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고백은 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요 증거입니다. 본디 사람은 그 본성상 의심과 거부와 부정을 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믿지 않거니와 심지어는 눈으로 보았다고 한들 그것마저 기어코 의심하려고 드는, 빛이 아닌 어두움에 지배당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때로 꽃들과 풀들과 나뭇잎들과 그들을 비추고 또한 그들로 인하여 아름답게 비추어지는 햇빛들의 일렁임을 보면서, 그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깊이 묵상하고는 합니다. 그들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불안이 없습니다. 그들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그토록 고통스러운 과정들과 시간들을 거치면서 최선을 다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느 철없는 인간이 "예쁘다", 그리고 "가지고 싶다", 그러니까 사랑과 욕망을 착각하여 그리 꽃대를 꺾은 결과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꽃은 자기를 꺾은 자를 원망치 않으며, 오히려 그의 손에서 그에게 한 찰나의 그 허무한 아름다움, 부질없는 향기라도 띄울 수 있음에 기뻐하며, 꽃은 그 부질없는 존재의 아름다움마저도 사랑하여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그 앞에서 진실로 엎드려 경배하건대, 나의 존재는 그 이름 없는 꽃 하나만큼이라도 경이로웠는가? 그처럼 아름다웠는가? 그처럼 순수하고 순결하며, 진실로 하늘을 영접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였는가......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은 늘 정해져 있습니다. 내 응답은 언제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만약, 별들마저도 숨을 죽였던 그 쓸쓸하고도 아프고도 고귀하였던 그 겟세마네 언덕에서의 그날 밤, 베드로가 주께 바쳤던 그 아름다운 헌신과 충성의 맹세가 과연 옳은 것이었더라면, 어찌하여 주께서는 그토록 아름다운 목숨을 건 충성에 대하여 "너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정하리라"(마26:34) 하는, 그리도 잔인한 은총을 허락하셨겠습니까. 나는 그날 밤의 베드로의 심정에 너무도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깊은 관상을 통하여, 나는 모두가 떠나간 뒤에, 그 텅 빈 가운데에서 홀로 남아, 주저앉아 닭처럼 목을 빼고 길게 울었던 그의 심정에 너무도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그의 죄가 곧 나의 죄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아마도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내 손으로 팔아 넘겼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살기 위하여 내 손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나의 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용서하셨다 하더라도, 그분을 영접하는 나의 심장은 결국 죄 가운데에서의 은혜 받음에 대한 기쁨이요, 또한 부끄러움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와 다르시기에, 그분께서는 의로움을 사랑하지 않으셨고 오직 부끄러움 하나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이미 아시나이다"(요21:17)하고 고백하셨을 때, 그 고백이 주를 세 번이나 부정하였던 그토록 처절한 부끄러움 가운데에서 드린 것이었음에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베드로에게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봐야만 내가 믿겠다"(요20:25)고 하였던 도마가,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였을 적에......(나는 "목격"이라는 단어를 결코 망령되이 쓰지 않았습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을 이루 다하지 못할 적에 겨우 단 한 마디를 내뱉었으니, 그 한 마디가 그의 존재 전체를 진동하는 것을,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누구나 수천 년의 시공간을 넘어서서 다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현재" 가운데에서. "내가 당신을 영접하며,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는, 그 절대적인 고백과 증거를.
