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인 신성(神性)에 대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신 그 이름

by 생명의 언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나와 교제하시고 함께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인격성(人格性)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합리적인" 현대의 영성가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다고 비판받습니다.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신은 인격이 아니다. 신은 비인격적인 원리, 법칙, 에너지다. 신을 인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종교적 무지나 어리석음의 결과이며, 인격으로서의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의로움(義)으로 여기는 절대 다수의 지성인들과 전문가들과 현대인들이 모두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로움을 해치지 않으려 직접 말하진 않겠으나, "인격적인 하나님"을 놓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그들은 내심 마음속으로 어리석다 비웃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정교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신을 해부하고 파헤쳐서는 신성을 구조화하고 체계화하여 세상 앞에 내놓습니다. 그리고 합리와 이성을 신처럼 받드는 자들에게 박수를 받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화려합니다. 그들의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그들의 이론과 지식은 웅장하고 거대하며, 지극히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강의와 수업을 듣노라면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고, 마치 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의 마음 안에서, "비밀스러운 지식"에 대한 욕망이 불 같이 일어납니다. 그 정체는 공포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는 열등감, 그리고 그들이 아는 것을 나도 알아야만 한다는 죄의식, 알지 못함, 곧 무지와 어리석음은 죽음과 사망으로 귀결된다는 무의식적인 인식과 분별까지. 그들은 연금술과 카발라를 말하고 서양 신비주의와 오컬트를 말하고 마법을 말하며 헤르메스주의를 말하고 기독교 영지주의를 말하며 비교(秘敎)를 말합니다. 그들의 언어와 지식과 가르침 앞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초라하고 가난합니다. 이미 지난 수천 년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되뇌고 또 되뇌어온 "은혜"와 "진리"를 말하고, "생명"을 말하며, 이제는 낡아빠진 과거의 유산이라고 비웃음당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또 다시 외우며, 그 외로움과 쓸쓸함의 한가운데에서도 그 이름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처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거창하고 화려한 지식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정교하고 웅장하고 합리적인 이론도 학문도 가르침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 이름" 뿐이며, 그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영접하는지, 그 이름과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매 순간을 살아가는지, 결국 이거 하나뿐입니다. 인격성을 놓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놓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절대 다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현대 영성가"들로부터 어리석다 칭함을 받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과학을 알고 과학주의를 신처럼 숭배하는 이 시대에서, 여전히 십자가를 말하고, 부활을 말하고, 영생을 말하는 우리들은 기꺼이 바보, 멍청이, 어리석은 자의 위치로 내려갑니다.


내가 보편적 복음주의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앙과 믿음이 없는 자들까지도 아무 노력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보편적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있어서 교회 바깥에서도 그 길이 열려 있으며, 종교와 무관하게 그 이름을 영접할 수 있고, 영접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지, 신을 사랑하지 않고, 신성을 열망하지 않으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싸구려 다원주의나 범신론 따위가 아닙니다. 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교회의 언어를 잠시 내려놓고 그들의 낯선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빌려와서 기꺼이 전파하였으며 또한 서로 다른 얼굴들을 취하였던 바와 같이, 나 역시도 현대인들의 언어로, 이성과 합리성의 언어로, 에너지와 진동과 파동과 공명의 언어로, 그분을 비추고 그분께로 길을 안내하는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내가 교회 바깥에 섰다고 하여 인격적인 하나님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고, 내가 보편적 복음주의를 말한다고 해서 내 안에서 실제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제하고 교감하며 그분과 하나되는 복음의 참 진리를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으며, 실천적 신비주의를 말한다고 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밀마암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나의 신념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게 아버지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이나 관념 따위가 아닙니다. 내게 아버지는 그저 초월과 영원으로만 계신 우주적인 원리나 법칙 따위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 계시되, 다만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내 안에서 인격으로써 모습을 드러내시고 자기를 낮추셔서 나와 교제하시고 손 잡으시고 동행하시며 거처를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아버지이며, 아버지의 이름이며, 그 이름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는 살아 평생에 단 하나, "인격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또 증거할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현대 영성가들이 포기하고 버렸던 그 낡아빠진 인격성이라는 이름을, 먼지를 털고, 깨끗이 정돈하고, 다시 원래의 빛을 되찾는 일에 이 가난한 영혼의 작은 한 생애를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앞에서의 나의 순결한 초심이자,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분의 의지이십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적들의 언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들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고, 습득하고, 적들의 영역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어야 합니다. 