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아들의 계심을 증거하는 것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믿지 아니하느냐." (요14:10) 하나됨의 신비는 곧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언어, 지식, 관념으로는 이 하나됨을 인식과 분별의 틀 안에서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상호내주'이니, '인성과 신성의 관계'이니, 그러한 교리적 신학적 언어로써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를 가리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됨의 신비를 규정하지도 정의하지도 못합니다.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그분의 하나됨은 오직 그분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 개념적 이해는 더 이상 중요치가 않습니다. 관념은 실재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관념은 자아(ego)이고 실재는 영(Spirit)이니, 영이 드러날 적에 자아의 어두움(죄, 악, 어리석음)은 능히 비추어 밝히어지나(다른 말로, 온전하여지나), 반대로 관념을 소유하고 통제한다고 하여 영적 실재를 손에 넣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왕께서 사람을 오라 부르시면 사람이 왕께로 이르게 되나, 반대로 사람이 왕을 부른다고 해서 왕께서 사람에게 행차하지 않으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 높은 존재가 더 낮은 존재를 통치하고 다스립니다. 이것이 영적 위계이자 서열입니다. 세상의 위계와는 많이 다릅니다. 세상의 위계는 폭력과 공포와 강제성으로 인한 것이나, 하나님 나라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안에서, 위계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는 곧 완전하고 영원한 빛이시며, 그 완전성, 영원성, 창조성의 삼위일체의 신적 본성 그 자체가 비추어지고 드러남에 따라서, 그 빛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존재의 수직선의 위계와 서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서이자 조화입니다. 본디 질서와 조화는 수평적이지 않으며, 자비와 사랑은 오직 수직적입니다. 높음과 낮음이 제자리를 회복하고, 높음은 이끌고 낮음은 순종하고, 높음은 책임을 지고 희생하며 낮음은 진실로 경외하고 열망하며, 높음은 이루고 낮음은 동참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때에, 마침내 현상계의 필연적인 상대성과 이원성과 대립과 분열로 말미암은 하위 차원의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이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자아는 낮아지고, 영은 높아집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적에,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며, 그때에 영과 영혼과 의식은 삼위일체의 본래적 진리의 면모를 되찾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아래의 것으로는 위의 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온전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아로는 영을 어찌할 수 없으되, 다만 영이 깨어날 적에 자아는 저절로 따르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이치이지만, 진실로 깨어서 받아들이기는 지극히 어려운, 하늘나라의 다스림의 이치입니다.
아, 이것이 결국 "영접하는 존재 자체"인 것입니다. 이것을 말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미 거듭난 자의 눈, 자녀의 눈,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분의 눈으로 보면, 영접하는 자와 영접치 아니하는 자가 너무도 선명하게 분별이 됩니다. 이것은 세속적 분별과는 다릅니다. 자아의 관념적 분별은 곧 옳고 그름으로 말미암아 옳은 자가 이익을 보며 틀린 자를 죽여 없애는 목적성을 갖지만, 영적 분별은 옳은 자가 틀린 자를 섬기고 희생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아의 분별은 자아의 의지와 노력과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지만, 영적 분별은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을 통하여 드러나시는 주권적 활동입니다. "누가 하느냐?"가 엄연히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등감이 아닙니다. 굴복이 아닙니다.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이 단 하나의 유일한 항성의 "지배력" 하에 통치를 받을 적에, 행성들이 항성의 중력의 영향 하에 일정한 궤도를 따라 공전하는 것을 어찌 "굴복"이라 여기겠습니까?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이며, 항성의 통치 하에 행성들이 제 위치를 찾고 위계를 회복할 때, 행성계 전체에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는 "나는 행성이요, 그분께서 유일하고 영원한 항성이시며, 나는 그분의 통치를 받는 존재이다"는 것을, "행성이 행성이라는 것을 인식한 의식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행성들은 "자기가 스스로 항성인 줄로 착각하는 의식 상태"이며, 이것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아가 곧 죄성의 굴레 하에 고통받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항성이 행성을 저주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다만 행성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와 착각 때문에 일어난 고통일 뿐입니다. 죄는 어리석음에서 비롯하며, 은혜는 통치의 질서가 회복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의 자세를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영이 바로서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의 상태가 아무리 좋아져봐야, 존재의 중심인 영이 바로서지 못한다면, 영이 약하다면, 영이 교만하다면, 결국에는 단 1%의 어긋남만으로도 시간의 문제일 뿐 죄성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녀들을 "무조건 복종하기만 하는 노예"로 만드시고자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스스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 행성들을, 항성의 지배력 하에 제 위치를 따라 공전(순종)토록 하심으로써, 행성들에게 회복된 평화(구원)를 이루시려는" 의도와 목적만을 가지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행성된 자에게 굴복이겠습니까.
