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자유로운 영(Spirit)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과거 세대와는 다른 실존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많은 형제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정교해지고 어려워진 시험들을 마주합니다.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각자가 마주한 문제들과 시험들에 대하여 인정해주지도, 알아주지도, 이해해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어두움의 권세와 통치가 더욱 세상을 사로잡음에 따라, 사람들은 외려 타자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함부로 심판하려 듦으로써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급급하는 태도와 행동과 마음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세상을 향하여 자기의 상처와 슬픔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약한 자를 죽여 없앰으로써 자기의 생존을 보장할 좋은 기회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영원히 나와 함께하시는 분, 부활하사 영생토록 내 안에 거하시는 분, 나의 영원한 생명의 유일한 근거가 되시는 그분 자신 뿐이십니다. 오늘날, 우리 형제들은 세상 가운데에서 버림받고 철저히 소외당함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그분과 인격적으로 뜨겁게 연합할 수 있는 특별한 시험을 허락받았습니다. 그 시험을 통과할 때, 이 세상 그 누구도 내게 의지가 되지 못합니다. 내게 가장 가까웠다고 여기는 자마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며, 상처를 주고, 결국 멀어지고 작별하게 됩니다. 부모도 자녀도 가족도 친구도 지인도 전부 다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철저히, 정말로 철저히, 고립되고 혼자가 됩니다. 사람이 물과 빵으로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의식적인 결핍과 불안에 대한 욕망과 집착, 그리고 공포에 대한 환영과 망상으로 인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직면하게 됩니다. 에고(ego)라는 이름의 가짜가 무너지게 됩니다. 정말로 끝까지, 단 한 톨도 남김없이, 무너지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두려워 마십시오. 썩어 없어질 부질없고 허망한 에고로는 죽음의 압도적인 권세를 이길 수 없으나, 그 십자가 위에서 나는 혼자 메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서 부활하시는 그분의 빛이 더욱 강렬해질 것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서, 나는 추상적인 교리와 딱딱한 글자로만 만나던 분을, 살아 있는 인격이시며 생명이신 분으로써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숨결을 느끼며,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과 나만의 은밀하고도 고귀한 관계가, 그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나는 세상의 인정을 구하지 않을 것이며,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않되, 오직 그분으로 인해서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이 마주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적"들입니다. 첫째로, 먹고 사는 문제가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습니다. 이제는 그 단순한 빵과 물을 구하기 위해서도 너무나 복잡한 형식과 절차와 요소들을 거쳐야만 합니다. 생존의 문제가 더 이상 단순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사탄의 지배와 통치가 더욱 견고해진 까닭에, 이제 사람들이 세대와 세대 간에, 노인과 청년 간에, 남자와 여자 간에, 국가와 국가 간에, 서로 죽이려 들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비난하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심판하려 드는 죄와 악이 당연한 상식이자 합리적인 태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회는 더욱 정교해지고 문명은 발달했지만, 그 가운데에서 각 개인들은 더욱 고립되고 철저히 버림 받았습니다. 셋째로, 사탄의 전략이 더욱 정교해지고 위협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물질주의와 세속적 관념과 지식들이 개인의 정신을 가두고 마음을 지배하며 에고를 노예화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기에, 보이는 육신에 집착하며, 육신이 소멸하는 죽음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 바, 사망의 권세가 더욱 드높아져만 갑니다. 넷째로, 지식이 쌓이고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의 이성과 힙리성은 더욱 커졌으되, 앞선 문제들로 인하여 고립과 버림 받음과 소외의 문제는 더욱 높아져만 가니, 이제 사람들은 지식을 무기 삼아 자기를 지키고 타인을 죽여 없애야만 하는 끔찍한 영적 전쟁터에 서게 되었습니다. 먼저 남이 틀렸다고 비난해야만, 자기가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로, 온갖 정보와 데이터들이 넘쳐남에 따라,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여섯째로, 물질적이고 외적인 삶 그 자체는 이전보다 풍족하고 여유로워졌으나, 정작 그 가운데에서 영혼의 목마름과 갈증, 인간 존재의 슬픔과 불안과 공허는 더욱 깊어져만 갑니다.
