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와 보혈과 생명

by 생명의 언어


부족한 능력과 가난한 지혜로 감히 요한복음 1장에 대해서 지금까지 써오면서, 저의 개인적인 인생에도 많은 사건들과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나는 여전히 그 자유를 모릅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의지를 완전하게 계승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지런히 그리고 부끄러움 없이 열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내 삶을 어느 길로 이끄시든,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시든, 저는 이 여정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충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앎을 욕망하도록 태어난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서, 모른 채로 사랑하고 열망하며 충성하는 길을 지금껏 걸어왔습니다. 이끄시는 것은 그분의 일이요, 기쁘게 따르는 일은 나의 일입니다. 나는 나의 일을 그분께 떠넘기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미 상상 이상의 짐과 멍에를 지셨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나 하나가 이런 생각을 갖는다고 하여 그것이 위대하거나 대단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지만(진실로 맹세컨대 그렇게 여겼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분께 대한 나의 사랑 하나로 인하여 나는 내가 그분께 기쁨이 되기만을 바랄 뿐, 그분의 슬픔이나 고난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리 나아가는 여정의 끝에서, 그분께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바와 같이, 언젠가 나도 그분과 함께 그 문을 건널 것이며, 나의 오랜 운명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얻는 그날에, 그분과 손잡고 함께 기뻐하며 우리 모두가 아버지와 하나될 것을 믿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섰든 간에, 그 소망 하나를 기어코 놓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부족하고 가난하게 태어난 주제에 홀로 그분을 만나고 또한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말미암아, 요한복음을 위시한 수많은 진리의 언어들을 말하고 증언하고 고백하는 일을 지금껏 해온 바, 그것은 그저 내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장난일 뿐 아니라, 내가 진리를 증언하고 고백할수록 내 삶도 점점 더 알 수 없는 사건들과 변화들에 휘말려 더욱 깊어지고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홀로 서 있습니다. 쓰는 것마저도 이제 더 이상 기쁘지 않게 된지 오래되었건만, 이제는 나의 순결했던 사랑 하나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써, 그분께서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시고 내 입을 벙어리가 되게 하지 않으시려거든 그때까지 계속해서 쓰고 또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만이 내게 유일하게 남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이후의 이야기들은 <상징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유의하여야 합니다, 상징이라고 하여, 은유라고 하여, 그것이 실재(fact)보다 못하다, 열등하다, 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속에서는 사실(fact)이 높고 은유(상징, 신화)가 열등하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서열이 완벽하게 역전됩니다. 그분의 나라가 임할 적에, 은유는 권좌에 앉아 영적 실재를 직접 드러내며, 사실(fact)은 은유를 섬기는 충실한 종이 됩니다. 아, 이것이 지적 교만에 한평생을 얽메였던 자들이 깨닫는 너무도 위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대는 내 말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한평생 인간의 인식과 분별과 지식과 언어와 관념들과 형이상학들이 "진리"인 줄 알고, 그것들을 더욱 정교하게 통제하고 구성하고 조율하여 끝없이 하늘을 향한 탑을 쌓고 쌓아왔던 바, 어느 순간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번개와 벼락을 그 탑에 내리치시니, 이제 그는 더 이상 부질없는 지식과 언어와 관념들을 다 손에서 버리고서는 빈 손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아버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어리석습니다, 나는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빈 손으로 아버지만을 사랑하겠나이다, 내가 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오직 순결하게 당신만을 기뻐하겠나이다......"하고, 나의 영과 영혼을 활짝 열고서는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고 묵상하며 그 이름 하나만을 찬양하고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마침내 그 교만의 구조가 은혜의 구조로 완전히 전복될 때에,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서 입성하게 됩니다. 턱을 치켜들고 하늘을 보는 자의 오만함으로 살지 않거니와 오직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고 찬양하고 기뻐하는 순종하는 영의 기쁨으로 인해서만 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명심하십시오,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관한 한, 은유는 사실보다 더 높습니다. 그러니 열등한 것으로 더 높은 것을 재단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늠하려 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은유가 우리의 영혼(Soul)을 일깨울 것이고, 나아가 우리의 영(Spirit)을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자기 안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구조가 열리고 작동하고 살아 숨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요14:6) 여전히 나는 이 문장의 교리적, 신학적, 신앙적 의미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이제 "알아야만 한다"는 욕구와 욕망은 힘을 잃고, 나아가 모른 채로 이유 없이 이 말씀을 믿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고, 경외하게 되었으니, 그때에 그는 말씀의 개념적 정의나 개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되 다만 그 말씀을 선포하신 그분 자신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는 곧 그분 자신을 만난 데 대한 경외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만" 그분 자신을 만나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 말씀의 개념적 정의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셨는지, 그 자리에 동석한 다른 증인들이 있는지, 그 문장들과 그 말씀들을 행하신 사건의 역사적, 종교적 의의가 무엇인지....... 