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시니
세속의 사람들은 "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1. 신은 저 하늘 위에 있는 절대자, 초월자이며, 인간과 세계를 심판하는 존재이다.
2. 신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있다.
3. 신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며, 나의 기도와 청을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사실, 종교나 영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의 저를 굉장히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저의 언어들은 기독교인의 그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데도, 저는 저 자신을 "기독교인이 아니다"고 선을 그으며,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청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이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진다면 본격적으로 자세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겠지만, 저는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들을 신성시하지 않으며, 그저 온전한 "나 자신"으로써 신을 마주하고, 신 앞에 섭니다. 저에게 있어서 종교와 교리와 신학과 전통과 계파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한 영혼을 신에게 이끌고 인도하는" 수단, 방편으로서만 유효할 뿐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틀렸습니다. 신은 특정 종교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바로 그러한 죄악적 인식과 사고방식이, 지난 역사를 통틀어 끔찍한 살육과 학살을 낳았음을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자신들만이 신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며, 자신들의 율법과 교리만이 신의 뜻이니,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탄압하고, 억압하고, 심지어 거리낌없이 "심판"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아시겠지만, 심판이란 오직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자 외아들이신 분께만 그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기독교란 본래는 그리스도교로써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현하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과 그 정체성을 의미하는 고귀한 언어였으나, 그분께서 승천하신 이후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들은 "신의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죄악들을 무수히 많이 지은 바, 하나님 앞에서 인류 전체가 갖는 죄의 무게는 감소하기는커녕 오늘날의 시대에서 그 무게가 절정에 달해 있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은 차라리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를 용서받겠으나, 신을 믿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 신을 따르고 섬기는 자들은 그 집단적 죄의 무게 앞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공동의 책임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마음가짐과 태도를 지녀야 하며, 또한 그분께 올바르게 나아가며 그분과 올바르게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하지 말며, 오직 성령께로 직접 인도받아야만 합니다.
인류가 신에 대해서 갖는 오해들은, 뒤집어 말하자면, 또한 "참된 하나님(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낳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나" 중심의 사고방식, "집단"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지식과 관념과 인식과 분별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이 그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삶의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죄와 악들을 모두 감춘 채로 깨끗한 의복을 입고 경건한 척 성례에만 참석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다 해결된 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가장 처참하고 처절한 자기의 죄와 악과 상처와 슬픔들을 모두 고스란히 안고서 그분 앞에 나아가며, 또한 가장 "못생기고 처절하고 간절한" 모습으로 그분께 메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그럴듯해 보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경건하고 의롭고 화려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은 오직 간절하고 절실해야 하며,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의 가난함과 낮아짐과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과 그 앞에서의 나의 진실한 아픔과 슬픔과 눈물로 인한 것입니다. 그 어찌할 수 없는 처절한 심정으로 인한 것입니다. 간절하지 않다면, 하나님께 대한 오해를 해소하려 하지 않습니다. 굳이 무언가를 탐구하려 하지 않고, 찾으려 하지 않고,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자는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찾고 구합니다. 무엇을 찾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 그저 심장이, 영혼이, 절실히 이끌리는 대로 그리 나아갑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어디에 계시는지,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그 모든 것들은 사람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지식이 담지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갔을 때에만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이며, 참된 가르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오해 너머에 계시는 진실한 하나님은, "그리스도 하나님", 내지는 "그리스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본래 기독교의 가장 아름다운 진리였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이 만든 집단과 세력과 계파와 전통과 교리와 신학들이 그 본래의 진리의 아름다움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마23:13,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님께서는 "조건과 형식"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으뜸 가는 계명(마22: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이라 하셨으며, 오직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만으로도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다(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중 어디에도 "특정 교회와 종교와 집단과 계파에 속해야만 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 참된 하나님, 그리스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감히 밝히어 말하자면 :
1. 하늘의 권좌에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다스리시고 심판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사 세상과 자녀들 곁으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신 분.
2.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사람들 가까이로 직접 내려가셨으며, 하늘의 모든 비밀들과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말씀들을 다 나누어주셨으며, 그럼에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자 친히 십자가를 지셔서 그들의 죄를 대신 해결하시고 완전한 길을 열어보이신 분.
