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 : 임재하심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by 생명의 언어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원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실 것이다. 아버지를 내 눈으로 보려고 하는 자는 아버지께서 끝내 그분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아버지의 다른 이름은 진리이다. 생명이다. 신성이다. 주(主),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이시다. 나는 지금 <신의 언어>로, 언어 너머의 실재를 드러내려는 짓을 시도하고 있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수행자들에게, 진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깨달음을 내 손으로 이루어내려고 집착하는 수행자들에게, 공(空)의 진리는 침묵하실 것이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서는 그럴듯한 폼을 잡고 새벽기도하고 묵상하면서, "나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려오십시오." 따위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자의 의식은 영혼이 아닌 에고(ego)에게 동기화되고 고정되어 있으니, 그에게는 그분께서 임재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지금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수행자들은 "수행"이라는 자신의 방편에 집착한 나머지, 방편 그 자체를 신성시한다. 그러나 방편은 실재에 다다르기 위한 문자 그대로의 방편일 뿐, 그 어떤 가치도 없다. 가부좌하고 참선에 드는 일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낙엽을 빗자루로 쓰는 일이나, 청소하고 빨래하고 바닥을 닦는 일이나, 애초에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전자가 후자보다 더욱 악질이다. "나는 무언가 그럴듯한 중요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아성(我性)의 망상적 실체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그들의 것"(마5:3)이라는 말씀은 곧 "영혼의 본질적 태도"가 어떠한지를 직시케 하신 것이다. 영혼이 부유한 자는 스스로 완전하므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낮으며, 또한 낮아짐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공간"이 생기니, 그 공간으로 그분께서 임재하실 것이다. 보이는가? 결국 영혼의 차원에서도 "채우는 것", "높이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핵심은 결국 "낮아지는 것", "가난해지는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空)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 "나"의 관점에서는, 비우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그리 비워진 공간에 그분께서 임재하시는 것. 이것을 오쇼는 "채워짐", "넘쳐흐름" 등으로 표현했으나, 사실 그것은 양적 확산을 연상케 하는 용어이므로 적절치 못하다. 이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강림하는 것이다. 초월과 영원이 곧 현존 속에서 친히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의 언어>로만 그 높은 차원의 진동수를 겨우, 어렴풋이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접하는 태도", 이것이 결국 모든 영적 전통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고귀함"을 사랑하려는 마음이며, "낮아짐"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기뻐하려는 마음이며,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열망하려는 마음이니, 나(ego)라는 부족함, 가난함, 부끄러움의 통로를 통하여 그분의 완전, 영원, 초월, 신성, 고귀함, 의로움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나의 영혼이 크게 감동받고, 기뻐하고, 열망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말로써는 어찌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론과 지식으로는 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 수행으로 더 이상 전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과 영원을 사랑하는 마음." 이 하나를 결국 가슴에 품고 있는가, 이 하나를 영혼 깊이 간직하고 있는가, 그것이 결국 수행자의 "임계점"을 넘어서게 하는 열쇠이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수행하려는가? 그 수행의 열매들로 나의 내면이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내면은 신께서 거하시는 성전(聖殿)이신 바, 성전 안이 열매로 가득 차서 그분이 문 앞까지 찾아오셨다가도 어쩔 수 없이 다시 걸음을 돌리시게 될 것이다. 신비 체험을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묵상하려는가? 수많은 신비 체험들이 내 영혼을 가득 적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에 내 영혼이 홀려서는 그분이 오신 줄도 모른 채로 영접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은 문 앞에서 초대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걸음을 돌리시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이것을 결코 가벼운 심정으로 문자 장난질하듯이 말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형제들이 이 단순한 이치를 말로만 알 뿐, 영혼 깊이 체화하지 못한다. 그리도 "순종"과 "겸손"을 주구장창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의 실재로서의 "낮아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화려한 복장과 장신구를 차려입고 웅장한 성전의 드높은 권좌에 앉아서는,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오쇼도 이미 지적한 바 있을 것이다. 