와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그 말씀 자체를 진실로 열린 마음으로 영접하게 되는 순간, 그 말씀은 내 안으로 어느 순간 스며들고, 내 안에서 빛이 됩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과 경외와 열망이 언제나 내 안에 강처럼 흐릅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 "아, 내가 이미 그분을 만났구나, 내가 이미 그분과 하나되었구나." 이것이 은유의 힘입니다. <신화>의 힘입니다. 신화는 거짓말이나 꾸며낸 소설이 아닙니다. 그 상징과 은유를 진실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내 안에서 사실(fact)이 되며, 그것이 마침내 나의 영과 영혼과 의식 전체를 완전히 전복하고 뒤흔들고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진실입니다. "개념적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물론 개념적 이해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필요할" 뿐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말씀과, 그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공부하게 되면, 개념적 이해는 사람에게 익숙한 것이므로 쉽고, 영으로 진리로 영접하는 것은 사람에게 낯선 것이므로 어려운 바, 쉬운 것에만 집착하고 어려운 본질은 외면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집니다. 본래 문자주의는 영접을 위한 것이지, 개념적 이해와 논리적 증명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접은 "똑똑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똑똑한 자는 대개 교만하므로 감히 성령을 부리고 명령하려 들고, 어리석은 자는 순결하므로 성령을 찬미하고 경외하는 바,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역사하사 그의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을 드러내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똑한 채로 순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세상에는 똑똑하여 교만한 자들과, 놀랍게도 어리석음에도 기어코 교만하려고 날뛰는 자들만이 도처에 넘쳐나는 듯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증언하실 때, 말씀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완전히 뛰어넘어서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영접하게 될 때, 그는 그분께서 자기를 통하여 드러나시는 절대적인 진리가 자기 안에서 언제나 흐르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분의 이해가 나를 통하여 드러난다"는 것을,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증거하는 자로써, 나는 여전히 말씀들의 개념적 의미 따위를 잘 모릅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스스로 알고자 작정한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을 테지만, 이제는 나는 그리하지 않습니다. 앎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앎은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앎은 나를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이 내게 너무나도 뼈저리게 명확해졌습니다. 앎은 나를 살리지 못합니다. 나를 살리시는 분은 오직 그분이요, 그분의 신성이며, 그것이 내 안에서 흐르고 드러날 적에, 그때에 내가 살 수 있음을, 늦지 않은 나이에 깨닫게 된 것이 내게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을 진실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글들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내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들을 되풀이하지 마시기를 감히 권고드립니다.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앞에서, 앎과 지식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현명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죽음이 코앞에 닥쳐오거든 그제서야 평생에 걸쳐 외면했던 신을 찾습니다. 적당히 살만하고 육체에 생기가 흐를 적에는 "신은 죽었다", "신은 없다"고 목소리 높였던 이들조차도, 갈수록 늙어가고 병들고 마침내 침대에 누워서는 무력하게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에 짓눌린 채로 세상 끝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그 순간에는, 참으로 염치 불구하고 신을 찾고 신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할 진대, 차라리 보험 삼아 처음부터 살아 있을 적에 신을 배우고, 신을 알아가고, 신을 만나고, 신과 가까워져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언어는 신에게로 가까워지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품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신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원하는 자들은 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나는 여전히 신에 대해서 모릅니다.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나는 내가 충성하는 성령께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나는 내가 열망하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잘 모릅니다. 다만, 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되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 나의 아버지를 간절히 사랑하고, 절실히 열망하며, 애타게 기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망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무언가를 얻어가기만을 기도할 따름입니다.