3. 자녀들을 사랑하여 죄와 악을 직접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대신에, 자녀들의 곁에서 모범을 보이시고 희생을 보이시며, 다만 자녀들이 스스로 성장하여 구원의 길을 걷고 하나님께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하여 그 모든 과정들을 조용히 함께하시는 분.
4. 절대자, 초월자, 심판자로만 계시지 아니하시되 각 사람들의 영혼을 성전 삼으셔서 가장 은밀한 성소 가운데에 거하시며, 그들과 "거처를 함께하시는" 분.
이것이 세상이 모르는, 또는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는, "참 하나님(신)"의 실체이십니다. 믿음의 형제들은 당연히 눈치채셨겠지만, 참 하나님의 핵심은 바로 "성육신", 즉 십자가 부활의 대속과 중보의 교리입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믿음을 통하여 믿는 자의 영혼 안에서 "실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완성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인 하나님"을 이해하고 또한 내 안에 모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열쇠, 곧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교리는 그저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믿음과 신앙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한 그것을 믿음으로써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 물론 저의 배움이 무척 짧고 아는 바가 적고 생각이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증언하자면, 이것은 인류 역사의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신"은 그저 머나먼 하늘에 계신 분, 초월과 영원과 불멸로써 계신 분, 인간과 관련이 없는 분, 하늘에서 세상을 창조하고 심판하고 다스리기만 하는 분, "무섭고 두렵고 알 수 없는 분",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신은 언제나 심판과 징벌의 신이었으며, 신의 분노를 "달래어 드리기 위해" 인간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인류의 원형상징이라고 해도 될 만큼, 인류가 하나님을 대하는 "두려움 중심적인 사고의 틀(오해)"은 우리들의 DNA에 새겨져 있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적 하나님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 가까이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함께하시는" 분이시며,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가능케 된 일종의 "혁명적인 신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성, 이라는 것은 "신께서 드러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할 때, 모두가 같은 하나님을 만나뵐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하시고 인간은 불완전하여, 인간은 극히 일부분만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분만을 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빛"에 가까운 신성, "사랑"에 가까운 신성, "생명"에 가까운 신성을 보아왔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동일한 하나의 실재를 증언하고 보고해왔으며, 이것을 통하여 바로 "그리스도적인 하나님",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신성"이 오늘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소중한 "영적인 유산"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선명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며, 믿는 자, 원하는 자, 구하는 자로 하여금 누구라도 예외없이 다 신성 안에 동참하여 하나될 수 있도록 "실제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정형화된 방식"대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분과 교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고 참된" 신성을 영접함으로써 그분께로 나아가는 "원형적인 진리"는 존재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소중한 원형적 유산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를 넘어선 것이며, 종교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 이것은 인류 보편에게 열어주신 그리스도의 신성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이고 경이로운 유산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영혼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며, 매우 빠르고, 효과적이고, 직관적이며, 그 무엇보다도 높고 완전하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논증이나 토론이나 증명 가능성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높고 완전한 길이 있으며, 그것이 실제로 완벽하게 작동하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뿐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도 풀어야 할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순서대로 접근하면,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문자주의'입니다. 이것은 언어와 말의 개념에 대해서 우선 이해해야 하는데, 물론 이것만으로도 책이 여러 권이 필요하겠으나 반드시 필요한 핵심적인 것부터 접근해보겠습니다.