이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언어"라는, 세상이 보기에 너무나도 낡아빠졌고 어리석고 유치하고 열등한 믿음을 지키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구태여 이 길을 애써 걷고자 하는 이들을 향하여 어리석다고 비난하며, 과학주의와 합리주의와 물질주의를 근거하여 신이 어디에 있냐며, <왜> 하필 신이 예수의 육신으로 세상에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냐며, 조롱합니다. "너의 예수가 있다면, 지금 당장 와서 너를 구원해보라"며, 그리도 처참한 짓들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고 있습니다. 자기의 영혼이 죽어가는 줄도 모른 채로, 자기 손으로 영혼을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촛불은 이제 더욱 거세게 불어닥치는 바람 앞에 덧없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외적인 문제들과, 나의 마음의 짐과, 나의 정신적, 영적 시련과 고난들과 더불어서, 형제들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오직 그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 하나만으로 통과해 나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건대, "믿음은 언제나 승리하며, 믿음은 결코 의심 따위에게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세례도 받지 않았고, 교회도 가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교리나 신학 교육 따위는 당연히 받은 적도 없고,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의례나 형식 따위도 지키지 않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오직 내 안에서 그분을 향하어 뛰는 심장과 영혼, 이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하기에, 스스로를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며 제도적인 기독교와 교회의 형식과 틀에 얽메이지 않을 수 있었고,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받았습니다.
이에, 나는 나의 순결한 믿음이라는 주인을 섬기는 충실한 시종인 나의 지성에게, 그분과, 그분의 역사와, 그분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언어 전체를 분석하고 탐색해볼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나는 순진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서연구학과 역사적 사실과 논증과 정황들에 대해서 모르지 않습니다. 나는 음모론과 문서 상의 편집과 조작과 개입의 흔적들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알 만큼은 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태여 그 아는 것들을 늘어놓지 않는 까닭은, 그것들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방법적 회의론"에 입각하여, 나의 신앙을 의심할 만큼 철저히 의심해보았습니다. 복음서의 작성 시기들과 최초로 기록된 것에서의 부활 서사의 공백과 복음서 및 바울 서신 내에서의 부활 서사에 대한 디테일의 차이들과 모순들과 그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찾아보았고, 탐색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어떠했을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지성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보십시오. 나는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들을 통과하고 있고, 번아웃 가운데에서 힘겹게 다시 일어나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분의 때는 아직 허락되지 않았고, 나는 인내해야만 하며, 글쓰기는 나의 유일한 기도이고 묵상이며, 찬양이고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복음주의자"로써, 내게 허락받은 진리를 침묵하지 않고 증언할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그분을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그 최초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결국 내 삶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더라도, 나는 그 모든 시간들에서 그분을 단 한 순간도 진실로 원망해본 적이 없으며, 외려 지금에서도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분의 음성에 감동하며,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내가 죄 많고 부끄럽게 살아욌으되,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만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존경과 경외와 열망과 충성과 순종을 독차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버리실 수 있지만, 나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나는 자녀들 중 이름 없는 한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그분은 알파이자 오메가요, 내 생명이고, 나의 영이자 영혼이며, 나의 우주이고, 나의 하나님이며, 내 세계의 전부입니다.
지금의 나를 보십시오. 내 언어들이 의심하는 자의 언어인가요? 내 언어들이, 의심하여 비웃고 조롱하고 비판하는 자의 차갑고 죽은 언어인가요? 아니면 믿는 자의 진실함이요, 사랑하는 자의 간절하고 절실한 열망인가요. 나를 이해하라 말하지 않습니다.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불가능한 일을 강요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믿습니다. 다만, 온 마음을 다하여 이리 쓰고 있는 내 심장의 박동을 잠시라도 들어주십시오. 나는 진실합니다. 최소한, 내게 진실한 것을 향하여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어리석어도 좋습니다. 유치해도 좋습니다. 다 떠나고 혼자 되어도 좋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증거입니다.