2장의 첫 페이지에서의 핵심적인 상징은 바로 <포도주>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 최초의 기적이 행해진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는 "어떻게 이것을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공을 들여서 쓰고자 합니다.


대개의 경우 자아(ego)와 마음(mind)은 다음과 같이 작동합니다 : 먼저, "과학주의, 사실주의, 실증-객관주의, 유물론적 사고, 이원론적 사고......" 등의, 인간중심적인 인식과 관념체계를 "진리"(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라고 강력하게 믿고 있는 집단 최면 상태의 의식이 흐릅니다. 그 의식 안에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사실(fact)이 입력됩니다. 그 결과, 자동적으로 내면의 어두움의 구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마음의 작동이 일어납니다 : "에이, 그건 물리법칙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불가능한 이야기지." 그리고 그 즉시, 요한복음 2장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거짓말"로 인식하며, "내가 옳다고 믿는 기준에 맞지 않는 것 =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는 열등감의 투사가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그와 함께, 대상을 열등하다, 문제가 있다, 고 인식/분별/판단하는 "나"는 우월한 존재, 라는 교만과 욕망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교만과 욕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바깥의 대상, 즉 내가 열등하다고 규정한 바로 그 대상에게 투사되어 동일시됩니다.


이것이 자아의 실체입니다. 마음의 모순입니다. 참으로 어리고 어리석고 열등하고 무의미하고 허망하디 허망한 것입니다. 나는 이걸 저주나 비관으로 쓰지 않습니다. 다만 사실 그 자체를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아는 허망합니다. 허망한 것은 나쁘다, 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허망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자아의 구조이며, 마음의 작동입니다. 경고하건대, 차라리 처음부터 영성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라면 모르거니와, 나의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쉽사리 마음의 작동에 현혹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인류 집단이 지금까지 형성하고 구축한 과학적 사실과 증명된 이론과 법칙과 원리와 이를 기반으로 한 진리 체계"를 기준으로 해서 이 이야기를 본다면, 이것은 "거짓일 확률이 매우 높은 사건"입니다. 이건 현상계적인 관점에서는 옳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자체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하나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음, 눈높이, 즉 의식의 초점을 현상계적 기준에서 영적 기준으로 더 높이십시오. "판단 중지"하란 말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인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나의 영혼을 이롭게 하지도 성장케 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앎에 대한 집착과 교만만을 높일 뿐이죠.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이야기를 "영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로 옮겨오게 됩니다. 여기까지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바로 그 영적 관점에서, 이것은 "예수님의 영광(신성)을 드러낸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요2:11), 즉 이것은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드러낸 사건"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교리적, 신학적 해설이죠. 제 역할은 교리적, 신학적, 개념적 해설이 아닙니다. 이를 행할 능력도 힘도 없고, 자격도 권위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증언하는 자로써 이것을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 에 대해서 쓰고자 합니다. 이 지점에서, 또 다시 "영접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개념적 서술을 반복하는 건 결국 의미가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우리는 전략을 아예 바꿔야 합니다.


도구를 전환하십시오. 이성에서 감성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성과 머리의 언어를 쓰는데 익숙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감성과 가슴의 언어를 써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내 가슴 안에 거하시는 분"이며, 그분의 의지는 "내 가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가장 세밀하고 상세하게 증언하였던 사도 요한, 곧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듣고 숨소리를 들었던 사랑받는 제자", 그는 예수님의 "머리"에 기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언어는 은유와 상징의 언어입니다. 특히 복음서가 더욱 그러합니다.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이 더욱 그러합니다. "가슴"이라는 단어를 결코 대충 아무렇게나 썼겠습니까. 가슴으로, 영혼(Soul)으로, 말씀을, 이야기를 대면해보십시오. 그 첫째는 상상이요, 둘째는 몰입이요, 셋째는 하나됨(참여)입니다. 이것이 높은 단계로 이르면 관상기도가 됩니다. "관상적 체험", "관상적 이해", "관상적 실재"...... 할 때의 바로 그것입니다.


