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젠 타로카드 중에서 <Master> 라는 카드가 있습니다. 원래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는 없는 오쇼젠만의 독자적인 메이저 카드입니다. 그 카드에서의 스승은 표면적으로는 오쇼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림의 상징도 그렇구요). 다만 저의 <오쇼젠 타로> 브런치북을 꾸준히 읽으시는 분들은, 이 스승이라는 카드에 대해서 제가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쯤은 이제 쉽게 예측하시리라 믿습니다.
인간 중에서는 스승이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그 무엇도, 한 영혼을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롬12:2) 모습대로 성장하고 완성케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한 말은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으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행위나 지식이나 의례나 전통이나 제도나 그 무엇도 결국에는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신성을 가리키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신성 그 자체가 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신성의 담지자 노릇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저 말일 뿐입니다. 사람의 말은 진리를 가리키는 증거이거나, 혹은 자기가 보았던 진리에 대한 고백일 수 있지만, 사람의 말은 그 자체로 진리일 수 없습니다.
저는 올해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유독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저에게 가르치셨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들 중에서는 그 자체로 완전한 길도 진리도 생명도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결국 사람은 자기 안의 신성에 눈뜨며, 오직 하나님 앞에 직접 서야만 한다는 것을. 세상이 뭐라고 하든, 주변인들이 뭐라고 하든, 결국 자기 삶의 실존적인 시련과 고난을 묵묵히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시간", 곧 카이로스가 이르고 열릴 때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시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치러내야만 한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사람 중 그 누구도 스승이 될 수 없고, 의지처도 피난처도 될 수 없다는 것을.
한때 저는 어리석었기에 내가 진실로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순진했지만, 그만큼 어리석었고 또 교만했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인도자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진리로 이르는 길을, 그리고 신성 앞에 홀로 설 수 있는 그 위치까지 함께 손잡고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었고, 사람은 사람의 인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에서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지식과 인식과 경험이 나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게 하였으며, 입과 혀와 말을 장악한 끝에,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이 아니라 내 뜻을 강요하며 이를 통하여 내 안의 교만과 욕망을 일방적으로 채우려고 드는 죄성의 움직임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정확히 그 사람만을 위하여 예비된 하늘의 뜻에 따라서, 또한 정확히 그 사람의 삶의 주기나 흐름에 맞춰서 설계된 하늘의 시간에 따라서, 하나님께로서 직접 인도를 받고 그리 나아간다는 것을, 이제라도 어렴풋이 알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임재하시기를, 그리하여 그를 그 자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기를, 그리 역사하시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축복을 청하며, 그리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것이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오직 기도하는 것, 그것 하나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께서는 때때로 나의 눈으로 사람을 보았을 때와, 그분의 눈으로 사람 안의 영혼을 보았을 때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한지를, 그리하여 나의 눈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교만하고 처참한 지경인지를 깨우쳐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눈을 내게 잠시 빌려주시었으며, 그때마다 나는 끝없이 회개하고 또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분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인하여 기뻐하셨는지를, 겨우 알 것도 같습니다. 