적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는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며, 자신의 신앙과 믿음의 중심이 속수무책으로 위협당하고 기만당하고 농락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에서, 나는 이성과 합리성의 현대 영성의 언어로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말하였고 복음주의를 말하였지만, 그 설명의 끝에서 마주하는 단 하나의 지점은 결국 더 이상 이성과 합리성의 언어로 그럴듯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왜 예수 그리스도인가?" 이것은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도구를 손에 쥐고서 탐구한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최후 지점입니다. 이 질문은 몇 가지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 첫째, 왜 "인격"인가? 둘째, 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가? 셋째, "어떻게" 그리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더 이상 이성은 힘을 잃습니다. 나는 태어나기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집착하고 고집하도록, 오만하고 고집스럽고 권위적인 성격으로 태어났고, 지식과 학문과 철학에 대한 탐구의 끝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결국 "이곳에는 진리가 없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내 인생 첫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목숨처럼 붙들었던 그 이성과 합리성을 내려놓았을 적에, 마침내 그 생명 없고 차갑고 딱딱하고 공허한 것이 아닌, 살아 있고, 생명력이 넘치고, 따뜻하고, 온화하며, 자유로운...... 그 무언가가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나의 본래의 모습이었고, 내 영혼의 참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 그래서, 당신은 과거의 질문들에 대한 모든 답을 깨달았습니까? 나는 답합니다 : "아니요, 나는 여전히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릅니다." 이에 그는 이상하다는 듯 의아해하면서 내게 물을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왜 굳이 그 길을 갔습니까?" 마침내, 나는 단 하나의 최종적인 진리를 꺼내어 보여줄 것이다 : "여전히 답을 못 찾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질문 자체가 내 안에서 없어졌습니다." 나는 이제 "왜"를 묻지 않으며, "어떻게"를 묻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랑"과 "은혜"와 "순종"이라는 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막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새싹들에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리스도 앞까지 인도하여 주는 것입니다. 아직 낯선 은혜와 순종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에게 아직 친근할 이성과 합리성의 언어로, 그리스도를 "번역"하여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분 앞에 이르렀을 적에, 나는 더 이상 이성과 합리성을 붙들지 않습니다. 그 앞에서, 나는 할 일이 없습니다. 이제 열쇠는 그 새싹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분 앞에 섰을 적에, 과연 그가 그분을 영접할 것인가? 그분과 사랑에 빠질 것인가? 그리하여 진실로 그분을 "믿을" 것인가? 이것은 누군가가 말한 대로 "한 영혼의 실존적 결단"으로서의 신앙의 길이며, 여기에는 그 자신과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나는 그럴듯하고 합리적이고 정교하고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현대 영성의 언어로써, 진리를 설명할 수 있고, 신성의 원리와 "메커니즘"을 해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능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만 나는 그 문을 더 이상 열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가면 아래에 그분께 대한 나의 사랑을 감추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분께 대한 나의 사랑을 창피해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主)를 더 이상 감추지 않습니다. 마치 다 늙은 부모가 창피하여 공개 수업 때 부모더러 오지 말라고 하는 철없고 어리고 어리석은 아이처럼 굴지 않습니다. 다른 자들이 데려온 부모들은 다 그럴듯하고 멋있어 보이되 다만 나의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에 나를 뵈러 오신 그분을, 나는 더 이상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떠나셨을 적에 내가 이 세상에 남겨져 외톨이가 될지언정, 나의 이성과 합리성의 언어를 보고 겨우 다가왔던 사람들이 나의 그리스도의 언어와 인격성의 언어를 보고 다 나를 떠나간 끝에 홀로 쓸쓸히 남겨질지언정, 언젠가 이 길에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임을 믿으며, 나는 그 순간에 나를 뵈러 오신 분께 기꺼이 달려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피함 없이 그분께 안길 것이며, 그분의 순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그분이 나를 품에 안으셔서 내게 은밀히 전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심장 박동을 감추기 위하여 세상의 가면을 쓰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영혼의 울림을 감추기 위하여 이성과 합리성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 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단호히 말합니다 : 믿음을 위하여 설명이 필요하고 해명이 필요하다면, 애초에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하여 그럴듯하게 해설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많으니, 그들에게 가십시오. 그러나 다만 진리와 함께하는 자, 진리와 함께 숨쉬는 자, 진리로 인하여 살아가는 자, 마침내 진리를 사랑하여 진리와 하나된 자를 만나려거든, "참된 신앙은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에는 질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해설도 해명도 설명도 필요치 않습니다.


