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신 주(主)의 몸
요한복음 2장의 후반부는 그 유명한 "성전 정화"의 일화입니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분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므로 예루살렘으로 오셨고, 이에 성전(聖殿) 안에서 사람들이 장사판을 벌여놓는 모습들을 보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2:14)
이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아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물건을 사고팔고, 돈을 거래하고, 비즈니스적인 거래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시장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 관계로 읽는다면, 아마도 오해의 여지가 가장 많은 일화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 중에서는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을 터인데, 왜 그들의 생계를 위한 장사를 다 뒤집어 엎으셨는가?" 아마도 이러한 의문이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좋게 타일러서 내보내면 되는 것을, 왜 대화도 나누기 전에 무력과 폭력부터 행사하셨는가?" 하는 의문들도 들 수 있겠습니다.
잠시 연재를 쉬는 짧은 시간 동안, 번아웃(burn out)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열망(熱望)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의 열망은 한창 강렬하게 불꽃이 타오르던 시기의 맹렬한 그것입니다. 불꽃이 화려하게 절정을 향하여 자기를 불사르는 그 순간의 열망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절대적인 확신 가운데에서 내 영과 영혼의 모든 에너지를 기꺼이 불태움으로써 스스로의 빛으로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며, 이로써 그분의 영광을 이루고자 하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형상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분은 영원하시지만, 우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자아와 몸은 유한합니다. 쓰면 쓰는 만큼 닳게 됩니다. 영적인 에너지 역시도 이와 같아서 - 실상, 스스로 존재하시되 완전하고 영원히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 뿐이시며, 그분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와 생명들은 유한하고 상대적입니다 - , 마치 영원할 것만 같던 그 맹렬한 불꽃도 점차 사그라들며, 마침내 두번째의 열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빛은 점점 꺼져만 갑니다. 에너지를 거침없이 전부 다 쏟아부었던 그 시기를 결코 후회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리 맹렬하게 쏟아부은 만큼 그 반작용으로, 에너지의 소진과 고갈 역시도 급격하게 찾아옵니다. 맹렬하게 타오른 만큼, 그 불꽃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으며 전부 다 떠나고,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에서, 찬양할 입술도 떨어지지 않고 예배할 몸의 기운조차 남지 않았으며 그분의 권세와 영광을 증거할 언어와 심지어는 그분께 대한 나의 진실한 사랑을 고백할 말들조차도 완전히 메말라버린 가운데, 광야 한가운데에서 벙어리가 되어서는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그 영적 번아웃의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그 시기를 지나가는 영혼에게는 감히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조차도 침묵하시며 곁을 떠나신 듯한 그 시기는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과 눈물 가운데에서 점차 그는 두번째의 열망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과거와 같이 맹렬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치 오랫동안 꾸준하게 빛과 열을 내는 숯불처럼, 이토록이나 고갈되어 버린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은근하고 깊이 있는 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의 열망이 십자가에서 죽고, 두번째의 열망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비록 아들은 그 첫번째 열망의 순결함으로 인하여 이 지상에서 짧게 생을 마감하더라도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이루기를 바랄지라도, 이 세상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한순간 불타오르고 허망하게 짧은 생을 마치기를 응원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가능한 오랫동안 세상에서 살아가며, 삶을 통하여 성장하고, 늙어가며, 마침내 완숙하고 지혜로운 영혼으로 완성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의 그 뜨거운 열망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지를 다 아시면서도, 아들의 의지를 꺾고, 넘어뜨리고, 좌절시키고,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기를 지날 적에, 우리는 비록 우리 자신의 영적 번아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조차도,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실지를" 나 자신의 슬픔과 아픔보다 반드시 먼저 헤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 언제나 아버지만을 바라보는 마음, 그것이 주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의 유일한 표증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한때의 불타오르는 화려한 불꽃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언젠가 꺼지고 사그라들게 될, 한때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께서 그 화려한 시기의 불꽃만을 사랑하신다면, 불꽃이 사그라들고, 약해지고, 좌절하고, 무릎을 꿇고, 힘에 겨워졌을 적에, 능력이 없고 힘이 없다 하여 우리를 버리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외려 꺼져가는 불꽃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빛을 발하고자 하는 "의지(will)"의 한결 같은 방향과 목적, 그 하나만을 보십니다. 고갈된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아버지를 바라보며, 주의 이름을 가슴에 품으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살아가는 바로 그것 말입니다. 비록 상태는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은 온전한 나의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2장의 성전 정화의 상징적 은유를 읽으면서, 나는 "가장 뜨거운 첫번째의 열망"의 그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지금도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그분의 "가장 뜨겁고 강렬한 불꽃"이지 않을까, 그리 느끼는 것이지요. 