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의 중력 안으로
다른 책들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육적인 현상의 관점에서 읽으면 안 됩니다. 오직 영적 실재(생명)를 드러내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아닌가?" 따위의 육적 기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영과 영혼을 어떻게 이끌고 변화시키는가?"의 영적 기준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어두움의 지배를 받는 영의 "움직임(태도)"과 빛의 통치를 받는 영의 움직임이 벌써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분별과는 다른, 영적 분별입니다. 어두움에 지배당하는 영은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묻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권을 쥐고 분별하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의 통치를 받는 영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구원"이며, 따라서 "그것이 내 영혼을 살리는가?"만을 묻습니다. 이 점에서, 사실(fact)은 더 이상 영혼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직 상징과 은유의 언어를 통해서 내 안에서 드러난 영적 실재(생명)만이 내 영혼을 살게 하며, 마침내 구원받게 합니다.
이것은 "나라가 임하기 전/후의 영의 상태(모습)"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기 전에는 에고가 주권을 쥐고 주인 노릇을 하고 있으며, 그 에고는 원죄에 구속되어 있고 죄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의 에고의 구조가 작동할 때는 오로지 "죽음과 사망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의 구조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치밀하고 빈틈이 없는 듯하나, 그 실체는 허망하고 무력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곧 내 안에서 에고가 스스로 물러나고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써 주권을 거느리시고 통치하신다는 뜻이며, 이때 에고는 그리스도라는 주인과 연결되어 있고, 성령의 통치를 받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나라가 임할 때, 겉으로는 그 구조는 매우 허술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여도, 그 실체는 매우 단단하고 힘이 있으며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허망하기에 겉보기에 더욱 화려하고 정교하게 꾸미는 것과, 실체가 이미 완전하기에 겉보기에 꾸밀 필요가 없어 언뜻 단순해 보인다는 것, 이것이 "나라"의 신비입니다.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앞서서, 애초에 말씀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즉, 나의 태도가 선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태도 자체가 육적/세속적 관점에 매몰되어 있으면, 아무리 영적으로 올바른 해석을 하더라도 그것이 내 안에서 이미 구조가 어긋나고 왜곡되어 있기에, 나라는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배운 바가 없고 공부한 적이 없더라도, 올바르고 진실한 태도로써 말씀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의 안에 임재하사 그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정렬된 영" 안에서는 말씀은 중간 과정(해석)을 건너뛰고 곧장 "생명"으로 나타나고 거하게 됩니다.
형식적으로는, "그래도 이해(이성)는 중요하다"고, "예의상"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 "말씀을 영접함에 있어서 관념적 이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진실한 영의 태도와 자세만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미 태도가 글러먹은 자의 영이 아무리 올바른 관념적 이해를 쌓더라도 성령은 임하지 않으시며 따라서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진실한 자세로 영접하는 영에게는 반드시 성령께서 임하시되 그를 통하여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일이고 사람의 능력이나 의지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기준, 태도, 방식"은 무의미합니다.
