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변화(實體變化)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by 생명의 언어

[해설]


성체성사, 그러니까 성찬례의 본질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는 각 계파마다 입장이 다르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가톨릭의 입장, 그러니까 성찬례에서의 포도주와 빵은 성례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써 변화한다, 는 "실체변화"일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한 한, 전적으로 동의하며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나는 "개신교인"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순결하고 자유로운 영혼이며, 따라서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엄연한 "실체", 그러니까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이자, 자아와 타자와 세계의 가장 최외곽부(물질, 현상)에게까지 절대적인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하시는 초월과 영원으로서의 성부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신성의 "현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찬례에서 믿는 자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포도주와 빵을 자신의 몸 안에 받아 모시는 의식은 그저 "허례혀식"이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다른 여타의 물질 요소들로 대체 가능한 "부수적인"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실체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자신 안으로 깊이 받아 모시는 성스러운 변형(Transformation)의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실체변화의 최종적인 목적, 곧 "복음의 성취"를 통하여 우리들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되는 것, 으로 귀결된다.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불확실한 인간 존재로서의 본성이,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와 대속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되찾을 적에, 이것은 그저 "교훈"이거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혼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실체적인 것이며, 또한 그러한 것이어야만 한다. 믿음이란 그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이 믿음을 통하여 "실체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진리를 내 안에서 "이루게끔"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생물학적인"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찬례에서의 빵과 포도주를 실험실로 가져가서 현미경으로 관찰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물질" 그 자체인 채로, 그것은 "성화"되어 수천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와 우리들의 영혼을 하나로 이어주는, 신성을 매개하는 "실체"가 된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하여 가능한 것이며, 더 이상 물질세계의 물리법칙과 이성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이 말씀은 아마도 많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고 가장 사랑받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영혼의 태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사람들은 신앙을 그저 감정적, 정서적 위로 수준으로만 이해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찬송가 부르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에서 정서적, 감정적 위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뿐이라면, 이는 곧 "나의 심리적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것"이 됩니다. 물론, 감정적인 것은 참된 신앙,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위한 좋은 시작점이 됩니다. 다만 그것 자체에만 머물러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만약 이 단계에서만 머무르게 된다면, 치명적인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 이것은 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만만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사랑과 은혜로써 편안하고 따뜻하게 다가와주시니, 그것에 익숙해져서는, 그분께서 나를 사랑해주시고 또한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배은망덕한" 태도로써 하나님을 대하게 만듭니다 : "하나님, 오늘치 축복은 이것뿐인가요? 어제보다 더 적지 않습니까! 얼른 다시 내어오십시오. 아, 내일과 모레는 제가 바쁘니까, 사흘 뒤쯤 찾아오시구요."


