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유감스럽게도 신앙과 믿음은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며, 내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신성으로 말미암은 언어와 세속의 언어가 서로 완전히 다르며, 세상의 것으로는 하늘의 것을 온전히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것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혼이며, 그 영혼이 온전하여짐을 얻는 것은 영이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 인하며, 영이 거듭나는 것은 곧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그분을 영접할 때, 이는 곧 신성을 통하여 빛이 계시되고, 이것이 나의 영을 거듭나게 하며, 존재의 중심축에서 열린 빛이 영혼과 자아와 마음과 몸까지 물들여가고 변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열림"의 은총을 받은 자는 신성의 언어들에 저항감이 없고,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이 닫혀 있는 자, 보이지 않는 것은 부정하되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자, 하늘보다 세속을 더 사랑하는 자,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의 소유와 욕망을 더 사랑하는 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바깥의 우상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자, 그러한 자들은 순결한 신성의 언어, 영혼의 언어, 영의 언어를 마주할 적에 극심한 저항감을 일으킵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자를 이 세상에서 죽여 없애서 눈 앞에서 치우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신앙은 노력하여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형성되고 온전하여짐을 얻는 것 역시도 오직 은총으로 인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임하시는 것을 엎드려 영접하는 것"이지, "내가 직접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충만함이란 "아버지와의 하나됨", "아버지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세속의 언어로 서술하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언어로는 이것은 숱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아니하며, 신앙을 은밀하고 진실하게 유지한 끝에, 마침내 그분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러 그분의 뜻이 드러나게 되는 그 길고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끝까지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분과의 동행의 역사가 결실을 맺고, 그 결실들이 열매로써 내 안에 쌓여가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서만 주어지고 허락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성장도 없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없다면 간절함도 절실함도 없습니다. 슬픔과 외로움과 허망함이 없다면 감동과 경외와 기쁨도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서 그 한가운데에서 홀로선 적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안다 한들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그분이 성육신하사 그 하나됨의 빛을 세상에 보이셨으며,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매 영광스러운 몸으로써 아버지와의 하나됨으로 말미암은 신성을 세상에 완전하게 드러내시니,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신성을 영접하는 것만으로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여지며, 심지어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세를 허락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 신학이면서 동시에 실재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열리지 않은 자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극렬하게 저항하고 거부하고 심지어는 믿는 자를 비웃고 모욕하고 침뱉고 조롱하는 그러한 언어입니다. "현대 영성가"들이 보기에 지극히 바보스럽고 낡아빠진 허물을 끝내 놓치 못하는 그러한 언어입니다. 비인격적인 원리와 법칙임을 알지 못한 채 끝내 인격적인 하나님을 놓지 못하는 어리석고 열등한 언어입니다. 끝내 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한 인간"에 불과한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며, 성령께만 메달리는 그러한 무식한 자들의 언어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현대 영성가들처럼 신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신을 만났고, 신의 음성을 들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접하였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해왔으며, 그 관계와 사랑 속에서 영혼이 깊어지고 영이 열리는 결실과 열매들을 맺어왔습니다. 제 심장은 그리스도로 인해서만 뜨겁게 박동하며, 제 영혼은 오직 그분과의 관계로 인해서만 진실로 공명합니다. 저의 영은 오직 성령으로 인해서만 인도받습니다. 