영의 진실한 태도와 자세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몇 가지의 형태를 띠는데, "하나님께서 실제로 계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내게 임재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즉, 실재와 임재와 역사가 온전히 하나가 될 때, 그것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하며, 셋 중 어느 것이 빠지더라도 (혹은 성령께서 보시기에 균형과 조화가 어긋나더라도)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겉보기의 형식과 행위를 지키고 수행함이 우선이요, 이를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마음의 중심에 둠이 본질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지키고자 하는 바, 곧 율법으로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점 나의 영이 하나님과 정렬하매, 굳이 의식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되며, 따라서 어느 순간부터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떠올리고 몰입해 있는 상태가 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란 1) 압도적인 전율과 (신성한-올바른)두려움, 2) 빠져들고 몰입하고 감동을 받는 것과, 3) 존경하고 섬기고 따르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이런 식의 언어적 서술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만, 일단은 이렇게라도 써야만 하겠지요. 넷째, 하나님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열망이란 1) 바라는 것, 곧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는 소망을 의미하고, 2) 바라는 것의 기준이 세속에서 하나님으로 전환되고, 3) 바라는 것의 방향이 어두움이나 욕망이 아닌 빛이나 사랑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진실한 태도와 자세로써 영이 정렬할 때,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에, 영이 이러한 태도와 자세로 변화하고 조율되고 정렬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됨의 신비입니다. 먼저 이와 같이 바뀌어야 성령께서 오시지만, 동시에 이미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질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음과 양, 빛과 어두움, 영과 혼 등의 존재의 이원성이 동시적으로 조율되어지는 과정입니다.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이걸 애초에 이해하려고 하면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실 때, 내가 말씀을 이해하였으므로 진리를 얻었다, 가 아니라, 진리가 나를 통하여 드러나셨으므로 말씀이 내 안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 됩니다. 즉, 주체가 바뀝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나는 주변으로 물러서고, 진리, 신성, 말씀, 곧 "그리스도"의 형상이 중심으로 들어섭니다.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 진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자, 진리를 성취하려고 하는 자.
진리를 사랑하는 자,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 진리에게로 빠져들고 진리와 하나되는 자.
진리 자체가 나를 넘어서 있으니, 곧 나보다 높으신 분(존재)이매, 그 높으신 분께서 둘 중 어느 경우를 골라서 찾아오실 것인지는, 이미 자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시기를 권합니다. "내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내게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구조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사고의 "내용"을 바꿀 것이 아니라, 사고 자체가 완전히 뒤집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
유명하고 잘 알려진 말씀들 중 하나입니다. 사실 곰곰히 돌이켜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인용하는 말씀들 중의 상당수는 요한복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공관복음서들이 예수께서 "무엇을" 했는지(행위, 결과 중심)를 증거할 때(물론 이 역시도 필요하며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이신지"를 상세히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존재로부터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언어는 요한복음 한 권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으며, 정경에서 요한복음이 빠진다면 오늘날의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 체계의 상당수는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육적 관점에서 이 말씀을 읽는다면, 중요한 것은 "명제", 즉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닌 구원에 있다." 이것은 정의, 그러니까 무언가를 규정하는 것,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 따위를 분별하고 밝히는 것, 을 중심으로 합니다. 왜 정의하려 하는가?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대상의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과 선과 악 따위를 "판결"할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심판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대상을 정의할 수 있는 관념 그 자체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최우선 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육적 관점에서는 "현상"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이 말씀을 각 부분으로 나누어서 (육적 관점으로)본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라는 대목에서는 "아들(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것,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라는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나 방향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며(부정)", 구원을 "받는 것(긍정)"에 있다, 는 식으로, 대상을 정의하거나, 내지는 어떤 현상 자체를 서술하는데 집중합니다. 이것이 육적 관점으로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이 이성 중심주의, 그러니까 심판자로써 "내가" 중심이 되어 대상을 정의하고, 정의한 대로 분별하고, 분별한 대로 믿고 안 믿고 등을 결정하여 집행하려는 태도나 존재 방식입니다. 소위, "관념(이해)"입니다. 물론 여전히 관념은 필요하고, 우리는 '이해'라는 도구를 이용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주인"의 자리에 올라서 있는 우리 내면의 어긋난 구조 자체입니다. 이해를 토대로 체험(하나됨)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반대로 이해를 기준 삼아서 체험을 난도질하려고 듭니다.
