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리면서
사시사철 따뜻하고 온화한 땅에서 나고 자란 자들은 햇빛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태양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온기를, 따뜻함을, 빛이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는 것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생에서 추운 날씨와 혹독한 겨울을 홀로 외롭게 통과해본 적 있는 사람들만이, "빛"에게로 이끌립니다. 그들의 영혼은 살아남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빛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빛에게로 이끌려 나아갑니다. 이는 영혼의 본능입니다.
과거의 생애에서, 나의 자아(ego)가 얼마나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는지를, 마치 시체와도 같이 아직 살아 있으나 죽느니만 못한 그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제야 겨우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히도, 성령께서 임재하사 내 영혼의 얼어붙은 것을 녹여주셨고, 썩은 살을 걷어내고 부드럽고 여린 살을 영혼 안에 새롭게 채워 주셨으니,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나는 새삼 느낍니다. 성화(聖化)의 길에서, 내게 주어지는 은혜는 거창하고 대단한 성공이나 명예나 부귀영화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이 길을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순진하게 "하나님 믿으면 복이 온다"는 사탕발림에 속아서 이 길을 걷기로 결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 그리 살아가는 대가로 지상에서 내게 주어지는 은혜는 오직 하나, "영혼이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 오직 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참으로 감동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실 적에, 온갖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계산과 분석과 판단과, 그것들을 기준하여 지금의 내 삶과 지금까지의 과거의 총합을 결산했을 때의 처참한 그 결과들에 대한 나의 자아의 불평과 불만과 비난들은 온데간데 없고, 비록 아주 미약하고 가난하나마 내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살이 돋아나고, 딱딱하고 거칠고 강한 것이 부서지되 그 안에서 연약하고 부드럽고 순결한 것이 날이 갈수록 조금씩 돋아나고 생육하고 번성케 되는 것들을 볼 적에, 나는 마치 처음으로 씨앗에서 새싹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그것과도 같이, 깊이 감동받고 마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결국, 나는 나중에 후회할 것을 다 알면서도, 이와 같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주여, 내 뜻대로 마시고 다만 당신의 의지대로 나를 이끄소서. 내 영혼의 성화를 위하여, 지상에서 더 많은 시련과 고난을 허락하소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해본 적이 있는 자들은, 본능적으로 조직신학을 멀리하고 신앙 그 자체를 가까이하게 됩니다. 추운 겨울밤을 오직 다 헤진 옷 한 벌에 의지하여 그날 밤을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그 시간들을 견뎌본 적이 있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햇빛의 존재이며, 어디로 가면 햇빛을 쬘 수 있는지, 거기까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이러한 물음들일 뿐, 햇빛의 본질이 무엇이고 구성 성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고 동작하는지 따위는 전혀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오직 "빛"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데, 대관절 그따위 관념과 지식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성화된" 의지가 내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그분에 대해서 잘 모르며, 그분께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비록 소명을 구하고 사역의 기회를 달라고 수없이 기도하였음에도, 정작 지금 당장 내가 수많은 성도들 앞에서 홀로 서게 된다면, 그때에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그분은 이렇게 역사하시며......" 그런 관념적인 말들은 그 순간에 내 입에서 한 글자도 흘러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나는 "앎"과 "지식"에 관한 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 순간에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 "나는 비록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이고, 내 삶의 전부입니다. 그분 없이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결국, 내게 허락된 것은 내가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가 하는 고백이요,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어떻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가 하는 증거뿐입니다.