"언어"와 "말"과 "글자"는 제각각 다릅니다. 언어라는 것은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흔히 문장 구조, 라고 할 때의 그 구조입니다. 구조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즉, 나의 의식과 정신의 틀 자체가 이미 "언어"라는 보이지 않는 구조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법'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문법은 서로 다르고, 따라서 이 구조의 차이가 한국인과 미국인의 "의식 구조"의 차이로 이어지며, 이것이 사고방식과 행동과 태도와 감정과 집단성과 더 나아가 국가 전체의 본질적 특성으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언어란 구조입니다. 구조는 "입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평면적인 것, 수평적인 것입니다. 말은 "시간의 흐름"의 순서대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내가, 밥을, 먹었다." 이것은 구조라기보다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펼친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유심히 잘 관찰하면(소위 "현상학적"으로 탐구하면), 말을 하기에 앞서서 내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에 "내가 밥을 먹었다"는 음식물 섭취의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 는 '개념'을 상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 그러니까 "말로 구현되지 못한 무의식적인 의도" 자체는 아직 언어라는 입체 구조 안의 어딘가에서 머무르고 있는 혼돈의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것을 "말"이라는 규칙에 의해서 "일직선상으로" 펼침으로써, "시간의 흐름"에 의지하여 서로 표현하고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가 의사소통이라 부르는 것은 서로의 의식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도'를 직접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각자의 의식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언어와 말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원격으로 상호 해석을 주고받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더 쉽게 말해서, 딱히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여 서로 마음이 통하는게 아니라는" 거죠. 그냥 컴퓨터가 데이터를 처리하는 과정과 우리가 언어와 말로써 의사소통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언뜻 듣기에 좀 어려울 수 있는데, 영적 수행을 통하여 의식이 깊어지고 열리게 되면 이 말 자체의 뜻을 체감하게 됩니다. "존재와 존재가 직접 연결되고 교감하는 것"은 영과 영혼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언어와 관념 그리고 자아와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글자라는 것은 이 "말"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시하도록 정한 규칙, 또는 문자 그대로의 글자 자체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나열한다면 :
입니다. 언어가 100이라면 말은 10이고, 글자는 1인 셈입니다. 글자 안에 말이 전부 담기지 않고, 말 안에 언어가 전부 담기지 않으며, 언어 안에 사람의 의식과 정신이 다 담기지 않고, 사람의 의식과 정신 안에 그의 영혼이 다 담기지 않으며, 그의 영혼 안에 그의 영(Spirit)이 담기지 않고, 그의 영 안에 성령과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이 다 담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더 열등한 것으로는 더 크고 높은 것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고전15:50,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성육신은 오직 법칙과 원리 전체를 초월하여 계신, 창세 이전부터 계셨던 분(Ancient One)께서 스스로 "친히 자기를 낮추셔서 모습을 드러내심"으로 인해서만 가능하였던 문자 그대로의 초월과 영원의 신비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나의 영과 영혼을 아득히 넘어서 계신 분께서, 나의 영과 영혼 "안에" 내주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은, 현현세계의 법칙과 원리로 해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단순하게 "말씀"을 "글자", 내지는 "말" 정도로 이해합니다. 성경에 쓰인 물리적인 "글자" 자체, 그리고 그 글자를 소리내어 읽고 머리로 이해할 때의 그 "내용물"을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쓰인 글자는 곧 "말"을 담고 있고, 말(내용)은 곧 언어(의식 구조)를 담고 있으며, 언어는 곧 "보이지 않는 실재(신성, 생명)"를 은유(언어는 신성을 직접 가리키거나 담지할 수 없으며 다만 간접적으로 은유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서는 사실face보다 은유가 절대적으로 더 높습니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의 오류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내용"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이 본질은 바로 언어(의식 구조)를 통하여 현현된 "의지(WILL), 곧 언어화되기 이전의 언어화를 통하여 드러난, 드러나게 하신, 드러날, "힘(POWER)", 권세와 영광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것을 말로써 설명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에 쓰인 "글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말"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본질"이 무엇인지, 에 초점을 두고, 깊이 사유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묵상입니다. 말에 속지 않고, 그 말 너머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관한 첫째 오해입니다. 말씀은 내용(말)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통하여 현현되는 "보이지 않는 실재(신성, 생명)" 그 자체, 입니다. 말씀은 곧 신성입니다.
이어서 축자영감설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접근이 가능합니다. 성경 전체가 "동일한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니, 성경의 모든 책들이 다 같은 권위를 지닌다, 는 뜻입니다. 다만 이 말 자체에 전제된 개념들을 신중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씩 살펴본다면 :
1. "영감"이라는 건 문자 그대로 영(Spirit)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은 언어, 관념을 통하여 형성된 의식 구조(소위 '에고', '마음'이라 불리는 것)보다 "명백히 더 높은" 차원입니다. 따라서 영감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직접 교제입니다. 고로,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를 통하여 의식 구조 안으로 내려오고, 그것이 다시 말(글자)을 통하여 쓰여지는 "열화"의 과정에서, 명백히 "불완전성"이 드러나게 됩니다("시차"가 발생한다, 고 이해하시면 아마도 쉬울 것입니다).
