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하나됨
만약 어떤 사람들이 결혼식장을 찾아와 각각 신랑과 신부에게 묻기를, "당신들은 왜 결혼했습니까? 상대와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먹었습니까?" 그리한다면, 신랑이 먼저 대답하기를 "그는 나의 반려이며, 이 세상에서 나를 진실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에게로 찾아와 의지하며, 그가 세상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나를 의뢰할 때에, 나는 참으로 그가 나를 사랑함을 느끼며, 또한 나도 그를 사랑함을 느낍니다." 이에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여 이윽고 신부에게로 찾아가서 똑같이 묻기를, "당신은 신랑과 왜 결혼하였습니까?" 본래 주인공은 가장 늦게 등장하는 법이요, 결혼식의 유일한 주인공,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는 오직 신부이니 그가 마침내 입을 열어 답하기를 : "그가 나의 유일한 기쁨이요, 오직 그의 품 안에서만 내 영혼이 안식할 수 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의지할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고, 그가 참으로 의롭고 정결하고 자비로운고로 언제나 나를 돌보아주고, 나를 보살펴주며, 나를 위로하고 또한 언제나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은 결국 만족하지 못하여 재차 두 사람에게 묻건대, "그러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오?" 이에 그들은 한 음성으로 답하기를 : "이것은 사랑입니다. 의지하는 자와 이끄는 자, 안아주는 자와 안기는 자,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온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하나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이는 체험하지 못한 자, 사랑하지 못한 자는 영원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극히 상식적인 단어와 개념들에 대해서, 너무도 당연하게 이를 "안다"고 말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의 언약을 맺는 이유는 당연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영혼으로, 존재 전체로, 깊고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벙어리가 됩니다. 순환 오류를 저지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사랑이 뭔데?" 하면서요. 응답에 의문이 뒤따르고, 의문에 의문이 다시 뒤따릅니다. 본래 관념이란 그런 것입니다. 자르고 나누고 해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은 본래 하나가 되는 것이니, 인간의 언어와 지식과 관념으로는 본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태도, 즉 지식으로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은 끝에서 결국 허망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저는 지금 "지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으로는 인간 영혼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은 평생 헛된 "하나님 지식"을 추구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매 결국 그날에야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나 그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이에 일찍이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가르치셨습니다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6) 영생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 날에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서", 즉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미 이루어진 채로 이어지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며, 구원은 살아서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다시 말해 삶과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본래 자르고 나누고 쪼개고 분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지식으로, 앎으로, 관념으로 다가갈 때,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자꾸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본래 하나가 되는 것, 온전하여지는 것, 합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는 그 사랑 하나로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곧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임을, 어느 기독교 신비주의자가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과 초월로 계신 성부께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영혼을 빛으로 비추어 밝히시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지식과 관념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고 가까이 이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 오직 그 사랑 하나로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아득하고 까마득한 격차를 뛰어넘어, 온전히 연결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어야지!" 우리는 이걸 기만이라고 부르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강제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성령의 빛"이 임할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로부터 강제로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제성이 아프거나 무섭지 아니하되, 외려 너무나도 경이롭고 기쁘고 황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격증이나 인증 문서라도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걸 직관적으로 다 알 수 있습니다. 온통 회색빛의 우울한 삶을 살아가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존재 이유도 알지 못했고, 자기의 삶이 왜 여직껏 죽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반복된 하루 속에서 그의 영혼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고, 우울과 공허라는 깊은 병에 걸려 시름하는 줄도 모른 채로 그렇게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는 우연히 쉬는 날 아침의 산책길에서, 그의 아름다운 연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그가 자신의 연인으로 창조되었고, 자신은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순간마다 연인이 떠올랐고,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모든 것들에게서 연인의 흔적과 존재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사로잡았고, 그의 삶과 일상은 마침내 "살아 숨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생명의 빛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퇴근 길에 텅 빈 방 안의 문을 열고 그 적막과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냉소적이었던 마음이 온화하여지고, 타인을 차갑게 대하던 것에서부터 선하고 진심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것들을 연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일상의 모든 것들을 연인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구체적인 육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하나로 말미암아 자기의 존재 전체가 완전히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빛"이 너무 강렬해서, 그 모든 육의 차원을 한순간에 다 변환케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졌을 때, 그는 깨어서나 잠들어서나 오직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 있습니다. 기쁘나 슬프나 그는 하나님을 찾고,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기도와 함께 시작하며, 퇴근하고 돌아와서 기도로 일상을 마무리합니다. 누구를 만나게 되어도 하나님만을 이야기하고,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증거하는 글만을 쓰게 됩니다. 삶의 모든 고민들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게 되고, 자기 존재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시며, 그 중심을 늘 모시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헌신하고 감수하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늘 고요한 평화와 진실한 기쁨이 잔잔히 흐릅니다.