"근원"에 대한 참된 자각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무엇이 근원인가? 아니, "누가" 근원인가? 이 질문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는 영혼은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나보다 "먼저" 계셨던 분, 이 표현 자체는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자체가 우리의 육과 영, 그리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묵상해볼 만한 말씀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 모두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영접하지는 않습니다. 모태신앙이라 하더라도, "참"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언제나 삶 속에서 일정한 성장을 이룬 이후의 일이며, 특히나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빛에 눈을 뜨는 이후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보다 늘 "뒤에" 오십니다. 나는 "먼저" 삶을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에서인가, 그분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기묘한 경험입니다. 아니, 경험이라기보다는 인식이랄까, 이해랄까, 무어라 말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삶의 어느 지점까지는 분명히 "나"로서 살아온 것 같은데, 언제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그 어느 시점부터는 내 삶이 시련이든 은혜든 축복이든 간에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었고, 지금은 그분께 완전히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뒤늦게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리 "눈을 떴을" 적에, 과거에 내가 나로서 살아왔던 그 시간들마저도 그분의 뜻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바로 "그분의 때"를 예비하시기 위한 과정들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영적으로 열려 있는 부모의 아래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타고난 영적인 자질과 재능들을 억압당하면서 뒤틀리게 컸을지도 모르고, 또한 어려서부터 소외당하고 방황했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이른 나이에 영성에 눈을 뜨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 "영혼의 어두운 밤"이 없었더라면, 삶 속에서 이토록이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의 존재와 삶은 그분께서 빚으신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며, "창조된" 것입니다. 나의 영과 영혼은 그분의 "도구"로써, 그분께서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하여 들어올리시매 이를 통하여 그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참으로 설명하기가 난감한 그러한 느낌입니다. 내가 나인 채로, "나-임"이 없어지고, 나의 존재의 중심이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그러면서도 특별히 고귀하거나 그럴듯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평범한 삶 속에서 문득 찾아오는 임재와 역사들과 교제하면서 이리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은 내 "뒤에" 오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보다 "이미" 앞서 계셨다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 알게 됩니다. 이것은 깊이 묵상해볼 만한 주제입니다. 내가 다른 영혼이나 특정한 장소, 공간 등을 생각하며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내가 기도하였으므로 그분께서 은혜를 허락하신 게 아니라, 내가 기도하기도 전에 그분께서 "이미" 먼저 그들을 축복하고 은혜를 주셨으며, 이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기도를 그분께 올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기도하였으므로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임재하신 것을 기도드림으로 알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예비하시는 분이며, "후행(後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먼저" 계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영의 감각입니다. "나"라는 존재 전체에서, 자아(ego)는 탄생 이후의 전반기의 삶을 먼저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은 먼저 자아를 형성하고 자아로써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의 어느 지점에서, 자아의 인식과 관념 안에서 이해되기 어려운 삶의 순간들과 과정들을 마주할 적에, 마침내 뒤늦게 자아보다 "더 높은" 나의 존재들이 깨어나는 것을 봅니다 : 어느 순간 영혼이 깨어나서는 그의 에너지를 퍼뜨리며, 어느 순간 영이 깨어나서는 그의 "지배력"을 행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 순간에 마침내 자아는 깨닫게 됩니다 : "아, 자아로서 먼저 살기는 했으되, 자아보다 영과 영혼이 먼저 계셨구나." 자아가 "선행"이 아니라는 것, 자아는 오히려 영과 영혼이라는 먼저 계신 "참된 나"로 인하여 "후행"된다는 것. 이것은 바로 "영접"하는 자의 안에서 일어나는 "영의 선행성"입니다.