2. 따라서 "보이지 않는 실재"로서의 말씀(신성)을 "드러내는 힘"이 바로 의지(WILL)이며, 이것은 곧 인격으로 말미암게 됩니다. 이 인격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에 따라서, 인격을 따라서 의지가 말씀을 현현케 하는 정도가 명백히 차이가 납니다. 쉽게 말해, "죄 없는 완전한 인격"으로 오신 예수님의 의지를 통하여 현현된 말씀(신성)과, "(아무리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 하더라도)불완전한 인격"으로써 말씀을 언어와 말과 글자로 받아적은 것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차이로 인한 것입니다.
3. 따라서, 말씀의 "권위"라는 것은 그저 높다, 낮다, 의 차이라기보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것", 곧 밀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통로를 통해서는 불완전한 신성만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오직 완전한 통로(인격)를 통해서만 완전한 의지가 발현되며, 완전한 의지를 통해서만 완전한 말씀의 선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권위란 곧 "힘"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때의 힘은 당연히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다음과 같은 순서로 말씀이 "계시"됩니다 :
이때, 힘이 없다면 아무리 의지와 인격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의지는 곧 그분의 힘 그 자체입니다. 근원이 되는 "힘" 자체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결국 언어나 말이 사람 눈으로 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해 보인다 하더라도 실재가 되는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나머지 저자(예: 성도들, 선지자들, 예언자들)들의 인격은 명백히 차이가 있습니다. 나머지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힘에 의지하였으되 그 힘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써, 그분의 의지는 곧 그분 자신의 힘(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인격을 통해서 드러난 말" 사이에는 권위(힘)의 차이가 나며, 그것도 "압도적으로" 납니다.
이것은 발현의 역순으로 접근해도 동등한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만, 즉 글자와 말로만 달달 외우고 또 머리로만 말씀을 되풀이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아주 단순합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소위, 복음의 성취(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이 모든 것들은 명백히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선은 말과 언어를 통하여 학습함으로써 나의 의식 구조를 "재구성"하는 지속적인 훈련을 반복하되,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드러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기도는 더 이상 "말"로만 되풀이하는 형식에 멈춰서서는 안 되며, 자기의 삶과 일상 전체에서 드러나는 "존재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글자와 말에 집착하면", 이것이 언어(의식 구조)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나"라는 인격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며, 이것은 곧 "나의 의지"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바로 "1인칭 능동태"의 죄성을 강화하는 "어두움(죄)의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존재를 그 역순으로, 다시 말해 "신성한 수동태"로 작동케 하는 훈련입니다. 아주 지독하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훈련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렴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하지 말라"니, 그렇다고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라는 뜻입니까? 기도를 하든 뭘 하든 일단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 "행위" 자체가 능동태라고 하니, 미칠 노릇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과정입니다. 에고라는 "의식 구조" 자체가 박살이 나는 고통, 성장통, 부활전야(復活前夜)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자기 자신 안에서 직접 성령의 음성과 가르침을 듣는 것 외에 타인의 그 어떤 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이것을 대신할 수 없으며, 대신 이루어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굳이 조언한다면, "~하려는(능동)" 의도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이루어지는(의지; WILL)" 신성한 수동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능동으로 인합니다. 그러므로 수동을 체현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에 맞먹는 존재론적인 고통을 겪게 합니다.
말씀을 "영접"한다는 것은, 정확히는 다음의 단계를 거칩니다 :
1. 그리스도의 신성(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완전하게 현현하시는, 아버지와 하나되신 근원적인 힘)
2. 의지(WILL) ; 신성이 존재 안에서 스스로 드러나고자 하는 운동, 움직임, 신성한 의지.
3. 영감(靈感)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의지를 나의 존재의 영(Spirit, 靈)이 "느끼는(感)" 것.
4. 감응(感應) ; 1-2-3을 통하여 드러난 "빛"을 나의 영혼(Soul)이 체험하고 받아들이고 공명하는 것; 상위 감정 ; 감동, 경외, 경이로움, 기쁨..... 등.