진정한 겸손이란 "윤리"적 행위가 아니다. "도덕"적 규범이 아니다. 율법은 실재가 아니다. 율법은 실재로 이르기 위한 실천적 지침일 뿐, 실재 그 자체가 아니다. 율법은 행위를 지향하고, 행위는 아성(我性)을 낳으며, 이는 결국 자기 의(義)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결국, "내가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신앙생활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의도와, 정말로 "내가 내 힘만으로 자력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함, 그것이 최초이자 최후의 죄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 "하나님을 오라가라 하는" 감히 입에 담기조차 버거운 크나큰 죄이다. 성령을 마치 자기 종 부리듯이 이리오너라, 저리가너라, 하는 태도이다. 예전에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어느 목회자가 이런 말을 하더랬다 :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도 되어주시고 부모도 되어 주시고 다 되어주시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 종은 아닙니다. 착각하시면 안 되요." 나는 그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내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마치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혹은 물 떠놓고 소원성취하려고 백일기도 하는 그런 잡신(神) 나부랭이 따위로 착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일부러 강한 어조를 쓰고 있다. 착각하면 안 된다. 절대 다수의 성도들이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신앙을 포기한다. 도대체 왜? 애초에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나를 정렬시키기 위함인가, 나에게 하나님을 정렬시키기 위함인가? 주권이 나에게 있는가? "내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제멋대로 자기 욕망을 하나님께 투영시켜놓고서는, 그 억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노라고 하늘을 원망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땅바닥에 헌신짝처럼 버리려는가? "기복신앙"적 어조는 모든 영적 성장의 길에 있어서 어쩌면 인류 보편의 근원적인 죄성일 것이다. 내게 아버지는 언제나 기쁨이 되어주시고, 또한 그분께서 내게 걸음하셨을 때, 내 곁에서 함께 걷고 함께 잠들고 함께 대화할 때, 그분의 음성을 내게 들려주실 때, 심지어 새벽의 그 깊고 고요한 어두움을 함께 통과하여 지나는 순간에서조차도, 언제나 내게 크나큰 평화와 기쁨이 되시는 분이지만, 그렇다고 "내 맘대로" 오라가라, 손가락질할 수 있는 분은 아니시다. 내가 원할 때에 필요하다고 해서 불러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며,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을 때에 오셨다고 문전박대할 수 있는 분은 아니시란 말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내게 보여주시는 "눈"으로 보면, 그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훤히 다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마에 "교만"이라고 쓰여져 있다. 눈동자에 "아집"이라고 박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일요일 하루 교회 가서 엄숙하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영성체한 뒤에, 자기 일상으로 돌아와서 바쁘게 일할 시간에 주(主)께서 찾아오셔서 "네게 이를 말이 있다, 잠시 걷자꾸나." 하시거든, 그는 대꾸하기를 : "주님, 일요일에 제가 교회 찾아갔을 때 오셔야 할 일이지, 지금은 제 시간이고 제 일에 바쁩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죠." 하고 응대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아픈 심정으로 쓰는 것이다. 그분은 "내가 원할 때에 내가 준비가 된 때에 맞춰서" 만나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이 나의 영혼을 거처 삼으셔서 그 안에서 잠시 쉬시고자 찾아오셨을 때에, "사전에 예약하고 스케줄 조정해서" 만나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분이 임재하시는 것이 이른바 "먹고사는" 그 세속의 모든 일들 전체와 다 비교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한 영혼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귀중한 일인지를, 그가 모르기 때문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체험하여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그리 행동하고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은유이다. 주님께서는 나와 같이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자주 오시지 않으신다. 나는 이미 "의로운"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내 생사가 달린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분께서 오신다면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는 그분의 뜻에 따를 것이다. 그분께서 나와 차 한 잔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 하더라도, 내가 내게 있어서 가장 간절한 소망마저도 다 내던지고는, 그분께 차를 대접해드리고, 떠나실 적에 그 소망이 다 엎어진 것을 슬퍼하더라도 마침내 그 순간에서조차도 그분을 원망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임재"에. 그러나 이미 이것을 깨달은 자에게 주님은 자주 오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영혼이 가난한 자, 심령이 병든 자, 교만과 욕망의 죄성에 고통받는 자들에게 임재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문전박대한다. 그분이 그리 서 계시는데도, 문을 열고 나가서 영접하기는커녕,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았다"고 하여 대꾸도 하지 않고 퇴짜를 놓는다. 나는 그 모습을 너무도 깊이 가슴 아파한다.