자아(ego)의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은 "증거하는 자"까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완벽하게 그 모범을 보였습니다. 증거하는 자, 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자아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관한 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첫번째 진실(Truth)은, "자아는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아에게는 권능(POWER)이 없습니다. 자아는 그저 설계된 대로 움직이는 기계,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그것은 딱히 "생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기계가 10년을 작동했다고 하여 그것을 기계의 "늙음"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없듯이 말입니다. 10년을 살았든 하루를 살았든 기계는 그저 기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아 역시도 나이를 먹었다고 하여 딱히 "삶"의 깊이가 더해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아는 원죄 중심의 메커니즘에 의하여 작동하므로, 오히려 "연식"이 오래될수록 점점 더 어두움이 어두움을 낳고, 그 어두움이 다시 무의식에 쌓여 구조 전체를 강화하는 죄성적 반복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막9:37)이라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한 채로 자아로서 이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것"에 대하여, 가슴 깊이 부끄러움을 순결히 간직한 자, 성령께서는 그 자를 선택하셔서 임재하실 것입니다. 영접하지 못함은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이 사람 안에서 어두움의 지배력 하에 놓이면 알지 못하므로 곧 교만하여질 것이되, 사람 안에서 빛의 지배력 하에 놓이면 알지 못하므로 곧 부끄러우며, 그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기를 열망할 것입니다. 육신의 조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나이가 아무리 많든 적든, "인생"의 경험이 아무리 많든 적든, 인간의 지식과 능력과 힘이 아무리 강하든 적든 간에,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람이 이 생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섰을 적에, 그분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아가 한평생을 목숨줄이랍시고 움켜쥐고 살아왔던 세속적인 수많은 집착과 욕망들은 그 앞에서 아무런 성과도 쓰임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 날에, 그분 앞에 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께서는 오직 하나만을 물으실 것입니다 : "너의 살아 평생에서 무엇을 열망하고 기뻐하면서 살았느냐?" 그분의 음성을 듣는 자는, 곧 그분께서 "주로" 누구를 택하여 말씀하시는지를, 그분의 "성품"을 대략 짐작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할 적에, 이른바 "신뢰놀이"라고 하는, 아이에게는 자기의 키보다 더 높은 책상 위에서, 부모가 한 걸음 떨어져서는 팔을 벌리며 말하기를 "안심하여라 내 아이야, 내가 너를 반드시 품에 안고 보호할 터이니, 그곳에서 뛰어내려라"고 할 적에, 그 아이가 아무런 의심도 두려움도 심지어 비장함조차도 없이, 너무나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을 봅니다. 영접하는 자는 바로 그 모습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내가 지금껏 기도하고 묵상해왔다는 것이 결국에는 저 아이의 저토록 순결하고 진실한 영혼에 비할 데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순결함을 "열망"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는 전문적이고 능숙하기를 바라지 않되 오직 바보스럽고 순결하기를 바라며, 능력이 좋고 재주가 좋기를 바라지 아니하되 오직 선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를 바라며, 타인을 심판하고 내맘대로 하기를 바라지 않되 오직 이타심과 희생과 헌신과 섬김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인간의 바람에서 성령의 "바람"으로(이것은 일부러 중의적인 표현으로 쓴 것입니다), 바람 자체가 변화하게 됩니다.
결국, 자아는 이 모든 것을 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혼과 영에게 있지, 자아에게 있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한평생을 집착하여 붙들고 살았던 나의 육신은 언젠가 허락된 수명이 다하면 썩어 없어질 것이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숨쉬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없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개체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망상적 집착에 불과하며, 자아의 수명 또한 엄연히 한계지어져 있습니다. 죽어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적에, 결국에 그분께 이르는 것은 육신도 자아도 아니요 오직 영혼과 영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선행성"입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인식과 분별보다도 아이들은 자기 삶의 "체험"이 더욱 중요합니다. 아이는 주변의 시선이 어떠하든 간에 어머니를 보면 달려가서 그 품에 안깁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순간, 주변의 시선을 염려하고 "체면"을 걱정하여, 이제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조차도 당신께로 나아가지도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졸업식 날에 자기를 보러 오신 "늙은" 부모가 창피하다 하여 이를 버리고 외면하고 모른척합니다. 나는 이 "외면의 죄"가 곧 나의 죄임을 이미 압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이끌림대로, 순수한 영의 의지대로, 아이의 의식과 정신은 온전히 내맡깁니다. 아이들은 "내일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내 스스로 안전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자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아는 창조할 수 없습니다. 자아는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보다 앞선 영과 영혼이 모습을 드러내고 움직일 적에, 이것을 "목격"하고 "체험"하여 이에 대하여 증언할 수만 있을 뿐입니다. 자아로는 절대 불가능했던 것들이, 자아보다 앞선 영과 영혼이 깨어날 적에는 정말로 가능해지더라, 바로 그 "증언" 말입니다. 자아의 역할은, 내 안에서 나보다 "앞선" 분들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적에, 이를 체험하고 목격하며 증언하는 것뿐입니다. 자아는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자아는 삶을 창조할 수 없고, 자아는 삶을 인도하고 이끌 수가 없습니다. 이 "선행성"을 온전히 알아야만 합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고,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언뜻 "나"처럼 보일 뿐입니다.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려면 기도와 묵상이 매우 깊어져야만 합니다. 사람의 의지로 일을 진행할 때에는, 사람이 그 일의 내용에 대해서 일일이 모든 것을 다 알아야만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를 낱낱이 알고 이를 상대에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실 때에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내게 "사전에" 보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언제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오셔서는,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으신 채로, 그저 그분의 의지와 주권에 따라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는, 불현듯 또 다시 떠나십니다. 