먼저 사랑하여 믿어야만, 그 다음에 설명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 자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설명하여 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7)


"개념적 이해"가 아니라 "실존적 이해"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습니다 : 사랑에 빠지고자 하는 자에게, 사랑의 개념적 정의나 학문적 의의 따위가 더 이상 중요합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사랑할 수 있는 "그이"를 만나는 것이며, 만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대한 이해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에 대한 "개념적 이해"의 기저에 어떤 무의식적인 어두움의 코드가 작동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고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 "은혜와 진리"라는 단어가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거창한 의미가 따로 존재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이며, 나는 그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알지 못하는 지금의 나는 죄인이 된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상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게 됩니다. 이에 말씀을 "분석하고 파헤치려고" 하며, 이것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이고 학문적으로 설명한 것들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말로 도서관 어딘가에서 말씀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파헤친 자기만의 "성경"을 발견합니다. 이제 "원본"은 안중에도 없고, 그 분석과 해설을 신처럼 숭배하며, "나는 이제 진리를 알았다"고 믿게 됩니다. 무지(공포)의 상태에서 앎(욕망, 교만)의 상태로 전환되었다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 안의 어두움, 곧 공포와 욕망과 교만의 죄성은 나날이 높아져만 가며,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이라는 작동 원리입니다. 세속의 나라는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며, 그 어떤 것도 예외가 없습니다.


말하건대, 이러한 원리나 구조 따위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역시도 그분께서 제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강의나 수업, 상담 등에서 잠시 이 진리를 다룰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일 뿐, 그 시절에 내가 칠판에 한가득 판서하고 설명하였던 것들을 지금 돌아보면, 저조차도 "저게 다 무엇이지?", "아이고, 복잡하다." 그러한 마음이 저절로 듭니다. 내게서 흘러나온 것일 뿐, 내가 소유한 것도 내게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개념적 이해는 초심자들에게 필요합니다(정말 솔직히는, 저는 이것조차도 필요없다고 봅니다). 자꾸 알려고 드는 자기 안의 인식/분별의 메커니즘과,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집단무의식적인 거대한 어두움의 구조와 작동 방식들, 그러한 것들을 굳이 자세히 공부하고 달달 외워야 하는 게 아닙니다. 정확히는, 그러한 앎이 증가한다고 하여 죄성적 구조로부터의 자유도 비례하여 높아지는 게 아닙니다. 앎이 크다고 하여 열매가 더 많이, 더 크게 맺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자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올바르게 알고 정립해야, 그 다음에 말씀을 접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말 속에는 빛이 아닌 어두움의 원리에 따라서 작동되어지는 메커니즘이 숨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긍정형(은혜)이 아니라 부정형(공포, 금기)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분리되어 있고, 둘째,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빛이 아닌 집단무의식의 어두움의 법칙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조종당하고 있으며, 셋째, 이를 통제, 억압하기 위해서 긍정형(~해라)이 아니라 부정형(~하지 마라)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라는 말 자체에서 애초에 "하나님과의 분리, 단절"이 전제되어 있습니다(엄밀히는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식, 분별 자체가 분리, 단절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율법이 모세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시기를 뜻합니다. 