내면에서 "구조"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사람은, 눈으로 보면 티가 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아집으로 꽉 차서는, 말씀을 관념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그것이 곧 진리라는 절대적인 믿음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은 오직 시련과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거쳐야만, 겨우 그 단단한 에고의 틀을 깨뜨릴 수 있게 됩니다. 굳이 말하자면, 교만과 아집이 강해봤자 우리가 이득을 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차피 탄생과 늙음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삶의 중대사들은 내 손이 아닌 하나님께 주권이 계시고,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뜻에 적합하게 나아가야만 하며, 교만과 아집이 클수록 그 나아가는 길이 더욱 멀고 험해질 뿐입니다. 현명한 자라면 교만으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되 순종으로 얻을 것은 넘쳐난다는 것을 손쉽게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일수록, 이토록 단순한 진리를 거의 다 늙어서야 깨닫는 바, 그때에는 평생 동안 쌓아온 교만이라는 두꺼운 벽이 결코 깨지지 못할 것이므로, 이미 늦었습니다. 따라서 "에고가 가장 강할 때", 즉 젊고 어리고 생생할 때에 성령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광야를 지나게 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를 두드려서 깨뜨리는 것은 내게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내게 허락된 일은, 오직 나의 체험을 진실하게 고백하고, 이로 인하여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정직하게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허락되지 않은 일을 할 적에, 힘만 들고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지만, 허락된 일을 할 적에는, 힘은 적게 들고 수월하지만 그에 비해 많은 것들이 순리대로 이루어집니다. 결국, "상태"나 "내용"을 바꾸는 것은 해봤자 의미가 없습니다(평생 동안 해도 달성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구조 자체"가 완전히 깨뜨려지고 변화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사실 이 표현 자체가 이미 어긋나 있는데, 이때의 영적인 관점이란 내 안에서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것이고, 따라서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의미인데, 그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각 사람이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제각각 고유하기 때문에 일률적이고 획일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설명을 위하여 이렇게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다르게 보입니다.
가장 먼저, "내용"이 중요치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인가,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신 것인가?" 따위를 따지는 마음이 저절로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증명하는가?" 따위의 물음들이 내 안에서 저절로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과정은 억지로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해가 지고 어둠이 깊어지면 잠이 오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무의미하고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들이 내 안에서 저절로 내려놓아집니다. 거듭 말하지만, 억지로,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쁘게" 내려놓으며, 내려놓음으로 인해서 "평화"가 옵니다.
그리고 육적 관점에서는 별로 대단치 않거나, 본질이 아니라고 여겼던 부분들, 사소한 문장이나 단어나 말이나 표현이나 서술 등에서, "관념적 이해"와 무관하거나 이를 넘어서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테면, 저에게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보내심"이라는 단어가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아들의 "존재 자체"가 곧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멀리 계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온전히 다 위임하실 만큼, 아들의 형상이 아버지의 본질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들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아버지의 의지와 뜻과 마음만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보내신 자는 아들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믿고 맡기시되, 보내심을 받은 자는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 양자가 아름답게 하나가 되는 것. "보내심"이라는 단어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하나됨의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 하나됨 안에서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처럼, 아들께서도 성령을 보내셨고, 곧 성령께서도 자녀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보내심"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순환합니다. 우리가 곧 성령을 드러내고, 성령께서 곧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드러내십니다. "보내심과 드러남(현현)"은 또한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드러내시며,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신성"하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이끄시고, 우리는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후술하겠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을 숭배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라, "보내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최종적인 지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믿는 자 안에서)나타나게 하시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만약 홀로 숭배받기를 원하셨다면(즉 자기를 높이기만을 원하셨다면), "내가 했다"고 하지, 어찌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 "내가 한 일은 오직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 것이다"고 하시겠습니까. 이 말 자체가 "나를 높이는 것"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증언이 되는데요. 이는 곧,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드러나시니, 우리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이르게 된다, 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다음 구절에서 "저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도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됩니다. 