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홀로 주를 따르다

by 생명의 언어


"......대답하라, 너는 너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그들이 물으니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하고 말하였다." (요1:22-23)


저는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스스로 보편적 복음주의자라는 괴상한 영적 정체성을 입에 담으며, 실천적 신비주의자라는 모순을 지향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교리적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저의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모르지 않으나, 그 역할은 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훌륭하신 목회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릇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광야가 아닌 도시에 있는 바, 광야에 홀로 선 자가 오만하게 모든 이들이 도시에서의 삶을 버린 채로 허름한 옷과 낡은 지팡이 하나 걸치고는 주를 증거하는 자를 무작정 흉내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교만일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이를 지식과 학문과 논리로써 증거하는 일은 인간에게 쉽고 편한 길이며, 또한 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허락된 자질과 능력들에 비교해 보아도 쉬운 일입니다. 8월 이후 브런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이미 140편을 넘었으며, 생계를 위한 노동을 제외하면 사실상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온종일이라도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책을 읽기를 별로 선호하지 않고 평소에 공부도 하지 않는 자가 이리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작은 능력 하나로 인한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제게 숨쉬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글을 쓸 적에, 저는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설계도 없이 그저 하얀 화면을 마주하며, 그 순간에 자아가 물러서고 영이 모습을 드러내니, 언어를 통하여 신성과 진리를 증언하는 글들이 마치 강물과 같이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 쉬움이 나의 정당한 자격으로 말미암지 않았음을 알기에, 글쓰기는, 더 나아가서 사명은 저에게 즐거움이나 기쁨이라기보다 차라리 무거운 짐이고 멍에에 가깝습니다. 사람으로써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그 어떤 성취도 성공도 허락받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서 그분을 알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래로 내게 소중했던 것들을 그때마다 거두어가시고 또한 내게 목숨보다도 소중했던 얼마 안 되는 제자들마저도 거두어가심으로써, 그토록 잔인하게 내게 스승과 선지자와 예언자의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셨던 그 고통스러운 시험의 나날들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께 의하여 높임을 받을 적에는 부모조차도 나를 미쳤다고 뒤에서 씹었고, 나는 먼저 선택받은 자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분의 뜻임을 진실로 열망하였기에 외로움 가운데에서 더 많은 짐을 져야만 했으며, 더 나아가서 올해 봄을 지나면서 여러 차례 희망이 좌절되고 간절한 소망이 꺾여질 때에는 죽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신앙을 더 단단히 붙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게 그분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였습니다. 비록 나의 십자가가 그분께서 지신 십자가에 비해서 오성급 호텔에서 숙식하며 배 부르고 등 따신 가운데에서 짊어지는 것임을 모르지 않되 이로 말미암아 언제나 부끄러움과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을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나는 언제나 빛을 지향해왔으며, 나의 오랜 업보와 까르마를 짊어지고 정화하는 과정에서 그때마다 무너지고 또 좌절하였음에도 언제나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되살려주셨던 그 은혜 하나로 말미암아, 나는 지금 죽지 않고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증거할 적에 그것은 나의 절실한 고백 하나로 말미암아야 할 뿐, 지식과 이론과 인식으로 말미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선명한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언젠가, 그들에게 내가 말하였던 바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데, 실패해도 어차피 본전 아니냐? 성공하면 대박이고 실패해도 어차피 본전인데, 잃을 것도 없으면서 도대체 왜 그렇게 믿지를 않느냐?" 그 잘난 "이성"이라는 것,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 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압니다. 그놈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증명 가능한 것"...... 그것에 누구보다도 집착했고 또한 고집과 오만을 부렸으며, 나의 자아는 본래 그와 같이 태어났습니다. 나의 인격은 빛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두움에 가깝습니다. 그것을 매 순간 너무도 선명히 느낍니다. 자기 삶의 괴로움과 슬픔과 상처 가운데에서도 타고나기를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태어난 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께로부터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진리를 알도록 허락받았으나 그들은 진리는커녕 영적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름에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또한 이를 그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언제나 그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만을 느낍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건대, 진리를 알도록 허락받은 자의 재능과 자질과 능력으로써 증거하니, 세상에서는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빨리 성공하도록 하는 능력과 함이 곧 칭송받는 재능으로 불리거니와, 하나님 나라에서는 스스로 남들보다 더 낮아지기를 자청하며, 또한 낮아짐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우러러볼 수 있음"에 기뻐하는 선한 영혼을 타고난 자, 바로 그 자가 하늘의 모든 보화를 다 누릴 특권을 허락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의 영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빛 너머에서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너무도 그들이 부럽고, 또한 경이롭고, 기쁘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하면서도, 그들의 압도적인 선(善)을 거울 삼아 나 자신을 비추어보건대 이깟 재능 하나 타고났답시고 지금도 남들 위에 서려는 마음을 아직껏 버리지 못한 나의 초라하고 가난한 영혼을 봅니다. 나는 교만을 비난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나 자신이 누구보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실로 받아들이기가 내게 죽기보다 더 힘든 과정이었음을, 나의 형제들에게 고백하고자 합니다. 더 솔직하게 토로하자면, 어쩌면 내 스스로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을 자청하는 것도 그분의 뜻이라고 우길 뿐 나 자신의 교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나 유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내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그 이름을 진실로 경외하고 열망하며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 이 하나뿐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뚯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하셨으되, 결국 그 하나가 나의 유일한 살 길이요, 온 힘을 다하여 붙들어야 할 구원의 동앗줄임을 나의 여정이 깊어질수록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그 자신의 증언대로, "장차 오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을 뿐입니다. 예비라는 것은 무엇인가? 귀빈께서 국빈 방문하실 적에 우리는 뉴스에서 화려하고 질서정연하고 완벽하게 조율된 예식들의 정점의 순간들만을 봅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과 정교함을 위하여 누군가는 밤을 지새우며 일하고 또 일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뉴스에 실리지 않았을 것이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뉴스를 보았을진대, 그 순간에 그들의 심정이 차마 어떠하였겠습니까. 그것이 예비하는 자의 길입니다.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도 정작 온 세상으로부터 전혀 아무런 인정도 이해도 존중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예비함으로 말미암아 "원래라면 하지 않았어도 될 추가 업무"까지 다 짊어져야만 합니다.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바"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의 길을 세례 요한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의 얼굴을 뵈었기에 광야에서 그 오랜 세월을 증거한 것이 아니며, 주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어떻게 이루실지를 훤히 다 알았기에 그와 같이 행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알지 못함", 하나님은 오직 길을 주실 뿐, 그 길을 얼마나 오래 걸어야 할지,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르러서 어떻게 될지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단 두 가지, "왜"와 "어떻게"입니다.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그분은 말씀해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이리 홀로 충성하고 열망한다고 하여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참으로 답답하고 막막한 심정 가운데에서도 결국,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느끼며, 그 가운데에서 그분의 임재를 목격하며 이를 증언합니다. 아직은 언어로써 세상에 밝히지 못할 증언들이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어떻게" 당신의 뜻을 이루실지에 대해서는 "왜"보다도 더 잔인하리만치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때는 바로 1초 전까지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형제들이 증언한 바와 같이, 그분의 때가 오기만 한다면, 마치 지옥 같은 인내와 기다림의 순간이 언제였냐는 듯이 그 즉시 한순간에 모든 뜻을 번개처럼 이루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낭만이 아닙니다. 처절한 싸움입니다. 나의 죄성은 "왜"와 "어떻게"를 걸고서는 끝까지 저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중요한 것은 "앎"이 아니었습니다(나는 지금 "앎"이라는 단어를 기독교 영지주의와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열망과 충성"이라는 어리석고도 단순하고 순진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어리석은 믿음이, 온 세상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 전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였고, 또한 증언하게 하였습니다.