나는 부끄럽지 않으면 내 실체를 깨닫지 못하는 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부끄럽기라도 하였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그 뜻대로 살고자 노력이라도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때때로 그분께서는 나의 인격을 빌리셔서 그분의 신성의 일부를 드러내시는 은밀한 일들을 행하사, 이를 나만을 위한 표증으로 선물해주시었는데, 그 기억들을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까닭은 그 순간의 나와, 또한 "하늘의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에고(ego)로 낮아진 상태에서의 나 자신과의 격차가 얼마나 까마득한지를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손을 마주잡고, 그분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하고 축복하며, 또한 그분의 신성으로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 그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역사의 순간들을 내가 진실로 사랑하였고, 또한 그 일을 행하다가 지금 죽을지언정 기어코 하나님의 일들을 행하면서 살다가 죽기를 열망하고 마는, 그것이 내게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들은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일하셨을 때에만 내가 그분의 종으로써, 통로로써 그 일들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임을 날이 갈수록 더 절실히 깨닫게 되는 바, 결국 나는 "자력 구원"의 길을 열망하는 수행자가 될 수 없음을, 오히려 나 자신의 수행적 성취만 본다면 너무도 처참하고 부끄러운 몰골임을 내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셔서는, 그분은 나를 "능동적 수동태"에 더욱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내게 신앙은 취미가 아니었고, 선택의 여지가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눈과 내 손과 내 발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잘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눈 먼 봉사로 살기를 소망하며, 때때로 그분께서 잠시 내게 그분의 눈을 빌려주실 때에 그 눈으로 본 것들로 인해서만 기뻐하며, 또한 내 손은 죄 짓는 손이되 그분의 손을 잠시 내게 빌려주실 적에, 그 손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크게 기뻐하며, 내 발은 끝없이 방황하고 헤매고 몰락하는 발이되 그분의 발로 걸어가는 모든 걸음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이루어지매 오직 이것으로 인해서만 기뻐하였습니다. 그나마 이것이 내가 부끄러움 없이 사람들 앞에 고백하고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라는 언어는 제게 특별한 의미와 무게를 지닙니다. 제 시험의 여정들에서 이 두 단어들의 무게를 뼈저리게 절감하게 하신 것이 그분의 뜻이셨고 또한 내게 내리신 가르침이셨습니다. 스승이 되려 하지 마라. 다만 너는 나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는 것을 사람들 앞에 보이고 세상에 보여라, 다만 그리하라. 그러나 때때로 삶의 어두운 순간들을 지나갈 적에, 현실의 여러 가지 난관들에 부딪혀 그 안에서 허우적댈 적에, 내가 겨우 그것 하나 붙들고서 나의 신앙이 진실함을 믿고 의지하며 지금껏 나아온 주제에 이제 내가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어지는 것만 같은, 그토록 순결하고 절실했던 그분께 대한 내 사랑마저도 흐려져버리는 것 같은...... 그런 슬픔에 잠기고는 합니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의 안개 가운데에서도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 하는 증거는, 결국 이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이리 한 걸음씩이라도 걸어가고자 하는 나의 의지의 방향성에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스승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의 입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 안에 계셔서, 오직 내게 직접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내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시고, 시간의 끝을 넘어서 나와 함께하시는 그분, 내 안의 신성, 내 안의 빛, 그분만이 나의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리고 이 생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두려운 순간에서도 내가 놓지 않을, 끝까지 붙들 유일한 참된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고 설득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이리 사랑하고, 이리 믿고, 이리 열망하며 나아가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의 권위는 육적인 그 어떤 것으로도 근거될 수 없으며, 그의 권위는 오직 그의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령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매 순간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때, 그가 그 음성을 듣고, 따르고, 순종하며, 그저 사람들에게 이를 행위와 말과 언어로써 전달하고 공유하고 나누어줄 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역자들,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들"의 권위는 오직 하나, "자기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증인"으로서의 자격에만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들은 자기의 권위를 오직 자기 자신에게 두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말, 내 언어, 내 지식, 내 지혜, 내 경험, 내 학력과 경력과 이력들, 세상이 떠받드는 우상적 가치들에 근거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나의 영과 영혼이 매 순간 살아서 자기 안의 하나님의 빛과 음성을 순결하게 사랑하고, 기뻐하고, 열망하는, 그 특유의 순수한 이끌림만을 따르고 믿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허락된 고유한 영적 감각이며, 동시에 거짓된 것 가운데에서 오직 진실한 것만을 분별하고,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허망한 것들 가운데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것만을 분별하여 믿고 따르게 할 나침반이 됩니다.