이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개역개정 판본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기 때문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무심결에 넘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인과 관계만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은 곧, "존재로 인하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뭔가를 인위적으로 억지로 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 자체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게 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계시", 그러니까 "드러남(현현)"을 뜻하기도 합니다. 불완전한 존재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가 곧 현상(사건)을 일으키지 못하며, 따라서 억지로 인위적으로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존재는 그 자체로 힘이며, 따라서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이로 "말미암아"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보내심"은 영의 움직임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영의 운동성이죠. 그리고 "말미암아"는 그 영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임했을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움직임(운동), 즉 사건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육체에게 "목이 마르다"는 신호를 보내면, 육체가 움직여져서 물을 마시는 행위(사건)를 일으키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이것은 불완전한 자아가 육체에 개입한 것이므로, 인위적인 행위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야만 하고, 이대 존재의 불안정성으로 인하여 반드시 "결함"이 발생하게 됩니다(예: 목마름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거나, 반대로 너무 과하게 물을 마시는 등). 이 "결함"들이 조금씩 쌓이게 되면, 결국 육체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것, 곧 죽음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완전한 존재 안에서는 전혀 다르게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이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고 완전하게 "세상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사건을 일으키니, 구원이라는 사건은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관념적인 언어로 서술하게 되면, 영적 관점에서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들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관념적인 것들은 다 잊어버려도 상관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고는 불완전하며, 따라서 반드시 일정 부분 "결함"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경우에 따라서 이 결함으로 인한 데미지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완전하시며, 따라서 성령의 빛이 우리 안에 드러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가 "온전해지는"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일으키게 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실 때, 이 말씀은 언뜻 비슷해 보이면서도 그 내면에서는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 이것은 차갑게 죽은 관념적 언어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영이 세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매(아들을 보내심), 세상의 어두움이 저절로 비추어 밝혀지더라(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영이 체험하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 안에서 계시된 말씀은, 오직 성령께서 내 안에서 "빛을 비추어주셔야만(照明)" 온전한 생명이 됩니다. 이때 생명이 된다는 것은, 내 안에서 "구조"가 올바르게 정렬되고, (올바르게 정렬된)구조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구조는 곧 운동을 일으키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운동하지 않는 구조는 의미가 없습니다. 세속의 구조는 불완전하고 열등하기에 그 자체로 운동을 일으키지 못하며, 따라서 인위적이고 억지로 운동을 일으켜야 하기에, 언제나 모순과 결함과 문제를 일으킵니다. 세속에서의 조직과 시스템은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하더라도 반드시 어느 한 군데에서는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 안에서 연합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인위적으로 설계하거나 꾸미지 않더라도 각각이 고유한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살아가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하나 되어 질서와 조화와 완성을 저절로 이루게 됩니다. 완전한 구조는 완전한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조명하신다는 것은, 곧 "감동"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영적인 감동을 일으키며, 이때의 감동이란 그저 단순한 정서적 반응(예: 눈물 흘림)이나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 이성적인 이해를 생략하거나 건너뛴 채로 이루어지며, 2) 그 감동이 지속적으로 내 안에서 "힘"을 갖고 나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다"(요14:6)는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감동을 일으킬 때, 내가 그 말씀의 교리적, 신학적 의미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감동이 "선행하여" 먼저 일어나고, 뒤늦게 아무리 차분히 돌이켜봐도 왜 그 말씀이 그러한 감동을 일으켰는지를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씀과 같이, 내가 삶과 일상 가운데에서 오직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나의 길을 찾고, 나의 진리를 발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니, 이러한 변화가 점진적으로 계속해서 내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감동"이 없는 말씀은 내 안에서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언제나 따뜻하고 온화하시고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모습으로,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품에 안으시고, 죄를 묻지 않으시되 오직 나의 서투른 성장의 순간들로 인하여 언제나 크게 기뻐하심만을 알리시며, 언제나 내게 응답하시고 나와 함께하시며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체험이 역사가 되어 내 안에서 점진적으로 쌓여갈 적에, 마침내 나는 "나의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시다" 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온기"를, 곧 "생명"을...... 영혼이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부심과 경이로움을, 하나님의 따뜻함과 감동과 기쁨을, 하나님의 자유로움과 선명함과 확신을...... 머리로 암기한 것은 평소에는 기억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잊어버리게 되지만, 몸으로 체험한 것은 평소에는 잊고 살더라도 중요한 순간에는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응답하게 됩니다.