5. 이해 ; 말씀이 실재가 되어 내 안에서 "새로운 차원의 의식 구조"로 완전히 전환되는 것.
6. 연합 ; 그리스도와 나의 존재가 실재적으로 "하나됨."
이때, 1-2는 "위",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영역이며 우리가 이해할 수도 직접 만나뵐 수도 연결될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믿는 자들은 말씀을 접할 적에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요한복음의 내재적, 초월적 말씀들에 관한 한, 애초에 이해도 불가능하고, 이해가 곧 "변화"를 낳는 것도 아닙니다(물론 그렇다고 머리로 하는 공부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머리로 하는 이론 공부는 당연히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영접"과 "감응"만이 가능합니다. 말씀을 내 안으로 모신다는 것은 바로 이 단계, 곧 3-4의 단계입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요4:24)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곧 나의 영과 영혼으로써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하게 되면, 5-6의 과정은 내 안에서 부활하사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하시는 그리스도의 칙령에 의하여 성화의 흐름과 단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말씀을 영접한다는 것은 대략 이러한 과정을 거칩니다.
머리(이성)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글자나 문자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공부의 바탕일 뿐이며, 기본일 뿐이며, 출발선 앞에 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대부분 "특별히 머리 써서 이해"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들이며, 개념적으로 그저 당면하고 읽는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라는 뜻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문자 그대로, 살아서, 그분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여기에 무슨 "감추어진 신비스러운 비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육을 통하여 드러나지 않는 특별한 분리된 영의 차원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비록 글자(말) 자체는 그분의 신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긴 하지만, 그 말 자체가 결국 그리스도의 의지와 인격을 통하여 완전하게 계시된 것이므로, 여타의 "말들"과 달리, "영접하는 자의 영과 영혼"으로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시차"의 불완전성을 넘어서 믿는 자의 안에서 그 말씀이 실재가 되고 생명이 되고 의지가 되어 영원히 그와 함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신비입니다. 영접하는 자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산, 곧 "새 언약"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개념으로 지식으로 이론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왜냐하면 개념적으로는 말할 게 없으니까요), 이성과 합리성과 논리로는 더 이상 드러내어 밝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 건넌 자"로써 증거하건대, 이것은 명백히 "실재적인" 것입니다.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관념의 일부를 통하여 드러나되, 영접하는 자 안에서 실제로 살아 숨쉬는 영원한 빛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형제들에게 한 가지의 실효적인 조언을 감히 드린다면, "영접"의 기준은 개념적 이해에 있지 않습니다. 개념적 이해는 영접의 자격에서 아무리 잘 쳐줘도 10% 미만을 차지할 뿐입니다(사실 엄격한 순수주의자가 본다면, 너무 많이 쳐줬다고 비판할지도 모릅니다). 영접의 결정적인 기준은 오직 4(감응)가 이루어지고 있느냐, 의 여부에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감동이 아니라, 적당한 인간적인 그런 감정이 아니라, 나의 존재 전체를 압도적으로 뒤흔드는 "천둥"과도 같은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감동으로써 말씀의 "하나"만을 영접한다면, 그 하나로 말미암아 나머지 전체를 다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한 말씀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신성과 연합하는 순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나머지 모든 말씀들은 자동으로 영접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접의 핵심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항상 목적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자각하고 있어야 하며, 의식의 초점이 선명해야 합니다. 이 "감응"을 열게 하는 말씀들은 각자마다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이는 각자의 영혼의 고유성으로 인합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저의 경우에는,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라자로야 나오라 부르시니"(요11:43)에서, "나오라"는 이 너무도 짧은 단 한 말씀이 재게 너무도 크게 와닿았습니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서 그 무덤 앞에서 그분의 음성을 선명히 듣는 듯했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나의 영이 영접하매 곧바로 깨달은 바 ;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완전하게 드러내시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나오라'의 음성이 현현우주 전체를 진동케 하매, 죽은 자의 육신과 영혼이라고 하여도 감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불러내셨습니다." 저는 여전히 왜 이 단순한 한 음성에 아직도 이리 감동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개념으로는, 지식으로는, 이성으로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나의 영혼이 이 한 말씀에 경외하고 감동하며 기뻐하는 이 고유한 "감각"을 너무도 선명히,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증거하는 자의 인격이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명확한 설명은 하지 못하되, 그저 영접이 저에게는 이와 같았음을 고백합니다.