나는 내가 이다지도 사랑하는, 광기를 넘어선 사랑과 믿음과 신앙의 주인 되신 그분의 얼굴을 모릅니다. 다른 영성가들은 재주껏 잘도 환영도 보고 환시도 보고 계시도 보고 그리도 다 보던 것을, 나는 기어코 단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비추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직접 뵙지 못한 분을 이리도 어리석고 미련할 만큼이나 사랑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리 글을 쓴다고 누구 하나라도 알아줄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나마 내게 가장 가까웠던 자들조차, 내 심장을 열어보이니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능력들은 오로지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이루신 일에 불과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저도 하리요 그 이상도 하리니"(요14:12), 그 말씀이 진실인 줄을 나는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그분께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즉 십자가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은총일 뿐입니다. 어두움을 비추어 밝힐 적에, 한 영혼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들어줄 적에, 그 어떤 어두움 앞에서도 내가 결코 두려워하지 않거니와 오직 성령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더욱 담대히 믿고, 또한 그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할 적에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주변을 능히 비추어 밝히니, 그것을 내가 진실로 사랑하거니와 그 일을 행할 적에 그리 행하다가 죽더라도 내게 전혀 아쉬움도 미련도 슬픔도 없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나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삶을 살아갑니까? 그러나 나는 그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은 나의 길일 뿐입니다. 내게 주어진 길이 이것이었고, 따라서 나는 내게 주어진 길을 진실로 걸어갈 뿐입니다. 내가 잘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사도들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영접하고 그분을 가까이서 뵙는 절대적인 특권을 누렸으되, 나는 그분의 얼굴을 모르고 그분의 목소리를 모르고 그분과 육적으로 전혀 함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고, 그분의 눈빛을 보았으며, 그분의 임재와 또한 그 마음과 성품을 느꼈으며, 깊이 교제하였고 또한 사랑하고 사랑을 받았으며, 결국, 보지 않고서도 믿고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분께서 진실로 기뻐하시는 뜻이란 걸, 그분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들었을 적에, 내가 어떠한 심정이었는지를 그분을 제외한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는 복되다." (요20:29)
세상은 갈수록 어두워져 갑니다. 오늘날 인터넷이 발달하여 도처에 선지자, 예언자, 스승들이 넘쳐납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각각 진리랍시고 떠들어대며, 신의 뜻이랍시고 확신에 차서는 그럴듯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나의 진심은 결국 내 스스로를 위한 것일 뿐, 다른 영혼을 일깨우고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때 오직 글을 쓰겠다는 신념은 지금껏 내가 소중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의지할 길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의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을 대신해주지 않으며, 그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깨달은 진리로 인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권력을 탐닉할 뿐, 결국 "인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신" 분의 뒤를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담대하여야 합니다. 나를 포함하여 한 트럭이나 되는 그 인터넷의 진리에 대해서 안답시고 떠들어대는 자들의 역할은 결국 길을 예비하는 것까지입니다. 입구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 뿐, 결국 그 길은 각자가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그 무엇도 신성하지 않습니다. 집단과 세력과 군중의 이름은 결코 신성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계시며, "나 한 사람에게만"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십시오. 그리하여 오직 그분께만 내 영혼 전체를 내맡기십시오. 그리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적에, 결국 그대는 그대 자신만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변화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본질적인 거듭남이 아닙니다. 죄와 업과 까르마의 윤회는 돌고 돌아서 결국 자기를 다시 어두움으로 종속당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실체를 나는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으로 말미암고 신성으로 말미암으며 진리로 말미암은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부활하셔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을 일깨울 것이고, 나로 하여금 이전에는 도망치고 외면했던 그 압도적인 삶의 시험들 속에서도 어떻게든 내일을 향하여 죽지 않고 살아서 나아갈 용기를 줄 것이며, 슬픔과 상처와 눈물 가운데에서도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진리의 빛에 따라서 살기를 열망하는 고귀한 마음을 선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지 말고, 온 세상을 믿지 말고, 예언자와 선지자들을 믿지 말고, 오직 내 안에 직접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으십시오.
언어와 말로써 신성의 빛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이들은 많습니다(물로 세례를 주는 것).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신께서 내 안에 이미 계신다"는 것을.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아는 자라면, 감히 내가 그분을 넘어서서 다른 누군가의 스승 노릇을 할 것이라고 그리 교만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 중에서는 스승이 없습니다. 사람의 역할은, 그가 그 스스로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될 그날까지, 잠시 통역자이자 인도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는 인도자를 떠나서는 그리스도께로 직접 홀로 나아갈 것이니, 인도자는 버림받음을 사랑하고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결국, 신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성을 열망하는 마음만큼은 다른 이가 대신해줄 수 없는 영역이며, 옆에서 아무리 이끌어주더라도 이 근본적인 마음만큼은 스스로 깨우쳐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사람의 욕심대로 억지로 그를 변화시키려 했을 적에는 항상 그 결과가 좋지 못하며, 설령 사람의 능력과 힘과 의지로 잠시 운명을 거스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한계가 있고 결국 역풍을 맞아서 이전보다도 더 못한 어두움 속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진실입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천명을 거스를 수 없는 법입니다. 순종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라는 건 없습니다. 