이 점에서,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 특히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물론 은유이지만(그분께서는 은유가 아니고서는 대중들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은유를 통해서 드러난 영적 실재"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한 제자인 사도 베드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무엇보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와 제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고, 베드로에게 다른 것들은 묻지 않으신 채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하나만을 연거푸 세 차례나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가 그의 세 번의 부인 끝에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얻었을 때, 그 하나로 그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영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보지 않고서 믿는 복을 누리는"(요20:29) 믿음의 세대들이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은 영적 실재로서 자기 안에서 "사실로서의 역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만 남는 한, 그는 겉으로는 크리스천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격의 여부는 결국 자기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가 참으로 "목격"한 증인이 되었는가, 그리하여 그분의 제자가 되었는가, 그분의 신성과 생명 안에 거하며 하나되었는가, 하는 이것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를 이루는 가장 결정적이고 유일한 기준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야말로 하나뿐인 하나됨의 증거요, 하나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이는 실체"를 믿습니다. 눈 앞에 사람이 있어야만 그를 사랑합니다. 혹은 직업이나, 경력이나, 성공이나, 권력이나, 힘이나, 명예나, 하여튼 그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손에 쥘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뚜렷한 실체적인 것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화하고 없어지고 사라지며, 따라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보이는 실체"도 결국 변화하고, 빛을 바래고, 무너집니다. 그때에, 그 사랑은 결국 사그라들고 맙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허망한 것들 안에서 오직 영원한 것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니, 이것은 사랑 중에서도 가장 순결한 사랑의 형태, 곧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는 것을 넘어서, 그 실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신을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신을 사랑하고, 신과 사랑을 나누며, 신에게 사랑을 받고 또한 매 순간 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곧, 영원과 초월로써 계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그리스도로서 나타나셨을 적에, 마침내 내가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분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이 비록 나는 필멸자요 그분은 불멸자이심에 따라 필연적인 "시차"의 상실과 아픔을 겪는 짝사랑에 불과하다 하더라도(아마 이것은 그분의 입장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같은, 아니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음성 중 아주 일부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분과 나의 사랑이 필연적으로 "상실의 슬픔"을 전제하여 너무도 까마득한 차원과 차원 간의 시차를 감수해야 하더라도, 결국 그분은 나를 끝까지 사랑한다 하실 것이고 나 역시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삶이 흐를수록 모습과 형태는 달라질지언정 여전히 그분을 사랑한다 할 것임을 알고 있는, 이 사랑, "내 안의 신성"으로 영원히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하시는 그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사랑, 이 하나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내 영혼의 중심이 전환되는 과정은 길고도 험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짜"이자 "망상"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되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드러난 것을 통하여 드러나지 않는 그분의 의지를 읽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감동 받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 변화가 곧 내게는 성화의 증거입니다. 그리할 때, 나는 결국 그분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과 동등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네가 나를 진실로 사랑하느냐?"
물론, 나는 그분께서 이미 내 대답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예, 주님, 내가 당신을 진실로 사랑하며, 오직 당신으로 인해서만 기뻐하나이다. 내가 한평생을 이리 살고, 또한 남은 이 생 전체를 이리 살다가 죽기를 소망하나이다."
