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1:3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한 새 사람, 새 영들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은 곧 성령께서 우리가 그분께로 이를 수 있도록 증거하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 첫째, 우리는 이미 성령님을 만났고 그분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둘째, 그러므로 성령이 증거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그나마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런 식의 '거리'나 '시간'적인 개념들은 하나님께 대한 한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묵상이 깊어질 적에, 삶 속에서 하나님과 가까워질 적에, "진실로 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거짓 없이 지속적으로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시간과 과정의 차이가 있을 뿐 예외 없이 성령님을 만나게 됩니다. 애초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고 또한 그리스도께로 이르는 길을 열어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과 영혼의 독자적인 힘(믿음)만으로는 주님을 영접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 3년여 동안 그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뵙고, 함께하였던 제자들마저도 결국에는 "봐야만 믿는" 이들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너는 날 본 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육적으로)예수님을 직접 뵙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복(福)"을 누리는 까닭은, 결국 그분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일방적인 자비의 손길에 의지해야만 겨우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과 성령님의 관계는 수직적이며, 일방적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고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위치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증거하는 말에서 이르기를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 의지하는 위치, 그분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위치입니다. 이 엄청난 영적인 차이를 앞두고서 저는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과 힘과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의 신비들을 체험합니다. 사방이 퇴로가 막혀 완벽하게 절망적인 상황, 아무것도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오히려 할 일이 없어져버린 그 적막한 삶의 한가운데에서도,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어떻게든 죽지 않고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겠노라 하는 불가사의한 믿음이 일어납니다. 자기의 죄를 올바르게 직관한 형제들은 이것이 자기 능력이 아님을 너무 잘 알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믿음이야말로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나, 그 믿음마저도 결국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는,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에는 무엇이든 다 가능합니다.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며, 우리가 참되게 기도할 때에는 땅에서 묶으면 곧 하늘에서도 묶이게 됩니다. 이토록 경이로운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거느리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령께서 아들보다 못하다, 불완전하다, 열등하다, 가 아닙니다. 이는 그만큼 아들이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어 계시기에, 아들의 의지가 곧 아버지의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주시는 분, 이라는 말에서, 저는 하나님의 아들의 엄청난 권세와 영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천지차이, 라는 말조차도 부끄러울 만큼이나, 까마득한 영적 격차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 의지대로 성령께 명령할 수 없습니다. 감히 이 지상의 그 누구도 그따위 오만방자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단 한 분,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을 휘장처럼 거느리시며, 죽음마저도 명령하여 부리실 수 있는 그분,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어 계신 그분의 의지만이 성령을 운동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진실로 사랑하여 그 뜻대로 기도하고 청을 할 때(예: 타인을 향한 용서, 은혜, 축복 등의 선한 일들을 구할 때), 성령께서 모두 이 기도를 기쁘게 들으시고 또한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우리는 명백히 "청"을 드리는 것이고, 그것을 이룰지 말지의 모든 주권은 오직 성령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의 유일한 예외가 곧 외아들께 계신다는 것은, 교리나 신학으로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지 몰라도, 영으로 영혼으로 진실로 경외하기 위해서는 깊이 묵상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 세례 요한조차도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머무르시는"(요1:32) 표증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은 명확한 일입니다. 1) 먼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품 안에 계셨을 때부터 그에게 자신이 오실 것을 알리셔서 증거를 주셨고, 2)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곧 '그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기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세례 요한의 한평생에 걸친 믿음이 다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의 일방성"에 대해서도 예민한 문제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나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주님께서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해놓으셨으니까" 나는 게으르고 나태하게 삶을 보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올바르게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주님 앞에 이른 자는, 애초에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기에,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도 죄악스러운 자는 당연히 하나님 앞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자입니다(물론 가끔씩 예외는 있습니다). "효력", 곧 실제로 영과 영혼을 변화시키는 권세(POWER)는 당연히 하나님께 그 절대적인 주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는 그 자체로는 힘이 없습니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힘은 신성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의"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의 운동성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움직일" 때, 그것은 사랑이라는 형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형상 자체가 영혼을 통하여 드러나시는 하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효과가 없다"는 말을 들으면, "에이, 그럼 아무 의미 없네!"하고 포기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구원받는 것, 곧 이익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는 "효과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 사랑 하나로 말미암아 언제나 같은 마음, 같은 자세, 같은 태도로 삶 속에서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면서 그리 살아갑니다. 사랑의 차이인 셈입니다.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분 앞에서, 내가 진실로 경외하고 열망하는 분 앞에서, 내가 진실로 기뻐하는 분 앞에서, 그분이 보시든 안 보시든, 그분이 말씀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그분이 옳다 그르다 하지 않으시더라도, 내 스스로가 그분께 대한 지극한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는 형제들마다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주로 '이름'과 관계되어 있는 듯합니다.