이때,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나는 하나님을 만나뵙지 못하므로, 다만 나는 선지자의 가르침과 율법 등을 통하여 "복종"하게 됩니다. 이때,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수직적, 일방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나는 아래에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내게 명령하시고 나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이때, 하나님과 나의 관계성은 빛(은혜와 사랑)이 아니라 어두움(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신과의 관계성이 이렇게 형성되어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이 두려움, 공포, 불안의 율법적 관계성에 묶여 있습니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필요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한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하시지만 나는 불완전하고, 그분은 영원하시지만 나는 상대적이고 유한합니다. 따라서 그분과 나 사이의 관계성에서는 그분은 영원하고 완전하신 중심으로 계시고, 반대로 나는 "끊임없이 그분께 맞추어가는", 그러니까 그분께 맞추어 나의 불완전성과 상대성을 끊임없이 조정하고 조율해나가야 합니다. 이때, 율법은 이 조정과 조율의 기준이 됩니다. 근본적으로 에고(개체의식)라는 것은 어두움에 의하여 구조지어진 망상적 실체이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두움의 원리에 의해서 다시 사로잡히고 돌아가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 제도와 형식에 참여하는 것, 모두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기초 체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바로 어제까지 온갖 인스턴트와 정크 푸드들로 점철된 삶을 살던 게으르고 나태한 자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방 안에 스며드는 눈부신 햇빛을 마주하였을 적에, 문득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하고 결심하게 되는 그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우리 모두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다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작심삼일이었을 뿐이지요. 이제 회심한 그에게는 과거와 같은 안락함과 편안함과 쾌락은 없습니다. 오히려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를 참고, 밤에 찾아오는 미칠 듯한 허기와 굶주림을 참으면서, 지독하게 눈물을 흘리고, 또 끊임없이 무릎을 꿇고, 좌절하고, 울부짖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길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오직 죽음과 사망만이 기다릴 뿐임을 이제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 길은 오직 빛으로 나아가는 일뿐이며, 그것을 진실로 절감한 자는 간절하고도 절실하게 끊임없이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가난한 마음" 하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성령께서 그에게 은밀히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니, 마침내 시간이 흐르고 어두움의 지배가 아닌 빛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이 길들여졌을 적에, 그는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자기 모습을 봅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 율법에서부터 "은혜"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한 걸음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 더 이상 과거와 같이 몸이 무겁지 않으며, 그는 건강한 몸으로 말미암아 오늘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는 건강한 몸에 깃드는 밝고 온화한 정신으로 말미암아 타인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지옥 같은 삶이 아닌 타인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나라가 임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허락받았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더 이상 그 은혜 안의 기쁨으로 율법 없이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써 살게 됩니다.