이르건대, 세상은 연인들의 관계의 은밀함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전혀 모르는 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연인들의 사회적인 모습만을 볼 뿐입니다. 연인들도 사람이기에, 바깥에서는 서로 정중히 대하며, 평범한 사람들처럼 대화하고 함께하지요. 이에 그들은 "아, 연인들도 별로 특별할 게 없네!" 하고 여깁니다. 그러나, 참으로 어리석은지고! 연인들이 어찌 그들의 깊고 은밀한 사랑을 바깥 세상에서 드러내겠습니까. 거짓된 사랑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인정받으려고 사람의 시선을 갈구하나, 오히려 진실한 사랑은 주위의 시선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단 둘이서 남았을 때, 그 은밀한 가운데에서만 온전히 드러나니, 그때에 신랑은 신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붉게 물든 아름다운 뺨을 어루만지며, 별빛처럼 반짝이는 그 눈동자에 이름을 붙이고, 떨리는 그 음성으로 신랑을 사랑하노라고 말할 적에, 그 음성이 천상의 그 어떤 음율보다도 아름답고 황홀하여 하늘과 땅과 별들마저도 다 숨을 죽인 채로 귀를 기울이니, 신랑은 참으로 그 여리고도 소중한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은밀히 사랑을 나누고, 그를 지켜주겠노라고,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되 세상 끝날까지 그대와 함께할 것이라고, 그 언약의 표증을 반드시 은밀한 가운데에서만 건네어주는 법입니다. 신부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지 하는 것을 온 세상은 모르되, 오직 단 둘이서 품 안으로 파고들 적에, 오직 신랑만이 신부의 순결한 얼굴을 봅니다.
대외적으로 나타나실 적에 하나님의 형상은 물론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단 둘이서 사랑에 빠지지 않았기에, 그 공식 석상에서의 하나님만을 그분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낯설고, 때로 멀게 느껴지고, 정작 시련의 순간에, 내 마음 깊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여깁니다. 이에 참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은, 지상의 연인들도 그러할진대, 어찌 신부가 그 부끄럽고도 순결한 기쁨을 대낮에 버젓이 공식 석상에서 보이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오직 그의 하나뿐인 신부의 앞에서만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내시는 그러한 면모가 있으시며, 이는 여러 신비주의자들이 증언한 바, 인간 존재에게 참으로 경이롭고 기쁘고 황홀한 것입니다. "공적인 하나님"만을 보면서 살아온 이들이 참으로 안타까워질 만큼, "은밀한 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귀하디 귀한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알고 싶고, 이것을 손에 넣고 싶고, 이것에 빠져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귀한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이것을 손에 쥐고 얻는 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존재 방식의 전환." 자르고 쪼개고 나누고 분석하려는 이성의 태도를 버리십시오. 그것은 세상에서는 유익하나 하나님께 관한 한, 영혼의 구원에 관한 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 대신, 이제 새로운 존재 방식, "하나님의 영의 존재 방식", 사랑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름답고 순결한 신부가 망설임 없이 기쁘게 신랑의 품에 뛰어들어 내맡겨 안기는 바와 같이, 사랑 안으로 자기를 내던지십시오.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3:22-23)
앞서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며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한 바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역사를 이룰 것인지를 명료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1)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로 말미암아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분이며, 2) 모든 이들에게 편재하시는 성령을 보내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들려야 하고(유월절의 어린 양의 희생 제물), 3)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피의 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과 영생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리적, 신학적 설명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아직까지 그분께서 세례 요한과 더불어 물로만 세례를 나누어 주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일화에서 이르기를, "아직 내 때가 이르지 못했다" 하신 말씀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분의 공생애 기간에 대한 예비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일은 "죄를 씻는 일"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원죄와 죄성을 씻는 일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로만 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예수님만이 성부 하나님과 인류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존재의 무의식적인 어두움의 근원은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나 힘으로는 없애거나 제거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행위나 상태 등을 정결하게 하고, 율법을 지키고, 형식과 의례를 반복한다고 해서 그 안에 든 죄와 그 지배력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오히려 '없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게 함으로써, 더욱 교묘한 교만과 욕망에 빠져들게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주신 것은 "마음을 돌리는 일", 곧 회개하라는 가르침이셨습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제 곧 이를 것인 바, 천국이 가까워졌으니 죄에 속한 마음, 죄에 지배당하는 마음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라, 는 의미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귀중한 지혜를 허락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받는 엄청난 특권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공생애 기간은 짧았고, 그분이 육신으로 세상에 머무신 시간 또한 짧으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오늘날 육적 한계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믿는 자 안에서 성령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바, 바로 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세례"란, 곧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는 것을 내가 가로막거나 방해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마음을 돌리고, 항상 하나님께로 마음을 두며, 의식과 정신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세례입니다. 그 준비된 마음과 의식과 정신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사 그분의 사역을 집행하실 것입니다.
