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더 사랑하여

by 생명의 언어


주(主)는 영이십니다(고후3:17).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며, 영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육은 보이는 것이되 보이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고전2:14). 마음(mind)과 자아(ego)는 명백히 육에 속한 것이며, 자아의 인식, 분별과 그 재료가 되는 언어, 지식, 관념들은 모두 육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빛이 아닌 어두움의 지배를 받으며, 어두움에 속한 것으로는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을 인지할 수도 분별할 수도 만날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제한이나 억압이 아니라 그 자체 본성으로 인한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운동입니다. 어두움이 빛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치이고, 섭리이며, 아버지께서 정하신 뜻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정한 것은 사람 안에서의 인식이요 분별일 뿐, 현현우주의 법칙도 원리도 될 수 없습니다. 과거, 사람이 천동설을 진리로 믿었다고 하여 본래부터 지동설로 정하신 그 질서와 조화와 진리가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본 것과 사람의 생각으로 정한 것들과 사람이 옳고 그르다고 믿는 것과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이 세계의 조화와 질서와 법칙과 관하여 아버지께서 제정하신 뜻보다 더 높다고 믿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 한계를 통찰해야 하며, "나"는 교만함이고, 그 교만함이 자아와 타자와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가리우고 있었음을,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는 눈 뜬 맹인이나 다름없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누가 강요하거나 대신 알려줄 수 없는 것이고, 자아의 실체를 그 자신이 스스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이것은, 자아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이라는 죄성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인식, 분별하려고 드는" 너무나도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과 태도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신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나는 답합니다 : "신은 있음과 없음을 창조하신 분이며, 있음과 없음보다 더 높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의 눈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영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내가 "꽃"이라는 관념으로서 대상을 인식하고 또한 이것을 "꽃"이라는 언어와 말로써 분별한다고 하여, 그러한 관념과 인식과 분별들이 그 자체 실재하는 "꽃"보다 더 우위에 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인식과 분별과 언어와 지식과 관념보다 눈 앞의 실재하는 꽃 그 자체의 실재성이 이미 "먼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꽃이 먼저 실재하였기 때문에 내가 꽃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이지, 사람이 인식하고 분별하고 정의하고 개념화하였다고 하여 이로 말미암아 꽃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있다고 믿기에 하나님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믿음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그 자체 실재하시는" 것입니다. 실재성을 먼저 깨달아야 하며, 이 실재성은 결국 아버지 그 자체로 인한 것이며, 아버지가 아닌 다른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기나긴 설명 끝에서 결국 답답한 심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는 육의 것만을 볼 수 있을 뿐, 영에 속한 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2차원 평면세계의 존재에 속한 눈으로 3차원 입체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듣고 이해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차원 세계에서 단순히 테니스 공을 바닥에 튀기는 행위조차도 2차원의 존재에게 설명하려면, "공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은 움직이지 않는 채로 움직입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높이"라는 개념은 2차원 존재에게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동물의 교만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상대적이고 유한하고 불완전한, 상대성과 이원성의 원리와 법칙에 힌계 지어진 3차원 시공간에 속한 존재들이며, 이 자체가 우리들의 "눈"을 가리우게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그저 현상적인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심지어 현상하는 것들 중의 "일부"만을 겨우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당연시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 차원에서 본다면 대단히 모호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명백히 "물질적인 감각" 중 일부인 향(香)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향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맛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향이 향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그대로인데, 어느 순간 향기로운 무언가가 지나갔다는 것을 그 순간 선명히 알아차리게 됩니다. "어라, 향수를 뿌린 사람이 지나갔을까?" 모든 것은 이와 같습니다. "당연시하는" 감각이 곧 "꿈 꾸는" 감각과 같습니다. 당연시한다는 것은 확실성에 대한 동일시이며, 확실성은 무의식의 두려움, 공포, 불안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확실시는 곧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 장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도로 드러나서 자아와 타자와 세계에 투영됩니다. 이것이 우리 무의식의 원죄-메커니즘입니다. 이 "옳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람은 본래 태어나기를 하나님을 보고 듣고 느끼고 교감할 수 있게 태어났음에도, 그 무한한 잠재성과 가능성의 절대 다수를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로 허망하게 죽습니다. 육의 감각으로는 영의 감각을 결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없으며, 심지어 육에 속한 것으로는 영의 존재를 인지할 수도 인식할 수도 분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능동태", 즉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한다, 내가 행위해야 한다"....... "하려는" 의도, 이것이 능동태이며, "행위자"라는 자아의 망상적 실체입니다. 나는 행위자다, 나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나는 능동태다, 이러한 착각...... 이것이 완전히 깨부셔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수동태가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나는 받아들이는 존재다, 나는 수렴하는 존재다, 나는 수동태다, 나는 통로이다, 나는 그릇이다, 나는 매개이다...... "내가 신을 인식한다"가 아니라, "신께서 나를 통하여 드러나신다"로...... "내가 한다"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로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나인 채로,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말로 하면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데, 사실 체험적으로는 매우 직관적이고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이것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태어나기를 "신에게 더 가깝도록"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을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일컫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육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적 어리석음으로 기인합니다. 