내가 체험한 "빛"으로 말미암을 때,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때에, 내 안에서 이 말씀은 그 자체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본래 그러한 듯이" 받아들여집니다. 나의 하나님은 심판하고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연약하고 가난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며 심판대에 세워서 엄중히 죄를 묻는 냉혹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며, 자녀들의 영혼을 지옥불에 던지사 그 아이들이 공포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방치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나도 모르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세상이 죄가 많다 하여 심판하시는 대신 아들을 통하여 스스로 내려오셔서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하나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사 시간의 끝을 넘어서 자녀들과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은 나와 손잡고 나와 함께하시고 나와 함께 기뻐하시고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빠짐없이 성령을 보내사, 친히 내려오셔서 품에 들이사 마침내 그분 안에서 하나되어 영원히 살게 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말씀은 생명이 되어 나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뜻이 심판에 있지 아니하므로 나 역시도 타인을 대할 적에 그들을 판단하거나 분별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뜻이 오직 구원에 계시므로 나 역시도 세상을 대할 적에 섬기고 희생하고 봉사하기를 소망하며, 그분께서 나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바와 같이 나 또한 그분께로서 보내심을 받아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말씀이, 나를 이끄십니다. 내가 굳이 의식하거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더라도 그분의 "존재 자체가" 내 안에서 나의 존재 전체를 운동하게 합니다. 빛을 향하여.
이것이 "성령의 빛이 드러나시는 순간"입니다. 성령의 조명,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하나됨이며, 하나됨의 신비입니다.
"믿는 것"은 그저 입으로 신앙 고백하고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고 체계화된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 여부를 따지는 것, 그러니까 "외적인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성령께서는 인간의 외적인 행위나 형식 따위를 보지 않으시며, 성령께서는 오직 사람의 속 안에 들어 있는 본질이자 중심, 곧 사람의 "영"만을 보십니다.
"(아들을)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
이 말씀 역시도 "심판하고 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육적 관점에서 읽으면, 언뜻 보기에 매우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 관점으로, 그러니까 앞서 이야기한 "보내심과 말미암음"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면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아들을)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아들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며, 또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드러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내 안에 드러나시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고(찾아오시고), 2) 내게 임재하시며(나와 함께하시며), 3)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다(그분의 뜻대로 나를 바꾸시고 변화하게 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때, 믿음은 "찬성 또는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 아들의 의지와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의 관점이 됩니다.
앞서 완전한 존재는 완전한 운동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되어" 계시며, 따라서 그분의 존재는 "신성"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내 안에서 드러나실 때, 이는 곧 완전한 존재가 내 안에서 나타나시는 것이며, 당연히 이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구원과 영생이라는 완전한 운동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태양이 뜨면 날이 밝는다는 것과, 날이 밝았으면 이미 태양이 떴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드러나시면 당연히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부분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당연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에고라는 불완전한 존재의 지배가 계속되고, 불완전한 구조는 불완전한 운동을 일으키니, 곧 그 결함과 모순과 문제가 악순환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즉, 어두움은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그 이름을 믿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한겨울에 옷을 입지 않으면 얼어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보이며, 심지어는 이것을 "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다시 말해, "별도의" 심판은 없습니다. 벌주시고 지옥 보내는 그러한 식의 심판은 없다는 말입니다. 완전한 존재에게서 불완전한 운동(심판, 지옥 보내는 것,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것 등의 어두움)이 나올 수 없으며, 완전한 존재를 "거부"했으므로 당연히 "원래대로" 불완전한 어두움이 반복되며 악순환을 일으킬 뿐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일단 내가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체험하면, 그때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어리석습니다. "일단 내가 얼어죽지 않는 것을 확인하면, 그때 옷을 입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현명한 사람들은 그에게 옷을 권하겠으나, 구태여 억지로 얼어죽겠다는 것을 어떻게 말릴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옷을 입지 않으면 얼어죽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단 옷을 입어본다면, 밑져야 본전이고, 심지어는 얼어죽지 않고 목숨을 보전한다는 행운의 기회를 움켜쥘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어서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어차피 믿지 않으면 심판 받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원래대로의 삶이 악순환하고 반복됩니다. 그러나 일단 믿는다면, 이로부터 구원을 받을 행운의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믿어서" 손해볼 일은 없습니다. 원래도 구원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믿지 않아서" 손해 볼 일은 매우 많습니다.