사실, 거기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특별한 은사였을지를 저는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에, 하얀 구름과 청명한 하늘이 흘러가고, 그 아래에서 반짝이는 시원한 강물 근처로 사람들이 몰려 있는 바,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저 멀리서부터 그분의 "존재감"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하매, 나는 한 달음에라도 달려가서 그분을 영접하고만 싶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강물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 적에 눈부신 햇빛에 물방울들이 산산히 부서지면서 내 마음은 눈과 같이 희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열망의 불씨가 불붙기 시작하는, 그 아름다운 은사의 순간을 체험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합니다. 아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동일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분께로서 손길 한 번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 잘했다 하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이제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어라" 하시는 그 짧은 한 마디라도 좋으니, 평생 내 영혼 안에 간직할 그 육성을 직접 귀로 듣고 싶은 마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분과 수천 년의 시공간이라는 아득한 격차를 두고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좌절하지 않으니, 이는 그분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그분의 얼굴 한 번 뵙지 못했고, 그 눈빛과 나를 들여다보시는 눈동자와, 그 음성과, 그 손길과, 그 아우라와 존재감까지도, 전혀 육적으로 한 번도 뵙지 못했음에도 지금의 나는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의 모든 것을 닮아가기를 열망하며, 그 불꽃이 나의 존재와 삶과 일상을 이끌고 인도하기에...... 이에 나는 물로 주신 그 아름다운 세례보다도 더욱 높은 "성령"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형식과 의례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신앙 생활에 필요한 것이지만, 본질이 아니며, 목적도 아닙니다. 경건함과 거룩함은 겉으로 보이는 행위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결하다는 것은 곧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서도 언제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 그분께로 의지하는 마음, 그분과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 그러한 것들이 곧 진정한 회심과 회개입니다. 그리 마음이 온전히 그분께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집중되고 몰입되었을 때, 기도하고 묵상하고, 일상 속에서 선을 행하며, 그분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외적인 행위와 형식과 의례들을 지켜나가게 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이는 그의 제자들이 그를 향하여 말하되 "스승님, 당신께서 증거하시던 자가 저 쪽에서 세례를 주니 사람들이 모두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한 것에 대한 세례 요한의 응답입니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나오지 않지만,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에서 알 수 있듯이, 무언가 심상찮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랍비", 즉 이스라엘의 스승으로 불리던 이였고, 따라서 그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권위 있는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끝까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음성"으로만 남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처음부터 순종하는 자가 아닙니다. 본래 태어나기를 마음이 적당히 순수하고 적당히 둥글둥글한 자는, 딱히 큰 어려움이 없이 곧바로 순종하되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당신께서 주신 선천적인 것으로 인한 것이지 그의 진실한 마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원한다면 위험을 피할 수 있었고, 또한 랍비로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동족들 가운데에서 살 수 있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적당히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발적으로"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홀로 광야에 나아갔고, 그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끝까지 증거하는 자의 외침으로 남았습니다. "자유 의지" 입니다. 자유 의지란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제멋대로 미친 망나니처럼 설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무엇을 바라고 소망하고 구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육의 안온한 삶인가, 영의 구원인가?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유의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외적인 행위, 즉 "고행"에 관심을 둡니다. 그들은 에세네파 전통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오해를 합니다. 결국, 오늘날 여전히 율법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이로 인한 폐혜들이 여전히 범람하는 바, 이에 성도들과 교회들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내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거였으면, 애초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외아들을 보내셨으며, 또한 우리들은 어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단 말입니까. 자력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다른 종교나 전통으로 갈 일이지. 외적인 행위들과 율법을 지키는 것들과 형식을 경건하게 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것 같으면, 어찌하여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단 말입니까. 