도대체 왜 이런 가슴 아픈 사태가 신앙의 형제들에게 빈번히 발생하는가? 그들이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임재가 "어떤 모습"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형상(Form)"에 대한 집착과, 그 반대로서의 "비어 있음"에 대한 이해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fact)은 알고 있다. 이것은 개념적 이해이다. 그러나 실재적 이해는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념적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실재적 이해는 가슴과 영혼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자에는 구원이 없으되, 오직 후자로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해되는가? 나는 머리로는, 개념으로는,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시다"고 알고 있지만, 영혼으로는, "다른 것들과는 차별되는 것으로써의 특정한 형상으로서의 아버지께서 따로 계신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망상적 실체가 나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죄성이다. 가장 근원적인 죄성이다. 무의식의 가장 심층적인 단계에 이르러야만 겨우 감지할 수 있는 죄성이다. "보이는 무엇"에 대한 근본적인 집착 말이다. 상(像)이다. 정확히는, 나(ego)가 집착하는 망상적 실체로서의 상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상과, 상 아닌 것이라는 분별이 작동한다. 이 상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언어, 지식, 관념이다. "관념", 이것은 에고라는 거대한 죄성적 구조물을 형성하는 뼈대이자 재료이자 중심 그 자체이다. 말하자면, 절대 다수의 성도들에게 주님이란 "무언가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계신 분"이면서, "흰 옷과 빨간 두루마기를 두르시고, 후광을 거느리시며, 가시관을 쓰시고,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으로 임하시며,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는 분" 등으로, 자신들이 상상한 바로 그 "이미지"로서의 주님에 집착한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러한 분별이 작동된다. 말하자면, "주님과 주님 아닌 것" 간의 근원적인 분별이 작동한다. 그러므로 에고는 자기의 "구조물" 안에서, 자기 눈에 보이는 상(像)과 더불어 놀고 있다. 그 보이는 실체로서의 "신"이 자기에게 찾아오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서 찾아오시는 것을 그가 알지 못하며, 감지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상(像)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이라는 "형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되는가? 애초에 3차원 시공간의 현상계에서의 물리법칙에 근거하여 규정된 "실체"로서의 하나님은 안 계신다. 그분은 그 "틀" 너머에 계시는 분이다. "있는가, 없는가"의 규정 자체를 넘어서 계시다는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가?"는 물음 자체가 틀렸다. "신은 존재보다도 더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최선을 다하여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이 에고라는 관념적 세계관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나야만, 마침내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분을 영접할 수가 있다. 눈을 떠야 한다. 지금, 나의 눈은 관념이라는 두꺼운 어두움에 가리워서는 빛이 비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늘 아침마다 걷던 산책길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던 그러한 일상적인 체험들과는 명시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특수한 체험(예: 산책 중에 신비 체험으로 신을 만나는 것)이 있어야만 아버지를 영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꿈 속에서 주님이 오시고 대화를 나누는 그런 특수한 무언가를 해야만 그분을 만나뵌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체험들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 실재는 아니다. 내가 눈을 뜨지 못할 때에는 제아무리 교회든 성당이든 성지순례든 간에 어디를 가봤자 그분을 뵙지 못하지만, 반대로 내가 눈을 뜨기만 한다면 그 어떤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들조차도 그분을 영접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을 뜨는 것(어떻게 있느냐)"에 있지, "무엇을 보는가(어디에 있느냐)"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더 정확히는, "육적인 조건이나 요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의식의 상태"의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마음가짐, 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 즉,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상(像)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자신들의 영혼의 문 앞에 그분이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기쁘게 나가서 영접치 아니하는 가슴 아픈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지르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모르되, 신을 믿는 자들, 신을 사랑하는 자들, 이른바 "크리스천"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는가. 세속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더 깊이 흠향하며 기뻐하여야 하지 않는가. 