주께서는 "나를 통하여" 뜻을 이루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일이라도 나의 영적 재능으로 말미암아 이를 원하는 이들이 내게로 몰려들 적에, 그들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나의 능력을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이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들은 즉시 나를 비난하고 심판하고 비웃고 모욕하면서 그리 떠날 것이지만, 그분께서는 내가 능력이 없다 하여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내가 쓸모를 다했다고 하여 나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가장 외롭고 약해지고 더럽혀졌을 적에 더욱 내게로 가까이 오셨고, 그때마다 내 안에 생명을 부어주셨으며, 언제나 진리로 나의 길을 밝히고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루시는 주권은 그리스도께 계시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거느리셨고 그분께는 죽음마저 명령하실 수 있는 권능이 있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하나를 끝까지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그분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내가 그분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만큼 그분의 역사는 미루어질 것이고, 따라서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이루실 더 크고 의롭고 고귀하신 뜻이 그만큼 연기되고 좌절될 것입니다. 주의 길은 곧 십자가를 통한 부활입니다. 그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상에 드러내실 것이며, 이로써 수많은 영혼들과 생명들을 보호하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를 진실로 절감합니다. 결국 성화는 나의 일이 아니요, 그분의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성화되었을 적에, 나 하나로는 결코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너무나도 고귀하고 의로운 일들을 행하였으며, 비록 허락된 시간이 다하여 작별하고 각자의 삶을 이어갈지라도 그 순간에 함께하였던 사랑과 자비와 생명과 기쁨들은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씨앗이 되어 세상에 뿌려질 것이고, 더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내가 불가능하다 하니 그 불가능의 원인을 그분께서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만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세속의 시공간을 떠나 하나님의 시공간으로 홀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는 곧 그 광야에서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짖는 영혼의 음성입니다. 그 시험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성령께 의지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고, 내 안의 죄와 악이 일어나서는 언제라도 나를 죽이려고 들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하여 신앙을 붙들게 될 것입니다. 도처에 어두움이 일어날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 나의 자아는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사망의 권세는 나를 공포 가운데로 몰아넣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담대하여야 합니다. 그 마음의 어두움 앞에서 영혼의 진실한 음성으로 외치십시오.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시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지금은 비록 내가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있으나, 장차 그분의 때가 이를 적에 나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 믿음 하나로 담대할 적에 아무리 어두운 공간이라도 비추어 밝히어질 것이고, 아무리 지독한 죄라도 사하여질 것입니다. 그리할 적에 주의 길이 곧아질 것이며, 나를 통하여 어느새 그분의 길이 펼쳐지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길은 가망이 없고 온통 절망뿐이나, 그분의 길이 펼쳐질 적에 나를 포함하여 모든 영혼들과 생명들이 구원을 얻고 어두움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나는 증언자입니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차는 자의 소리"입니다. 그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또한 주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주 앞에서, 우리 형제들은 그분의 길의 목격자이자 또한 "부활의 신비를 목격한 자의 증언"이어야 합니다.


이로써 광야에서 홀로 주를 따르는 자의 증언의 한 페이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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