세례 요한은 비록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광야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살았지만, 그것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증거하는 자의 음성"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외침"으로 남기를 "선택"했고, 그 외 나머지들을 그냥 "버린" 것뿐입니다.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불필요하니 자연스럽게 버린 것이고, 버려진 것입니다. 안온한 삶, 적당한 부와 명예, 세속에서의 인정, 그러한 것들 말입니다. 그는 고행한 게 아닙니다. 그는 다만 사명을 선택했고, 그 외 나머지는 자기의 길에 도움이 되지 않고 의미도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져나간 것일 뿐입니다. 역사상 더 많은 에세네파의 수행자들이 거기에 있었을 것이고,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로 고행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육의 풍족함보다는 영의 평화와 기쁨이 더 좋았음으로 그것을 부러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육의 풍족함은 도시와 문명 가운데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되, 영의 풍요로움은 오직 의도적으로 제한된 음식과 환경 가운데에서 온전히 기도하고 몰입하는 것에서만 얻을 수 있기에, 그들은 그저 물을 얻기 위하여 물가로 가는 바와 같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광야로 간 것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고행이 아닙니다. "노력"이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애를 써서 구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영의 풍요로움이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은 무어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의 고요함과 평온함과 기쁨과 환희 가운데에서 강렬하게 이끌리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과 환경을 선택하고 나아갔을 뿐입니다. 이는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는 것처럼, 배고픈 자가 음식을 얻는 것처럼, 그저 소망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이는 매우 큰 지혜를 허락해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고대 에세네파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회사로 출퇴근해야 하고, 가서 북적이는 가운데에서 세속적인 일을 처리해야 하며, 자기의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는 바, 그러한 삶의 "목적"을 무엇으로 둘 것인가, 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다가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비명횡사할 것인가? 아니면 비록 분주하고 바쁜 삶이더라도, 그 가운데에서 영의 구원과 영생을 바라고 소망할 것인가? 이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의 소망 곧 얻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해진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됩니다. 도움이 되는 것들을 스스로 찾아서 구하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직장에 조금 일찍 출근하되 차에서 내리기 전에 기도하는 것, 점심식사를 할 때에 육의 욕망에 기만당하지 아니하되 다만 감사 기도를 먼저 올리는 것, 휴대폰을 쳐다보면서 도파민에 절여져서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되, 다만 온전히 집중된 마음으로, 주의 생명을 내 안으로 받아 모신다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시간을 "성찬"으로 삼는 것, 퇴근길에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다른 이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찬송가를 듣는 것, 찬송하고 예배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는 것, 퇴근하고 텅 빈 방 안에 돌아왔을 때, 그 적막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주께 옆드려 인사를 올리고,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 쉬는 날이면 주를 고백하는 글을 쓰고, 주를 증거하는 말을 하는 것......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삶을 다 버리고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조용히 사는 자의 수행으로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삶과 일상을 온전히 마주하고 감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순종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려 애쓰는 자의 서투름과 실수들과 그 가운데에서 묻어나는 순결하고 고귀한 진심들로 인하여 기뻐하시겠습니까. 거룩한 마음조차도 주께서 주신 그분의 것이거늘, 이를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대하는 자의 자세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찌 크게 기뻐하지 아니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바로 "구하는 마음", 곧 소망이고 열망입니다. 마땅히 준비된 바탕 위에만 준비된 것이 주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맨날 말로만 주구장창 외면서, 어찌하여 그 본의(本意)를 깨닫지는 못할까요. 진실로 이해하면 곧 실천하게 됩니다. 이해와 실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온전하면 율법은 당연히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가, 어찌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주의 이름을 부르짖는 진실한 영혼들을, 주께서 어찌 그냥 외면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소망하면 구하는 법입니다. 