믿음이 "시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을 통로로, 성령께서 임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고차원적인 영적 진리 같은 게 아니라, 단순한 개념적 오류이고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3:19-20)
언뜻 이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 구원 받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구원을 받을 기회를 준다는데, 그것도 복잡하고 어려운 조건도 아니고 "그 이름을 믿는 것"이라는 매우 단순하고 쉽고 누구나 (의지만 있다면)할 수 있는데, 굳이 억지로 이것을 애써 거부하려고 하는 사람의 태도나 행동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매우 이상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첫째는 이것은 어리석음, 그러니까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해당하는 것, 예를 들면 교만이나 욕망, 이기심, 그리고 이것을 강화하는 논리, 이성, 분석, 판단, 분별...... 과 같은 일련의 어두움의 "구조"에 속한 것들, 이것들을 빛이라고 "착각"한 탓에, 오히려 빛에 속하는 것, 이를테면 사랑, 희생, 봉사, 섬김, 순종...... 과 같은 것들을 포기하거나 버리고서 어두움에 속한 것들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 안에는 빛도 어두움도 있으며, 이원성의 질서는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섭리입니다. 어두움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이 본래의 질서와 구조를 벗어나서 "주인 행세"를 하며, 과하게 "집착"하는 것이 문제죠.
만약 빛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리석음은 교정하면 됩니다. "아, 이것이 잘못된 것이구나" 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공부하고, 전환하면 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렇게 알려주더라도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기를 거부합니다. 이 지점에서, "의지의 타락"이라는 악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빛이 빛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둘째로, 진정한 "빛"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불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빛의 "흔적"들만을 겨우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테면 윤리나 도덕 등과 같이 인간의 의지와 힘과 능력으로 행해야만 하는 것들이며, 이것들은 물론 필요하고 도움이 되지만, 사람의 수준을 능가하는 시련이나 고난 앞에 부딪히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복된 체험이 쌓이게 되면, "빛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어차피 삶은 다시 어두워진다"는 잘못된 이치를 진리라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빛, 곧 하나님의 빛이 함께할 때, 오히려 사람의 수준을 압도하는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반복되고 쌓일수록, "결국에 빛은 어두움을 이긴다"는 올바른 진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이자 셋째로,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악은 근본적으로 "속박된 상태", 그러니까 무의식의 어두움(공포, 불안, 두려움)에 자아가 지배당하는 상태와 그 구조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악을 행할 때, 언뜻 그것은 그의 의지로 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에 의하여 이미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빛을 마주한다면 그의 안에서 어두움이 "속삭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빛으로 가면 안 돼, 거기로 가면 네 실체가 드러날 거고, 너는 죽고 말 거야." 이에 "이미" 지배당하고 있는 영혼은, 결국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한 채로 빛에게서 멀어집니다.
