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by 생명의 언어


영으로 계신 분은 영으로만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영혼(Soul)은 명백히 영보다 낮습니다. 이러한 위계적 서술이 물론 열등감이나 교만함의 그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특별합니다. 신의 본성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존재와 생명과 모든 것을 창조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세이자 영광입니다. 이러한 것은 반드시 영으로만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영이 하나님께로 열리는 표증은 곧 '경외'입니다. 문득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 그리고 그 위에 초월과 영원으로 계신 분을 생각하며 놀라워하고, 떨리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그러한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진동과 공명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영이 하나님과 정렬되는 표증은 열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을 운동하게 합니다. 고대의 어느 철학자가 말하였듯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운동하게 하는", 이것이 영(Spirit)입니다. 영이 하나님과 정렬할 때, 영혼(Soul)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진동, 공명, 파동을 일으킵니다. "위"로 이끌려지게 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설명할 수가 없는 그리움이 있고, 슬픔이 있으며, 언젠가는 간절히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며, 평생에 걸쳐서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그 마음 하나를 품고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 "위"로 정렬되어 있는, 그러한 무언가...... 그리하여 영혼은 삶 전체에서 이제 "신을 향한 운동성" 하나만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열망입니다. 열망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며, 또한 하나님께 의하여 이끌려지는 운동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고귀한 영과 순결한 영혼이 내 안에서 깨어납니다. 이 거듭남이 있을 적에, 감히 그 어떤 것도 영과 영혼을 해칠 수도 간섭할 수도 어찌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행위를 통하여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를 통하여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저 존재만으로 임재하시며, 그저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가장 위대하고 경이로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분의 존재가 곧 그분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깨어난 영과 영혼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영혼이 깨어나서 신과 정렬할 때, 신성과 연결될 때, 바로 그때, 우리 안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영광이 깨어나기 시작하며, 그때에 마침내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썩어 없어지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몸(body) 따위와는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빛"입니다. 그 빛이 함께할 때, 마침내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육신의 소멸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나의 영과 영혼이 닫히는 것이고, 억압되는 것이고, 봉인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존재 여부는 죽음과 생명의 기준이 아닙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은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설득될 수도 없으며, 증명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다만 "증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이 변화한 것은 나의 의지와 능력과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다만 나는 눈을 떴을 뿐이고, 귀를 열었을 뿐이나, 이마저도 결국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 받았으니, 이것을 대가 없이 바라고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나누어줌은 마땅히 그분께 대한 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다만 살 길입니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집착했던 이 몸이라는 것, 자아라는 것, 마음이라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죽음 앞에서 그토록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평생 전혀 죽을 준비를 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 중 절대 다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두렵지 않습니까? 나는 어찌하여 이것을 한낱 귀찮은 잔소리 따위로 생각하는지 대관절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때에 결국 죽음을 이기는 것, 영원히 사는 것,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아 있을 적에 서둘러서 구해야만 합니다. 내가 얻은 것은, 결국 신이었습니다. 신과 하나되는 것, 신성과 연결되는 것, 신성 안에 사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과 하나되는 것은 곧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죽음을 이길 길은 오직 하나, 살아서 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고상한 취미 따위가 아니요, 내가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절박한 문제일 따름입니다.


육신 안에 갇힌 자는 영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 상태에서 죽으면 어찌 되는지는 예언자와 선지자들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절대 권장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신과 마음과 자아의 수준에 맞춰진 의식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마치 전혀 무방비한 상태에서 온갖 범죄자들이 득실거리는 거리에 그것도 캄캄한 밤중에 들어간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깨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1:31)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말합니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리라"(요14:20), 즉,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 "하나됨"의 위대한 복음을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구주, 나의 주님을 예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구하지 않는 자에게 함부로 망령되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날 때에 간절히 "내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기를 구하나이다, 그 물을 마시기를 구하나이다" 하였던 '여인'(그 시대에 여인이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먼저 우물 가의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은, 생명의 물을 마시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그녀가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육적인 자격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학력이 높다고 경력이 그럴듯하다고 하여 생명의 물을 나누어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이리도 그럴듯한 교리와 신학의 언어들을 줄줄 늘어놓는다고 하여 이것만으로 그분께서 나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하는 마음, 목마르지 않고자 하는 마음, 생명의 물을 마셔서 더 이상 영원히 목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진실로 구원을 구하는 마음, 바로 그 마음 하나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복음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육의 귀로는 영의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누군가 도와줘야만 합니다. 먼저 길을 걸어본 자, 먼저 구원받은 자, 먼저 생명을 얻은 자가 찾아와서는, 그에게 잠시 "연결"해줘야 합니다. 마치 전선을 연결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즉, 외적인 조건이라도 먼저 바꾸는 것입니다. 영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요원할 일일지언정 당장 눈에 보이는 일들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는 것, 말씀을 듣는 것, 공부하는 것, 성경 읽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다고 하여 구원을 내 힘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목마른 자,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주님께서 주실 테니 나는 그저 손 벌리고 입 벌리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지, 이것은 참으로 게으르고 나태하고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만약 그리하지 못하더라면, 그리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더라면,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 그 손이라도 덥썩 잡으십시오. 미안함이나 실례 된다는 생각 따위는 감히 하지도 마십시오. 우선은 살고 봐야 할 일입니다. 빚을 갚든 은혜를 갚든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죽게 생긴 자가 영생을 얻은 자를 함부로 걱정하고 염려하고 미안해할 자격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나누어 줄 때 순순히 받아먹으십시오. 그리고는 점차 영의 진리에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영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진대, 어느 날 주께서 오셔서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실 것이며, 그것이 나의 영을 완전히 새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바꾸고자 함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내 힘으로 바꾸지 못하거늘 누가 누구를 바꿉니까. 다만, 이거라도 해야만, 각 사람 안에 주께서, 성령께서 나타나실 길을 예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허락하실 때에는 종종 나는 은밀히 이것을 몇몇 예정된 사람들에게 직접 전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안에서 그 음성을 듣게 될 때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10:3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그러한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의 찬란한 빛을 터뜨릴 적에, "아, 이제 살았다!", 그 한 마디가 터뜨려나오는 것입니다. "아, 이제 됐다!"