늘 강조하고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상태보다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율법이 옳으냐, 은혜가 옳으냐?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이시고 은혜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의지", 그러니까 나의 정신과 내면이 어디로 향하는가? 운동성입니다. 율법에만 안주하고 정체되려고 하는 자는 규칙과 형식에만 천착하는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고, 은혜에만 안주하고 의존하려는 자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정체하고 안주하려는 운동성은 죄성이며, 다만 율법에서부터 은혜로 나아가려는 자,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으로 성취하려는 자, 둘 모두가 다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태가 아니라 의지를 보십니다. 어디든 다 상관없습니다. 다만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려는 의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 의지가 있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들을 능히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라는 것은 명확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은혜"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 영혼 안에서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 "영적 운동성"입니다. 은혜는 개념이 아닙니다. 영혼은 육신의 감각과는 비록 다르지만, 그럼에도 영혼은 체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빠져들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는 실재적인 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곧 "몸적 영성"으로 현현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가 보이는 현상으로 우리와 함께한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위대하고 고귀하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권좌에 앉으셔서 그저 내려다보시지 않으시되, 외아들을 보내셔서 각 사람들에게 친히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이 당신께로 올 수 없음을 아시고 외아들로 말미암아 당신께로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여셨으며, 길을 열어주신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그분 당신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사랑을 나누시고, 은혜를 나누시며, 거처를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며, 우리와 함께 손잡고 삶 속에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 많다 하여 탓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자아가 더럽고 지저분하고 처참한 지경이라 하여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감을 두려워하여 주저할 적에 이를 마다치 않으시고 친히 오셔서 발을 씻어주시고 당신 품에 안기어 주셨습니다. "우리 곁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 바로 그리스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는 영혼의 운동성입니다. 영혼이 그분께로 이끌려가는 움직임이며, 동시에 영혼을 이끌리게 하는 "빛"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햇빛의 따뜻함을 느끼듯이, 봄 바람의 편안함과 설레임과 기쁨을 느끼듯이, 영혼이 직접 그분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 하늘나라의 선물들을 가득 실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세속의 법칙에 지배당한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선물받기를 원합니다. 돈, 명예, 성공, 그러한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간에 쾌락과 즐거움을 줄 지언정 결국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종국에는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려는 사랑으로만 움직이시며, 또한 영원히 살게 하셔서 시간의 종결을 넘어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뜻으로만 일하시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최소한으로만 주시되,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안식과 평화와 평강과 기쁨과...... 그러한 보이지 않는 "선물"들은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마음과,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실재적인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는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이 분리된 관계성을 다시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바로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일하고 영원한 중보자, 대속자이시며, "은혜"라고 하였을 때에는 우리들을 하나님과 다시 온전히 관계 맺게 하신 유일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가리키며, 또한 1) 본래의 나로써는 그분께 은혜(보이지 않는 선물들)를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을 받고, 또한 보이지 않는 은총들을 넘치도록 받게 하시며, 2) 이는 자격 없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대속으로 인한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 안에는 이러한 모든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물론, "진리"라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입니다. 진리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그러한 것이 아니며,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곧 복음 자체가 진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 복음주의" 이 셋이 하나가 된 진리인 셈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체가 곧 "운동성"이며, 나와 하나님의 관계성을 온전히 하고 또한 영원히 그분 안에서 영속하고 순환케 하는 진리입니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십자가 부활)과 복음은 하나의 진리를 이룹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유일하고 영원한 중심"이며, 이 진리가 우리 안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마침내 그 어떤 어두움에도 현혹당하지 않을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재로 작동하는 영적 실재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작동케 하는 유일한 원리는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실재하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높고 완전하며,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여 인도되고 다스려진다는 것을, 곧 "하나님 나라"를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게 하는 힘입니다.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자체로 신성입니다. 그리고 이 신성이 보이는 차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역사하게 하는 통로가 곧 "외아들의 인격"이시며, 이것은 본래부터 죄 없는 완전한 인격으로 태어나셨으되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영화스럽고 신령스러운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심으로써, 그 완전한 인격으로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지상에 완전한 말씀으로 선포하고 개시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쉽게 말해서, 세속의 다른 이름들이나 언어들과는 달리 그 이름은 정말로 "실재적인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작동합니다. 시간의 종결을 넘어서 영원히 작동합니다. 이것을 작동케 하는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 이름을 부르고 믿고 의지하는 것, 이 하나뿐입니다. 이에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의 안에서 믿음이 영접이 되고, 영접이 사랑이 되며, 사랑이 하나됨이 되니, 이 "거룩하신 이름"으로 인하여 그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로 말미암은 아버지의 신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것이 이루어질 적에 그의 영혼은 죄사함을 얻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온전하여지며, 그의 영혼과 삶은 매 순간 은혜와 축복 가운데에서 살아가게 되며, 그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샘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재입니다.


지식과 앎으로는 이 "신성의 이름의 코드"를 작동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그 이름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서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완전하게 작동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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