떠난다기보다는,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나, 우리 자신의 자아의 한계로 말미암아 그분께로부터 주기적으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할 뿐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이듯이. 자아는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자아가 다 무용한 것인가? 허망한 것인가? 아닙니다. 자아 역시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나"의 일부입니다. 다만 주인이 아닐 뿐입니다. 자아의 역할은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자아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므로 1) 그 뜻을 알 필요가 없고, 2)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3)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때가 임박할 적에는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모든 것을 나를 통하여 이루실 뿐입니다. 나는 그저 나의 존재 전체를 그분께 내어드림으로써 그분께서 역사하시도록 "동참"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아의 일입니다. 그분께서 이리로 가라 하시면 이리로 가고,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시면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그것이 비록 내게 이해가 되지 않고, 또한 전혀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불안하다 하더라도, 결국 그분의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이 즉시 한순간에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의심과 불안은 우리에게 참으로 절박한 문제인 것이나, 그 가운데에서도 "나의 이해를 넘어서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인도하시는" 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우리를 마침내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므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닙니다. 내게는 "힘"이 없습니다. 힘은 권세를 뜻하며, 의지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기로 "의지"하실 때, 그 자체가 그분의 영광이었으며, 또한 그 영광이 말씀으로써 선포될 적에("라자로야 나오라"), 그것이 곧 그분의 권세가 되어 "창조"를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의지는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따라서 영광스러운 대신 어두움의 지배를 당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말"할 적에 어두움이 실체화되며, 이 어두움은 우리의 눈앞의 현실에서 어두운 결과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그분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동안에는 내 청을 들으셨는데, 이제는 안 들으시면 어떡하지?" 와 같은 불안은 이미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이루시든 이루지 않으시든 그것은 그저 그분께 속한 일일 뿐이며, 우리는 1) 음성을 듣고, 2) 순종하고, 3) 행하면 됩니다. 거기까지가 우리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셋을 행할 적에,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이며, 이것을 행할 적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세례 요한 역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의 증거하는 삶은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므로 그는 그저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행했습니다(물로 세례를 주는 것). 그리한 까닭은 그의 뜻대로 이루려고 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상에 나타내려 하는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도 알지 못하면서 왜 행하느냐?"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므로 오히려 우리는 당연히 알지 못하고, 또한 우리의 능력이 아니므로 우리가 이를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의 절대 다수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들었다 한들 순종하지 않으며, 순종한다 한들 행하지 않기에 하나님과 분리되며, 자녀들은 설령 음성을 듣지 못했다 한들 순종하며, 순종하지 못한다 한들 행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언제나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살아서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됨 안에서, 우리는 그저 받아들여서 행하면 됩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는 이처럼 우리에게 "선행성"이라는 매우 귀중한 지혜를 선사합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와 능력대로 평생을 살았다 한들, 결국 그는 하루하루 늙어가는 자기를 발견할 것이고, 그 가운데에서 죽음이라는 예정된 종말에 가까워져가는 것을 볼 것이며, 때때로 그는 장례식장에서, 무덤과 묘비에서, 또 죽음의 기운이 서린 장소들과 그 시간들에서,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 평생을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인 채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녀들은 그 "영원한 신성"께서 "이미"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며, 따라서 "나"는 죽음을 이길 수 없더라도 내 안에서 부활하신 그분은 "이미" 죽음을 이기셨기에("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살아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된 자녀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없을 뿐더러, 삶 속에서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여 고통받는 영혼들과 생명들을 볼 적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되, 오히려 그들에게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따뜻한 빛과 온기와 생명을 전해주는 것을 기뻐하고 또한 원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고귀해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남의 죽음이 무섭다 하여 피합니다. 설령 예의와 체면(그것이 자아에게 죽기보다 더 두려운 것이므로)을 생각하여 죽음의 자리에 참석했다 한들, 그곳에서 진실로 영혼과 생명을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하기는커녕 "자기를 방어하고 지키려고" 몸에 소금을 뿌리고 팥을 뿌리는 등의 참으로 우스운 일들을 행합니다. "타인을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되, 하나님의 일을 행할 적에는 나를 통하여 이미 그분께서 임재하고 역사하시거늘, 무엇이 두려울 일입니까? 이는 그분을 믿지 않고, 또한 그 뜻을 행하지 않기에 그분이 함께하지 않으며, 함께하지 않기에 혼자되며, 혼자되므로 죽음과 사망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행할 적에 우리는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감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의 삶 속에서 신을 증거하고 신의 뜻을 행하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또한 신께서 내 삶의 모든 순간들마다 임재하고 역사하시며, 이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