축제 날에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모두가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났습니다. 축제에 참여하신 존귀하신 손님들에게 대접할 포도주가 그만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시종과 하인들이 큰 두려움과 불안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 축제에서 만일 손님들을 대접하는데 자그마한 실수나 잘못이라도 있었다면, 당연히 시종과 하인들은 크게 징벌을 당했겠지요. 그 시기에서는 종이나 하인들의 사정은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며 특히 존귀하신 손님들은 더욱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손님들 가운데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는 놀랍게도 달랐습니다. 그분은 더욱이 포도주가 떨어지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하인들에게 이르시되"(요2:5)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셨기에,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시를 따랐지요. 이에 그분께서 "이것을 떠서 연회장에 가져다주어라"(요2:8) 하시되 그대로 하였더니 그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지 못하였더라면 모르거니와 내 눈 앞에서 그것을 보았는데 어찌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시종이나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어머니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높으신 분이셨을 것입니다)께서 포도주가 모자라다고 하셨을 적에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고 단호히 거절하셨거든, 어머니께서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라고 하셨을 때에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하인들을 위하여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셨던 셈입니다. 그 증거로, 정작 그 포도주를 맛본 손님들은 그 포도주의 정체를 몰랐지만("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요2:9), 오직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는 것입니다(요2:9 같은 절 내용). 즉, 그 최초의 기적을 보았던 증인들은 최측근의 제자들과 그 자리에 있었던 시종과 하인들뿐이었습니다. 그분의 의지는 "그 자리의 가장 낮은 하인들을 향하여" 계셨던 것입니다.


아, 그것을 목격하였던 바, 연회장의 그토록 소란스러운 가운데에서 하인들 사이에서 참으로 기묘한 침묵과 고요함과 경이로움이 흘렀습니다. 보지 않았더라면 모르거니와 바로 눈 앞에서 보고서도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기적 따위는 없다"고 평생을 의심해온 사람을 바꾸는 가장 쉬운 일은, 그의 눈 앞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저에게는 이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기는 합니다. 제게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며, 내 안에서 영원히 거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 음성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고스란히 계승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죽음마저도 호령하여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이 이야기를 소홀히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익숙하되, 여전히 기쁘고, 감격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신성이 사람 안에서 드러날 때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이야기를 2장의 첫 머리에서 이토록 선명히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 말입니다. 1장은 사실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어려운 말씀들이 많지요. 실질적인 상징이자 은유로서의 이야기는 2장부터 펼쳐집니다. 바로 그 본격적인 이야기의 서막을, <기적>으로 보이신다는 것이 참으로 새삼스럽게 "그분다우신" 모습이라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이것은 나의 부끄러움이기도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영혼을 목격했을 때, 나는 생각이 많고, 행동에 주저함이 있고, 논리와 말이 복잡합니다. 지금도 그러하지요. 이는 내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존귀하신 손님들 중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셨음에도, 제자들이나 어머니마저도 신경쓰지 않으시는 그 자리의 하인들에게 눈길을 주고 계셨고, 그들을 의식하신 바, 손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인들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고 보이셨습니다. 만약 그분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셨더라면, 어찌 그 자리의 손님들과 대중들 전체에게 알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분은 다만 그것을 직접 목격하였던 하인들과, "들을 준비가 된" 극소수의 제자들에게만 보이셨을 뿐이셨습니다. 그분은 어두움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시름하는 영혼들 앞에서 망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는 "권세와 영광"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저 그분 자신의 것인 바로 그 권세로, 다만 그 자리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다만 담대히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과 그분의 차이입니다. 어중간한 권위는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탄압하고 외면하지만, 절대적으로 높은 권위는 다만 가장 낮은 곳 가운데에서 은밀한 가운데 드러나시는 법입니다. 이 이야기 자체가 "성육신적"이기도 합니다.