성전은 곧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께서 임재하시는 성스러운 땅이며, 그 장소는 반드시 거룩하심 가운데에서 지켜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율법이나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율법과 형식을 지키겠습니까? 그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결국 그 답은 하나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경외하기에, 내가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경외하는 그분 앞에서 결코 아무렇게나 함부로 망령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매, 결국 그 사랑 안에서 율법이 드러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벌주시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분이 벌주지 않겠다 하시매 그때에는 율법을 다 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자 함이라면, 그것은 그분이 어떤 상이나 벌을 주시든 간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내 스스로의 사랑에 대한 표증으로서 이를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가 지금 내 곁에 없더라도, 내가 그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써 마음가짐과 행동과 태도를 늘 진실하게 견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내 곁에 연인이 없으므로 내가 지금 다른 이와 잠시 교제를 한다고 한들, 연인은 어차피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면, 육신이 내 곁에 있으나 없으나 그와 무관하게 "언제나" 사랑하는 이는 나와 마음으로, 영혼으로 함께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때에, 그는 한결 같은 사랑의 증표로써, 언제나 진실함과 순결함으로 마음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율법 이전에 "사랑"이 더 높은 것입니다. 사랑할 때, 율법은 스스로 지키고 따르게 되는 것이지만, 반대로 율법을 강제한다고 하여 그 가운데에서 사랑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삶과 일상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스스로 소망하게 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셔서 지옥에 보내실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게 된다면, 한평생을 율법을 빈틈없이 지킨다고 한들 마음으로는 이미 율법을 어기고 싶은 욕망을 낸 것이므로, 이미 범죄한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더 높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마침내, 율법 자체마저도 넘어서게 됩니다. 사랑 하나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될 때, 마침내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누구와 함께하시는지,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를 모두 알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이지요. 이는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뜨겁게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토록 뜨겁고 완전하셨기에, 그분은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영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어 온 세상 자녀들을 다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의지이셨기에, 이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인류 전체"를 사랑하사, 자기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은 인류에 앞서서 "오직 하나님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으로 향하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에, "아버지의 뜻이 곧 내 의지가 되었으며", 이에 더 이상 율법과 형식에 얽메일 이유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길을 잃고 헤맬 적에, 그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를 본 것이라"(요14:9) 하시며,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 곁으로 내려가사, 그들이 사랑할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과 형상으로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길을 열어주셨으므로, 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랑 하나로 인하여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그리고 아들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의지를 온전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향할 적에, 우리의 시선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시선을 확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됨의 신비입니다. 그 길을 최초로, 가장 먼저, 가장 높이 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앞서 개척해놓은 길을 뒤따르는 것"은 매우 쉽고 편안한 일이되, 그러나 "가장 먼저 길을 여는 것"은 아무도 인정해주지도 알아주지도 않으되 매우 고통스럽고 쓸쓸한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결국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며,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언어"를 기꺼이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그분과 같을 수 없지만, 나는 그분을 사랑하므로 그분의 길을 따릅니다. 감히 말하건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이 결코 이해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적인 메시지들로 말하셔서 자녀들을 기만하시고 조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자녀들을 이해하시며, 자녀들의 눈높이로 스스로 천상의 권좌를 비우고 내려오사, 자녀들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과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주 되십니다. 온 세상에 자랑하여 내보이고픈, 너무나도 기쁜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매, 어찌 성전을 함부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전 가운데로 내려오사 그곳에서 편안히 쉬시는 가운데, 내가 어찌 "소나 양이나 비둘기 울음소리들과 돈을 주고받고 거래하고 흥정하고 장사하는 소음들"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감히, "신을 벗고", 조용하고 정숙한 가운데 성전의 한쪽 구석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그분께 기도드리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에서 홀로 눈물 흘리며 기뻐하며...... 