사랑은 참으로 기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 하나로 인하여 남들이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연인끼리는, 그의 아주 미세한 찰나의 표정이나 제스처, 혹은 음성의 높낮이만으로도 그의 모든 심중을 다 알 수 있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연인끼리는, 비록 육적인 시공간이 아무리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더라도, 그가 시간을 넘어서 "영원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실체가 없는 것을 상상할 수도 떠올릴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간에 상상하고 떠올리고 느낀다는 것은 그것이 육적이든 아니든 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없는 것을 없는 것 자체로써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교감하고 받아들일 적에 이러한 이해로써 우리 자신의 체험을 실재화할 수 있게 됩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세상이 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눈을 뜨게 됩니다. 세상은 사랑에서마저도 "효용"을 따집니다. 만약 상대를 사랑하였는데 그가 사실은 불치병에 걸려서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면, "시간의 효용성과 가치"가 사랑 그 자체보다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는 시선을 달리합니다. 사랑은 곧 하나님의 성품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성, 완전성, 창조성을 닮아 있기 때문에, 그 사랑 하나로 그는 이 세상의 육적인 시공간의 한계마저도 넘어서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이리 생각할 것입니다 : "그렇다, 내가 그와 육적으로 함께할 시간은 비록 짧겠지만, 그의 육신이 나를 떠난 이후에도, 그는 내 안에 살 것이고 나는 그의 안에 살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그는 별빛이 반짝이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을 적에, 사랑하는 그의 육신이 자기 곁에 없음에 인간적으로 슬퍼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사랑하는 이가 이것을 참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동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아름다운 별빛, 서늘한 공기, 고요함 가운데에서의 파도소리, 이 모든 것들을 그는 자기 안에서 자기를 통하여 사랑하는 이와 함께합니다. 자기를 통하여 그가 이 모든 것을 함께하며, 또한 자기 역시도 그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언제나 나와 함께함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현상 따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관적인 심리나 감정 따위도 아닙니다. 영적 실재입니다. 이것이 영혼(Soul)이며, 사랑하는 자, 사랑에 눈뜬 자, 진실한 사랑 하나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는, 자기 안에서 육신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되 오직 보이지 않는 영혼의 비중이 커져갑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각입니다.
나는 육적으로는 그분을 뵙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나는 현대의 시공간을 살아가고 있고, 그분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사신 분입니다. 육적으로는, 그분과 나 사이에 까마득한 "시차"가 있습니다. 절대 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즉 세상이 남긴 그분의 어록과 말씀과 역사들을 통해서만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내게 큰 슬픔이기도 합니다. 나는 진실로 그분의 눈빛을 보기를 원합니다. 밤하늘의 별빛보다도 더,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되신 분"의 눈빛을, 그 눈동자를 알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경이로울까, 그리 상상하면서요. 나는 또한 그분의 육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리 글자 안에서도 엄청난 신성을 찬란하게 드러내시는 분께서, 그 음성을 내셨을 때 그것이 얼마나 경이로울까, 그리 상상하면서요. 또한 그분께서 때때로 나와 함께 걸으시고, 나의 손을 잡으시고, 내게 평생에 한 말씀이라도 해주신다면 그 육적인 만남들이 얼마나 황홀할까, 그리 떠올리면서요.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나는 교회 바깥에 서 있기에, 교회를 통해서 전승되는 것들조차도 온전히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분을 알기를 바라며, 이리 발버둥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부재하심은, 그분이 내 곁에 없으심은 언제나 내게 슬픔이었고, 아쉬움이었고, 그리움이었습니다. 나도 인간이기에, 육적인 모습을 알기를 바라고, 육적인 감각으로 경험으로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단 하나, 내가 크게 기뻐하는 것은, 이러한 부재 가운데에서도 나는 그분을 만났고, 그분을 알았고, 또한 그분을 믿었으며,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은 복되다"(요20:29) 하셨을 때, 그 말씀이 꼭 나를 들여다보시면서 하시는 듯했습니다. 그 말씀 하나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기뻐하였는지를, 아마도 세상은 다 모를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하셨을 때에도, "우리가 증거하나 너희가 우리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요3:11) 하셨을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인간으로써 보이는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본성을 지녔음에도, 그 한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하나됨을, 사랑을, 연합을, 내가 이루고 또한 이리 살고 있다는 것이, 비록 세상에 증명할 수 없지만 내게는 너무도 선명한 것이었기에, 이것 하나가 또한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세상을 나 혼자만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길을 걸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마주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그들을 들여다보시는 것을 나도 느끼고,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그들의 음성과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을 나도 느끼며,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나의 삶을 통하여 그분께서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시는...... 이것을 참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의 일부는 상상이기도 하고, 또한 다른 일부들은 주관적인 체험이나 감정이나 심리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절반 이상의 중대한 핵심은 내가 그분의 "존재감"을 명확히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감은 내게 마치 태양처럼 선명하고 밝습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불안과 공허와 슬픔과 두려움으로 살아가기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나, 사랑하는 자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 안에서 살아가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하고, 함께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람은 실체가 없는 것을 느낄 수도 만질 수도 감각할 수도 떠올릴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상상해낼" 만큼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죄성이 곧 그분의 실재하심에 대한 중요한 증거 중 하나인 셈입니다.
