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시간, 영혼의 성숙함

높은 영혼을 경외하고, 낮은 영혼을 사랑하며

by 생명의 언어

의식의 초점이 자아(ego)에서 영(Spirit)으로 상승, 전환될 때, 일어나는 몇 가지의 변화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입니다. 지상의 시간은 선형적이고 객관적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며, 1초, 1분, 1시간, 하루, 한달, 1년...... 이 내면이나 의식의 상태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똑같은 흐름과 똑같은 길이로 적용됩니다. 이것이 세속에서의 시간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깨어날 때, 에고(몸)는 여전히 지상의 시간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의 의식은 영의 시간을 감지하고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때때로 깊은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통과할 적에, 오직 하나님과 그 자신만의 외롭고 은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할 적에, 그의 영이 깊은 성소에 은거하며 그 안에서 비밀스러운 의식을 통과할 적에...... 그 시기에, 하루는 1년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불과 2~3개월이 거의 수 년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육의 시간으로 수 년 전의 일들은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지며, 육의 시간으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등의 기억은 마치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천상에서의 하루는 지상에서의 1년, 이라고 은유해야 할까요.


이것은 "밀도"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자아와 마음은 언뜻 보기에는 주변의 사물이나 공간, 시간 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각"의 틀에 갇혀서는 관념에만 집착하고 있을 뿐, 주변의 에너지와 빛과 실재들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매우 둔감한 상태입니다. "사실상 잠들어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의식 상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깨어 있을 것"을 수많은 영성 전통에서 동등하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의식이 상승할 때, 영이 활성화될 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지나가지만, 동시에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의 밀도의 차이가 느껴지며, 시간의 "질감"의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시간은 훨씬 더 "천상"에 가깝게 공명하며 흘러가지만, 또 어떤 시간은 굉장히 "지상"에 가깝게 흘러갑니다. 어떤 공간은 빛이 충만하고 따뜻하며 신께서 은밀히 거하고 계시지만, 또 어떤 공간은 차갑고 공허하고 삭막하며 어둡습니다. 여전히 육적인 감각 자체는 똑같습니다. 똑같은 풍경,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오감입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감각 경험 너머의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육의 감각은 "내가 인식한다"의 능동태이지만(사실 이 자체가 망상에 가깝습니다), 영의 감각은 "나의 통제 너머에서 나를 통하여 불현듯 일어난다"의 수동태거든요. 이러한 "체험"들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믿음"을 형성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저 "물질세계"만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지금은 마음이 닫혀 있더라도 믿고자 하는 의지를 낼 적에, 성령께서는 적절한 때에 그를 위하여 "표증"을 선물하십니다. 그것은 주변에 말할 수 없는 굉장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에게는 도저히 절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만드는, 특별한 신호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하여, 한 사람은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신비체험"으로 말미암아, "어쩌면 하나님께서 '진짜로' 계실 수 있겠구나" 하는 무의식적인 "전환"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길을 걷는 사람들 열 명을 붙잡고 다음과 같이 물어본다고 가정합시다 :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요. 믿습니까?" 결과는 안 봐도 뻔합니다. 열이면 백,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요. 그들을 믿게 만드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옆에서 마법사가 그를 잠시 공중에 떠오르는 마법을 사용하면 됩니다. 자기 몸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공중에 떠오르는 체험을 한 사람은 혼비백산하면서, "강제로 믿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기도와 묵상과 찬양과 예배들은 바로 이 "은밀한 표증"을 허락받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나의 영혼을 잠시 공중부양시켜 주시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신비 체험들은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을 획득하거나 강화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 체험"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참으로 인상이 깊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하게 하시는 특별한 목회자 분께서 계셨다고 합니다. 그 자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느꼈는데, 단 한 명만 느끼지 못했답니다. 그 사람이 원래의 성격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예의바른 사람이었는데도, 그 날은 사람들이 아무도 못 나가게 문을 막고서는, "내가 체험하지 못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오늘 못 나간다"며, 울면서 간절하게 메달렸다고 합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여서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육의 관점에서 들으면 윤리, 도덕적으로 그 사람을 비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듣는다면, 그토록 합리적이고 예의바른 성격이었던 그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성령 체험 하나를 위해서, 그것도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면서, "창피를 당한다"는 것은......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먹는 것입니다. 에고에게 수치심과 억울함은 최악의 고통이거든요. "자기를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기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워지든, 얼마나 수치스럽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령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어쩌면 영영 그분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는 그 절실함 하나로...... 