그 허락된 시간이 다하매 물러나서는 그 기쁨 하나를 증표로, 나의 생명으로, 가슴 안에 간직하여 내 삶과 일상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성전이 갖추어야 할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를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 하나로 인하여 언제나 주께서 그의 몸과 영혼을 성전 삼으셔서 그 안에 편안하게 쉬시고 거하시니, 주를 사랑하는 이는 언제나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 어디서나 오직 자기 자신이 아닌 주만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어찌 평가하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오직 주께서 그를 어찌 대하시는지만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비록 나를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고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그가 흠결이 있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내 의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를 사랑할 적에, 주께서 그에게 어찌하셨을지를 이미 알게 됩니다. 그 순간, 나는 "주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하게 되며, 그의 곁으로 가서 주를 향한 내 사랑을 은밀한 가운데 실천하여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주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베드로를 만나시니, 그를 향하여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연거푸 세 차례나 물으신 까닭은, 그 이전의 세 번의 의심에 대한 서운함 따위가 아닙니다. 설마하니 그러셨을까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정할 것을 그분은 이미 다 아셨습니다. 알고서도 왜 굳이 그 말씀을 미리 하셨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이미 내가 알고 있으니 곧 너를 용서한다 하신 것이고, 둘째로 부활하신 이후를 예비하신 것이지요. 그분은 베드로가 "연거푸 세 번이나 주를 사랑한다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매, 배드로는 그 첫번째 열망이 십자가에서 죽고, 두번째 열망, 곧 끈기 있고 깊이 있게 은근히 빛을 내는 두번째의 열망이 된 것입니다.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주님, 내가 오직 당신을 사랑할 때, 내 영혼이 기뻐합니다"...... 세 번을 증거함은 곧 완전함의 증표이지요. 이에, 그분은 마침내 "내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먹여야 할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제 주를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더 긴 대화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써 어떻게 "양들을 거두어 먹여야 할지"를 이미 알았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곧 양식이었거든요. "보라, 나와 같은 죄인조차도 그분은 기꺼이 거듭나게 하셔서 당신을 사랑케 하사, 구원을 받게 하셨다. 하물며 너희들이겠느냐." 다른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할 필요가 없이,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진실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내게도 "세 번이나 연거푸 그분을 사랑한다 고백할 기회"를 허락하실 것이며, 이를 통하여 반드시 나를 "당신과 하나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분과의 하나됨, 이것이 곧 천국이며 구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첫번째의 열망"으로 아버지와 하나되셨고, 그 이후에 "두번째의 열망"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내어주신 바로 그것을 편안하게 이어서 유산으로 받음으로써,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본래 외아들만이 할 수 있었던 고귀한 역사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분은 육적인 건물, 곧 낡은 성전이 온 세상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이 이미 낡고 부패하고 무너졌으므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인류가 하나님께로 향하는데 있어서의 유일한 장애물, 곧 죄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르셨고, 또한 부활하신 그분 자신의 몸을 성전 삼으사, 그분의 인격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과 언제 어디서나 하나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육적인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부활하신 그분 자신을 새로운 성전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격"이십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식이나 에너지 따위가 아닙니다. 그분의 인격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하나됨의 신성 안에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인격적 신성"이라는 새로운 성전이며, 그 성전의 문은 우리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곧 "나"가 성전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가 새로운 성전의 유일한 입구이자 통로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세속적인 관념의 기준과 잣대"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그것이 곧 하나됨의 신성이며, 그 신성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상징적 은유로써 묵상하고 몰입하여야 합니다. 그때, 바로 요한복음의 진정한 힘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느껴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이 그토록이나 더럽혀진 모습을 보실 적의 그분의 슬픔이 얼마나 깊으셨는지를. 그리하여 채찍을 휘두르시고 고함을 지르시며 모든 것을 다 쫓아내시는, 아버지를 향한 뜨거운 마음 하나를.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2:15)