믿으면 살 것이고, 믿지 않으면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평생 공포와 불안에 떨며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가장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란 결국 언젠가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잠시 빌려온 몸에 불과하며, 본래부터 나의 소유물이 아닌 바, 결국 "온전히 나 자신에게 속한 것"은 영이고, 영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심판자로써, 살아서의 모든 생 동안에 그가 어두움에 집착하였는지 빛을 사랑하였는지에 대하여 낱낱히 밝히고 그에 응당한 값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이는, 다른 그 어떤 스승의 존재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깨닫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 중에서는 나의 스승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의 시간"이 열렸을 때, 신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그에게 운명의 문이 열림이 허락되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실 때", 그 성령께서 그의 내면의 성(城)의 가장 깊고 은밀한 중심부의 성소(聖所)에 계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시며 그의 영과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 인도하실 적에, 마침내 사람의 영은 더 이상 지상의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들에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서 오직 하늘의 지혜만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 나아가는 자의 영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게 될 것이며, 그 빛을 만인이 다 목격하게 될 것이니, 그는 지상에서 외로운 바, 이는 그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의 환하게 빛나는 영을 차마 범접할 수 없기에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 그리스도께서 불러 모으신 자, 성령께서 임하신 자의 영은 특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분별할 수 없고 알아볼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마침내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아니하되 오직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이 지상에 곳곳에 숨어 있음을 보며, 또한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고귀한 영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선(善)을 사랑하고 행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마7:21)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더이상 인간의 껍데기를 보지 않고, 인간의 허물을 보지 않으며, 다만 인간 안의 영과 영혼만을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지 않으시되 오직 그 안의 영만을 보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뜻을 곧 자기의 뜻처럼 사랑하기에 지체 없이 그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고귀한 영의 안에서 그의 의지가 되며, 더 이상 그 자신의 의지는 없되, 아버지의 의지만이 곧 나의 의지가 됩니다. 결국, 하늘의 시간에 속한 자는 지금까지의 인간으로써 살아왔던 육적인 삶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 변화가 곧 거듭남이며, 이제 그는 육신이 살아 있는 채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천국은 미래에 죽어서 가게 되는 곳이 아니며, 천국이 곧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이시니,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살아서 천국에 입성한 것과 같고, 또한 살아서 매일을 천국 안에서 사는 것이 죽어서 천국 가기를 기도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높고 고귀한 아버지의 기쁘신 뜻입니다(요11:25-26). 세례 요한은 이 모든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그는 물로써 세례를 주어 그저 그의 영과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예비 작업만을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인 어두움이 그의 영과 영혼을 지배, 장악, 기만하는 패턴, 원리, 메커니즘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딱히 고귀한 것도 아니고 의로운 것도 아니며 신성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운명이라는 것, 숙명이라는 것, 결국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기인한 허무주의와 물질주의적 사고이며, 이 자체가 사탄의 교묘한 술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의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지상에서 그분 자신의 뜻을 완전하게 이루시는 것이니, 결국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곧 "신의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과 분리되어 있는 성부 하나님만의 그 자체의 독단적인 뜻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되 심판을 오직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그리고 그 외아들께서는 아버지가 허락하신 천지만물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를 "전 인류의 죄를 대신 값을 치름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것"을 위해서만 쓰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확히 봐야만 합니다. 신의 뜻은 악인을 징벌하고 영혼을 영원히 불타는 지옥불에 내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까닭에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영으로써 직접 느끼지 못하기에 그리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묻건대, 도대체 한 음성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분께서, 지극히 작고 가난하고 열등한 두려움에 떠는 영혼들을 지옥불에 던지심으로써 도대체 무슨 뜻을 이루실 것이며, 무슨 영광을 얻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습니다. 외아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12:47)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그리스도의 통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내 스스로를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단호한 원칙이 있습니다. 참된 "말씀"이라는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음성으로 밝히신 그것만이 해당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선지자, 예언자, 사도들의 말들은 똑같이 귀중한 것이기는 하되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신성"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말의 내용이 의로운 것과 말 자체가 신성하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자체로 생명입니다. 그저 관념적인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영원한 생명이 되며, 이것은 그분 자신께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그 유일하고 영원한 신성 하나로 인해서만 "작동"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믿는 자들은 결국 "나의 영과 영혼이 직접 그리스도와 연합(하나됨)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수많은 교회나 기독교의 전통들과 유산들은 물론 똑같이 귀중한 것이되, 엄연히 무엇이 최우선 순위인지만큼은 명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은 스스로의 말들이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으로써만 쓰임받기를 바랐을 뿐, 그리스도의 말씀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오늘날 믿는 자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직접 말씀보다도 더 중요시하는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역시도 그 자신의 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 말씀을 증거하기만을 바랐을 뿐,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의 말이 감히 그리스도의 말씀과 동등한 위격적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대우받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교리와 율법을 엄격하게 세운 까닭은 사람들이 거짓된 것들에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께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을 세우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세운 방편들이 그 본질이자 유일한 목적인 그리스도 자신보다도 