앞으로 수없이 자주 인용하겠지만(저는 그리하여 빌립에게 빚을 집니다), 예수님을 곁에서 직접 모시고 섬기며 그분의 육성을 직접 듣고 대중들에게는 가르치지 않으셨던 하늘나라의 비밀들을 가장 곁에서 가까이 들었던(마13:11,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마저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부끄러움을 내딛고 용기 있게 드렸던 질문이 저 유명한 "하나님을 저희 앞에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믿겠나이다"(요14:8, "주여 아버지를 저희 앞에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였으며, 빌립은 "육의 눈으로 영으로 계신 아버지를 보겠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줄" 수도 있는 분이셨지만(그분께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들과 이적들이 다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재차 이것을 해주는 대신에 빌립의 "영을 완전히 거듭나게 하시려" 답하시기를 : "내가 너희와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하였거늘 어찌하여 나를 모른다 하느냐?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14:8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는, 너무도 완벽한 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 당시의 빌립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는, 가장 완전하고 높은 차원의 영의 진리를 깨달아야만 마침내 그 귀중한 값어치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는 향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명히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감각입니다. 향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모든 사람들은 향을 분명히 느낄 수 있듯이 말입니다. 영의 눈으로 볼 적에, 보이는 예수님은 분명히 보이는 예수님 그대로이시지만,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들과, 특히 빌립의 경우에는 그토록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느꼈을진대, 그분의 보이는 존재와 움직임들을 통하여 그분께서 이미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을 영의 눈으로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마치 "향(香)을 반드시 눈으로 봐야만 향이 있음을 믿겠다"고 하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좀 이상한 사람이다, 향은 원래 안 보이는 것이고, 향은 냄새를 맡아야 아는 것이지,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같은 맥락으로 질문컨대, "나는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지를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겠다"고 하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가 어떻게 느껴야 합니까?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원래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지 않는 채로 만나야만 하는 것이지, 참으로 어리석다",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며, 영으로 계신 분이며, 영으로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영과 진리로써 예배드릴 때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이때의 경험은 명백히 육의 감각이 아니라 영의 감각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실은 논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이어가는 것은 무용합니다. 영은 애초에 관념이 아니라 관념 너머의 실재이기 때문이며, 실재를 관념으로 가리키는 순간 그것은 지극히 허망하고 또 허망한 것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종교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종교 불문하고, 그가 진실로 진리를 영접하고 있는가, 를 기준하는 것은 오로지 영의 감각이며, 영의 감각은 고유하고 명확한 것이지만, 쉬운 설명을 위하여 단 하나의 명확한 기준 하나를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 "감동(感動)." 각 종교에 맞게 비유해보겠습니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을 적에 개념적 이해를 넘어선 존재 전체를 진동하는 어떤 거대한 감동의 물결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자기 안의 진리에 의지하되 다른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 그 말씀 전체에서 너무나도 경이로운 감동이 느껴집니까? 또한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바 예수님의 말씀을 접할 적에,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언들을 읽을 적에,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와 동의를 넘어선 압도적인 감동이 있습니까? 정말로 "신의 음성"을 듣는 듯한 그 감동이 있나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과거보다 현대가 인간의 죄성이 더 커진 바, 세속의 지혜는 죄성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똑똑하고 현명하고 영리한 사람들이 늘어난 바, 마치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감동은 자기를 낮춤으로 인해서만 현현하는 것입니다. 감동은 영접에서 비롯합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해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는 오직 영접을 통한 감동에 있습니다. 영의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스승의 말씀을 기어코 한 마디라도 더 외우려고 들고, 개념적으로 완벽하게 다 이해하려고 아등바등 "기어오르면서" 질문을 하는 자들의 그 혈안이 된 눈빛과 목소리 너머에서 미쳐서 발악하는 죄성이 다 보입니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스승을 사랑하며, 스승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진리의 음성을 사랑하며, 그 진리를 그저 가만히 듣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나도 행복하고 기쁜 듯이 침묵 가운데에서 진리를 영접하는 그 이름 없는 제자를, 영의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에게서는 순결하고 진실한 영의 향(香)이 느껴집니다. 묻건대, 스승이 모를 것 같습니까?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를 모를 것 같습니까? 주(主)께서 누가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는지 사랑하는 "척"하는지를 모르실 거라고 생각합니까? 정말로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하나요? 저는 여전히 이 아득한 차이 앞에 종종 압도적인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분께서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적에, 저는 그 "아버지"라는 글자 자체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낍니다. 그러나 내가 입으로, 혹은 글로 "아버지"라고 쓸 적에, 그 글자는 너무나도 초라하게만 느껴집니다, 감히 나 따위가 그 글자를 입에 담고 손으로 썼다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요. "이름은 신성입니다." 영의 감각으로 볼 적에 모든 것은 다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육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반드시 영으로만 보입니다.