첨언하자면, "신비 체험"이 아닙니다. 무슨 특별한 환시를 보거나, 꿈속에서 계시를 듣거나,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에 대한 집착이 낳은 망상이며, 이 집착은 "평범한 자기 자신은 곧 열등하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열등감, 죄의식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마음은 그저 어제와 같은 내 마음일 뿐이고, 생각, 감정, 전부 다 그대로입니다. 다만, 어느 순간, 내 마음이 평상시보다 더 고요해지고 충만해지는 그 은밀한 소리 없는 순간에, "나를 넘어선 무언가"가 내 마음을 통하여 흐를 적에, 그것을 나의 의식이 깨어서 고요히 몰입하고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문득 감동이, 경외가, 경이로움이, 기쁨이, 열망이, 증거가, 고백이...... "나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알게 됩니다. 그 흘러나옴이 무척이나 자유로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내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영의 고유한 감각"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에만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언어와 지식과 말로는 그분을 "알" 수만 있을 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다음의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
1.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가리키시는 것. 이때의 육신은 "죄 없는 완전한 인격"이신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하게 현현하신" 그리스도의 신성, 곧 아버지와 하나되셨으며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성취하신 바로 그분의 "실체"가 지상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2. 그리스도의 신성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의 내면에서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것. 이때의 육신은 곧 "내재적 신성"이 됩니다. "너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이라 하실 때, "몸"은 그저 육체(물질적 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유물론적 사고", "물질주의적 사고"에 길들여진 나머지, 몸(물질성)의 진정한 실체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 않는 실체"로써 나의 삶과 일상과 현현우주의 시공간 전체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 이것은 훨씬 포괄적인 차원에서의 이해이며, 이때에 바로 "삶이 곧 예배이며, 세계는 곧 성전"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때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이면서, 엄밀히는 성령을 통하여 성자를, 성자를 통하여 성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말씀이 육신이 되어)은 결국 "성육신"의 교리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본질적인 진리이자,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 그 자체이며, 단호히 말하건대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는 제도적인 의미이든 본질적인 의미이든 간에(오히려 후자 쪽이 더욱 엄격히)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저 초월적인 신으로써 하늘에만 계신다고 믿을 것이라면, 여타의 다른 종교들과 같이, "하늘에서 그저 인간과 세계를 다스리고 심판하고 벌주기만 하는" 인류의 오랜 오해와 망상 속의 신들에 대한 그릇된 신앙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적인 하나님"의 핵심은 결국 성육신에 계십니다.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관점에서는 서로의 길이 다를 수 있어도(이 때문에 저는 저 자신을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 칭합니다), 성육신 자체를 부정하거나 믿지 않는다면(이때의 믿음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를 넘어서 '영으로 영접하고 영혼으로 감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존재와 삶을 통하여 보여주신 그분의 "아버지"를 우리가 만났다고 결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매우 입장이 단호합니다. 첫째,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며, 둘째,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는 외려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셋째,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임재하고 역사하지 않으시며, 넷째,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는 교회 안이든 밖이든, 기독교 안이든 밖이든 간에, 자신을 '그리스도인' 내지는 '기독교인'이라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다섯째,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는 모든 신앙생활을 헛되게 한 것이며, 여섯째, 성육신에 대한 불신(믿음이 없는 상태) 자체가 곧 신앙(영적 성장)의 결실과 결과로서의 "열매"입니다.
물론, 저는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서 이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기존의 기독교의 그것과 상당히 달리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 브런치북을 참고해주시기 바라며, 지금은 지면상의 한계로 저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서는 추후를 기약하겠습니다.
이 성육신에 관해서 또 하나 이해해야 할 것은, 성육신 자체가 여타의 교리들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 전체가 이 "성육신"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적인 하나님"은 바로 다음의 "진리의 삼각형"을 통하여 현현됩니다 :
1. 삼위일체 하나님 : 성부(초월과 영원으로서의 근원) / 성자(신성의 현현) / 성령(통치하시는 신성)
2. 성육신 : 성부 하나님께서(초월과 영원) →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시고 뜻을 완성하셨으며(신성의 현현) → 이를 성령께서 이끌고 인도하고 이루신다(신성의 보편, 내재, 초월적 연합).