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는 것. 제게 이름은 곧 신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자기 눈으로는 알아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의 삶과 평생에 걸친 증거가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자체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증거하는 꼴이나 다름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평생에 걸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장차 오실 그분"에 대한 예의와 경외를 표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의로운 것인지를 새삼 느낍니다. 오늘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을 구하지 못한다면 당장 내일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그 외로운 사막에서, 비할 데 없이 막막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자신이 들었던 그 음성 하나만을 의존하여 별빛 속에서 그분을 찾고, 그분을 그리워하고, 그분을 증거하면서 그리 살아가는 삶...... 제가 감히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저는 그것의 무게를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경외하는 자는 할 수 없다는 것 앞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습니다. 그날, 그 언덕에서, 물질적으로는 당연히 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수천 년 전의 일이니까요. 그러나 그 자리에 없었다는 그 객관적인 사실(fact)이 저에게는 저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마음과 의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와 전혀 무관한 그 일에 대해서, 나아가 인류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도 극악무도한 살인과 학살과 고문을 일삼은 그 모든 죄들을, 내 죄라고 느낍니다. 그러하기에 내가 한 평생 게으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하여야 한다는 깊은 열망을 품게 됩니다. 성령께서 증거하실 때에는 대개 사람의 영혼이 이와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고귀한 마음은 절대 내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 우리는 "눈을 뜹니다." 장님이 눈을 뜨는 것처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에서 하나님을 보는 자로,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 자신이 삶 속에서 이리 살아갈 뿐이며, 나의 삶의 일부를 가끔씩 이와 같이 글을 쓰거나 하는 방식으로 증거하여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비록 그와 같을 수 없고 그분과 같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언제나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정렬하도록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내가 다시 죄 가운데로 돌아가지 않도록, 성령께서 나를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죽음과 사망과 교만과 욕망과 공포 앞에서 기만당하여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내 영혼을 어루만지고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의 삶을 언제나 축복하셨기 때문이며, 이는 우리에게도 당연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치 피곤하면 잠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영혼의 반응과 운동입니다.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을 그저 윤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껍데기의 일부만을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경외는 명백히 물질이 아닌 영혼에 속하는 무언가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유일한 표증은 바로 날이 갈수록 경외가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주(主)를 경외한다는 것, 이것은 그저 단순히 "믿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믿는다는 것은 "동의"의 느낌이 강한 것이며 이 자체도 물론 귀하지만, 동의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라는 것은 신 앞에 홀로 선 자로서, 신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지극히 존경하기도 하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무언가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신학에 대해서 지금도 기본적인 틀 외에 거의 아는 게 없지만, 지금보다 더더욱 몰랐었던 그때에도, 나는 본능적으로 성령 앞에서 스스로 경외와 경이로움의 자세를 지켰습니다. 내 스스로 그리했다기보다는 그냥 내 존재가 성령 앞에서 자동적으로 그리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과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과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나를 기뻐하시는 것과 나와 함께하시는 것들을 절대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 절대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성령께 기도를 드릴 적에 언제나 내 목숨을 거는 것, 내 전부를 거는 것, 결코 함부로 망령되이 성령 앞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언제나 내게는 온화하고 따뜻하고 자애로우신 모습만을 보이셨으며 단 한 번도 내게 엄격한 권위로서 드러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가 그분 앞에서의 지극한 예의를 잃지 않고 스스로 그 엄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경외하는 자는 경외하는 자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태도와 자세를 지키는 척하나 그 속에 든 영과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는 자가 있는 한편, 겉으로는 자주 술을 먹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든 영과 영혼으로는 언제나 신 앞에서의 절대적인 경외와 경이로움을 한 순간도 잃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의 경외로써 다른 이의 경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성령께 대한 경외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경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주로 증거하시는 분, 역사하시는 분이시지만, 성령께서 아무런 역사도 이루지 않으시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더라도, 그저 그분의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히 나의 지극한 경외를 받으실 자격이 넘치도록 계신 분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 "자체"에 대한 경외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넓게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셔서"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께서 내게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셔서" 내가 그분을 경외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영(Spirit)이, 절대자의 실체를 영접하는 그 자체에서 비롯한 경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운동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안에 역사하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때, 그 역사의 주된 방식은 경외인 셈입니다.
사람은 오만하기에,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하나님 앞에서 엎드리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죄는 경외를 위한 훌륭한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도 설명하기 힘든 무엇입니다. 저는 대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는 합니다 :
"이 지상에서는 감히 나의 존경과 경외를 받을 자가 아무도 없되, 오직 하늘에 계신 분만이 나의 절대적인 경외를 받으신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저는 저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잘 압니다. 그러므로 이 "나"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분을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한다는 것, 주인의 명령에 언제나 내가 기뻐하며 따른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결국에는 교만이겠지요. 하지만 아직은 나의 영혼이 많이 미숙하고 어리석기에, 이것으로 인하여 저는 때때로 나의 신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합니다.