에고적인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의 감각으로, 그리고 "나를 통하여 들여다보시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 볼 적에, 이전과는 무언가 다른 것들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앙이 능숙하고 익숙한 자는 오히려 신앙이 가난하고 절실한 자 앞에서 부끄러움과 무거운 마음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누구의 곁에 계시는지, 어느 곳에 계시는지를 "직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을 적에, 그 순간에 그에게, 그리고 그 공간 전체에 그분께서 계셨음을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참 기묘하고, 말로 설명하면 굉장히 이상해지는 것들이지요. 나는 그토록 간절하고 절실하게 기도해본 적이 있었던가? 자기 체면이나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따위는 다 내던지고, 어떠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그리 메달려본 일이 있었던가...... 흔히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합니다. 그것은 주로 의롭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을 향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사실은 굉장히 고귀하고 특별한 은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 "자녀"들에게만 그분께서 진실로 허락하시는 축복이거든요. 그러니 "오직 신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영혼만이 부끄러울 줄 아는" 것입니다. 그 말은즉,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영혼이 되어라"는 고귀하고 의로운 뜻이 숨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과 감동과 기쁨과 열망은 사실 하나입니다. 상상이 가질 않지요? 말로는 전해질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히 재능을 타고난 자들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력은 평등하다"고 말하며,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저 노력하지 않았거나 노력이 충분치 않았을 뿐, 이라고 그리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그들은 주로 자기가 재능을 타고났음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처음부터 그 재능으로 인하여 비교적 편안하게 성장해왔으므로 재능 없는 자들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모르는 안일함과 오만함에서 비롯했을 뿐입니다. 재능 없는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도 해내지 못하는 것을, 재능을 타고난 자는 전혀 배우지도 훈련받지도 않았는데도 놀고 먹으면서 한두 번의 시도만에 능숙하게 해냅니다. 그 절대적인 차이 앞에서 절망적인 무력감을 느껴보지 않았으면서, "노력이 부족하다"라......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았나 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속에서뿐 아니라 신앙의 길에서도 재능이 있습니다. 심지어 세속에서보다 압도적으로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별의별 희한한 신비 체험들을 마치 숨쉬듯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진실하게 기도하고 묵상하며 찬양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혀 훈련받지도 않았는데 진리를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능숙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쓰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의 길에서 가장 압도적인 재능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도저히 잘 되질 않는데, 재능을 타고난 자들은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도, 절벽 앞에 섰거나 벼랑 끝까지 몰린 그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을 앞두고서도, 그들은 기도하고 묵상하며 결국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일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하나님과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그 조용한 임재 가운데에서, 부재함조차도 곧 응답이 되는 그 "친밀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배우지도 훈련받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도 타고난 재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큽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상태"가 아니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는 상태를 묻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 말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상태"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 선과 악 등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시각일 뿐, 하나님께서는 상태를 보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의 마음이 어둡다면 밝히실 것이고, 그의 마음이 우울하다면 평화와 기쁨이 넘치게 하실 것이며, 그가 무능하다면 능력이 넘치게 하실 것이고, 그가 죄가 많다면 회개하게 하실 것이며, 그가 용기와 의지가 없다면 그의 안에 함께하셔서 친히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시기에 그분께 상태는 중요치 않습니다. 바꾸면 되니까요.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의지(Will)"입니다. 의지란 마음이 아닙니다. "나의 정신이 어디로 향하는가?", "나의 의식이 어디로 흘러가는가?"의 문제입니다. 눈앞의 시련과 고난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이를 핑계와 변명 삼아서 게으르고 안일하고 나태한 가운데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더 나아지려고 하는 의지, 더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 더 밝아지고자 하는 의지"를 낼 것인가, 의 문제 말입니다. 이때, 의지란 "행위"가 아닙니다. 내 힘으로 바꾼다, 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점을 놓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지력마저도 타고나는 것"이라는 헛소리에 속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본래 이 세상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원래 "절대 다수는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생이 그러합니다. 참된 의지란, "바라는 마음"입니다. 무엇을 바라는가.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바라는가?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 순종과 믿음을 바라는가? 바로 이 바라는 마음은 속일 수 없거든요. 의지가 열등한 자는 은혜와 축복 한가운데에서도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불만족과 열등감과 질투를 더 원하고 바라는 법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지요. 불가능 앞에서 그저 핑계와 변명으로 삼지 않고, 불가능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진실로 바라고 원하고 열망하는 마음을 낼 것인가. 이것이 바로 참된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지만을 보십니다. "현실적인 조건이 불가능하니까 포기하겠다"는 것은 합리적이지요. 그러나 합리적인 마음과 의식 안에 하나님은 임재하지 않으십니다. "현실적인 조건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바라고 원하고 열망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은 참된 소망이며, 하나님께서는 소망하는 자의 내면에만 임재하십니다.