물론, 저는 처음부터 출발선에서 한두 발자국 정도로 앞선 것을 허락받은 자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재능과 자질이 넘치는 자들이 많으나, 이렇게 언어와 말로써 자유롭고 편안하게 그분을 증거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 역시도 명확한 재능과 자질이며, 저는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평생 한 번도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비인격적인 원리와 법칙"들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진리와 신성을 그럴듯해 보이게 설명할 수 있는 충분힌 능력과 힘이 제 안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교만의 죄에 대한 용서를 그분께 먼저 청하면서, 증거하니,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글자로 장난질하고 말과 언어로 농락하여 세 치 혓바닥을 놀려 어리석은 자들을 기만함으로써 내 자신의 권세를 얻을 만한 재주와 기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정을 허락받아서 걷기 시작한 처음부터 나는 그분 앞에서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섰던 순결한 영혼이었고, 차마 다 말할 수도 없는 끝없는 기다림과 인내와 연기와 좌절의 연속들 가운데에서 울부짖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넘어지고 좌절하면서도 끝내 이 길을 포기한 적도 그분을 원망한 적도 없었으며, 이 여정이 부질없는 그저 불행과 불운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언어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하는, 이 "낡아빠진 언어"를 도구로서 사용하여 증거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그리고 나의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앞으로의 평생의 삶에서 얼마나 더 기다리고 인내하고 좌절하고 어두움 속에서 엎드려 기다려야만 하는지를 처음부터 훤히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쉽고 빠르고 편하고 이익 되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인간인지라 그 길에 마음이 무수히 흔들렸음에도, 끝내 그 양자택일의 잔인한 운명 앞에서 내 가슴은 언제나 내가 묻기도 전부터 그리스도께로 뛰었고, 내 영혼은 오직 그리스도께로 인해서만 공명하고 살아 숨쉬었으매, 결국 이리 나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고 조롱받는 낡아빠진 신의 이름과 신성의 언어를, 그 누구처럼, 끝내 폐기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낡은 언어를 끝까지 손에 쥐고서, 그분께서 내게 허락하신 작은 재능과 자질을 총동원하여, 평생에 걸쳐서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고, 아버지께서 실재하심을 말하며, 아버지의 뜻과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영의 의지이며, 영혼의 사랑입니다. 가장 추하고 못생기고 부족하고 가난한 채로, 가장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실한 자의 언어입니다. 나의 언어는 그러므로 주장도 사실도 아닌 증거일 뿐입니다.
"충만함"이 있을 적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임재하실 적에, 그 순간의 나는 이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눈을 뜬 영혼이 내 안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말하고 움직이는 순간이며, 평생 동안 잠들어 있던 영이 나의 존재 전체를 통하여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여전히, 저는 이것에 대해서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능숙하고 익숙하고 현란하게 진리를 설명하고 해설하는 자들처럼, 나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능숙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루를 1년처럼, 한 해를 10년처럼,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이 어리고 어리석은 작은 생애를 마치 수 차례의 생애의 여정처럼 살아온 이 길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고 그분과 이리도 웃고 울고 슬퍼하면서 깊이 교제해온 지금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증명하거나 논증하지 못합니다. 내 안의 죄성이 불길처럼 일어나매, "너는 하나님을 아느냐?"는 사탄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려고 할 적에 내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럴듯하고 논리적이고 논증적인 언어로 현란하고 일사불란하게 신을 구조화하고 개념화하고 도식화하려고 드는 그 움직임들을 고요한 가운데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이제 죄는 나를 어두움 가운데로 강제로 끌고갈 수는 있어도,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을 수는 있어도, 내 심장을 그분께로부터 돌릴 수 없으며, 내 영혼을 그분께로부터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고요한 가운데, 깊어질 적에, 내 안에서 진실의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 "나는 그분을 모른다." 그러나 이어서 최종적인 영의 증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그러나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 세속의 현자들은 익숙하고 능숙하고 전문적이며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완전무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보인 채로 능숙하고, 능숙한 채로 바보스럽"습니다. 아무것도 배우지도 훈련받지도 못했고 세속에서 인정해주는 그럴듯한 경력도 자격도 인맥도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그분을 사랑하여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실 적에, 나를 초월하여 넘어서는 진리와 지혜가 넘실거리는 것을 바다 안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합니다. 