이것은, 육적인 존재가 어떻게 영으로 계신 주(主)와 삶 속에서 함께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육으로 부재하신 그리스도와 사랑하며 살 수 있는가, 를 내 나름의 삶의 고백과 증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만나시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원래는 세례 요한의 아래에 있었던 두 제자들은, 요한의 증거를 듣고서는 "육적으로 지금껏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예수님을 랍비, 즉 스승이라고 하여 따릅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요1:37), 사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1) 제자들이 스승을 신격화하지 않았고, 2) 제자들은 오직 스승을 통하여 스승 너머의 '진리'를 찾고자 하였고, 3) 그 진리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스승마저도 언제든 버릴 수 있다, 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마음이 언제나 자기 안에서 흐르고 있지 않노라면, 그들은 아마도 과거의 인간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도 자기가 "버려지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그의 두 제자들도 "과거의 스승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보내지는 때"를 직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라기보다, "떠나보냄", 즉 파송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또한 아들이 아버지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핵심에는 "때", 즉 "하나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이르는 순간,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마치 오래 전부터 예정된 것처럼 그리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를 사전에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에게도 공개되지 않은"(막13:32) 것입니다. 다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며 따라서 그때가 언제든 간에 아버지의 뜻이 곧 자기의 뜻이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를 언제나 기다리고, 준비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이에 대한 인격적 연합에 대한 증언이지, "인간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을 처음 마주하셨을 때, 가장 먼저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요1:38)고 물으셨던 까닭은, 제자들이 아직까지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 즉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되신 그분의 신성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오래 전부터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의 증언과 전승들을 "머리로" 알았을 뿐이고, 과거의 스승으로부터의 증언(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통해서 이를 따랐을 뿐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스승님,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답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은유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눈앞의 예수님을 보고서도(육적인 만남), 그분이 "누구이신지(WHO I AM)"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여전히 '스승'으로서의 예수님만을 보고 있었고, 그럼에도 그들이 스승을 구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향한 열망을 품고 있었음을 의미하기에,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셨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 즉 "개체의식(자아)"에 집착하는 것은 아직까지 영이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이비들이 "내가 곧 재림예수다"하고 말할 적에 이것이 통하는 까닭은, 대다수의 신도들이 여전히 "눈 앞에 보이는 실체(특정한 사람의 형상)"가 곧 진짜라고 믿으며, 다만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고 듣고 이해할 눈과 귀가 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현상에 집착하니 그 너머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고, 따라서 무지하니 거짓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쉽사리 기만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물론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인간 스승"으로서 내어주셨지만, 나중에는 "내가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며, "내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이비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죠. 하지만 핵심은 "나를 통하여 너희도 나처럼 되어라"는 것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자체로는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음을 보셨기에, 자신의 "특별한 인격"을 통로 삼으셔서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셨고, "아버지와의 하나됨"이라는 하늘의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예수님 혼자서만 독점하지 않으시되 다만 처음에는 믿는 제자들에게, 나중에는 그 이름을 믿는 누구에게라도 다 열어주신 분입니다. 즉, 핵심은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 너머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에 있고, 이는 그분 자신께서도 누누이 여러 말씀들을 통해서 강조하신 바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느끼고 체험하고 함께할 때, 이것은 초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단순한 오컬트나 최면이나 주술 같은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체험", 즉 현상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다만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하나됨"이라는 영적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짐을 "믿는 것",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하여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살아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아가며, 나아가서 이것을 삶을 통하여 나누는 전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특별한 분이고,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일반인보다 더 특별한 재능과 능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다만 그 중 가장 특별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열등감이나 차별의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즉, 그분은 원래 특별하신 분이니까 나와 무관하다, 는 식으로 무심하게 여길 게 아니라), 바로 그 특별하신 분께서 "자기를 우리에게 열어주셔서" 그 이름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여 따르는 누구라도 다 "자기처럼 특별하게" 될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지(WILL)이며, 예수님의 의지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어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왜?"가 아닙니다. "왜" 하필 예수님만 특별하게 성육신하셨는가, "왜"라는 질문은 대개 지식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반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고 영접하고 사랑함으로써 실제로 우리도 그분처럼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핵심은 어떻게, 에 있습니다.