내가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재능을 타고난 자들처럼 되기를 열망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을 만나보고,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십시오. 내가 기도가 서투르고 묵상이 잘 되지 않는다면, 진실로 기도하고 묵상하는 자들처럼 되기를 원하십시오. 바라고 원하고 열망하는 것은 능력이나 힘이나 성취와 상관이 없습니다. "의도의 방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을 일깨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히11:1)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태"를 핑계 삼아서 소망보다는 자기 안의 죄성과 어두움을 합리화하려고 듭니다. 바라고 원하고 열망하는데는 돈 한 푼도 들지 않는데도, 그것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열쇠인데 말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지 않습니다. 물질을 바랍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물질적인 성취와 성과를 원합니다. 본래 사람이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바라고 원하도록" 되어 있는 죄성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알아차리고, 의도적으로라도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바라고 원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훈련입니다.


이것은 때로 대단히 고통스럽습니다. 눈앞의 상황 자체가 압도적인 절망감과 무력감만을 불러 일으키는 그러한 순간들이 삶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모든 길이 다 차단된 상황, 발버둥조차 칠 수 없어서 오히려 무덤덤한 상황 말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보이는 것, 육적인 것, 세속적인 것"을 바라고 원해봤자,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자기 안의 죄성과 어두움을 자극하기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는 어두움이 보이는 현실의 삶마저 더욱 어둡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어두운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현실적인" 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바라고 열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하는 것, 그분의 사랑과 임재를 원하는 것, 그분께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것, 친밀해지기를 원하는 것...... 그러한 것 말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을 통하여 내 안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며, 언젠가 나의 영과 영혼이 충분히 "성화"되어서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온전히 드러나실 적에, 마침내 보이는 차원의 현실과 삶마저도 능히 변화될 것이라고, 그리 믿고 올바른 초점과 의도를 맞춘 채로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 이것이 결국 신앙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일 뿐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1:15)


사실 성경은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표현이나 문장 구조로 쓰여져 있지 않다 보니 읽기에 힘이 듭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를 감안하여 현대인들의 언어로 번역해놓은 버전들도 많지만, 사실 원어에 가깝게 번역된 것이 가장 왜곡과 변질을 줄일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세례 요한보다 예수님이 육신의 나이는 더 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다 한참 먼저 계셨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 본인이 스스로 이 말을 했습니다. 즉,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사람을 보면서 "나보다 높으신 분이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쉽지요. 오늘날 우리들은 그 "한참 나이가 어린 사람"이 누구신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보내신 이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왜 오셨으며 또한 어떤 일을 이루실 것인지를 다 알고 있지요. 아는 상태에서 그분을 영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한 채로 믿는 것"이 진실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평생에 걸쳐서 얼굴 한 번 본적이 없는 예수님께서 언젠가 오실 것임을 진실로 믿고, 그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였으며, 그 기쁨을 삶의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며 소리치는 자로 살았습니다. "보지 않은 채"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에게 주어진 증거라고는 오직 "직접 들은 음성" 뿐이었고, 이것은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인간으로서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도 "올바른 의지"를 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무엇을 열망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또한 그 의지로써 자기 삶을 이끌어갔습니다.