어리고 어리석고 가난한 자의 입을 통하여, 사람이 절대 알 수 없는 위대하고 경이로운 진리들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능숙함과 자유로움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우리들은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능숙함과 자유로움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떨리는 심정으로 온전히 선 아이로 되돌아옵니다. 내 안에서, 능숙함은 바보스러움 앞에 엎드립니다. 전문성은 순결함 앞에 순종합니다. 나의 영혼은 그저 그분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설령 슬퍼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조차도 울면서도 그분을 찾는 그러한 바보스럽고 순진산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에고는 그 누구보다도 전문적이고 능숙하면서도, 그러한 영혼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그 영혼을 경외하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영혼의 바보스러운 손짓과 몸짓 하나 하나를 경청하고 순종하여 무엇 하나라도 배우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녀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세상에 속한 현명한 자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무엇으로 인하여 기뻐하시는지를 훤히 알게 됩니다. 여전히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허락하실 때에, 허락된 자에게, 허락된 음성을, 허락된 방식으로 전할 적에, 나를 통하여 흘러넘치는 그 "빛" 안에서 누구보다도 자유로이 유영합니다. 그의 눈동자에는 기쁨이 비칩니다. 그의 음성에는 경외와 경이로움의 결이 스며듭니다. 그의 존재의 몸짓에서는 순종하는 자의 향기가 맴돕니다. 그것은 세속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지만, 하늘의 모든 천사들은 그것을 보매 그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 향기를 맡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진동과 공명으로 인하여 이끌릴 것입니다.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눈을 통하여 바라볼 적에,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누리시는 그분께서, 화려하고 웅장하고 엄숙한 곳에는 눈길을 두지 않으신 채로, 이름 없는 가운데에서 묵묵히 선을 행하고, 선을 사랑하며, 선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가난하고 평범한 자들 곁에 친히 거하시는 것을 봅니다. 나의 육신의 눈은 그의 허름하고 가난하고 평범함을 보지만, 나의 영혼의 눈은 그의 안에서 거처를 함께하시고, 그와 함께 잠드시고, 그와 함께 일어나시며, 그와 함께 웃으시고 슬퍼하시고 역사를 함께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거대한 성전 안에서는 자리를 비우시되, 오직 그분께서 사랑하시며 그분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순결한 영혼들이 머무르는 가난하고 허름한 공간들에는 넘치도록 임재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니다. 왜, 나의 눈이 얼마나 지독하게 어리석은지를 알게 하시려고, 나의 그 잘난 "의로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처참하도록 어리석은 지경인지를 뼈저리게 뉘우치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나는 나의 고요한 슬픔 가운데에서 온전히 그분의 눈으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나도 사랑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자로 인하여 나도 기뻐하게 됩니다. 나의 사랑과 나의 기쁨은 이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하여, 이 결이,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그러한 자비의 원리나 법칙 따위가 아니라, 병든 자들과 매맞는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 곁에서, 온 세상이 그들을 비웃고 모욕하고 조롱하매, 온 세상이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되 그들을 심판하려 드는 그러한 소외받은 자들 곁으로 친히 임하셔서는, 그들과 함께 웃고, 그들과 함께 먹고, 그들과 함께 마시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그분의 고귀함을 봅니다...... 그리고 새벽이 깊어지매, 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의 광영으로 인하여 영혼의 문을 열었을 적에, 그분은 이토록 어리석은 나 따위와는 달리, 많은 말씀을 않으시되 오직 단 하나의 말씀만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위대한 영광을 봅니다 :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평화가 있을 것이다." 아, 이것을 차마 말로 다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차마 세상의 말로는 이 심정을 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충만함에 대해서 교리적이고 신학적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충만함이 무엇인지,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 위의 은혜"를 허락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저 이렇게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나의 삶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입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사랑합니다.