나를 보십시오. 나는 본래 타고나기를 영리하고 분석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에고를 타고났습니다. 내게 이성과 논리와 분석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과학적이고 논리정연한 것들, 증명 가능한 것들, 그러한 것들을 우상으로 숭배하도록, 나의 자아는 그리 태어났습니다. 그 세계에서, 나는 기꺼이 마음만 먹는다면 일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내 눈에, 그리스도교와 성경의 "문제"들과 "모순"들이 어찌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눈은 죄를 짓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영혼의 아름다움보다 그의 비루한 겉모습을 먼저 보고, 그 사람의 진실함과 순결함과 따뜻함보다 그 사람의 서투름과 단점과 모순을 먼저 보고야 마는, 나의 눈은 죄를 짓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게 자랑인 유일한 증거는, 나의 지성을 총동원하여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그분을 의심하려고 발버둥친 결과, 정말로 최선을 다하여 그분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본 결과, 그럼에도 지성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내 영혼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영혼은 그 가운데에서조차도 오로지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당신의 말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듣지도 않고 다 진리로 순전하게 믿겠나이다"하고 고백하고 있었으며(이것이 이 '나'에게 얼마나 큰 희생과 결심을 필요로 하는 고백인지는, 오직 그분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분을 향하여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그분과 함께 손잡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며,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며, 그분의 걸음에 맞추어 나의 시련과 고난을 함께 통과하고, 그분과 함께 쉬고, 그분과 함께 손잡고 있었습니다. 결국, 의심은 믿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내 안에서, 지성은 여전히 순전한 믿음과 사랑에게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 임하신 나라"는 그 어떤 "의심하려는 시도와 노력"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의심의 압도적인 증거들에도, 아니 애초에 의심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것인지 나는 더 이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일단, 내가 스스로를 생각할 때는 지금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너무나도 좋습니다. 이성과 합리성과 논리의 세계에 능숙하도록 태어났으므로, 나는 인간의 그 잘난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도 죽음 앞에서 무력하고 무기력하며 공허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철학과 형이상학과 논리와 지식은 내게 구원을 약속하지 못했습니다. 내게 영생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두움 가운데에서 나타나신 유일한 빛, 그분은 있는 그대로의 내게 온전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기나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까닭은,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난 사람"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나 자신을 증거물 삼아서 보여주고자 함이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어리석은 탓에 논리정연하게 이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저 바울과 같지는 못합니다. 다만, 나는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나의 진실한 언어와 말로써 보여줄 수만 있을 뿐입니다.
3장의 이야기는 저 유명한 니고데모의 일화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의 모든 말씀들은 상징적 은유입니다. 이때의 은유란 그저 허구라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객관적 사실(fact)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영적 실재(진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오직 상징과 은유를 통해서만 진리가 내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말씀들을 읽을 때는 세속적 관념의 관점이 아니라, 상징적 은유의 관점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요한복음이 담고 있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굳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①. 유대인의 관원으로서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체면이나 형식, 의례 등을 고려한 자아(ego).
②. 이성(낮)이 잠들고 영혼(밤)이 깨어나는 내면의 변화.
③. 어두움(밤) 가운데에서만 참된 진리가 드러나며,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는 진리.