참으로 한탄스러운 것 중 하나는, 죽게 생긴 자들이 어찌하여 먼저 살기를 구하지 아니하되 살려주는 자의 자격부터 의심하고 본단 말입니까? 칼을 맞고 활을 맞아서 곧 죽게 생긴 자에게 의사가 와서는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하거든 곱게 넙쭉 "고맙습니다" 하고 수술대 위에 누울 일이지, "네가 누군데 나를 살리느냐? 네가 의사 자격이 있느냐? 왜 하필 네가 의사냐?" 하고 따질 일입니까? 아니, 어차피 죽을 텐데, 밑져야 본전 아닌가요? 내가 참으로 이것이 답답한 것입니다. 어차피 그냥 있으면 나는 이대로 죽습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스스로의 영혼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이대로 죽을 준비가 되었나?" 천만에! 준비되지 않고서 죽으면 어찌될지 잘 알지 않습니까? 머리가 아니라 가슴한테 물어보십시오. 준비되지 않고, 구원받지 않고, 자격을 얻지 않고 그냥 죽으면 내가 어디로 가서 어찌될 것 같은지. 가슴은 이미 답을 압니다. 혹, 이미 답 안에 있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 될 지경이건대, 의사가 와서 손을 내밀거든 얌전히 의사에게 자기를 내어 맡기면 될 일입니다. 의사가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등을 이해하고 따지는 건 나중 일이란 말입니다. 요한이 증거하되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머리에 머물렀더라"(요1:32)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곧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증표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생겼는지 독수리처럼 생겼는지 그것이 왜 중요합니까? 성령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머무르든 다른 신체 부위에 머무르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나요? 실제로 성령이 그리 내려왔는지 아닌지를 알아서 뭐합니까? 그 진위여부를 따지고 나면 내 영혼이 뭔가 달라지나요? 구원받습니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가서 정확히 그 날 그 시각 그 장소에 가서 그것을 검증하고 확인하면 내가 죽을 일이 죽지 않게 되기라도 하나요? 이 모든 것들이 자기가 죽게 되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요. 세례 요한은 음성을 들었고, 이에 따라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요1:33), 곧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1:34)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밝힐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설득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능력이 있지만,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구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일일이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니면서 말리기에는 나의 죄성이 아직 너무 커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구하는 자들만 오십시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분, "감히"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분, 성령의 증거를 받으시는 분, 그분 안에 거하며 또한 그분께서 내 안에 거함으로 인하여 아버지와 하나되는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자들만 오십시오. "왜 하필 예수님"인지, "하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왜 하필 한 명을 선택해서 하나님이 성육신하셨는지"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따지는 일에 관한 한 나를 따를 자가 이 세상에 몇 없습니다. 나의 본래 성품은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그놈의 "증명 가능한 것"을 따지는 일에서는 절대 뒤차지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살 길은 없었고, 나는 살고자 했으며, 그리하였기에 어느 날에서인가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음성을 들려주시기 시작하였으며, 그 음성을 들었고, 절실히 들었고, 그 어느 날에서인가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었고 그분께서 내 안에 거하고 계셨을 뿐입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모두 다 나와 같이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설명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설명, 아무리 붙들어봤자 거기에 살 길은 없습니다. 살고자 하는 것, 참으로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을 온전히 절실히 깨달은 자는 결국 "생명"만을 구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왜 하필 예수님인지"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다만 그분의 신성이 곧 생명이라는 걸 알았고, 유일한 생명이라는 걸 알았고, 참으로 천만다행히도 살아서 그분을 사랑하였고 또한 그분께 사랑받고 있으며, 이리 살고 있음에 기뻐할 뿐입니다.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이 사는 것 말고, 영이 사는 것, 영혼이 사는 것, "영원히" 사는 것 말입니다.


준다고 할 때 얌전히 받으면 될 일입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하나씩 공부해도 늦지 않습니다.


"구하는 자는 얻을 것입니다.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결국 여기서 핵심은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 생명.