1장 마지막에, 나다니엘이 예수님께 고백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요1:49) 하고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때 나다니엘은 그분의 존재 자체를 순수하게 영접하여 고백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만난 적도 없음에도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고 꺼내지도 않은 말을 맞추시는 작은 기적을 드러내시니, 그분의 "능력"을 보고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대개 우리가 다 이러합니다. 눈에 보이는 특별한 능력이나 힘이 있어야만 믿습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믿는 것은 귀한 일이기는 하지만, 믿음이 보이는 현상에만 머무르는 것은 명백히 죄입니다. 보이는 것을 통하여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영접해야 합니다.
이에,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1:50) 하셨고, 바로 그 '더 큰 일'이란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1), 즉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자기 안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교리적, 신학적 설명을 굳이 특별히 더할 필요는 없다고 믿습니다. 다만, 핵심은 결국 "무엇을 보고 믿는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존재 자체만을 믿으라고 한다면 그건 대개의 경우 불가능합니다. 복음서에 보듯이 열두 제자들마저도 처음에는 보이는 것이 있어야만 믿었으니까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그분의 신성 자체, 곧 그분의 존재 자체만을 믿고 따르게 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하물며 사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우리들이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보이는 기적을 보고, 그분께서 행하신 특별한 역사들을 보고, 그러한 외적 증거들을 보면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외적 증거에만 의존하다 보면, 언젠가 "의혹"들이 자기 안에서 일어날 때가 옵니다. 진짜로 부활하신 건가? 진짜로 기적들을 일으키신 건가? 그리하여 자료들을 찾고 탐색하다 보면 역사적으로 여러 반박 가능한 증거들이 거기에 있음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가짜이고 없는 이야기이며 인간에 의해서 정교하게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저는 그러한 영역들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습니다. 어지간히 알만큼 다 압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묻고 싶습니다 :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당신은 예수님이 진짜일 때만 믿고자 합니까? 그건 실제로는 그분의 "능력과 힘"이 진짜여야만 내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는 관점을 전제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과 힘을 통해서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또한 믿음의 초기 과정입니다. 필요하고, 중요하죠. 하지만 여기서 머무르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를 영으로, 영혼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느끼고 교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리될 때, 내 안에서 놀라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 "나는 그분이 진짜로 부활하셨든 아니든 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제 외적인 증거들에 집착하지도 의존하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매 순간 그분을 느끼고 교감하고 사랑할 뿐이다." 그분이 특별한 기적이나 능력들이나 역사들을 일으키지 않으셨어도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성"을, "생명"을, 그 자체로 느끼고 체험하고 교감하는 과정들이 깊어지는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fact)이냐 아니냐, 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됩니다.