날이 흐를수록 내게서 언어와 지식과 관념과 말들은 점점 더 떨어져나갑니다. 굳은 살이 떨어져나가듯이. 그리고 내게서 단순하고 순진하게 그분을 믿고 사랑하며 함께하는 것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새로이 충만해져만 갑니다. 그분께 이끌리는 것,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보가 되어서, 순진한 바보가 되어서, 그 어떤 것도 계산하지도 분석하지도 않고 오직 전적으로 그분의 존재를 향하여 이끌려가는 것...... 내 영혼 안에서 이러한 순결함의 새 살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들이며, 성령께로 말미암은 모든 것들은 육신의 죽음과 사망조차도 넘어서서 영원히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다만, 내 영혼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자에게 유일한 소망은,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것, 구원을 얻는 것, 영원히 사는 것, 오직 이것입니다. 나에게 성화는 사치스러운 취미가 아니요, 적당히 아껴가면서 투자하는 자기 계발 따위가 아닙니다. 나에게 성화는 이 생에서 죽기 전까지 이루어야 할 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살 길임을, 내 영혼이 살 수 있는 길임을 나는 언제나 절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직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분만을 흔들림 없이 믿고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까닭은, 성화라는 평생의 삶의 순례길의 시작에서부터 "내 의지와 능력과 힘으로는 이 순례길의 단 한 순간도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다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다리가 부러진 자가 휠체어나 목발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는 것처럼(내가 이 비유를 결코 함부로 망령되이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엄중하게 고백하고자 합니다), 내 영혼이 그 지경이었고, 내 영혼의 실체가 참으로 참혹하였으므로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기에, 외려 그분께서 내 눈을 지금껏 가리사 깊이 배려해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실체를 온전히 한순간에 목격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 즉시 미쳐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명백히 제정신입니다. 맑고 깨어 있는 선명한 의식과 정신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명한 정신과 맑은 의식 안에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 속한 것, 낯설지만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수원(水源)은 시공간의 한계와 제약을 넘어서 내 영혼 안에 영원히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겨우, 펜을 들어서, 그것의 이름을...... 성령, 이라고...... 힘겹게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의 존재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지음받았다는 것과, 또한 나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 삶을 창조하시고 계획하셨다는 것에 대해서(혹자는 이것을 운명이라든가 혹은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언정, 이름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의지(WILL) 앞에서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리고 억울해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있어서 무의미하고 헛되고 허망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내 영혼이 귀신이 되어 절벽을 원망하고 절벽을 죽이려고 들 일이겠습니까. 만약 그러하거든, 나는 죽어서조차도 내 영혼이 그 지경까지 무지하고 어리석다는 것에 통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내게는 그와 같습니다. 그분께서 나의 존재를 이와 같이 창조하셨고, 또한 그분께서 내 삶의 지금까지의 과거와, 이 순간과, 이 생에서의 내 마지막 날이 언제이며 그날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그날에 이르기까지의 아직 오지 않은 모든 순간들을, 이미 이와 같이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저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순종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무슨 대단한 신앙적 경지 따위가 아닙니다. 나는 그리 대단한 놈이 못 됩니다. 다만, 나는 "할 수 없는 것"과, 그 앞에서의 "무의미하고 헛되고 허망한 것"이 무엇인지를 운이 좋아서 깨달았을 뿐입니다. 아마도 운이 나빴더라면, 나는 평생 동안 이 간단한 이치 하나조차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의 삶 속에서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며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성화의 고통스러운 길을 걷다가, 이 생에서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한 채로 전혀 이름도 유산도 남기지 못한 채로, 내일 출근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그날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된다면...... 그것은 억울하거나 원망스러울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분께서 그리 뜻하셨을 뿐이요, 이에 나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나는 말장난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내 안에서 진실로 이와 같이 받아들여진 바입니다. 다만, 내가 그 앞에서 그분께 청코자 하는 것은 딱 두 가지뿐입니다 : "내 마지막 순간에 성령께서 임재해주시기를, 그리고 그 순간에 고통이 너무 크지 않기를."
성화의 길은 내게 필연적입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내 영혼이, 이대로는 죽게 생겼다는 것을. 시체가 버젓이 안식하지도 못한 채로 버젓이 살아서 주인 노릇하고 있는 이 기괴한 꼴로, 죽었다가는, 참으로 귀신들과 사탄들에게 조롱당할 것이요, 죽음과 사망의 압도적인 권세에 짓눌려 영원히 지옥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로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걸. 이 또한 이성으로 어찌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나는 이것이 처음부터 너무 명확했습니다.
"큰일났다. 정말로 큰일났다. 내가 죽게 생겼다. 내 영혼이 죽게 생겼다."