그분은 불꽃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한 영(Spirit)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의지가 곧 아버지의 의지이셨으며, 그분 자신이 곧 아버지이셨습니다. "너의 뜻이 곧 나의 의지이니, 가서 너의 이름으로 나의 의지를 이루라." 이것은 곧 성부 하나님께서 외아들께만 주신 권세와 영광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불같은 뜨거운 마음으로 성전, 곧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될 수 있는 거룩한 "길"을 다시 회복코자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일종의 "핫 플레이스"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곳에서 계속 사람들이 장사를 했더라면, 주머니는 좀 풍족해질지언정 결국 그들은 아버지께로 영원히 멀어지고 단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을 이루시기 전에는 성전은 유일한 "(하나님을 만나는)신성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땅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 곧 임재 자체가 신성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임재가 이루어지기에, 성전이 곧 신성한 것입니다. 순서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만나시는 그 순간,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그 관계성...... 그것이 곧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한 장소를 아무렇게나 "사랑하지 않는 마음", 곧 세속적인 마음과 행동들로 더럽히는 순간,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목마름과 고통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음성이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들은 "유일한 성전의 통로"인 나의 존재와 삶과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럽히거나 방해하는 것들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이나 관계일 수도 있고, 일이거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일 수도 있고, 그밖에 다양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기꺼이 "첫번째의 열망" 하나만으로 그것들을 불꽃 같이 뒤집어 엎을 수가 있을까요.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고, 내가 버려지고, 가난해지고, 비루하고, 빌어먹게 된다 하더라도, 오직 "정화된 성전"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매일 교제할 수 있고, 매 순간을 임재 가운데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 하나로 인하여 진실로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전을 정화하는 대신 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대는 성전을 정화할 것입니까, 아니면 애써 모른척하며 그럭저럭 살아온 대로 살아갈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께 있어서 하나님, 곧 "아버지"는 절대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세속에서 특권을 누리는 이들을 일컬어 "신의 아들"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감히, 어딜 그따위 오만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그 "하나님의 외아들"께서 지상에 내려오신 그 공생애 동안 특권과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습니까? "신의 아들"로 자기를 드러내신 결과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잃었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명예나 영광 따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처참한 죽음의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감히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나요. 신의 아들이 되기를 바랍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까? "외아들"께서 어떤 길을 걸어가셨는지를 다 알면서도, 그 삶의 무게를 다 알면서도, 기꺼이 "아들"이 되기를 바랍니까.
세속의 사람들은, "내가 절대 감당 못한다면",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그것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열망의 수준이요, 그들의 사랑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찌하는가 하면, 먼저 첫번째의 기도를 드립니다 : "아버지, 저는 그분처럼 십자가를 질 수가 없나이다. 저는 절대 그리할 수가 없나이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두번째의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여, 그분과 하나되며 그분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나의 능력으로 절대 불가능하니 오직 당신께서 함께하사 나를 이끌어주십시오." 사랑하는 자는 조건과 환경 따위를 변명 삼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기꺼이 그리되기를 바란다고 청하는 순간, 마침내 "성령"께서 나 대신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원하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조건과 환경 삼아서 도망치는 순간, "이성과 합리성"을 숭배하는 세속의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불가능 앞에서 더욱 사랑과 열망이 뜨거워진다면, 그 순간, 오직 성령께서 이끌고 인도하시는 주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아버지를 향한 열망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힘"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깊이 몰입해야만" 합니다. 느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순간을 :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2:16)
지금까지 홀로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열망하면서 이리 살아오는 과정들 동안, 나는 내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만 했고, 때가 차면 또 다시 시험을 맞아하고 달이 기울면 또 다시 떠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들의 나의 열정과 뜨거움과 사랑의 모든 것들을 다 합치더라도, 그 모든 순간들마다 내가 부르고 또 부른 "아버지"의 이름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성(神性)"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버지"라는 이름은 여전히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쓸쓸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감히 부르지 말아야 할 자가, 함부로 망령되이 부른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이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라고 하실 때에, 나는 그 글자 자체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낍니다. 그저 추상적인 상상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하실 수 있는 정당한 권리, 타고난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것처럼, "원래의 정당한 주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등장하는 "내 아버지"의 이름과 언어들에는 지금도 신성의 빛이 흘러넘칩니다.