경외하는 자는 어느덧 보이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전에는 경외의 근거가 곧 보이는 것, 현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기적들을 보면서 그분의 절대적인 신성을 느끼는 것, 말입니다. "라자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 파도와 바람을 꾸짖어서 잠재우시던 그 음성,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이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는 그분께서 이루신 "일들" 말입니다. 그분은 종종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한 일들을 봐서라도 나를 믿으라"(요14:11)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기쁘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내게 오셔서 그 어떤 눈에 보이는 역사를 이루지 않으시더라도, 그분께서 예고 없이 내게 잠시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나는 언제나 기뻐하였습니다. 그분의 눈빛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경외하고 열망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이리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언제나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내게는 그분의 역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내 아버지..."라고 하실 적에,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아버지라는 말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나는 느낍니다. 그리고 내 입에서 흘러나온 '아버지'라는 글자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매일 느낍니다.
경외하는 자의 끝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계신 하나님 자체로 인하여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요1:34)
'아버지', '아들'...... 이것은 물질적인 성(性) 관념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엄밀히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조차도 예수님께서 살아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신 그 하나됨, 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상에는 그 하나됨을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가장 근접한 무언가를 아버지와 아들로써 표현할 뿐입니다.
먼저, '아버지'라는 것은 가부장제 시대에서 가족 구성원을 이끌고 통치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집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부장제의 권위만을 보고 그 권위에 따른 책임을 보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모든 권세가 있기에, 아버지는 1) 어떠한 경우에도 가족 구성원들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야 할 책임, 2) 스스로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족 구성원을 우선시하고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고백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이끄실 것임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신앙 고백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리고 '아들'이라는 것 역시, 가부장제 시대에서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정당하게 계승할 권리를 누렸습니다. 물론 그 권리는 아버지의 책임 역시도 물려받는다는 것과 마찬가지구요. 즉,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아버지의 아들"로써 가리키셨을 때(예: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정당하게 계승한다"는 것과, 또한 "아버지의 뜻을 어떠한 경우에라도 지키고 수행하고 완성해야 할 책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록 "맏아들"이 아니지만,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역시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정당하게 마음껏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내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백과 동시에, 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써 부를 수 있는 고백 역시도 가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써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며, 나를 통하여 그분의 의지를 이루신다는 것과, 그러한 자격이 내게 있음을 진실로 믿고 동참한다는 고백 말입니다.
'이름'은 단지 언어가 아닙니다. 이름에는 이러한 영과 영혼과 신성의 존재 자체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가 이르른 그 순간에는, 그분의 뜻을 이루고 역사를 이루는 그 순간에는, 나의 영(Spirit)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는, 그분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며, 또한 나를 "아들"로써 부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곧 "권능"이 임하는 열쇠거든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힘이 없는 자는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전체보다도 더욱 강한 힘을 지녀야만 하며, 그 힘으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그 힘은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나 자신에게 힘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세상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를 만날 때, 어두움의 권세 아래에 신음하고 고통받는 자를 만날 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어두움을 호령하고, 밝히고, 그를 축복하시는 분께 기도를 드릴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그 힘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그 이름을 믿는 것", 곧 믿음 자체가 이를 가능케 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은유를 통하여 드러내는 실재입니다. 그 실재가 바로 진리이자 생명이 되어, 믿는 자의 믿음을 통하여 그의 영과 영혼 안에서 실제로 살아 숨쉬고 운동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일반적인 세상의 텍스트를 읽을 때처럼, 개념적으로 분별하고 정의하고 해석하는 그러한 방식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건 요한복음을 읽기 위한 "사전 공부"입니다. 요한복음의 독서 자체는 은유를 통하여 이야기 전체에 완전히 빠져드는 몰입에 있습니다.
때로는 특정한 글자나 단어 자체에서 그분의 신성을 깊이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매우 깊이 그분의 신성을 느끼기도 하며, 그런 과정들을 통하여 결국 은유가 사실(fact)보다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이 표증과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서 살아 숨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서를 읽는 방식이고 성경을 읽는 방식입니다.
교리나 신학 이전에, 신앙은 "보이지 않는 신성이 내 안에서 살아 숨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그분과 내가 완전히 하나되는 순간, 말씀은 더 이상 성경 안에서만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내 삶 속에서, 모든 순간마다, 언어를 넘어선 실재 그 자체로써 매 순간 흘러나오고 체험하고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