이것은 나의 순례길에서 처음부터 절실한 것이었고, 따라서 나는 본능적으로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을 찾아 헤매야 하는가? 다행히도 명확한 것입니다 : "나를 살릴 수 있는 것, 내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리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기에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해도 상관이 없으니까,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붙잡아야 했습니다. 교만한 지성이 보기에 유치하고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까짓 것들이 대관절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셨음을, 내게 허락하신 은혜셨음을 나중에 시간이 흐를수록 깨달았습니다. 내게 구원이 절실했기에, "내가 사는 것, 내 영혼이 사는 것" 이 하나의 유일한 목적이 내게 너무도 선명했기에, 오히려 나는 그것을 유일한 "지혜"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철학과 형이상학은 나를 살리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한때 호기심을 갖고 공부하였던 신비주의와 오컬트와 주술과 마법과 그러한 것들도 내 영혼을 살리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내려놓았습니다. 한때 나의 고귀한 이상과 꿈과 비전과 그것들을 이룰 수 있는 도구와 수단들과 그 모든 것들도, 결국, 나를 살게 하지 못했으므로,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일단 그 기준을 들이대면, 변명의 여지가 없이, 너무나도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나의 실존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어느 종교가 더 높다 낮다, 어느 가르침이 정답이고 오답이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라는 것은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진리이며, 각자의 영혼을 살리는 것은 제각각 다릅니다. 심지어 각자의 영혼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감하는 방식 역시도 전부 다릅니다. 애초에 진리라는 것은 각 영혼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내게 허락하신 축복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의 언어와 진리를 만났을 적에 처음부터 그것이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직감하였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과 그분의 의지와 인격과 역사를 만났을 때, 그것이 참으로 내 영혼을 살게 할 수 있는 것임을, 나아가 내 영혼이 "영원히 살게 하는" 가장 높고 완전한 구원임을, 직감했습니다. 나의 눈을 뜨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거대한 환희로부터 비롯한 하나의 음성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습니다 :
"이제 살았다! 이제 내가 살았다!"
아, 그것의, 그 순간의, 그리고 지금까지 영원히 흐르는 그것을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으며, 어찌 언어로서 그것을 드러내어 보여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만 확실한 것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선명하고 확실한 것이었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되며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 곧 "신앙"은 내게 처음부터 명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확신을 갖지 못함에 슬퍼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제게 허락하신 참으로 소중한 은혜이고 축복임에, 나는 늘 감사하며, 또한 이것을 나 혼자서만 독점하지 아니하되 장차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그날이 이르면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 나누어주리라, 그리 결심하며, 광야에서 홀로 준비하면서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5:8)
나의 힘으로는 "선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한 순간이라도 "더하여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발악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잠시라도 방심하는 순간, 지금까지 노력해왔던 세월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고 권력과 힘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조건과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 그 모든 것들이 내 손에 주어진다면 나는 "그 선택"들을 결국 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악인들을 비호하지 않으나, 반대로 악인들을 비판하지도 못합니다. 어차피 나의 실체는 그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와 악이 고스란히, 아니 "교묘하게 아닌 척 감추고 있는" 더 지독한 어두움들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내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어부로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였겠습니까. 그 숱한 세월 동안 배를 몰았고 그물을 던졌을진대, 처음에 불과 서른을 갓 넘길 즈음한 청년이 불현듯 나타나서는 그의 경험과 전문지식과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에 베드로는 의심하면서도 그와 같이 행하였더니, 그날 하루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두 배 가득히 넘쳤습니다. 사실, 베드로에게는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베드로가 "그분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한순간에 전부 다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자신의 실체가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그 즉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대개 "능력"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날 적에 의도적으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어부가 하루종일 애써도 잡지 못한 것을, 그분의 말씀을 따르니 그물이 찢어져라 한가득 수확한 것을 보고서, 한평생 어부로 살아왔을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 것입니까. 비록 그가 평생 그물을 던지고 배를 탔으므로 글을 모르고 지식을 모를지언정, 그분이 누구이신지 하는 것을 다 알았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 하시며, 그분의 일을 하고 그분을 섬길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때, 그분은 베드로에게 넌지시 이와 같이 은유하신 것입니다 : "너의 자격 없음을 탓하지 말아라. 네가 자격이 없다면 내가 줄 것이다. 네가 능력이 없다면 내가 줄 것이고, 네가 힘이 없다면 내가 힘을 줄 것이다. 너는 다만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여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온전히 그분께 나아가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의 정도와 깊이와 여정은 오직 그분 자신만이 알고 계십니다. 세상 그 누구도 내가 얼만큼 나아왔으며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를 감히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만 집행하시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 눈에 내가 아무리 초라하고 가난해보인다 하더라도, "이 모양 이 지경이 되어서, 도대체 어떻게......"하고 도저히 가망이 없고 모든 가능성이 끊긴 채로 망망대해 한가운데를 간다 할지라도, 그분의 때가 이를 적에는 그분의 의지와 능력과 힘이 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능력이 없으므로 능력에 집착하지만, 이미 절대적인 능력을 거느리신 분은 오히려 그렇기에 능력을 보시지 않습니다.