저는 지금 이 말을 결코 가볍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습을 낮추셔서 우리 곁으로 "내려오셔서" 함께하실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의로움이요, 고귀함이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기어 올라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분께서 권좌에서 내려오셔서는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친구라 해주신다고 해서, 내가 감히 그분의 진짜 친구라도 된 마냥, 건방진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기사요, 그분은 왕이십니다. 기사는 왕 앞에서 철저하게 예법을 지키며, 왕의 명령이라면 그것이 비록 기사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명예를 짓밟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에 의문을 갖지 않으며, 또한 담대히 그것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사는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분의 명령을 기다리며, 또한 그분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나를 일으켜주시기 전까지는, 감히 먼저 일어날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외"입니다. "경이로움"입니다. 사람으로써, 인간 존재로써, 절대자를 영접하였을 때의 "당연하고도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 경외를 완전히 다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값싼 "은혜"로 팔아넘기고, 개나소나 발품만 적당히 팔고 몇 푼 돈만 내면 마치 편의점에서 물건 사듯이 그분의 사랑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말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진실로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이제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 앞에서 전율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나의 존재 전체를 완전히 압도하는 감동과 기쁨과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무덤덤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타성적으로 젖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드리는데 무슨 그리도 복잡한 절차와 형식과 구절들이 필요합니까? 오직 단 하나만 있으면 족합니다 : "하나님",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기도는 충분합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주(主), 그리스도, 성령....... 이 하나의 단어로도 묵상은 충분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복잡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혼이 홀로 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묵상의 형식과 절차가 복잡하다는 것은,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섰을 적에 변명을 늘어놓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그 앞에 섰을 적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직 한 마디만을 되뇌이게 됩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나의 주(主)......" 그 외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곧 신성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이름"은 결코 세속의 다른 언어들과 같지 않습니다. 신의 언어, 신의 이름은 그 자체로 성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담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언어로 말미암아 그분을 가리킬 적에, 언어는 그 자체로 "실체변화"합니다. 언어가 곧 신성이요, 말이 곧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언어와 말이, "경외하는 자"의 영혼을 통하여 흐를 적에, 그것은 곧 물질세계 전체의 힘과 에너지보다도 압도적으로 더 높고 강렬한 "빛"이 됩니다. 그 빛이 어두움을 비출 적에, 감히 그 어떤 어두움조차도 그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그 한 음성만으로 천지의 혼돈과 흑암을 한 찰나에 평정하신 분입니다. 너무도 평온한 한 음성만으로요.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이 그분을 "가리키는" 신의 언어를, 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 적에, 그리도 오만방자하고 나태하고 게으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그리도 무슨 술자리에서 친구 이름 부르듯이 함부로 망령되이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너무도 명증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은 영혼이, 그 이름 앞에서, 존재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는 압도적인 경외를 통하여 예배드리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의 언어입니다. 이것이 없는 한, 믿음은 그저 공허할 뿐이며, 신앙은 그저 자기 기만일 뿐입니다. 핵심은 "경외"입니다.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이란, 자기 존재 전체가, 자기의 영과 영혼 전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 앞에서 엎드려 어쩔 줄 모르는 바로 그 설명할 수 없는 심장의 떨림이며, 그 떨림 가운데에서의 두려움이며, 또한 두려움 가운데에서의 존경과 감동과 기쁨인 것입니다. 그분 앞에 섰을 적의 그 영혼의 고유한 떨림을 옮길 수 있는 적당한 말과 언어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명확한 기준입니다. 절대 오해할 수가 없는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나의 영혼이 실체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체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도 귀에 못딱지가 앉히게 반복해서 들은 탓에 무덤덤해져서는 안 됩니다. 실체변화, 라는 말입니다. 그리도 처절하게 죄성에 농락당해왔던 나의 영혼이, 마침내 그분 안에서 "온전하여짐을 허락받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번데기 안에서의 그토록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한 끝에, 그 허물을 찢고, 그 이전의 모습을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그 순간을 볼 적에 영혼 전체가 천둥처럼 울리는 그 압도적인 감동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이, 그저 무덤덤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너무도 절실하게 증거하고 싶습니다.


신앙은 결코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능숙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익숙하고 능숙하고 전문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영혼들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이름을 영접하는" 자녀들에게 평등하게 약속된 것인 바(이 자체도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 줄 아셔야 합니다, 체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영으로서 온전히 영접한 자는, '아들'이라는 칭호는 오직 그분께만 허락된 것이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온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사, 그토록 고귀하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권세를 '그 이름을 믿는 자'라는 너무도 쉬운 자격 하나로써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주셨음을, 그 압도적인 사랑과 은혜를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기쁨"은 오직 외아들께만 허락된 것입니다.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강물 위로 올라오셨을 적에, 하늘로서 큰 음성이 들리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하셨으니, "사랑받는 아들"이 되는 권세는 믿는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되, "내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는 것...... 이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감동인지 아십니까. 그분께서 나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 크게 기뻐하셨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내 영혼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생명이 되어, 나의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여 나아갈, 그러한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직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로 인해서만 "기뻐하십니다." 이는 더 이상 나의 뜻을 구하지 않음이요, 나의 이름으로 살지 않음이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살고, 그분의 뜻을 내 뜻으로 삼으며, 또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짐을 나의 뜻이 이루어짐보다 더 크게 기뻐하는 자, 그리하여 육적으로 아무리 가난하고 외롭더라도 오직 그분께서 동행하심으로 인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자, 누구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분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살아가고 증거하는 자, 그러한 자......


