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3-15)
신앙을 처음 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솔직히 말하자면, 이러한 의문을 마음속으로 품고 있을 것입니다 : "예수님의 말씀과 사이비 교주들의 자기 우상화와 무엇이 다르지?" 실제로 사이비 교주들도 "내가 진리이고 내가 신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복음서 속에서의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라고 말씀하십니다. 둘 사이에는 언뜻 개념적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저는 말장난을 싫어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 지식, 관념들은, 실존하는 삶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며 눈물 흘리는 내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비록 저 또한 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 언제나 제게 슬픔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합니다. 이에, 최소한 글을 읽는 자들에게만큼은 저는 말장난이 아니라, 저에게 있어서 진리(Truth)로 드러난 것을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드러내려 합니다. 저는 위험한 질문들, 그러나 진리에게로 다가가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질문들과 주제들을,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통과해나갈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개념적 이해 자체를 전환해야 합니다. 대개, 아직 세속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신앙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를 낯설어합니다. 이 차이를 나타내면 :
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난 "말씀(내용)"이 (인격보다)더 중요하다. (세속적 사고방식)
②. 말씀을 완전하게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문자적 내용보다)더 중요하다. (신앙적 사고방식)
대략 이러합니다. 물론, 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의 개인적 신앙 중 상당수는 정통 교회나 기독교에서 공인하는 교리와 상당 부분 다르거나 대치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며, 제 말은 교회나 기독교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미리 솔직히 밝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격(통로) > 개념(내용)", 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온전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인가, 가수 이적은 그의 노래인 <거위의 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 "그 곡은 젊었을 때 단지 치기 어린 마음으로 쓴 가사일 뿐인데, 똑같은 가사를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인순이 선배님께서 노래할 때, 그 무게가 전혀 달라진다." 저는 그 말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유재석과의 협업을 설득할 적에, 유재석은 자기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였지만, 이적은 "그 말을 당신(유재석)이 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누가' 말하느냐, 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방구석에서 편안하게 놀고 먹는 금수자의 인격에서부터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것을 딱히 대단히 감동스럽게 느끼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인격은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할 자격이나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온갖 시련과 고난 끝에서 결국 성공하여 가장 화려한 절정의 무대 위에 섰을 때, 그때에 그의 인격을 통하여 정확히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삶의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완벽하게 똑같은 개념적 의미로 반복하여 마주하더라도, 바로 그의 인격을 통하여 그 말을 "영접"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와 힘을 얻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의 인격을 통하여 현현된 그 언어는 "힘(권세)"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내용보다 인격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내용, 즉 텍스트나 관념 자체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합니다. 문제는 그 명제를 "사람들이 삶 속에서, 내면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존재를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힘"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격>이라는 통로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 중에 상당수는, 특히 산상수훈과 같은 경우에는, 내용적인 관점에서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그렇게까지"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는 확신합니다. 그분이 하늘나라의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적이고 우주적인 진리에 대해서 몰라서, 그리 단순하게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그분은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그 아버지의 뜻인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완성하는 것이 그분의 최종적인 목적이자 의지(WILL)이셨으며, 그 의지를 이루기 위해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감동받고 생육하고 변화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씀을 수 없이 반복하십니다. 만약 그분께서 "아버지와의 하나됨"의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미나 구조 같은 것들을 가르치셨더라면, 그분 자신이야 본래 그러하셨으니 온전히 이해하고 계셨을지라도, 생업에 종사하던 어부였던 베드로나, 그밖에 그다지 배움이 깊지 못했던 당시 제자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도 그러했을진대, 하물며 대중들은 어떨까요. 이에, 그분은 차라리 오해받고 배척당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으로 내어주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특별하셨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분은 특별한 신성을 타고나신 분이었고, 특별한 능력과 힘을 가져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독점하지 않았고, "나를 믿고, 사랑하고, 내 말대로 따르고 실천하기만 한다면,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너희도 이루게끔 해주겠다"고, 가장 고귀한 것을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룰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 사랑의 의도와 방식을 마주할 때마다, 이것이 참으로 "그분다우신"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의 인격은 여전히 죄기 많고, 교만하고, 욕망에 집착합니다. 나의 인격을 통해서 발현된 언어들은, 사람을 생육케 하지 못하고, 변화케 하지 못합니다.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나의 언어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에게, 나의 인격은 부활의 희망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화려하고 그럴듯한 언어와 지식과 관념으로 무장하여, 스스로를 대단한 척 포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기 싫습니다. 이것이 나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달랐습니다. 그분의 인격은 완전하셨고, 이에 그분은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오해의 여지"가 있는지를 설마하니 그분이 모르셨겠습니까. 그분은 자기의 인격을 구원의 희망으로, 영생으로,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인격은 힘이 됩니다.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압도적인 권세와 영광, 말입니다.