더 높을 수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 이미 명확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바울만큼 자기의 죄를 뜨겁게 고백하며 또한 그의 약함과 가난함 가운데에서 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유일하고 진실한 사랑과 열망 하나만으로 그 숱한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이제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이 가난한 영혼이 감히 말하는 바, 바울만도 못한 자들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는 바울의 유산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려 드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실태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부활하시고, 권좌에 오르시고, 정당하신 통치를 펼치시는 것"이며, 신앙의 유일한 목적은 "나의 영과 영혼이 그리스도와 직접 연합(하나됨)하는 것" 이 하나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 유일한 본질과 목적을 위하여, 부수적인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버리고 내려놓음으로써 홀로 외로운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증언 중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이루시는지, 곧 그리스도의 "의지(WILL)"와 그 신성한 목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진리, 곧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모든 인간들을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게 하시는 것, 곧 "대속"(대신 속죄하여 값을 치르는 것)과 "중보"(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는 것)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곧 대속과 중보의 진리이며, 이것은 단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실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영적-실제적 사건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개시됩니다. 따라서, 십자가와 중보와 대속과 부활은 다 하나입니다.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에 관한 저의 교리적,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보편적 복음주의의 길> 브런치북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으니, 여기서는 좀 더 중요한 이야기에 집중하겠습니다. 처음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하여 간추리자면, 기존의 기독교는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어쩌면 광신적으로) 집착을 합니다. 물론, 믿음을 통하여 영적 실재가 말 그대로의 "실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은 매우 중요한 열쇠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인 신앙으로서도 이것은 능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으며, 온전히 성령 안에 거할 적에 이것을 믿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자녀이자 제자들인 우리 형제들이 어떤 "의지"를 품을 것인가, 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평생에 걸쳐서 추구하고 펼쳐나가야 하는 사명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 곧 "온 세상에 널리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이미 바울은 "내가 이방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취하고 서로 다른 얼굴을 한 까닭은 아무쪼록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바울은 애초에 자기가 어떤 모습을 취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 그리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거하사 자기처럼 "실제로 변화하는 것" 이것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확신컨대, 오늘날의 시대에서 바울이 사역하였더라면 그는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의 언어로, 불교인에게는 불교의 언어로, 이슬람에게는 이슬람의 언어로, 그리고 신비주의자들과 오컬트주의자들에게는 서양 신비주의와 오컬트의 언어로 그분을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일들에 누구보다도 능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죄가 그의 안에서 믿지 않는 그들의 심정에 공감하고 동조하게 만든 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는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왜 하필 예수님인가?"라는 질문에 내 자신이 크게 걸려본 바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크게 공감합니다. 그게 내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에 대해서, 비록 오해받을지라도 "기존의 교리적 신학적 방법론으로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의 합리주의, 이성주의의 장벽을 넘을 수 없다"고 말하며, 또한 "그렇다고 은근슬쩍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을 퉁 치고 넘어가려고 들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점에서 감히, 바울이 오늘날의 시대를 살아갔더라면 이러한 생각에 그도 동의하였을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서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주장으로 인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강력한 믿음을 형성하게 하였고, 그것이 그에게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에서는, 결국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라는 문제는 "판단 중지"하되, 다만 그러한 "영적 신화"를 실제라고 "믿음"으로써, 내 안에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와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자, 고 저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가? 복음이 이미 이루어진 자, 즉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내 안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자녀들은 하나님의 역사가 물질세계의 원리와 법칙을 넘어서서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 믿음 하나에 이르는 길은 각각의 자녀들이 저마다 다를진대, 결국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직 하나님 안에 속하지 않은 자가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해명도 없이 무작정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안의 죄성의 실효지배로 인하여 상당히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의 정신은 죄성적-관념적 구조, 즉 유물론적 관점, 물질주의적 관점, 실증-객관주의적 관점 등에 사로잡혀 있으며, 말하자면 "합리적, 이성적 사유로서의 과학을 진리라고 맹신하는" 모순적인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을 들이밀어서는 오히려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목적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를 먼저 직접 체험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물을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자에게 물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아무리 설명하고 가르쳐봤자 무용하며, 목마른 자에게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우선 마시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믿음"이라는 "작동하는 열쇠"를 우선 체득해보자, 는 것으로써, "실제로 작동시키는 것"에 집중하여 우선적으로 모든 신앙적 방법론을 집중하되, 십자가 부활이라는 중심 교리에 대한 각자의 교리적, 신학적 입장이나 이해의 차이 같은 것들은 나중에 정립하고 조율해나가더라도 늦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저는 다음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신앙적 고백을 근거로 하여 십자가 부활의 중보와 대속의 진리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용기내어 글을 씁니다. 