신앙이 익숙하지 않고 절실한 자.

신앙이 능숙하지 않고 간절한 자.

믿음이 전문적이지 않고 가난하고 순결한 자.


그러한 자들에게만, 그분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곧 신앙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나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만을 또한 내가 기뻐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믿는 자 모두에게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것에 안일하고 교만하게 머무를 생각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보다 가장 먼저, 가장 외롭게,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던 외아들께서 어떤 모범을 보이셨는지, 를 말입니다. 내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한가운데에서, 자기를 대할 때, 남들을 대할 때, 세계를 대할 때, 삶을 대할 때, 그분이라면 과연 어찌하셨을 것인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또한 미약하고 가난한 수준이나마 그분을 경외하고 사랑하여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기를, 단 1%라도 흉내내고 모방할 수 있기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리면서, 가장 두려운 순간에서조차도 홀로 외롭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던 그 마음을 닮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리 희생하고, 그리 헌신하고, 또한 내 의로움을 자랑하지 않으며 매 순간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으로 인하여 깊이 부끄러워하고, 회개하고, 낮아지는 것으로 인해서만 기뻐하면서......


이리 사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넘치도록 과분한 자격을 감히 엎드려 받을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이 되며, 이것이 삶의 방식이 되며, 이것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가,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또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영혼으로의 실체변화를 허락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주님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만을 느끼는 법입니다. 그분께서 "아들"로 칭함을 받으신 바, 그분께서 그토록 잔인하리만치 무거운 십자가를 어떻게 끝까지 짊어지셨는지를 오늘날 우리는 방구석에 편안히 앉아서는 훤히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탓인지, 그분께서 짊어지신 그 십자가의 무게에 비하면 "5성급 호텔에서 편안히 숙식하면서 호화롭게 치른" 과분한 나의 시험, 이까짓 시험을 통과하였다고, 감히 그분 앞에서 그분과 '동등해진 척', '의로워진 척', '고귀해진 척'을 하려 듭니다. 그 아찔한 죄성을 나는 오늘도 내 안에서 넘실거리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처음으로 길을 걷는 자"의 무게를, 뒤이어 그 길을 편안히 걷는 누구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 심정을, 그 외로움을, 그 쓸쓸함을, "너희는 어찌하여 나와 단 한 시간도 함께 깨어 있을 수가 없더냐"(마26:40)고 하셨던 그 심정을...... 그분 곁에서 어마어마한 특별한 은총을 넘치도록 받은 제자들조차도 차마 헤아리지를 못하였는즉, 하물며 더 이상 신앙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질 일조차도 없는 오늘날의 시대에 태어나서는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이, 자기더러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칭해도 아무도 죽여 없애려 들지 못하는 이 편안한 세상에서 태어난 자들이, 어찌 그 앞에서 당당할 수가 있는지, "스스로 의로워할 수 있는지", 참으로 서글픈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빚입니다. 본래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의 압도적인 무게를, 그 권위를, 감히 조금이라도 짐작해본 바가 있는 영혼이라면, 그분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지를 실감할 수가 있는 법입니다. 원래는 오직 그것은 그분께만 허락된 일입니다. 저는 그 이름을 결코 함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분"이라고밖에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내 이름을 믿는 자, 나를 사랑하는 자, 내 말을 지켜 행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다 그 엄청난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단 말입니다. 그 증거가 되는 말씀이, 이리도 버젓이 명시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그분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끼며, 또한 그분께서 그 부끄러움을 크게 기뻐하사 그의 안에 거하시며 그와 거처를 함께하시니, 그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며, 사랑으로 사랑 안에 거함이 더욱 깊어지게 되니, 마침내 부끄러움은 열망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불가능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