인자(Son of Man)라는 표현은 단지 예수님 자신(개인으로서의 나)을 가리키는 용어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 그분은 "나는... 이니"와 같이, '나'라는 주어를 '인자'와 구별하여 별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인자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서의 그분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완전하게 하나되셨고, 그 하나됨의 신비를 통하여 드러나는 완전한 "인격적 신성"이자, "신성의 인격"이 바로 그리스도, 이셨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적 신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으로서의 '나'와 구별되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인격적 신성"이 바로 인자라면, 이것은 곧 성부에게로부터 내려와서(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이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며,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인류의 "구원자", 곧 그리스도의 인격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하여 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셨고, 이루셨고,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은 꽤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처음부터 "성부와 완전하게 하나되어 계셨고", 성부 하나님이 곧 "하늘나라(나라가 임하는 것)"이자 하늘 그 자체이시니, 결국 <인자>, 곧 그리스도의 인격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을 통해서만, 성부와의 하나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는 '죄'로 인하여 그 누구도 <완전하게>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될 수는 없었습니다.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씀은, 결국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성부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인류 구원의 역사"의 완결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때, 그 이름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 자체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특별한 영적 지식이 없어도, 신비스러운 수행법 따위를 몰라도, 그분의 인격을 믿고, 교감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살아서의 삶 속에서 교감하고 교제하고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승리"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그리스도의 인격과, 이를 통하여 이루신 십자가의 인류 구원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은 오늘날 내 삶과 내면에서도 실체로써 나타나게 되며, 실제로 나와 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게 되고, 십자가의 승리는 곧 "살아서 영생을 얻는(영생은 곧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만을 가리켜서 "나 이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더라면, 유감스럽게도 개체로서의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육적 한계를 지니셨을 것이고, 이에 성부께서 뜻하신 바, 인류 구원의 역사는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고 이루셨고, 이에 부활하사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시공간의 육적 조건을 초월하여 모든 믿는 자 안에서 구원과 영생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이때, 대다수 사람들은 자아(ego)와 인격을 오해합니다. 사실 이것은 세속적인 관념 하에서의 구별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의 구별입니다.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고는 개체의식입니다. 정확히는, "내가 주인(主)이다"라고 믿는 상태의 <나>를 뜻합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일상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나, 입니다. 이때의 자아는 그렇게까지 특별한 존재는 아닙니다. 자아는 그저 계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죠.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존재의 "층위"를 구별하는 법에 무지합니다.
이것은 의식이 깊어지고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은 대개의 경우 단순하고, 모순적이고, 열등하고, 불완전합니다. 그 생각과 감정들은 느낌이나 정서 자체가 거칠고 투박하고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때때로 의식이 깊어지고 정신이 선명해질 때, 예를 들어서 기도하거나 묵상할 때, 그 순간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들은 자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선명하고, 맑고, 투명하며, 진실합니다. 이를테면, "상위 감정"인 셈입니다.