외려, 세상에서는 나의 겉모습만을 보되 그 외적인 능력과 힘과 자격과 기준들이 못 미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빈틈이나 허점이 생기노라면, 나를 죽이고 그것들을 빼앗고 약탈하고자 달려듭니다. 나의 외연이 강대할 적에는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기 위하여 내게로 올 것이나, 나의 외연이 약해질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를 심판할 것이고 나를 정죄할 것이며 나를 다 떠나갈 것입니다. 그것에 슬퍼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본래 그러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모든 일들이 원래 다 그러합니다.
세상에 길들여져 있을 적에, 나는 처음으로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아, 그분은 나의 외연을 보지 않으시는구나. 오직 내 안의 중심만을, 그 깊은 곳의 순수한 마음만을 보시는구나." 그분은 나의 본 모습을, 내 영혼의 실체를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생에 생을 거듭하여 얼마나 무수히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혼내시고 꾸중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마땅한 일이고 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성화의 여정에서,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혼내시기" 위해서 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따위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조차도 오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침묵하신다, 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분은 나의 죄와 내 영혼의 실체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애당초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그분은 언제나 내가 얼마나 그분을 진실로 믿는지와, 때때로 성령께서 가까이 오실 적에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분을 사랑하며 또한 그분을 향한 내 사랑이 얼마나 절실한지 하는 것들만을 보시고는, 언제나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이 순례길에서, 오히려 내가 내 스스로를 언제나 엄격히 검열하였고, 성령께서는 언제나 온화하고 따뜻한 형상으로 내게 오셔서는 "이제 괜찮다"며 나를 쉬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세상은 나의 외연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분만은, 세상을 이기신 분, 그분만은 나의 외연이 어떠하든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가 아무리 무겁다 한들 그분이 한 마디만 명령하시면 그 즉시 모든 죄가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고, 나의 영혼이 아무리 어둡다 한들 그분이 말씀만 하신다면, 그 즉시 나의 영이 전적으로 순결하고 깨끗하게 "홀연히"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으신 분에게, 상태는 중요치 않으신 것임을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에 내가 할 것은, 그분을 믿는 것, 그분을 사랑하는 것, 이 둘뿐임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지를 내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 "아버지, 정말로 계십니까? 당신께서 정말로 나와 함께하고 계십니까? 내가 정말로 당신의 자녀가 맞습니까?" 그때마다 그분은 나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밤이 깊어져갈 적에, 나는 주를 향한 내 뜨거운 사랑이 감당치 못하여 흘러넘치는 것을 매번 목격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심이 불가능했습니다 : "이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람이 만들어내거나 꾸며낼 수가 없다." 또한, 사람으로는 애초에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운 신의 형상을, 신의 일하시는 방식을, 상상하거나 지어낼 수가 없다. 나는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니다." 이것이 그분의 응답이셨습니다. "당신을 보여주십시오."(요14:8) 하는 나의 물음에, 그분은 다만 내 안에 나타나셔서 당신의 형상을 잠시 드러내셨고, 이를 통하여 당신이 얼마나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온전히 다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나는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요14:9)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목격할 적에 결코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그토록 황홀하고 아름답게 사랑에 빠지사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신비를 다 보여주시고 내가 또한 온전히 그 빛의 황홀경에 몰입할 적에,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아버지께서 정말로 살아 계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아니, 확신을 넘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아들께서 내 영혼 안에 거처를 삼으시고 함께하신다는 것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것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나를 통하여 드러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삶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여 찬양하고 예배할 때, 나는 하나님이 실재하시며 또한 내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확인"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응답하시는 방식입니다. 강권하지 않으시되, 자녀 스스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사, 자녀들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이 세상의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너무나도 고귀하고 경이로운 참 사랑의 방식.