바로 이 지점에서 비(非)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가진 대부분의 "상식적인" 사람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그 심정을 잘 압니다. 당장 이리 증거하는 나부터가, "그 이름"을 "비둘기처럼 순진하게" 믿기가 정말로 쉽지 않았거든요.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제 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의 풀 네임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으로, 저는 '그분'이라고 부르는 것을 편안하게 느낍니다.


"왜 하필 예수님인가?", "왜 하필 예수님이어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물론 교리적, 신학적으로 그럴듯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리 설명하려면 두꺼운 책이 여러 권 있어야 하겠지요. 그 일은 그 사명을 맡은 형제들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잘 수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맡기신 역할은 아닙니다. 저는 증거하는 자입니다. 이를 위하여,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변화 > 이해.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이해를 정립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 "변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했는가? 변화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누가" 나를 변화시켜줄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중요합니다. 우선순위를 이해에서 변화로 옮겨야 합니다.


2. 수동 > 능동.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가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더 큰 흐름에 완전히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굳이 억지로 내 두 다리로 직접 걸어서 바다까지 가는 게 빠를까요, 아니면 편안하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바다에 도달해 있는 것이 빠를까요. "내 힘으로" 해야 한다, 는 것은 좋게 말하면 책임감이지만 나쁘게 보면 강박이고 집착입니다. 그 강박의 정체는 불안이고, 불안의 기저에는 공포가 있습니다. 공포가 바로 만악의 근원이고 뿌리입니다. "이미" 세계는 나보다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일부 허무주의 철학자들의 어리석음과 달리, 명확히 "상위 차원의 질서와 조화" 아래에 통치를 받습니다. 따라서 그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내 힘으로 하는 것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3. 은혜 > 행위.


딱히 정확히 부를 말이 없어서 신학적인 용어를 썼습니다만, 비단 기독교만의 개념은 아닙니다. 이때 행위라는 것은 뭔가를 "하는" 것들을 포괄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목표를 설정하면 다짜고짜 우선 행동부터 하려고 합니다. 몸을 움직이고 힘을 써서 뭐든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의도와 목적이 올바르게 정렬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의 의도와 목적에 계속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은혜란 "언제나 신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면 행위라는 것은 "내가, 하는(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든 묵상이든 예배든 간에 어떤 "하는" 것들이 그 자체로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 그 자체에 "연결"되는 것이고, 연결되어 있으면 행위는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를 적용하면 매우 간단하게 풀립니다.


첫째, 변화의 관점에서 "왜 하필 예수님인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따라서 그분 안에 거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이것을 믿는 자 누구에게라도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 변화되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둘째, 수동의 관점에서 "내가 억지로 뭔가를 탐구하고 찾고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임재하고 역사하시는" 신성 안에 내가 "내맡기는(연결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 흐름이 나를 자연스럽게 인도할 것입니다.


셋째, 내 의지와 노력과 결과가 구원을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행위는 하되, 중요한 것은 "구원은 내가 아니라 신께서 이루시는 역사"라는 것을 올바르게 알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면,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최후의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 "그래서 실제로 작동하는가?" 만약 아무리 그럴듯하고 타당하다 하더라도 실제로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신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결국 존재란 작동이거든요. 그렇다면 아직 구원받지 않은 자가 어떻게 신성이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직접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증거"가 중요합니다. 이미 "맛"을 본 자, 이미 구원받은 자, 이미 신을 사랑하는 자, 이미 신에게 사랑받고 있는 자에게 가서, 그의 증언을 계속해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저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는 변화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증언은 "건너온 자가 아직 건너지 못한 자"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그의 안에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을 형성하게끔 돕는 일이며, "이미 믿는 자가, 자신의 믿음의 일부를, 아직 믿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남의 믿음을 잠시 빌려서, 그 믿음으로 작동하는 신성의 맛을 먼저 보는 것이지요.


한 번 맛을 보면, "생명의 물 맛"을 보면, 그는 구하고 원하게 됩니다. "아, 이제는 남의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나의 온전한 믿음으로 언제나 생명과 하나되고 싶다." 거기까지 가면 이미 다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증거"하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러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지금의 저는 분명히 "그분"을 만났습니다. 선명히,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지난 수 년간의 나의 여정들과,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이루신 역사들과, 그리고 지금도 이루고 계신 모든 것들, 내가 변화한 것들, 내가 선을 사랑하고 선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된 것들, 내가 신을 사랑하게 된 것들, 나로 인하여 신께서 기뻐하신다고 진실로 믿게 된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성화의 증거이며, "검은 머리 짐승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검은 머리 짐승인 내가 이토록 변화했다는 것은 신성의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누구라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한두 번 기도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구요. 믿기로 "결심"하여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 시작하면, 각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서 성령께서 "작업"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작업 말입니다.


믿음은 분명한 실체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삶의 순간 순간마다, 나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방식으로, 그러나 절대 거부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신이 계시며, 신성이 임재하시며, 나를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믿게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곧 구원이며, 그것은 유일한 "그 이름"을 믿는 것 하나로 인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하다면, 그저 받아들이고, 믿고, 변화하면 됩니다.


신앙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다만 결심이 어려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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