전자는 자아가 일으킨 생각/감정이고, 후자는 영(영혼)이 일으킨 생각/감정입니다. 이것의 구별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체험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진리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는, 사흘이나 일주일 밤낮이라도 쉬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 읽는 사람,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 걱정될 정도로요. 그 순간의 나는, 자아가 아닙니다. 물론 자아 안에서 자연스럽게 체험되지만, 자아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나의 영이, 자아를 통하여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술가들의 경우를 대입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지도 모릅니다. 예술가들이 모든 삶의 일상 속에서 전부 다 창작이나 영감에 몰입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 역시도 때때로 생활비 걱정을 하거나, 현실적인 갈등이나 문제들 속에서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일상 속의 자아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창작에 몰입할 때, 그 순간에 그들의 내면에서 유려하게 흐르는 에너지와 힘, 곧 창조성은 평범한 자아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경이롭고 아름답고 눈부십니다. 그 순간에 몰입할 때, 그들은 "자아를 잊어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최면에 걸리거나, 세뇌에 당했다거나, 그런 부정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나 자신으로서 자연스러운 몰입 속에서도, 자아를 넘어선 영의 빛과 에너지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이라고 함은 영(Spirit)을 의미합니다. 그 영은, 언뜻 자아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개의 경우에 사람들의 영은 억압당해 있으며, 거의 드러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평상시의 의식이 대부분 세속적인 활동 등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할 때,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영적인 것에 몰입할 때, 그때에는 세속의 자아는 잠시 물러나고, 그들 안에서 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고 지루합니다. 쉬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복되다 보면, 점차 영이 살아나고 해방되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께서 나를 움직이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영은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과 같은 정신 장애 상태와는 다릅니다. 영은 "나(자아)"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나입니다. 무슨 접신 들린 것처럼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몰입된 상태에서, 자아라는 통로는 유지되되 자아는 주인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그보다 더 순수하고 완전하고 높은 존재인 영의 인격이 자아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죄 없는 완전한 인격"이라고 할 때, 이는 그분의 영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불완전한 영과 연결되어 있기에, 자아(ego)가 곧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아는 곧 그리스도의 인격(그분의 영 = 성령)과 연결(하나)되어 계셨기에, 그분의 자아를 통하여 드러난 모든 것들은 곧 그 자체로 완전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 맥락에서, 저는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표증들과 이적들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라는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 또한 무수히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저라는 인격을 통해서 드러난 이 말을 여러분이 읽는다고 하여,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구원, 영생)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드러난 말씀과, 그 말씀을 발화하신 그분의 자아를 통해서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저는 분명히 내 안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지금 저의 존재와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의 차이입니다.
나의 자아와 나의 인격이 스스로를 "주인(主)"이라고 믿고 행동할 때, 즉 주권이 <나>에게 있을 때, 불완전한 자아와 불완전한 인격(영)이 결합하여,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은 극대화됩니다. 이때, 자아를 통하여 드러난 인격은 곧 어두움(불완전성 = 공포, 불안, 두려움 = 교만, 욕망)의 실체가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사이비이고, 정확히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들의 방식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의 자아와 스스로의 인격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인정하지 않기에, 잘못된 "코드"에 연결했을 뿐이고, 이로써 왜곡된 출력값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들 스스로가 이를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알면서도 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가장 최악의 죄가 될 뿐입니다.
반대로, 나의 자아를 나의 인격(영혼)이 아닌 그분의 인격(그리스도, 성령)에 연결하며, 그분의 인격을 주인(主)으로 섬길 때, 불완전한 자아는 완전한 "인격적 신성" 안에서 성화됩니다. 즉, 영혼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완성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올바른 코드에 연결했으므로, 올바른 출력값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영원하시니, 곧 완전하신 그분의 인격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라는 올바른 출력값이, 나의 인격을 통하여 "성화"라는 실체를 일으키고, 그 성화된 인격이 나의 자아를 통하여 구체적인 말과 행동과 태도와 마음가짐 등으로 육화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육신이지요.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는 것"이 "나의 구원"과 연결되는지를,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믿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이해해야, 그 다음에 체화가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선을 어디에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코드만 손에 들고 있는다고 해서, 전구(영혼)에 빛(영생)이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올바른 코드(그리스도의 인격)에 올바른 선(나의 인격과 자아)을 연결(믿음, 영접)해야만, 마침내 전구(영혼)에 빛(구원, 영생, 성화 등)이 들어오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인격, 곧 "그리스도의 인격"이 완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격이라는 통로 그 자체에만 집착하기보다, 그 통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드러나는)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이때, 그분의 인격이 완전한가 불완전한가, 를 따지고 분석하고 논쟁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개념(텍스트)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격을 거치지 않은 개념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나의 존재(영혼)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즉, "변화"가 중요한 것이며, 대개의 경우 교리적, 신학적 논쟁 등은 한 존재의 실존적 변화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불완전성은 곧 어두움이요, 완전성은 빛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분의 인격이 불완전하다면, 그 인격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드러난 열매(결과)는 어두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격이 완전하다면, 그 인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열매는 전적으로 선한 것, 곧 빛이어야 합니다. 즉, "열매"를 보면, 통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여기저기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높이시는 듯한 다수의 표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요14:6)와 같이, 그분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높이시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은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이 부분에서 걸림을 느끼고는 합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놓고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그분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손에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며 맹인을 눈뜨게 할 권세가 주어진다면, 나는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워서, 겸손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나의 안전하고 안락한 삶만을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나는 특별하다"고 자기를 드러냄으로써, 내게 주어진 권세로 더 많은 죄인과 악인과 병자들을 구원할 것인가? 그분께서 자기를 높이신 까닭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와 영광으로 그분의 개인적인 영달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였습니다. 곧, 모든 사람들이 자기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유일한 통로인 그분의 인격 자체가 "높임"을 받아야만 합니다.