이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망상적 실체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탄의 술수이다. 저 빌립조차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분께 드린 질문이 "하나님을 내 눈 앞에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믿겠나이다"(요14:8), 였다. 열두 제자로써 우리들과는 달리 성육신하신 그분의 인격을 바로 지근거리에서 그토록 오래 보고 듣고 느끼고 함께하는 명시적인 "특권"을 누렸음에도, 그 역시도 결국에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높고 우선한다, 는 죄성적 관념의 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봤다."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표정, 그분의 말투, 그리고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사역하시는 모습들, 그분의 제스처와 어조와 보이지 않는 분위기와 그 고유한 모든 것들을 다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특별한 무언가, 가 따로 있다고 그는 집착했던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이 따로 계시며, 주님 혼자만이 그 보이는 하나님을 "특권적으로" 점유하고 계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그토록 간절한 것이었으되, 그에 대해서 그분의 응답은 매우 자비로웠고 매우 명확했다 : "네가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하였거늘 어찌하여 나를 모른다 하느냐,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요14:9) 결국, 빌립은 "봤다."(감각적 경험)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 그 자체가 실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지는 못한 것이다. 이는 "보이는 예수님"이라는 상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곧 그 자체가 "아버지께서 이루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 가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하신 그 모든 것들은 다 명백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그저 "육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맹인을 눈 뜨게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등, "특별한 육적인 것"이 있을 때에만 그분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특별하지 않은 육적인 것"으로써 함께하실 때에는, 그 자체가 "별 것 아니다(특별하지 않다)"고 믿었던 것이다. 믿었다기보다는, 그들도 모르게 그리 마음이 구조지어져 있었던 것이다(구조는 작동과 거의 같은 말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달랐다. 그는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서" 그분의 심장 소리를 들었고, 그분의 숨결을 느꼈으며, 그분께 가장 깊고 은밀한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 역시도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끝까지 지키며 그분께서 어머니를 맡기실 정도로 그분께 깊은 사랑을 드렸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과 요한이 달랐던 것은 그 "친교"의 특권에 있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드러나는 것"과 함께하였으되 그 자체에 속지 않았고, 그의 눈은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그분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올곧게 보았다. 사도 요한의 눈은 깊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별 것 아닌" 순간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요한의 앞에서 특수한 기적이나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실 때에도 요한은 늘 그분의 "특별함(신성)"을 깊이, 선명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봄"으로 인하여, 요한에게는 그분과의 "평범한 교감의 순간들"(육적인 경험들)마저도 전부 성화됨으로써 "신성과 교감하는 순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분의 인격을 통하여 그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잠들고, 일하시고, 이루시고, 사역하시는 모습들을 드러내 보여주심으로써,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가장 위대한 사랑이자 은총이며, 그 빛을 제자들 중 가장 선명하게 보았던 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었다. 결국, 간단히 정리해서,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한, 아무리 특별한 경험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다면, 그 어떤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험들조차도 전부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이 된다." 결국 핵심은 믿음에 있다. 요한은 믿는 자를 넘어서 "사랑하는 자"였고, "사랑받는 자"였다. 그의 영혼의 중심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정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것과의 교감 그 자체였다. 이해되는가? 이것이 바로 이 카드를 통해서 오쇼가 드러내고자 했던 가장 은밀하고도 위대한 비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그 자체로서 만나는 것", 달리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보려고 하는 집착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망상이 깨어지는 것.