육의 감각은 에고가 통제하는 것이되, 영의 감각은 애초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감각은 능동태요, 영의 감각은 수동태입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소한 일상적인 순간 하나하나를 죄다 능동태로 봐버릇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는 것도 "내가 세수한다"이며, 숨을 쉬는 것조차도 "내가 숨을 쉰다"입니다. 지독하게 능동태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경고하건대, 평생에 걸쳐서 쌓고 또 쌓았던 그 능동태의 무게에 짓눌려 죽었을 때 영혼의 발목에 족쇄가 채워지매 하늘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그제서야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는 상관없으니 능동태를 내려놓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수동태를 배우고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고의 교만함과 한평생을 싸우면서 수동태를 배우고 익히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던 자들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수동태라는 날개로 인하여 자유로이 하늘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어서 신 앞에 섭니다." 이 말의 무게를, 아직 나이가 어린 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며, 자기의 육신의 늙어감을 직접 체감하는 지경이 되어서야 사람은 겨우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대부분 심히 늦습니다. 육신이 늙을수록 육신의 힘은 점점 쇠퇴하나 그 안의 무의식의 두려움 공포 불안은 더욱 강해지매, 젊어서는 육신의 강함으로 무의식의 어두움을 위압하였을지라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제 그 어두움의 지배력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비판이나 비난도 아닙니다. 다만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했을 뿐입니다. 영의 감각에 눈을 뜨는 것은 수동태를 이해하고 또한 체화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이 아닙니다. 애초에 나(자아)보다 영(신성)이 더 높습니다. 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지도 않습니다. 영은 "높습니다." 영은 애초에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경외로 말미암아 영접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영의 눈으로 볼 적에, 모든 것이 훤히 보입니다. 겉으로는 착하고 예의바른 척 하는 그의 표정과 눈빛 너머에 이글거리면서 타오르는 그 교만함과 욕망과 공포와 불안의 진동과 파동과 공명들이 다 보입니다. 그 앞에서, 나는 오직 슬픔과 안타까움만을 느낄 뿐입니다. 나는 이토록 무력하여 그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지 못하매, 그분이시라면 분명히 달랐을 텐데, 한 음성만으로도 그 어두움의 권세를 내쫓으시며 그 영혼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을텐데, 하고...... 영을 일깨우는 것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의 감각을 일깨우는 유일한 훈련법은 "내려놓음, 자기를 낮춤, 희생, 헌신, 십자가를 짐"...... 입니다.


부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권세는 오직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만 허락된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을 적에, 자아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새로운 "나"를 일으키십니다. 그때에 자아는 더 이상 주인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주(主)가 되십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마침내 그분께서 부활하실 것이며, 부활하셔서 정당하신 통치를 내 안에서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했던 "존재의 변환"이, 내 안의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에 나는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교만에서 순종으로, 죄에서 은혜로, 세속의 법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공포에서 평화로, 불안에서 기쁨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모든 "구조 전체"가 완전히 다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될 적에, 영의 감각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깨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영과 영의 감각과 영의 권능들은 전부 다 나의 것이 아니요, 본래부터 내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그분 자신의 의지를 이루시는 것일 뿐, 나는 그저 통로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힘으로 내 안의 신성을 일깨운다"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다"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께서 스스로 드러나시도록,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는 것"일 뿐입니다. 내 안의 중심이 전환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해법은 결국 "사랑"에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신을 사랑하는 것, 교만을 사랑하는 것보다 순종을 사랑하는 것, 죄에 집착하는 것보다 은혜를 사랑하는 것, 탐욕과 욕망을 사랑하는 것보다 선(善)을 사랑하고 선의 실천과 나눔을 사랑하는 것...... 그리할 적에, 중심은 자연스럽게 육에서 영으로 전환됩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를 사랑할 적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때에 나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마침내 나의 눈보다는 그리스도의 눈을 통하여 들여다보는 것을 더 사랑하고 믿고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말씀에 대한 개념적인 해설이나 풀이 등은 생략하겠습니다.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내 안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모든 말씀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힘(POWER)입니다.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는 이는 보이는 것만을 볼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사랑하는 이는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침내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나는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


이미 우리 모두는 스스로 답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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