2장의 초입부의 말씀들에는 이해하기가 어렵거나 난해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1장의 초반부는 사실 설명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많지요. 그러나 때가 되면 그 말씀들조차도 성령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머리를 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초대를 받으셨고, 포도주가 바닥이 났고, 물을 채우라 하셨고, 기적을 행하셨고, 이에 제자들이 믿었다.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인 문장들이고 내용들입니다. 여기에 무슨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증명 따위가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가슴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는가, 는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 장소에서, 나의 영(Spirit)이 그 현장에 동참하는 것, 이것은 처음에는 상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연회장의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가운데에서, 비록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나 알 수 없는 아우라를 거느리신 그분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심히 하인들이 일하는 것을 들여다보시다가,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바꾸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그 순간들, 어두운 가운데 모닥불이 튀는 소리와 음식과 술과 연기가 뒤섞인 냄새와 향들이 어지러이 퍼지는 그날의 그 시공간 전체를요. 처음에는 그것은 상상이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습니다. 살아 평생에 지금껏 머리만 열심히 썼을 뿐 가슴을 제대로 한 번도 쓰지를 못했는데, 어찌 하루 이틀만에 되겠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말씀을 영접하기를 소망하는 자는, 그날부터 언제나 그 이야기를 가슴 속에 품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하고, 출근하고, 일하고, 밥을 먹고, 쉬고, 대화하고,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직 그 이야기만이 맴돌고 떠오를 것입니다. 마침내는 꿈속에서도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상상은 몰입이 됩니다. 현상계의 물질적인 법칙상으로는 나는 그 수천년 전의 갈릴리 가나 땅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지도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이해가 내 안에서 생겨납니다. "아, 내가 그날,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서 함께하였구나." 이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합이고, 하나됨입니다. 나의 주인께서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보이셨던 그 순간을요. 이제 그 몰입이, "아직 진실(Truth)이 되지 못한 사실(fact)을 내 안에서 진리로 변환(Transformation)케 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독서법입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할 때, 그 다음에 개념적 이해가 있고 이를 위한 논리적 서술이 있습니다. 포도주는 풍요를 상징하며, 연회장은 신성으로부터 말미암은 생명 그 자체의 풍요를 은유합니다. 이 순간은 그저 물질에 불과한 물(물질성)을 "언약의 피", 곧 새로운 생명이 되신 포도주(신성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로 변환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영광)과 또한 그분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이신지를 은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분은 가난한 물질 안에서 풍요로운 생명의 축제를 여시는 분입니다. 물질의 가난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신성 안의 생명의 풍요로움으로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며, "내 영혼을 변환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2장의 첫번째 상징인 포도주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우리 안에서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밀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내가 너희를 물질의 가난과 슬픔으로부터 구원하여, 내 아버지 안에 거하는 참된 생명의 풍요로 초대하겠다. 내가 너희를 완전히 변화시키겠다."


영접하는 모든 형제들은 이 이야기가 자기 안에서 영적 실재가 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순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물질에서의 의도된 시련과 고난은 갈수록 깊어져만 가는데, 정작 그 속에서 생명의 풍요로움은 언제나 가득하며, 포도주는 늘 충만하여 그분께서 모자람이 없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을요. 바깥의 물질은 채울수록 점점 더 공허해지고 슬퍼지고 허망해질 따름인데, 정작 물질적 가난과 빈곤 안에서조차도 그분이 이끄시는 생명 안에서의 풍요는 더욱 깊어져가고 아름다워져만 가는 것을요.