무(無) 카드는 모던 타로의 상징체계에서 메이저 아르카나 5번, 교황(Hierophant)에 해당한다. 한국어로는 "교황"이라고 번역되었고 실제 카드의 상징들도 가톨릭 교황의 그것으로 대부분 다 묘사되어 있지만, 원어 Hierophant는 가톨릭이라는 특수한 종교의 수장이라는 배타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를 초월하는 어떤 원형적인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가리키는 단어다. 따라서 이 카드의 이름을 "대사제"로 바꾸자는 주장이 타로계에서 있어왔으나, 이미 익숙하게 굳어진 번역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카드의 의미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교황의 "인수권"의 신학적 근거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것은 결국 주께서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를 반석 삼아서 교회를 지으시며, "열쇠"를 맡기신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바로 그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며, 따라서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정당한 권위"를 역대 교황들이 대대로 위임받는 것으로써 이해된다. 그리고 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최초의" 열쇠는 결국 무엇으로 기인하는가? 바로 저 유명한 겟세마네의 밤에서, 그의 영혼이 거쳐야만 했던 죽음과 부활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과정으로 인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끝까지 목숨 걸고 주의 곁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비록 그의 다짐은 아름다웠으되, 그것은 "자기 의(義)"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의 죄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에 그분은 "너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정확히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토록 목숨 걸고 따랐던 스승을,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라 고백하였던 바로 그분을, 그가 연거푸 세 번을 부정하였으되 그것도 그 스스로 걸었던 바로 그 "목숨" 때문에 그리하였음을, 모두가 다 사라진 그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무너졌을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나는 너무도 절절히 공감한다. 우리들의 원죄는 행위로 의한 것이 아니요, 주를 영접하고서도 "외면"하였던 것으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리나 신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상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있었기에,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매, 연거푸 세 번이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나이다"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가 받았던 열쇠는 그의 "의로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처절한 부끄러움" 가운데에서 피어난, 주(主)를 향한 "사랑", 그 하나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라, 그분께서는 베드로에게는 온 세상 교회를 다 통치할 권한을 주셨지만, 이것은 육에 사로잡힌 자들의 시선에서나 "축복"일 뿐, 정작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자녀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분께서 사도 요한에게 "자기의 어머니를 맡기신" 바로 이것에 있는 것이다. 요한은 알았을 것이다. 그분께서 자기에게는 온 세상 교회를 맡기시지 않으실 것임을, 그리고 그분의 가장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은밀한 것들을 자신에게 맡기실 것임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 알았을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지상에서 이어받는 공적인 사명은 베드로에게 주셨지만, 정작 그분의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것은 "가슴에 기대어서 심장 소리를 들었던" 바로 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만 허락하셨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교황과 여사제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보라, 교황은 5번이지만, 여사제(High Priestess)는 2번이다. 명백히 앞선다. 그분의 신성과 교감하고 함께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황은 바로 이것,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차원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었던 그 특별한 순간들을 "목격"하고, 이를 세속에 널리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자다. 이것이 바로 계시를 전통으로써 계승하는 일이며, 이 자체가 "신성의 계시를 전통으로 계승하는 자(Hierophant)의 일이다. 따라서, 교황은 결국 "성육신"을 증거하는 자다. 그리고 교황 그 자체가 마침내 현존하는 "성육신 그 자체"가 되는 일이다. 따라서 교황의 인수권은 교황 직책을 수행하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황이라는 그 자리를 통하여 그분의 성육신의 증거를 "계승"하는 보이지 않는 그 권위 자체에 있다. 권위는 혈통을 따라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통해서 계승한다는 말이다. 영혼의 혈통은 바로 사명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걷는 자." 따라서 베드로의 열쇠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영접한 자"로써, 이를 "보이는 차원에서" 역사가 이루어짐을 증거하는 자의 권위의 상징이다. 바로 이 때문에,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요20:29)고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여야만 믿겠다"는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이미 답을 주셨다. 사도들은 특권층이다. 그들은 성육신하신 그분을 직접 보았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분과 함께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다. 인격으로서의 그분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언"들은 오늘날 복음서를 통해서 만인에게 다 주어져 있다. 그분이 어떻게 함께하시고 뜻을 이루시고 사역하셨는지, 그분의 인간적인 모습들과 말씀들과 가르침 모두를 우리가 다 알고 있다. 