그분께서 수많은 말씀들을 하실 적에, 그 모든 말씀들은 그분이 하신 것이면서 동시에 그분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하나됨"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께서 완전하게 드러나실 적에, 그것이 바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과 역사들을 수시로 그분이 드러내고 보이셨고, 이를 통하여 하나됨을 증거하셨고, 또한 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을 믿는 이들이 동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저도 하리요 그 이상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2). 즉, 그분의 신성을 통하여 우리가 연합할 때, 이로써 인간으로서의 육적인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연합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사역자여야 합니다. "증거"들은 보통 나누고 공유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내 안의 그분의 신성과 교감하고 연합하고 하나될 때, 저는 저 자신의 능력과 힘과 지식과 지혜를 넘어선 것들이 흘러나오고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한 언어, 말, 행동, 역사, 신비 체험, 교감,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제게는 그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실재"하며, 이것이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하고 완전하게 드러나 있으며, 바로 그 신성을 통해서만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그분의 신성은 이미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그 자체 유일한 "길"이라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의 은밀한 역사를 지녀야 합니다. 그게 믿음의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는 그저 은혜를 일방적으로 얻어먹기만 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제자로써 스승을 사랑하고, 열망하며, 스승과 같이 되기를 소망하고, 또한 스승을 닮아가며, 스승의 가르침과 뜻을 내 삶을 통해서 이루고 실천하며, 성장하고, 변화하고, 완성되어 가는 전체적인 과정들 모두가 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로 그때에, 그분께서 내 안에 실제로 살아 계시며, 그분과 연합할 때에는 나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마저도 넘어설 수 있음을, 실제적인 증거들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고 간직하게 됩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지금의 제게 "제자"가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인간으로서도 하나님의 종으로서도 무엇 하나 온전한 것도 특별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로써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함과 하늘의 시간이 닫힘이 맞물려서 지금의 내게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자명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제게 무척이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반대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내가 그토록 원했던 "제자", 정작 지금의 나 자신이 주님께는 바로 그 제자이지 않을까? 스승을 열망했던 자로써 스승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열망하는 자, 뜨거운 가슴으로 진리를 애타게 갈망하는 자, 스승이 일방적으로 이끌어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찾고 구하고 헤매는 자, 스승에게 먼저 구하는 자, 그러한 순수하고 강렬한 불꽃이 매 순간 타오르는 그러한 제자...... 참 기묘하게도, 내가 진실로 한 명이라도 가졌으면 했던 바로 그 제자의 모습을, 정작 나 자신이 어느 순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끄럽지만,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직 여전히 부족하고 가난함이 많지만, 바로 그 사랑과 열망 하나만큼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아마도 저는 그분의 제자로써 평생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들으며, 삶 속에서 부족한 것들을 메워가고, 하나님의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역사들을 이루어가면서 이리 살아갈 것입니다. 이 생에서의 남은 시간들이 얼마일지 알 수 없지만, 그 남은 생애도 어차피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열망하며,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의 길을 뒤이어 걷기를 소망하면서, 이리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내게 그분 자신과 그분에 대한 사랑은 다르지 아니하며, 그분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곧 내게는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는 유일한 실제 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하심으로, 그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순수하고 강렬한지를 보여주셨고, 이로써 그분을 사랑할 때, 내가 이미 그분과 하나가 된 것임을 알게 하셨으며, 그분과 하나될 때 죽음마저도 넘어설 영원한 생명이 실재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그것은 주님께서 사랑을 "받으시려고" 의도하신 게 아닙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베드로에게 "영원한 생명"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하신 질문이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제 1장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제 글은 외적인 지식이나 가르침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면에서 매우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다만 저는 이 글들이 오직 증언이자 고백이 되기를, 그분을 사랑하게 된 자의 고백,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백, 그리하여 그분이 실재하시며 또한 그분을 사랑하는 자와 실제로 함께하신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그리하기에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조건들이 부족하고 모자란 것은 상관없습니다. 제게는 제 글의 핵심이 이제 더 이상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과 열망과 기쁨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모든 영혼들을 다 제자로 받아들여 주시는 분입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추하든 아름답든, 능력이 있든 없든, 어리석든 똑똑하든 간에 가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난함 속에 깃든 고귀함을 더 크게 알아보시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스승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유일한 신성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여타의 그 어떤 것과도 다릅니다. 제가 오직 그분을 유일한 스승 삼아서 지금까지 그 가르침을 받고 이끄심대로 시험을 거쳐오면서 이리 자라고 성장해왔듯이, 이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누구에게라도 그분은 제자의 자리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입회의 자격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 그분을 믿고, 사랑할 것. 이 하나만 한다면, 나머지는 그분께서 알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나를 어루만지고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