3. 복음 :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은 설명을 위하여 대략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전체가 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드러나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며, 그 전체가 다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고정된 채로 영원히 계시는" 것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로써 "운동"하시고 "영원히 순환"하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복음은 "하나의 진리"를 완성합니다. 이 하나됨 안에 사람이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매우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이때, 성부 하나님께서 "천상에서 즉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으신 것"은, 자녀들을 사랑하사 자녀들에게 복종이 아닌 순종의 기쁨을 선물하시려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서 그분의 권세와 영광을 "심판하고 징벌하시는데" 쓰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셔서 사람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내시어" 친히 구원의 길을 인도하시고 또한 그분 자신이 길이 되시고자 한 데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육신의 말씀의 첫번째 의미가 드러납니다. 즉, "예수님이라는 완전한 인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완전하게 현현"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각 사람들이 믿음을 통하여 누구라도 다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육신은 이 점에서 "필수 불가결한 근원이자 핵심"이 됩니다.
또한, 성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완전하게" 현현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은 곧 부활하신 영화롭고 신령스러운 몸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들과 "실제로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내재성", 내 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것이 됩니다. 교리를 그저 지적인 동의로만 믿을 적에는 아직까지 성육신은 수천 년 전의 특정한 시공간 상에서 일어난 사건에 불과하지만, 교리를 영과 영혼으로서 영접하여 하나된 자는 그의 내면에서도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며, 그의 영이 그분께 주권을 스스로 넘겨드리니, 그분께서 그의 안에서 "왕 중의 왕"으로써 권좌에 앉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진리가 "실제로 작동"하게 되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역사"로 인한 것임을 믿는 것이 신앙의 열쇠(ke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즉 그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거하시게 될 적에, 그는 "복음의 성취", 곧 구원을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하나되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삶과 일상의 모든 순간들마다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듣고, 아버지를 느끼며, 아버지와 교제하고, 아버지와 동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세번째의 의미입니다. "주께서 모든 순간마다 모든 곳마다 나와 함께하신다"는 진리의 완성.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서 드러나시고, 현현하시고,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고, 동행하시는, 이 "운동성"은 오직 성육신으로 인한 것이며, 이 성육신을 그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서가 아닌 영과 영혼으로 영접하고 하나가 될 적에, 믿음은 "신성을 내 안에서 작동시키는 열쇠"가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바로 그 열쇠입니다. 이것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그러니까 성자께서 성부와 완전히 하나가 되셨으며, 성자를 통하여 성부의 권세와 영광이 완전하게 드러나고 성취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영광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성취를 이루도록 허락받으니 이것이 은혜요, 이 은혜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 안에서 공평하게 모습을 드러내니 이것이 바로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적인 사유의 과정이 아닙니다. 실제로 수천 년 전에 특정한 시공간 상에서 죽은 자의 육신이 생물학적으로 부활했는가 여부는 본질이 아닙니다. 물론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은 신앙의 열쇠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만, 본질은 바로 "보이는 차원에서의 역사(부활)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의 역사(아버지와의 하나됨)가 이루어졌음"을 믿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이며,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연합, 하나됨"을 통하여 이 영적 역사가 나의 영과 영혼과 의식 안에서도 "실재"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은 신비이며, "초월"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성적 사유와 영적 연합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전자보다 후자가 압도적으로 높고 크고 완전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의 초반부 내용들은 신학적, 교리적,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 초기 단계들은 어느 정도 공부와 학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만 이 부분을 무사히 잘 통과할 수 있다면, 이후의 "은유"들은 믿는 자의 안에서 실재가 되어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그 "은유"들에 대한 넘치는 감동과 경외와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전히 한 개인으로서의 삶은 불안하고, 위태롭고, 하루하루 절벽 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언어를 통하여 진리를 증거하는 순간에서만큼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빛을 증거하고 나누는 사명에 몰입하고자 합니다.
글은 쓰는 자가 아니라 읽는 자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읽으시는 분들 안에서 진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