사랑하면 행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곧, 그분께서 우리 가까이 오시며, 하늘의 축복과 은혜를 넘치도록 주시며, 우리의 영혼 가운데에 영생을 선물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이 선물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세레 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그가 준 세례조차도 결국 주께 속한 주의 권능임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축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게으르고 방만하게 그렇게 있기만 하면 되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자세, "맞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먼 길을 떠난 신랑께서 오늘 밤에 돌아오겠노라 하시는 편지를 신부가 건네받았을 적에,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비록 신랑께서 공의로운 일들로 인하여 장기간 집을 비울 수밖에 없음을 이성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신랑 없이 일어나는 아침이 얼마나 쓸쓸하였을까요. 잠결에 자기를 꼭 안아주는 그 품과 손길이 없고,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서 자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그 청명한 눈동자가 없이 홀로 기침하는 그 아침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럼에도 신부는 게으르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이불을 정돈하고, 창문을 열고 비질하며, 냇가로 가서 빨래하고, 점심에는 꼭 두 사람 몫의 음식을 차려놓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은 결국 차갑게 식고, 빵은 딱딱하게 굳습니다. 저 멀리 노을이 지는 모습들을 볼 적에, 신부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으시는구나, 행여나 늦게라도 오실까 하여, 밤새 잠에 들지를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오늘 신랑이 돌아오신다는 기쁜 소식, 곧 복음(福音)을 듣게 됩니다. 이에 홀로 쓸쓸히 점심식사를 마치고 외로움 가운데에서 눈물 짓던 신부의 마음은 한 순간에 눈부신 햇빛처럼,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에 신부는 이른 저녁부터 신랑이 돌아오실 것을 맞이하고 부지런히 준비할 것입니다. 몇 시간씩이나 걸리는 품이 많이 드는 음식들을 준비하고, 식기를 다듬고, 옷매무새를 만지며, 초를 켜고, 따뜻한 빛이 스며드는 가운데 두 손을 맞잡고 서성이며 문 앞에서 순결하게 신랑을 기다릴 것입니다. 초조하게 옷깃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때에 마침내 문이 열리고, 신랑이 돌아옵니다. 그 청명한 눈동자가 횐희에 가득 차고, 그의 강건한 가슴과 두 팔이 신부를 끌어당겨 한가득 품에 안으니, 신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매 그 젖은 눈동자로 신랑을 올려다보았을 적에, 그의 기쁨이 얼마나 넘쳐나겠습니까......
대다수는 "문전박대"합니다. 신랑, 곧 그리스도를요. 그분은 자비로우사, 맞이하지 않는 자녀들의 집으로도 꼭 찾아오십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분이 말씀하셨을 적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목에 십자가를 걸고 집 한 켠에 주의 말씀을 액자로 장식해놓고도,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닌 자는 집 안에 들이지 않소. 그리고 지금은 예배 중이니 다른 집을 찾으시오."하고 외면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포기하지 않고, 꼭 다시 그 집을 찾고, 다시 찾고, 그 문 앞에서 새벽을 지나보내실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그분께서 보내신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알아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기다린 신랑의 눈동자와 그 특유의 표정과 환하게 밝아지는 기쁨과 그 몸짓들과 일렁이는 아우라를, 어찌 신부가 하나라도 놓칠 수가 있겠습니까. 일상 속에서 언제 오실지 모를 성령을, 그분을,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또 오실까, 오셔서 어떤 귀중한 것들을 주실까, 설레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하고, 때로 쓸쓸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한......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것만큼이나, 땅 위에서 우리들이 그분을 "맞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형식이나 의례가 아닙니다. 교회에 모여 경건하게 정해진 예법대로 의례를 지킨다고 해서 맞이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일상 속에서, 언제나 그분을 생각하고, 언제나 그분을 느끼며, 그분과 교감하고, 그분을 열망하면서, 그렇게 나의 정신이 온전히 그분께로 깨어 있고, 나의 의식이 언제나 그분께로 흐르며, 나의 마음이 그분의 빛만을 비추어 밝히는 것,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몰입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교회에 가서 이름을 올리고, 교회가 인정하는 제도와 형식과 의례와 절차를 밟는 것, 그러한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외적인 형식이 없더라도, 교회 바깥에서도 홀로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매우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어떻게 사랑하는가, 를 묻지 마십시오. 오히려 되묻건대, 사랑하는 자가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게 되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하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늘 하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 말입니다. 그분은 자비하사, 그분을 찾고 부르는 자녀들의 손길과 마음을 절대로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수십 년간 너무나도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성령께서 구하는 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하늘의 수술을 집도하실 것입니다.
어느 날에서인가, 그는 문득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고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마침내, 내가 주의 자녀가 되었음을,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성령께서 이를 인치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십자가 목걸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표증을 그의 가슴 안에 영원히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