첫째, 개인적 신앙으로서 저는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실제적으로" 모두 믿습니다. 아니, 애초에 믿음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제 안에서는 엄연한 사실(fact)입니다. 이에 대하여 굳이 논증하자면, 1) 저는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에고의 죽음을 먼저 체험하고 무의식적인 어두움의 죄성을 직시하도록 인도받았으며, 2) 이로써 내게서 이루어진 영적 성장의 결실과 열매들이 나 자신으로 말미암을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며, 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만 이루어진 일이고, 4) 보이지 않는 신께서 내게로 직접 내려오셔서 신성을 "보여주지" 않으시면 사람의 의심과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 신성의 빛이 개시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5)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차원으로 신성이 "충분히 낮아지고 가까워지려면" 일반적인 수단/방법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며, 6) 따라서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이라는 매우 특수한 예외적인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써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과 일상 속에서 신성을 체험하고 신과 가까워지기를 소망하며, 이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쟁적인 요소들은 우선 차치하고, 신성의 보편적, 일반적 은혜와 그 중요성 그리고 거기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공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므로 사적 입장에서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은 그 자체로 사실이지만, 공적 입장에서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은 "신성이 모든 영혼의 무의식 안에서 빛으로 계시되게 하는 것", 즉 진리가 각 개인 안에서 영적 실재가 되게 하기 위한 "작동 가능한 열쇠(코드)"로서의 영적 신화로서 자리매김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의식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무의식은 집단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집단적 무의식은 어두움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으며, 모든 인간들은 이로부터 그 어떤 예외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에게 주어진 실존적인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 짐의 무게를 목격한 자는 절망합니다. 그렇다면 이 억압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그 어떤 길도 진리도 생명도 없단 말인가? 사람은 그저 우연히 태어나서는 아무 때에나 죽어 없어지는 지극히 허망한 존재일 뿐이라는 말인가? 그 문제를 마주한 자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가 아닌가" 따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입니다. 이를 위하여, 1) 죄 없는 완전한 인격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외아들이 계셨고, 2) 아들과 아버지가 완전히 하나되어 계시며, 3) 외아들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류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4) 부활하사 "영화로운 완전한 몸"으로써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온 세상에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계시하셨으며, 5) 그 이름을 믿는 누구라도 하여금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완전하게 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고, 6) 이것이 진리이자 생명으로써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 이것이 "영적 신화"로써 모든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 안에 내재하고 있는 근원적인 신성으로의 연결 "코드"라는 것, 이것을 그저 관념적 유희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그 실재 안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들어 하나가 될 것인가, 의 실존적 결단 앞에 그가 마침내 홀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인격적 원리나 법칙" 따위를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령 어떻게 상상하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비인격적 원리나 법칙과 실제로 교제하고, 교감하며,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인격이며,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영원과 초월"은 본래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으되, 사람들이 신과 일상적으로 교제하고 교감하며 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 보편적인 복음의 진리가 계시되려면 반드시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합니다. 오직 신성이 인격으로써 드러나야만, 비로소 사람은 신을 상상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교감하며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은 무의식의 어두움에 지배당하는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죄 없이 완전한 인격"이셔야만 하며,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어두움의 중심부, 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이기시기 위하여 반드시 그 외아들은 "부활"하셔야만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언어로써 진리를 설명한 것이지만, 결국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은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영혼이 실제로 변화하는 것"이고, 이 유일한 목적에 내가 완전히 정렬되는 순간, 영적 신화는 이것을 "작동시키는 열쇠"로써 내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먼저 이해해야 믿는다, 는 틀린 말입니다. 사람은 이해하지 않으면 믿지 않고, 이해하면 더욱 불신하는 동물입니다. 본래 우리의 죄가 그렇게 의식적 사고를 진행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점을 달리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나중에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이해가 "인간적 사고"라는 불완전하고 열등한 인식, 분별의 한계를 넘어서, "신의 섭리"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나의 영혼이 변화(구원)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실제로 신을 만나고 신성과 연결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신성을 통하여 신과 하나가 되는 것, 말입니다.
신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신을 분석할 필요도 없으며, 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세속의 언어이고 인간의 언어일 뿐입니다. 신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증명한다 해봤자, 나의 영혼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죽음 앞에서 사람은 공포에 떨며,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미지의 죽음이라는 공포를 맞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 내 영혼이 실제로 깨어나고 열리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오직 "신을 만나는 것, 신성과 연결되는 것" 이 하나만이 중요하며, 이 하나의 목적을 분명히 할 때,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가 선명해질 것이고, 또한 내가 무엇을 따르고 받아들이고 행해야 할지 역시도 선명해질 것입니다.
먼저 신을 믿으면, 나중에 신을 이해하게 됩니다.
먼저 신을 사랑하면, 나중에 신성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실존적 결단, 이 하나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