8K 화질의 영상을 1GB짜리 USB에는 담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TB 단위로 "높임"을 받지 못한다면, 선명한 영상은 "현현"될 수가 없습니다. 인격이 통로이기에, 그분의 인격은 반드시 "높임"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통로를 통하여 완전한 권세와 영광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원하신 것은, "온 세상 성도들이 자기만 쳐다보고, 자기에게만 메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고, 자기보다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처음으로 길을 여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고, 그 길을 통하여 이를 믿는 자 누구라도 다 자기와 같이, 그리고 자기 이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 이것이 그분의 의지이자 목적이셨습니다. 이 자체가, 아버지의 뜻입니다. 곧, "완전한 선"입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 이것만큼 높고 완전한 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선을 지향할 때, 자기를 높이는 것은 더 이상 교만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윤리나 도덕 때문에 "특별한 통로"가 자기를 감추고 숨기는 것이, 더 큰 교만의 죄입니다. 통로가 감추어진다면, 이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가 제한받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은 병자를 고치셨고, 죄인들에게 가서 그들의 죄를 사하셨으며, 악인을 회개하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완전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이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열매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완전하심을, 또한 전적으로 선하시며, 전능하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그 "증거"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와 삶의 성화가 곧 살아 있는 영원한 증거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이 삶 속에서 매 순간 성장하고 변화하고 완성되어 가는 것, 그들의 삶이 더욱 진실해지고 선해지고 온전하여지는 것, 이것이 곧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실재하며, 그분의 영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에 임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인 셈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안에서 나타나시며, 또한 그분의 영이 나를 이끌고 인도하십니다. 그 증거들이 무수히 많은 역사상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변화하고자 하는 자, 성장하고자 하는 자, 곧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라면, 앞서 믿은 자들의 증거를 통하여 자신 또한 믿음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요약하면 :
①. 그분의 인격을 통하여 복음서 속의 많은 구원받은 자들의 증거가 있고
②. 그리스도교의 역사상의 수많은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성화의 증거들이 이어지고 있으니
③. 그 성화의 역사들의 "열매"를 통하여 그분의 인격의 완전하심과 전능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때, 그분은 나를 통하여 임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대해서도 우리는 몇 가지의 진실들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육신"은 인격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다수 성도들은 "육체적 부활"이라는 교리의 의미를 대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부활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 것"이라는 표현이지, 곧 2천 년 전에 이 땅에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오셨던 한 개체로서의 예수님의 "몸"만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 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분의 육신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였더라면, 그분께서 지상에서 태어나신 후 공생애를 펼치신 기간을 전푸 포함하여도 그분의 육신이 지상에 존재했던 시간은 불과 33여 년 정도이며, 이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비할 데 없이 짧습니다. 이에 그 33년 중에서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과, 그분이 주로 활동하셨던 권역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운 좋게 그분을 직접 뵌 극소수의 인류 개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들은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분이 육신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그분의 인격(내 안의 그리스도)을 영접하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즉, 육신은 그분의 성육신의 바탕이었을 뿐이지, 그분의 육신이 없다고 하여 그분의 존재(영, 인격)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영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그분의 의지와 신성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즉 이 말은 "인류 전체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십자가의 역사가 완성되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역사의 완성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결코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어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대개의 사람이라면 기어코 외면하고 기피하고 싶을, 그런 길 말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야 십자가가 영광의 상징일지 몰라도, 그 당시에는 십자가형은 가장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죄인의 상징이었습니다.