저는 제대로 배운 바가 없는 고로 이 말씀의 교리적, 신학적 의미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며, 허락되지 않은 것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제게 허락된 것은,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한 말씀이 얼마나 인간 존재에게 압도적인 희망이 되는지를, 구원의 희망이 되는지를, 부활의 희망이 되는지를...... 그 빛 앞에 서본 자의 날 것 그대로의 감동과 기쁨을 온전히 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능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만을, 간절하게, 절실하게 증거하고자 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3)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변명과 핑계를 위하여 조건과 형식과 절차를 따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그저 사랑할 뿐입니다. "사랑"과 "사랑함"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사랑과,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사랑은 관계적 계약이요, 사랑하는 것은 그 계약에 대한 책임의 이행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였으므로 말미암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분의 자녀가 된 것은, 결과는 같을지언정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께서는 물론 전자도 사랑하시겠으나, 오직 후자로만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내가 그분께 기쁨이 되었음을 알았을 적에, 그 음성을 들었을 적에,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절대적인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주는지는...... 오직 그 사랑 안에 직접 거하는 자들, 나의 형제들만이 공감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명증적으로 선언하십니다 : 그분의 자녀가 되는데는, 육적인 그 어떤 조건도 자격도 다 필요 없다, 는 것을요. 하나님께서는 혈통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핏줄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외모가 잘생긴 것도 못생긴 것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마음이 밝은 것도 우울한 것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영혼이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상태"와 "현상"은 모두 다 육적인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직 하나, "의도"만을 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 그리하여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자. 나의 모든 순간들로 인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는 자. 또한 자신은 낮아지고 쇠하여지고 잊혀지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자. 그러한 마음이 있는지만을 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되는 조건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 어떤 육적인 조건도 자격도 제한도 없는 까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그 어떤 조건도 자격도 제한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께서 언제 오시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더 이상 "어디에" 그분께서 계신지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머무르는 모든 곳마다" 나와 함께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더 이상 "어떻게" 그분을 만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인하여 사랑 안에 거하니, 그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구태여 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다 이 고유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무엇으로 인하여 기뻐하실지, 그리고 무엇으로 인하여 슬퍼하실지를...... 그것을 곧바로 듣고, 영접하고, 순종할 수 있는 이 고유한 감각 말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행동만을 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선택만을 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고 또한 죽고자 열망하는 바...... 사랑에는 그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니, 사랑에 제한이 없듯이 자녀가 되는 데에도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여야 합니다. 지상의 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나를 봅니다. 나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손쉽게 나를 비웃고, 모욕하고, 침을 뱉으며, 조롱하고, 멸시하며, 자기의 우월감과 교만함을 위하여 나를 아무렇지 않게 희생해버릴 것이며, 모든 상처와 슬픔은 내게 다 뒤집어씌울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다릅니다. 그분은 그 어떤 것도 다 보지 않으시되, 오직 하나,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가?" 그 하나만을 보실 것입니다. "사랑", 이 하나만을 보실 것입니다. 그분 자신께서 곧 자녀들을, 온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매우 어려운 자격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육적인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더라면 쉬울지도 모릅니다. 고시공부하듯이 시험공부라도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흉내낼 수도 모방할 수도 훔쳐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준을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교만함과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을 제치고 일등하려고 신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닮아가는 바, 내가 기꺼이 마지막이 될 터이니 다른 이들을 앞으로 세워 주시라고 그리 기도하게 됩니다. 남들을 비웃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들을 대신하여 벌을 받겠사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라고 그분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다른 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을 그 위에 올라타서는 비웃을 것이 아니라, 묵묵히 그의 곁에 가서 함께 십자가를 들어주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그 어떤 "외적인 자격, 육적인 자격"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건다고 해서 크리스천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증거는, 우리의 심장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있습니다. 오직 그분을 사랑하여, 평생에 걸쳐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을 증거하며, 그분과 동행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 하나만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유일한 증거이며, 이 증거는 온 세상이 다 모르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증거이되, 지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나 마침내 하늘로 돌아가서는 그분 앞에 섰을 적에 그분께서 이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의롭다 하실 것이며, 기쁘다 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막연하고 두루뭉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체변화", 믿음으로 인하여 실제로 나의 영혼이 변화하고, 실제로 나의 존재가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 거듭남이 점차 나의 삶의 외연을 물들여가매, 평생에 걸쳐서 이를 완성해나가는 것, 이것이 신앙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서 내 영혼 안에 실재(實在)로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홀로 외롭고 쓸쓸한 짝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온전하고 순결하게", 실체를 완전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변화된 영혼을 거처 삼으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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