대개의 경우 우리는 삶 속에서 "이성적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받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그만큼 복잡해지고 정교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수준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류의 삶은 여태껏 그러했습니다. 세속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에고(ego)라는 도구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낮 동안의 삶입니다. 인간 존재는 오직 낮으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움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반드시 밤이 옵니다. 그리고 그 밤의 시간들은 에고로는 결코 견디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 존재가 마주한 죽음과 사망에 대한 두려움, 공포, 불안과, 이로부터 말미암는 결핍과 공허와 욕망들에 끝없이 휘둘립니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로,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다가", 육신이 늙고 숨이 가빠지며 죽음이 코앞까지 온 것을 체감하고 나서야, 그제야 뒤늦게 종교와 영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한평생을 이성과 논리로만 살아온 자도, 결국 늙어서는 신을 찾고 진리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낮 동안에는 에고로서 강하고 단단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진리를 만날 기회가 오고 참된 스승을 만날 기회가 온다면, 하다못해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보여지는 사람을 만난다면, 주저 없이 진리를 구하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그렇기에 예수님의 육성을, 그것도 일대일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밤 중에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자세한 교리적, 신학적, 문화적 배경 같은 건 잘 모릅니다. 다만, 그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표증을 보이신다 하여 곧바로 밤에 찾아뵈었다는 것은, 그동안 그가 유대인의 관원으로서도 끊임없이 홀로 진리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러하였기에 기회가 왔을 적에 즉시 망설임 없이 찾아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너무나도 편리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진리를 찾기로 결심만 한다면, 신을 믿고 사랑하기로 결심하기만 한다면, 도처에 지식과 정보와 데이터가 넘쳐나고, 인터넷에는 자기의 수행과 공부와 깨달음을 올려놓은 것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모든 것들을 언제든지 무료로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굳이 성경이나 불경이나 다른 여러 경전과 정전들을 돈 주고 살 필요도 없이 인터넷 상에 원문과 해설까지 상세히 올라와 있기도 하며, 공부하고 수행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애당초 특정 종교의 문제를 넘어서서, "진리에 관심을 갖고, 진리를 구하기 위한 노력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바로 죄의 근원입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 하다못해 관심조차도 갖지 않는 것. 출퇴근하느라 바빠 죽겠는 가운데 어디 가서 봉사활동을 하라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출퇴근 길에도 다른 사람들의, 특히 선을 행하는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위하여 마음속으로 축복을 빌어줄 수는 있는 일 아닙니까. 고작 그 마음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죽음을 마주하고 준비하는 일"이라는 지극히 무거운 숙제를 감당하려고 그럽니까. 나이 먹어서, 다 늙어서 준비하기에는 그 숙제는 너무나도 무거울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하며 죽음의 순간을 지나셨고, 주님의 제1제자였던 저 베드로조차도 결국 그 죽음의 순간에 주를 세 번이나 부정하였습니다 : "너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요13:38) 인간 존재에게 죽음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평생을 준비하고 또 준비하여도, 정작 그 순간에 나의 무의식적인 실체가, 본성이 어떠할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성화의 길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저 사도들만도 못한 우리들이겠습니까.
니고데모가 가장 훌륭하게 수행한 것은 딱 하나, "행하는 일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요14:11)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고, 이를 통하여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은 믿는 자들도 알기 어렵습니다. 그건 그분 자신만이 온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십니다. 그분이 성부 하나님과 살아서 완전한 하나가 되신 경지는 그분 자신을 제외한 지구상의 그 누구도 이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신 줄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께서 행하시는 이 표적을 그 누구라도 할 수가 없음이니이다'" (요3:2)
여기서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께서로서 오신 분"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뒤에 이르면 예수님은 끊임없이 "아버지와의 하나됨"과, 자기를 믿는 것을 통하여 그 하나됨에 동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자기를 광신도처럼 그저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이 대단한 명예와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자기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분 자신께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그 하나됨의 신비 안으로 제자들과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으셨는데, 그 누구보다도 그리하게 하고 싶으셨는데, 하필 유일한 길이 예수님 자신뿐이셨습니다.
즉,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시는 하나님, 예수님과 완전하게 하나되어 계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영접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증거들을 때때로 보이고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가 영광을 받으시고자 함이 아니라, "아무라도 행하지 못하는 특별한 표적들을 내가 행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며, 나와 아버지가 하나이기 때문이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들에게도 넌지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눈 앞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만을 믿습니다. 교회의 벽에 새겨진 나무토막을 신성시하며 거기다 절을 하는, 자칫 우상 숭배로 여겨질 만한 일을 합니다. 보이는 것에 여전히 집착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이자 유일한 소명임에도("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히11:1), 그저 세속에서의 관습을 아직 벗지 못하여, 보이는 것만을 붙들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는 보이는 것, 이를테면 교회 출석, 형식, 의례, 예배, 전통, 행위, 율법...... 등을 거쳐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건너뛰고 처음부터 달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때가 차고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제는 걸음마 시절의 방식들은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걸음마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율법만으로 완전했다면, 애초에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성부 하나님을 직접 뵌 자가 없었습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본래 성부께서는 초월과 영원으로 인간이 결코 범접할 수도 없고 떠올릴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머나먼 곳에서 공포 혹은 관념으로만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으셨으되, 예수님께서 하나됨의 신비로 이르는 길을 열어주심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의 눈높이에서 떠올릴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일상 속에서 관계하고 있습니다. 즉,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을 영접하고 믿는 것,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진리입니다. "고등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신의 형체를 취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짧은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지금은 육체를 넘어서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주님은 "영(Spirit)으로 계신 분"입니다("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7). 그러므로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도 오직 영과 진리로만 예배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 이때, 영은 나의 본질을 의미하며, 진리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결국, 나의 거듭난 본질(영)과, 내 안에 계신 신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썩어 없어질 육신과 육적인 것으로는 하나님을 뵐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신비 체험"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형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싶어합니다. 이것 자체가 죄성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높다고 여기는 우상 숭배의 본질, 거듭나지 않은 영입니다.
