있게끔 길이 되어주고 계십니다. 영접하는 자 누구라도 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너무도 간편하고 편리한 길로써, 너무도 귀중하고 경이로운 진리와 하나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인류의 동서고금의 종교와 영성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신을 경외하십시오. 일상의 모든 순간들을 경이로움으로 맞이하십시오.
그리할 때, 마침내 그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