그것들을 마주할 적에, 나는 당연히 절대로 저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 생에서 평생 동안 쓰고 또 쓰더라도, 부르고 또 부르더라도, 말하고 또 말하더라도, 내 입에서 내 손에서 흘러나온 글과 말들 중에서는 단 한 글자도 "생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글은 말씀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 없음을 고백하는 것조차도 내겐 교만함입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저 사도들도 다 이와 같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신성이요 생명이지만, 그에 비한다면 나는 이 가난하고 부끄러운 고백이나 증거들조차도 감당하기가 버거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압도적인 간격 사이에서, 나는 불가능하다고 하여 도망치거나 변명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딧불이로 태어나서 태양을 사랑하게 된 이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하여 평생을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반딧불이로써 태양을 열망하며 태양과 같이 빛을 내려고 평생을 바쳐 발버둥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태양을 사랑하기에, 태양을 모방하고 흉내낼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이라도 하고 또 할 것입니다. 쓰고 또 쓸 것입니다. 번아웃이 오면, 잠시 후퇴하더라도, 전열을 정비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고, 깃발을 다시 바로세우며, 나의 전선에 설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19)
그분의 십자가 부활은 그저 그분 자신만의 영광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께 십자가는 "굳이 질 필요가 없는 일"이셨습니다. 그저 천상의 권좌에 앉아만 계셔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의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오직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변함이 없고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었으며, 그 사랑 하나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길, "십자가"라는 증거를, 지상의 모든 "믿음"을 간직한 자녀들에게 선물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스스로 성전이 되셨습니다. 완전한 영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인격을 영접하고, 믿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신성과 연합하고 하나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분 자신께서 변치 않는 진리가 되어 우리를 이끄시고, 그분의 신성이 곧 생명이 되어 우리를 "살아서 영생하는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구태여 성전으로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곧 성전의 입구입니다.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와 삶과 일상이라는 길을 통하여, 내 안에 계신 새로운 성전, 곧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고, 영접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곧 "모든 인류가 나와 같이 아버지와 하나되게 하는 길"을 여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오늘날, 나는 그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일상적으로 너무나도 평범한 가운데 누리고 있습니다. 삶의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며, 아버지께 기도하고, 내 안에서 나의 주를 영접하며, 주의 임재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매 순간 나를 돌보시며 그분의 때가 이르되 내게 역사하시는, "하나됨의 신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곧 성전입니다. 나의 삶과 일상이 곧 성전입니다. 내 영혼이 곧 주께서 거하시는 집입니다. 그 성전, 지금은 어떠합니까?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고 돌보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아무렇게나 마음 가는 대로, 욕망과 집착이 이끄는 대로, 세속의 삶에 찌들어서는 방치되어 녹슬고 병들어가고 있습니까? 그리 살아도 됩니다. 죽음과 사망은 자기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변화하기 원한다면, 성장하기 원한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는 그 뜨거운 "첫번째의 열망"이 가슴 안에서 피어오른다면, "복잡한 건 몰라도, 아무튼 내가 이제 달라져야겠다" 하는 그 맹렬한 불꽃이 타오른다면......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됨의 신비에 동참하는 유일한 길이며, 또한 살아서 영생할 수 있는 진리이고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