심지어 그는 아직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하시기 전에 그분을 만났으며, 그 상태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특별함이면서 동시에 그 근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무작정 맹신하는 것"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 하신 말씀은 명백히 다릅니다. 영의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소 뒷걸응질 치다 쥐 잡는 격"이며, 실제로는 쥐를 잡기보다 함정에 빠져서 죽을 위험이 압도적으로 큽니다. 자기 영혼을 구원받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에 관하여, 확률게임을 하려고 들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말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의 본질은, "육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영에 초점을 맞춘 상태에서 믿는 것이 복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하여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여전히 내 눈에는 하나님이 안 보이시지만(상태), 그럼에도 상관없이 나는 그분을 사랑하겠다(의지)는 것, 이것이 바로 '보지 않고 믿는 자의 복됨'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의지이며, 그 의지가 육에 의하여 지배당하지 않고, 영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때의 영은 "나의 영"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보시는 그리스도의 눈"입니다. 이 말 자체가 익숙치 않은 분들께는 매우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나의 영 너머에서 나의 영을 통하여 세상을 보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명백히 다릅니다. 전자의 경우 대개는 영적인 우월과 교만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진실하고 참된 길로 인도받으며, 신비주의가 복음주의를 섬기는 이상적인 은혜와 축복이 됩니다.


나의 눈으로 볼 때, 나는 대상의 단점과 결점과 문제와 불완전성과 불안정성만과 어두움과 죄와 악만을 봅니다. 이것이 너무도 당연한 나머지 문제라고 인식조차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나의 눈을 통하여 깊이 들여다보시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놀랍게도 "겉으로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인 상태에서, 그 보이지 않는 실체가, 본질이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어느 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불량스럽고 문제아처럼 보였는데, 그분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순수하고 순결하고 선한지를 훤히 보게 됩니다. 그때에, 나는 너무도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처참한 지경인지를, 그리하여 나를 믿지 않고 내 안의 그리스도를 더욱 믿고, 열망하고, 기뻐하게 되는...... 그리하여 나는 점점 성화되어 갑니다. 더 이상 사람의 껍데기를 보지 않습니다. 그것의 부질없음과 허망함을 알며, 사람 안의 영혼을, 영을, 본질을, 빛을 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실로 사랑하시는 영혼들이 누구인지를 훤히 다 보게 됩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들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목격하고 그들의 행함으로 인하여 드러나고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을 볼 적에, 나 역시도 너무도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이 내게 주는 어떠한 이익도 보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들의 영과 영혼의 선함으로 인하여,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그 자체로 인하여. 이것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실재입니다.


육신의 나이는 부질없습니다. 육신은 숨이 끊어지면 썩어 없어질 부질없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육신 안에 영혼이 정렬하매, 영혼을 성전 삼으셔서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적에, 육신은 성화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온전히 하는" 실체로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나이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육신의 조건이 아닌 영혼의 깊이를 보십시오. 나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그 영이 깊고 충만하고 그 영혼이 순결하고 진실하다면, 그는 이미 나보다 높은 자이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를 마주할 적에, 육신의 조건을 뛰어넘어서, 경외와 존경을 표시하고, 또한 그에게서 배우기를 바라고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하며 기도하고 열망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그리 살고, 그리 죽을 수 있기를......


이 말씀 하나로 조심스럽게 소망해봅니다.




끝맺으면서, 보잘것없는 개인적인 체험 하나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언젠가 생각없이 유튜브를 보던 중에 모녀지간의 갈등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에 나의 마음은 "누가 잘못을 햇고, 어느 쪽이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느니......"와 같이, 마치 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것마냥 심판의 권세를 행하려고 들었고, 그 짧은 순간에 내 안의 죄성이 불붙듯이 넘실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 의식이 깊어진 어느 순간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 일을 내 안의 그리스도의 눈으로 들여다보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1. 중요한 것은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허락되었는가, 아닌가, 만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2. 그리고 만약 기도가 허락된다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이 역시도 너무도 명확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들을 대신하여 내가 대신 채찍을 맞겠습니다. 내가 대신 징계를 받겠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여 주소서." 너무도 단순했고, 너무도 절대적이었고, 너무도 선명했습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드러나실 적에는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진리와 신성과 생명이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믿고 내맡기는 자에게,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에게, 진실로 복(福)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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