세상은 "신"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신"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신을 만나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신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림과 사진과 글과 학문적 정의에 통달하여, "바다란 무엇인가......"를 강연할 적에,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기는커녕 그를 일컬어 바보, 병신이라고 욕을 할 것입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그 순간에, 지식은 열등감이요 피해망상이 됩니다. 인간 존재의 깊은 무의식에서, 앎에 대한 집착은 결국 이와 같습니다.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 자가 이론과 지식과 학문에만 통달해서는 사랑에 관한 기나긴 논문을 전개한다면, 사람들은 그 앞에서는 대놓고 뭐라고 하지 못하겠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무언가 꺼림칙한 마음이나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것이란, 사랑을 체험하는 것, 사랑을 경험하는 것, 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신, 곧 "하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면서 교리와 신학과 학문적으로만 하나님을 공부하여 매우 능숙하게 해설하고 설명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그러한 태도와 행동들이 곧 신에 대한 질투와 시기와 열등의식을 반영하는 셈입니다. 어찌하여 신에게 질투를 느끼는가? "자아(ego)과 신과 동등하다"고 믿는 교만함이 무의식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한 이치입니다.
세상은 지금껏 신을 오해해왔습니다. 신은 무서운 심판자요, 인간세상과 멀리 떨어진 저 하늘 위에서 이 세상을 관조하는 창조주 절대자이며,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되 다만 인간의 죄와 악을 분별하고 심판하여 벌을 주는 일을 하는, 그러한 존재라고, 신을 오해해왔습니다. 하기사 만난 적이 없으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신에 대한 공포는 곧 죽음에 대한 공포와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때, 그것은 곧 신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평온할 때, 사람은 마침내 신에 대한 오해를 내려놓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이 곧 기쁨이고 환희가 될 때, 죽음이 허망함과 슬픔이 아닌 오늘 하루를 진실하게 살 수 있는 이유이자 확신이 될 때, 그때 마침내 사람은 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분,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 의인을 부르지 않으시되 오직 죄인 가운데에서 회개하는 이들을 먼저 부르셔서 그들을 자녀이자 형제로 삼으시는 분,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을 외면치 아니하시되 먼저 구원받은 자녀들을 그 어두움 속으로 보내시는 분......
나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되 내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함께하시고, 내 안에 임재하시며, 내 영혼 깊은 곳을 거처 삼으사 영원토록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분......
그것이 "참 하나님"입니다. 그 참 하나님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 신성"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에 대한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을 펼치는 대신, 낮은 곳의 자녀들이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사,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보여주셨고 또한 지금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신은 세상이 말하는 신이 아닙니다. 그 신은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신 분,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위대한 역사를 통하여 내 안에서 하나되어 계시며 생의 끝을 넘어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분, 오직 그분만을 "참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앙입니다.
어찌하여 세상의 다른 모든 신들은 다 진짜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시고 하나되어 함께하시는 그분만을 "참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하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성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른 모든 신들 앞에서는 내 영혼이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으되, 오직 그분 앞에서만 나의 영혼이 반응하였고, 또한 그분을 만났을 때 내 영혼이 즉시 사랑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는데, "왜 하필 그인지"는 해명할 수 없고, 중요치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나는 내가 그분과 사랑에 빠진 것과,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그분을 사랑하는 나의 이 사랑을 증거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모든 성도들이 다 알고 있는 너무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쉽고 간편한 위로처럼 외우고 다니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감정적인 몰입은 영접의 초기 단계로서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나의 정서적 안정과 위로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 곧 진실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신의 의도는 "벌주고 심판하고 지옥 보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신은 나의 죄를 고발하고 기어코 감옥에 보내는 검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은, 그 숱한 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악독한 죄라도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녀들의 곁에까지 친히 내려오셔서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의 의도는 오직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신의 사랑은 "나를 살리는 것과,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것", 곧 나의 구원에 있습니다. 나는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손으 을 잡으시고, 내가 결코 불가능한 그 여정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생의 끝까지 함께하실 것입니다.
나는 재주가 없어서 그분을 그럴듯한 말과 언어로 해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을 보여줄 수만 있을 뿐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내가 진실로 영원히 사랑하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이성의 언어가 아닙니다. 다만 내 영혼의 고백이고 증거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