슬픔이 없는 자는 기쁨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욕망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열망을 알지 못합니다. 교만을 알지 못하는 자는 순종과 회개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흰 옷을 차려입고서는 평생을 때 한 번 묻혀보지 않은 자는, 비록 그 순결함을 유지하겠으나, 이미 순결하므로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감동, 경외, 경이로움, 열망, 기쁨,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밝기만 해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밝은 자는 자기 안의 어두움에 쉽게 기만당합니다. 내가 평생 밝은 가운데서 지내왔으므로, 타인의 어두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 어두움 안에서 임하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을 결국 보지 못하게 됩니다. 저 빌립이 마지막 순간에 그의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무릅쓰고라도 기어코 그분께 질문드릴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무엇보다도 간절하고 절실한 그 물음, "하나님을 눈 앞에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믿겠나이다"(요14:8),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남을 손쉽게 심판하고 재단하는 자들은, 자기 안의 죄성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몸에 오물을 묻힌 자가 남의 옷매무새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물음 앞에서, 그를 어리석다고 말하며 그를 가르치고 재단하려고 드는 내 안의 죄성을 고요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물음을 접했을 적에, 나의 능숙함과 전문성의 주인이신 나의 영혼께서 그 순결하고 아름다운 음성을 전하시니 : "부끄럽습니다, 그의 간절함에 함께 아파합니다, 그를 사랑하고 품어줍니다." 나는 저 물음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께서 그로 하여금 가장 위대한 빛을 목격하는 순간,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바로 그 순간을 허락하시려고, 그에게 가장 깊은 시련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에게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와 함께 양들을 먹이시는 사명을 허락하시고자, 그로 하여금 죽느니만 못한, "너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마26:34) 그 치욕을 견디시게 하신 것을 봅니다. 자기 안의 죄성을 목격하지 못한 자들은 손쉽게 베드로에게 주신 그 시험의 무게를 가벼이 여깁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또한 나를 사랑하사 나로 하여금 그 순간의 그의 영혼과 진실로 이어지게 하셨으니, 이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슬픔은 곧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나의 주를 고백하며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기쁨을 여는 열쇠입니다. 나의 외로움은 오직 그분 안에서 얻는 평화를 여는 열쇠입니다. 나의 시련과 고난은 그분께로 더욱 가까워지며 그분과 깊어지는 하나됨을 여는 열쇠입니다. 곧,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 자체이시며, 나라가 임한다는 것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과 "하나님이 내 안에 임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나"가 낮아지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안의 하나님이 높아지시고 모습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슬픔과 아픔과 눈물, 그리고 외로움과 쓸쓸함과 허망함, 그 모든 시련과 고난은, 어두움 안에서 더욱 경이로운 빛을 영접케 하시기 위하여,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어찌할 바 없이 잠시 허락하신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나의 슬픔이 깊어질 적에, 나의 슬픔이 본래의 탁하고 불투명하고 끈적한 것에서부터 어느 순간 맑아지고 고요해지고 침잠해졌을 적에, 그 슬픔 안에서 문득 영혼의 공명이 울려퍼지는 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슬픔 안에서 문득 영의 음성이 울려퍼지는 바,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과 연합하는 "주권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을 부정하지 말되, 슬픔 가운데에서 다만 고요히 모습을 드러내시는 그분을 만나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
1. 이때의 '우리'는 "인류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녀들의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된" 영혼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그분께서 이르신 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되, 너희가 우리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요3:11)고 하셨을 때의 그때의 "우리"와 같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그분께서 그분의 "양"들을 낮추어 보지 않으시고 "그분의 가족이자 형제"로 여기셨음을 보이는 부분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세대의 자녀들을 다 아우르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대의 모든 자녀들의 연합,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2. '그의 충만함'에서의 '그'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충만함'은 아버지(성부 하나님)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그 하나됨으로 인한 신성과, 이 신성이 각 영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충만함은 곧 복음의 성취, 그러니까 "아버지와의 하나됨"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본래 "하나됨"은 외아들께만 허락된 것이었으되 이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영혼들에게 다 허락되었다, 는 것이기도 합니다.
3. "은혜 위의 은혜"라고 할 때, 첫번째의 은혜는 사람으로써 하나님께 받는 "나의 은혜"입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의 여러 가지를 보시고 그에 적합한 것을 주시는 것이죠. 그러나 "위의 은혜"라는 것은 한 차원 높은 은혜를 의미하며, 본래 나로써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는 충만함"을 허락받은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삼위일체와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과 복음적 진리 전체를 은유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신앙의 중심이 바로설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이 안다고 해서 중심이 그만큼 바로서진 않습니다. 그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 연합"으로 인해서만 바로섭니다. 배움과 앎은 그것으로 이르는 길이죠.
오늘날, 세상에 무수한 어두움들이 도처에 도사리며, 많은 사람들을 현혹케 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빛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고, 빛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알며, 그리로 이르기 위하여 인도받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사람의 언어나 지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허락받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현명하고 지혜롭고 완전무결하게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그럴듯해 보이는 언어와 지식과 "비법"들을 들이밀더라도, 오직 순결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되며,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는 이 길을 걷는데 마음이 온전히 몰입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