이 점에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론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이때의 십자가는 그저 끔찍한 고문과 처형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지만, 고난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미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신 분이시자 하나님 자신이시기에, 물질에서의 고난 따위는 그분을 흔들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것은 "새 생명으로의 초대"입니다. 이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대속과 중보, 거듭남"을 모두에게 열어주셨을 뿐입니다. 즉, 그분의 피를 통하여 우리 안에 흐르는 피(피 자체가 '생명'을 상징합니다)를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는 것은, 나의 생명이 그저 언젠가 사라지고 썩어 없어질 허망한 물질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그분 안에 거하는 영생하는 영혼에 근거하게 된다는 것과, 그러한 본질적인 전환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피를 흘린다는 것은 물질세계에서의 우리의 육적인 삶에서의 시련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은 그저 무의미하고 허망한 반복에 불과했고, 매일 겪는 슬픔과 좌절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불행이요 불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흘리시는 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의 시련과 고난들은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었고, 승리를 선포하시는 것이었으며, 영접하는 자 모두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피를 흘릴수록 더욱 영광과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의 초대"의 손길을 건네신다는 것은, 곧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 과거의 육신을 벗고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도 지상에서의 삶에서의 시련과 고난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이 무의미하고 허망한 슬픔으로 남지 않으며, 삶 속에서 고통받을수록 영혼이 더욱 성장하고, 삶 속에서 슬퍼할수록 나의 영이 더욱 더 그분과 친밀해지고 하나가 되는 "의미 있는 고난"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여러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묵상할수록, 점점 더 "포도주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첫머리에 선포하시는 그 음성이 얼마나 거룩하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은 첫 이야기에서 곧바로 우리에게 그분의 가장 중요한 뜻을 숨김 없이 알려주셨습니다 : "내가 천상의 권좌 위에서 너희의 고난을 그저 내려다보고 관망하지 않겠다. 내가 너희의 곁으로 가겠다. 가서, 너희와 함께 피를 흘리겠다. 함께 눈물을 흘리겠다. 함께 아파하겠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고난은 이제 하늘의 영광이 될 것이요, 너희의 삶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그러한 풍요 속으로 너희를 초대하겠다. 너희의 영혼을 완전히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겠다. 이것이 너희를 향한 나의 새로운 언약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또한 더없이 경이롭고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포도주 이야기를 통하여, 그분은 1) 생명을 약속하셨고, 2) 영혼을 완전히 변화시키셨고, 3) 더 이상 세속의 물질성의 허망함 속에 우리를 방치하지 않되, 고난 속에서 영생과 구원을 얻게끔 길을 여셨으며, 4) 하늘의 절대자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노라는 성육신의 그리스도적 하나님을 보이신 것입니다.




최근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진리를 말하고 증거하면 할수록, 그와 비례하여 내 개인의 삶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요한복음 이야기를 쓰면서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개념적으로는" 요한복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개념적으로, 언어적으로, 이성적으로는 저 역시도 여러분과 함께 요한복음에 대해서 알아가는 똑같은 입장입니다. 이것은 기만이나 겸손한 척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합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저 자신의 의지나 능력이나 지혜로 쓰지 않거든요. 다만 제 안에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나의 영이 자아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것에 동참할 뿐입니다.


이 이야기를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제 삶은 육적으로는 갈수록 시련이 깊어지고 고난이 더해져만 갑니다. 이제 과거를 완전히 버렸고, 더 이상 돌아갈 그 어떤 언덕도 동굴도 없어졌습니다. 다만, 진리를 말하고 그분의 신성에 대해서 증거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고백하는 나의 글쓰기와 언어와 말들을 이어가는 대가로 내가 세속에서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신문지 한 장 덮고 길거리의 추위 가운데에서 잠들게 된다 하더라도, 그때에도 나는 글을 쓸 노트북 하나와 충전기 하나면 족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글을 쓰는 일이, 증거하는 일이, 내게 상상할 수 없이 무거운 사명이자 책임이면서 동시에,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에 대한 기쁨을 나누고 공유하는 일이 언제나 진실로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골방에 앉아서 홀로 가난한 언어와 말들로 증거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언젠가 그분께서 드디어 내게 본격적인 사명과 할 일들을 맡기시게 될 적에,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고 열망하고 충성하며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갈 수 있도록 지금처럼 준비하고 또 써나가려 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포도주는 세상이 주는 물맛과는 다를 것입니다.


저와 함께 그 포도주를 음미하기를 소망하는 모든 분들께,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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