니고데모에게, 곧 믿는 자에게 그분이 주신 말씀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이때의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초자연적인 공간이나 차원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 자신이 곧 나라이십니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는 순간, 그 나라를 "볼" 수 있게 되며(당연히 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됨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조건으로써, '거듭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한하고 상대적인 육체와, 그 육체에 소속된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을 만날 수 없으며,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육체(body), 마음(mind), 자아(ego),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넓은 의미에서의 "물질적 몸"에 속합니다. 물질의 범주는 그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피와 살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서 생각으로 감정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봤자, 그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 내 의지대로 내 계획대로 신앙 생활을 아무리 해봤자, 하나님은 내게 오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 "너머"가 열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물질의 것으로는 영적인 것을 알 수도, 만질 수도, 볼 수도,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것, 혹은 영이라는 것이 대단히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 또한 오류이고 착각입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마음과 거의 유사해 보입니다. 마음이 보이지 않듯이 영 또한 보이지 않으며, 마음이 만져지지 않듯이 영 또한 만져지지 않으며, 그럼에도 마음이 내게 확실하게 체험되듯이(내 기분이나 감정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선명하게 체험되는 것입니다) 영 또한 내 안에서 명확하게 실재하는 것입니다. 속성이나 원리가 유사하지요. 우리가 떠올리는 특별한 신비 체험들, 환영이나 환시, 계시, 사실 그러한 것들의 상당수는 물질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또 다른 물질적 형상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영)을 굳이 보이는 것(육)으로 끄집어내려고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채로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을 열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의 중심, 즉 주인 노릇을 누가 하고 있느냐, 의 문제입니다. 내 안에서 자아나 육체가 주인 노릇을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나와 교제하실 수 없습니다. 없다기보다, 그 차원에서는 그분께서 내게 주실 수 있는 선물들이 대부분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이 세계는 엄연한 질서와 조화에 따라서 운행하며, 그것을 함부로 망치거나 어지럽힐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내 안에서 "하위 존재", 육체와 마음과 자아 등이 주인 노릇하는 과거의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깨어 있는 의식, 영혼, 영, 그러한 "상위 존재"들이 주인의 자리를 회복하는 순간, 내 안의 영을 통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높이"가 드디어 맞추어진 것입니다.