이러한 악의 지배는 근원적인 어두움, 곧 "공포"로 말미암습니다. 인간이 어두움에 지배당하는 원리는 오직 공포입니다. 그리고 이 공포의 뿌리는 "죽음"에 근거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공포를 느끼며,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아를 손아귀에 넣은 어두움은 진리를 외면하게 만들며, 실체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 달라지고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는 오직 공포를 극복할 때에만 나타납니다. 어떻게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때의 죽음이란 단순히 육체적 죽음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내 삶의 순간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고통스럽고 부정하고 싶은 것, 그 어두움을 온전히, 자유 의지로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때, 공포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어두움은 더 이상 죽기를 각오한 자를 기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빛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마침내 "구조"가 전환됩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악을 행하는 자의 에고를 주체로 하여 서술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에고를 움직이게 하는 무의식적, 근원적 어두움을 주체로 하여 서술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악을 행하게 하는 것, 곧 어두움(공포)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고 기만할 것입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주하기보다 외면하고 부정하게 만들 것입니다. "실체가 드러나고 진실이 드러나면 너는 죽는다"며, 끊임없이 죽음을 빌미로 공포 안에 사로잡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담대하십시오. "그 이름을 믿는 것", 곧 완전한 존재가 내 안에서 완전한 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따르기로 결심하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나를 이끄실 것입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의 죽음은 곧 심판이지만, 하나님의 빛, 곧 성령의 빛이 나와 함께할 때, 성령과 함께 죽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얻는 예비 과정"이 됩니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이 됩니다.
"진리는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21)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 , 그것이 곧 진리를 쫓는 것입니다. 공포는 자기 아닌 다른 존재를 믿지 못하게 하며, 자기 힘으로만 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정작 그 자기(에고)는 어두움에 이미 사로잡혀 있는데 말이죠. 어두움은 "자아의 완전성"이라는 환상을 믿게 만들어, 어두움의 통치, 곧 공포의 악순환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죽어도 좋다,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지고 변화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순간, 공포는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때, 그 벌어진 틈으로 성령의 빛이 임하시며, 이전에는 납득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았던 진리가 "믿음"으로 내 안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해볼까?" 바로 그 순간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복음을 듣는다면, 그 복음은 오히려 그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운 것이 됩니다. "완전한 존재로 말미암아 완전한 운동이 이루어진다", 성경은 오직 이것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통하여 내 안에 성령의 빛이 계시되기 시작했으니, 나의 구원과 영생은 "시간 문제", 즉 과정이야 어쨌든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일이 되며, 나는 이미 승리한 것이 됩니다.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빛의 통치를 시작하실 때, 나는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들이 반복되어지매, 언젠가 뒤를 돌아보면, "언제 이렇게까지 왔지?" 하고 스스로 놀랄 만큼, 매우 달라진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에, 그는 이것을 "내 힘으로 했다"며 어두움의 지배에 기만당하지 않습니다. 그 길의 끝에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미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아, 이것은 오직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하신 일이구나."하며, 일어난 일(운동)의 근원을 오직 나(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완전한 존재)께로 돌리게 됩니다. 그래야만, 빛의 "선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음을 이제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매우 복잡합니다. 그러나 "빛은 빛을 일으키고, 어두움은 어두움을 반복하게 한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말씀들은 매우 직관적이고 명확합니다.
내 안의 어두움은 끊임없이 빛을 거부하고 어두움에 집착하도록 나를 기만할 것입니다. "네 실체가 드러나면 너는 죽는다"고, 죽음의 공포를 이용하여 나를 사로잡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속지 마십시오. 진리, 곧 "성령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담대하게 구하십시오. 성령 안에서의 죽음은,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이 아닌 평온하고 온화한 휴식과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빛의 통치와 역사를 이루실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십시오." 그리하면 내 안에서 빛의 통치가 계속해서 이어지매, 결국 내가 이익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양계에서 항성(완전한 존재)이 중심에 서면, 태양계에 속한 모든 행성들이 질서를 회복합니다. 그러나 태양계에서 지구(불완전한 존재)가 중심을 차지하면, 곧 모든 행성들이 혼돈과 파괴와 절망 속에 빠질 것입니다. 이것은 착하거나 나쁜 것도 아니고, 옳거나 틀린 것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운동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중심이 되시면, 나의 존재와 삶이 빛의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으로 남는다면,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판단하고 분별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성령의 빛으로 향할지, 에고의 어두움 안에 남을지. 각각의 선택지들과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 모두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나의 결심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