비록 "완전"하진 않으되 그만하면 충분히 주어진 것이다. 보이는 것은 복음서 안에 다 있다. 그렇다면, "충분치 않다"고 아집을 부리면서, 여전히 "특수한 체험"에 집착할 것인가? 사도들을 질투하면서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분을 보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을 못 만날 것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 변명, 심지어 "본" 빌립도 했다. 믿지 않는 자는 봐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씀을 영접할 때에, 내가 비록 여전히 나의 죄와 업과 함께 영혼의 성장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침으로 더할나위 없이 기뻤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지 못했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모른다. 그분의 표정도 목소리도 몸짓도 모른다. 나는 그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뵙지 못함을 탓하지 않았고, 핑계 삼지 않았으며, "보이지 않는 그 자체로" 그분을 사랑했다.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도 그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시련과 고난과 더불어서 더욱 깊이 사랑했고, 또한 사랑받았다. "보이지 않는 채로" 그분과 사랑에 빠졌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다. 이것은 여사제의 진리이다. "나귀 타고 오신 왕"을, 나의 성전 안에 깊이 모신 것.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 내가 그분 안에 살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시는 것, 나의 "거처"에서 쉬시고, 잠드시는 모습을 뵐 수 있는 것. 내가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아니하되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내가 나의 귀로써 세상을 듣지 아니하되 그분의 귀로써 세상을 듣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나로써 살지 아니하고 오직 그분의 심장으로 인하여 뛰고, 그분의 영으로 인하여 영속하도록 영혼이 생명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이 "보지 않고 믿는 자의 복(福)"이다. 이 점에서, 나는 결국 "인격성"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가진 강력한 힘이라고 믿는다. "육신", 곧 육적인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영을, 생명을, 신성을, 가장 "육화되어" 체험하는 것. 신을 믿지 않고, 신과 "교감"하는 것, 신성을 형이상학적인 법칙이나 원리로 두지 않고, 신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 성령을 분석하지 않고 성령의 품에 "안기는" 것. 내가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외로이 영원과 초월에 계시도록 하지 않되, 내게로 오시도록 엎드려 "청"을 드리는 것...... 오늘날 세상은 기독교의 "인격성"을 오해하고 있다. 그것은 에고적(ego)이라는 말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을, 보이는 차원으로써 교감하고 연결된다, 는 뜻이다. 교황 카드의 본질은 바로 그것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의 역사가, 가장 완전하게, 그리고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모습으로, 보이는 차원에서도 드러나고 완성된 것, 바로 "부활"을 목격한 것. 인류를 오랜 시간 그분께로 멀어지게 하였으며 또한 분리되고 끊어지게 하였던 바로 그 죽음과 사망의 죄성을 마침내 이기신 것, 죽음을 거부함으로써 이기지 않으시되 오직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통과하신 것으로써 이기신 것. 내가 말하건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을 그저 "위(하늘)"에서 쓸쓸히 홀로 계시도록 '버려둔 채', 형이상학적 관념으로서만 논하고 있다. 왜냐하면 "똑똑하고 영리하기" 때문이다. 배운 게 많고 수행한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하여 그런 복잡한 것을 잘 모르더라도, 신께서 "외롭지" 않으시도록 늘 함께 곁에서 머무르는 영혼에게, 그분은 거하실 것이다. 천사들조차도 대동치 아니하시고 홀로 찾아오실 것이다. 오직 그만이 "유치하고 무례하지만, 가장 순결하고 진실한 심장"으로 그분을 대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차원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모시는" 것, 그리고 초월과 영원을 그 자체 형이상학적 실재 따위로 두지 아니하고 나의 "아버지"라 칭하며, 그분을 "분"이라고 말하며, 그분과 "교감"하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만나는" 길이며,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통하여 임하시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이에, 나는 무(無)라는 것을 그저 비인격적 실재로써, 원리로써, 법칙으로써, 이해하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그것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기능적 차원 중 이성(머리)과 감성(가슴)이 있으되, 실재를 이성으로써 이해하는 순간 실재로부터 가장 멀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공부"하는 자들이 진리를 머리로 자꾸 만나려 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앎"이 "체험"보다 높다, 고 믿기 때문이다. 관념 그 자체가 실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겠지만, 진리를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신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겠지만, 신과 "함께하지는" 못할 것이다. 기독교적 진리는 곧 진리 그 자체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영접케 하는 길이다. 길은 길이며, 따라서 길 그 자체는 절대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유일하지도 않지만, 나는 이 길 위에 서 있다. 신성에게로 이르는 "두 갈래의 길"중에서, 내가 부름받은 길은 "인격성"이었다. 그분을 그분이라고 부르는 것, 아버지를 결국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천명"을 천명으로써 두지 아니하되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 외아들로 말미암아 그분께만 허락된 것을 내게도 허락하신 것을, 내가 믿음으로써 또한 '나눔'받는 것. 아들이 아닌 자가 아들이 되게 하신 사랑, 은혜, 영광. 이것은 신의 언어다. 기독교적인 언어다. 나는 비록 종교로서의 특수한 집단이나 교리 그 자체에 갇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더, 신을 사랑한다. 