결국, 그분이 육신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한지 사흘째 되는 날에 "실제로"(육적으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영원히 이기셨으며, 또한 그분이 승천하셨기 때문에(=모든 인류가 성부께로 이르는 길이 완전히 열렸기 때문에), 오늘날 믿는 자 각 사람 안에서 성령께서 직접 임재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우리가 영접하는 그분은 "영으로 계신 주님"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 역시도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영생(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체의 목숨의 무기한 연장)이 아니라, 명백히 "영의 차원에서의 영생"입니다. 그분의 영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의 안에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바와 같이 말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들면 한없이 복잡해지겠지만, 결국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육체"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인격)으로서" 믿는 것,에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실 성경 내에서의 여러 언급들로 말미암아 "홀연히 변화되는" 신령스러운 몸이라든가, 혹은 마지막 날의 사건들이라든가, 이러한 것들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사후세계로서의 천국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에서 본질이 아닙니다. 부수적인 것이죠. 본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것", 곧 그분의 하나됨의 신비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별도의 초자연적인 공간이나 차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 자신이 곧 영원과 초월이시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임재하시는 것, 그것이 곧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나라입니다.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분은 자신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분께서 어떻게 아버지와 하나되셨는지, 그리고 하나되신 채로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그 하나됨의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것들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와의 하나됨"이 무엇인지를 그분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하여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상태, 곧 "하나됨의 신비"가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니,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내 안에도 하나님(=영원성)이 거하게 된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며, 따라서 자아로는 생명을 모실 수 없고 오직 인격(영) 안에만 생명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은 유한한 육신에 종속된 자아로부터 영원한 영으로의 변환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언젠가 죽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사라집니다(정확히는 형태 변화 합니다). 이 자체를 부정하는 순간, 비과학적이고 모순적이고 유치한 말장난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육체의 영생은 없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고 흘러가며 조화를 이룹니다. 인간 역시도 예외가 아닙니다. 육체는 썩어서 흙이 되고, 그 흙을 통하여 생명이 자라납니다. 영원한 순환, 입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에서도 영원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의 인격)"이 드러나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육체가 살아 있는 지금 이 상태에서 곧 하나님을 내 존재의 주인(主)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 이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음에도, 우리의 "체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실제로 내 안에 거하시고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으며, 이로써 나의 육신과 자아가 죽더라도 내 안의 하나님의 영은 영원하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인격)이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므로("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6), 어떤 형상/형태로든 간에, 한 번 하나된 것은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후의 "상태"를 아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살아서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났다는 것과, 이것은 죽음조차도 없애거나 제거하거나 건드릴 수가 없다, 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단지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우리가 교제하고 교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우리가 기도하고 묵상하고 삶 속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갈 적에,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실제로 느끼고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 속의 응답으로써, 묵상 속의 임재로써, 각자에게 주어지는 은밀한 표증과 증거들로써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보았거늘" 요14:9). 그리스도와의 사랑이 곧 그분과의 하나됨이요, 그분과 하나됨이 곧 "살아서 하나님(아버지)을 만났다(하나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육신이 살아 있는 지금의 삶 속에서)얻은 셈이지요.
다시 말해, 육체적 영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그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영생은 실재합니다. 다만, 육신(물질)의 형태가 아니라, 영의 형태로요. 그리고 그 영이라는 것을, 놀랍게도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영은 실재합니다. 영은 "보이지 않은 채로 느낄 수 있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내게 그분은 실재하십니다. 나는 나의 사랑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느낍니다. 나는 나의 기쁨을 통하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그분 자신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자아의 수준을 넘어서는 신성의 차원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체험하는 당사자인 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토록 고귀한 것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서", 곧 지금 이 순간, 여기, 내 삶과 일상에서,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며(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육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을지언정, 그 하나됨으로 인한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영혼 안에 실제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육신을 앗아갈 수는 있어도, 우리 안의 영원한 생명은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모든 놀라운 "영생"을 가능케 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통로이자 중심축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이를 영접케 하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그토록이나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형이상학적인 원리, 법칙 따위로는 죽음을 넘어서는 실제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아,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진리"의 가장 순수하고 원형적인 형상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살아 숨쉬는 영원한 진리 말입니다. 저는 처음 이것을 만났을 때 곧바로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 하나가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사로잡았으며, 이제는 이것을 떠나서는 한시도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내게 주었던 경이로움과 눈부신 환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나누고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언어로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말과 언어를 거치면 거칠수록, 이것이 내 안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살아 숨쉬는 그 생명력이 자꾸만 빛을 바래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은 거짓이거나 가짜가 아니며, 그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는 그 의미 그대로의 "실상"이며, "실재"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다시 불안해하고 의심할 때마다 내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증거를 주십니다. 내가 불안해할 때, 그분은 나로 하여금 그분 자신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때, 나는 내 안에서, 인간의 죄성을 넘어서는 너무나도 경이롭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흘러넘치는 것을 봅니다. 아, 그것의 눈부심을 목격할 때마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구나,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높고 경이로운 것(구원과 영생)을, 가장 단순하고 쉬운 길(이름을 믿는 것, 인격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얻을 수 있는, 이토록 놀라운 진리가 여기,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얻을지 얻지 않을지는 선택하는 각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