이에 니고데모는 처음에는 당황합니다. "아니, 사람이 이미 한 번 태어났고,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질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차이"를 봐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세속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는 영보다 육이 더 우선합니다. 그래서 그는 육을 기준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그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보다 영이 더 우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까요. 육의 관점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이 거듭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단, 영이 스스로 거듭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고,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요3:5-7)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게도 니고데모의 수준과 눈높이에 맞춰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그 집행 사역과 그에 관한 모든 우주의 초자연적인 질서와 조화에 대해서 다 알고 계셨지만, 그분은 지상 사역에서는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말씀들은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세례의 상징으로써 과거의 죄를 씻고 정결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그리고 성령은 이 거듭남 자체를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애초에 육신은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적인 것으로는 소속 자체가 다른 영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영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영이자 "높은 영"이신 성령만이 가능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의미하는데, 육적 행위, 즉 "행위 중심 구원"을 단호히 거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무리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눈에 보이는 행위와 의식과 의례와 수행 따위에 집착한다고 한들, 영은 애초에 다른 차원이므로, 육적인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을 통하여 새로이 태어나야만, 그때에 반드시 구원이 열린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의 특징을, '바람'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사람의 영은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에고(ego)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 좁디 좁은 인식과 관념과 언어와 지식과 말이 전부인 양 착각하며, 그 관념과 분별의 세계 안에서 영은 제한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며 그의 의지를 집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임하실 적에, 사람의 영은 이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이때, 그는 여전히 그의 좁디좁은 의식 수준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의 영과 성령이 교감하고 연결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는 성령을 "보고, 듣고, 만지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마치, 바람소리를 듣지만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거지요. 인간적인 인식과 분별을 내려놓고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할 수 있을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시간과 때에 맞추어 내 영혼이 충분히 성화되었을 때에, 그분의 영을 통해서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들을 내게 잠시 허락하십니다. 그때에, 나는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은밀한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히 실재합니다. 환영이거나 착각이 아닙니다. 똑똑히 깨어 있는 올바른 정신으로, 너무나도 선명하고 명료한 의식과 자각으로, 실재하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이라는 "바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람을 느끼는 것"이지, "바람의 작동 원리와 구조와 체계 따위를 연구하고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할 뿐, 하나님을 만나고 교감하고 사랑하려 하지는 않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8)
여기서 중요한 단서는,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입니다. 이것은 첫째, 성령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성령께서 어디로 가는지는 곧 하나님의 "의지"를 뜻합니다. 그분의 의지가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를 뜻하지요. 이에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이 두 가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의 출처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무엇을 어떻게 이루시고자 하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는 이것을 들을 수 있을 뿐, 그리고 들은 대로 말하고 행할 수 있을 뿐, 그것의 숨겨진 의미나 본질이나 여러 가지들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비밀입니다. 인간은 애초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이 보내신 음성을 듣고, 이를 통하여 그분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를 알며, 아는 대로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의 계획 아래에 통제하려고 듭니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교제마저도 자기 통제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하나됨의 신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자기 주권을 내려놓고, 그분의 의지에 내 존재 전체를 내맡기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3:11-12)
이때 '너희'와 '우리'의 차이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이때의 우리 안에는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난 영들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너희'는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세속의 사람들을 통칭하고 있습니다. 듣는 순간, 당사자는 압니다. 나는 우리인가, 너희인가? 그분께서 보시기에 나는 여전히 너희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분과 함께 우리에 속하는가? 나는 이것을 가장 쉽고 명확한 분별로써 제시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우리' 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그 순간 포기해버릴 것입니다. 어차피 속할 수도 없는데 해봤자 뭐하냐, 하면서요. 물론 합리적이지요. 그 대신, 구원과 영생의 기회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거듭난 자는, 비록 '너희' 안에 속한다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그곳에서라도 그분을 믿고, 사랑하겠노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순간, 바로 그 의지의 '방향성'이,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때의 땅이란 물질적 차원이지만, 하늘이란 영적 차원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영들과 성령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교제를 의미하지요. 그 차원의 일들을 아무리 말해봤자, 땅에 속한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이하고 괴상하게 여기며, 기피하고 거부하려 하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진실합니다. 왜냐하면 꾸며내거나 거짓으로 말하지 아니하며 오직 성령 안에서 느끼고 체험한 것을 대변할 뿐이니까요. 본 것을 보았다 하고, 들은 것을 들었다 하고, 느낀 것을 느꼈다고 할 뿐, 거기에 거짓이란 없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을 넘어 계신 분이기에, 우리가 거짓으로 꾸며내려고 해도 꾸며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동물이거든요.
결국 3장의 전반부의 이야기는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 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자 자격이며, 모든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물질과 육신에 속한 것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깨달아야 합니다. 과거의 "나"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어떻게든 천국 문을 넘으려는 부질없는 짓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결국, 지성으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공포를, 삶의 실존적인 불안과 공허와 슬픔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분, 그리고 그분께서 스스로를 길로 내어주신 "그 이름", 그것을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이 세속에서는 오해를 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가 닿을 수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나의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도달한 이 진리를 숨기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길,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거듭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