나는 신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나의 오랜 과거의 업보로 말미암아 또 다시 지성과 철학과 형이상학의 길을 걸을 뻔하였으되, 그분은 나를 그로부터 돌려 세우셨고, 나는 슬픔 가운데에서도 그분의 뜻을 따랐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이 "부재하신 채로",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모른다고 답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분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안에 계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어떻게 지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느냐고 묻는다면, "그분을 깊이 열망하는 마음 하나로써" 임재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마침내 그분이 누구에게로 임재하시느냐고 묻는다면, "자기보다도 더 그분을 사랑하는 자"에게로 임재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앎과 체험의 차이이다. 관념과 실재의 차이이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그분이 내게 기쁨이 되며, 또한 내가 그분의 기쁨이 된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결국 초월과 영원 그 자체로서의 성부 하나님의 위격을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아버지와 "하나될" 수 있는 것이었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열쇠다. 베드로가 받은 그 열쇠다. 신을 알려고 하지 마라. 그저 신을 사랑해라.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지 말아라. 그저 진리를 사랑해라. 만약 진리가 안 보인다면, 진리를 본 자를 우선 사랑해라. 그리하다 보면, 본 자를 통로 삼아서 본 자에게 드러난 보이지 않는 것이, 곧 사랑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요12:44). 이 지점에서, 이것은 나의 개인적 신앙인 바, 아버지를 "직접" 보신 분은 역사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분 뿐이시되, 그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우리들은 그분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보이지 않음"은 그분 자체이시니, 결국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믿음은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라 사실인 것을 토대로 하여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솔직한 인정이다. 사람은 성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과,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그리스도를 통하여)영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앙의 길에서 처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버지 자체라기보다도 아버지의 뜻이며, 그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다. 이것은 시작이다. 그러나 이로써 점차 우리들은 사도 요한이 보았던 그 참 빛에 가까워지니, 마침내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자아(ego)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으되, 우리들의 영(Spirit)은 그분을 '봄'이니, "보이지 않는 채로" 보이지 않는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모순이지만, 진실이다. 그리되었을 때, 영이 그분 안에 거할 적에, 자녀가 되었을 적에, 이제는 아버지의 뜻과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도 '아버지 자체'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초점은 이제 역사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그분 그 자체로 성화된다. 그리고 마침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성화됨으로 말미암아, 일상의 사소하고 평범한 모든 순간들로 인하여 그분과의 "보이지 않는 하나됨"을 "보이는 체험"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비밀이다.


아버지의 뜻은 "언어적, 문자적, 관념적으로 서술되고 규정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뜻을 모르는 것" 자체로써, 그 모름마저도 깊이 사랑하고 열망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한 것"이 된다. 이해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함을 사랑함으로써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고 말을 하고 문장을 읽는 것처럼 그리 "읽히는 것"이 아니다. 내게 이해되지 못한 그 채로,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 자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아버지의 임재는 "보이는 특정한 사건과 현상"이 아니다. 임재라는 특별한 체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상의 모든 순간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숨쉬는 모든 것들 안에서, 그 자체로 이미 그분은 "드러나 계시다." 다만,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채로 깊이 사랑하는 그 마음, 그것이 그의 존재 안에서 올바르게 정렬되어 있을 적에, 바로 그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 안에서, 그 사소하고 평범한 것 자체를 통해서, 그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순간들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채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임재는 특수한 것이 아니다. 신비 체험 같은 게 아니다. 드러난 모든 것들은 그저 드러난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상(像)"에 집착하는 육의 눈으로 본다면 그분이 "안 보일" 것이지만(당연하다), 그분과 하나된 영(Spirit)의 눈으로 본다면, 바로 그 순간에, 마침내 아버지의 "임재"가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자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를 보고자 하는 자는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만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오직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아버지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마라. "보이지 않는 채로", 보이지 않는 분을, 깊이 사랑하라.

이전 06화반역자 : 집단성이라는 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