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법을 따르지 않음이요, 그분의 법을 깊이 흠향함이니
황제는 세속의 왕이다. 그리고 세속의 왕의 권위는 명백하게 세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육이며, 육에 속한 것이며, 따라서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불확실한 3차원 시공간의 현상계의 "어두운" 세계관 내에서의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힘의 질서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고귀한 영(Spirit)들이 남긴 위대한 말씀들과 가르침들을 받아들일 적에 머리로 지식으로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직 가슴으로 영혼(Soul)으로 깊이 받아들이며 또한 그 말씀 앞에서 엎드려 경외하는 자세로써 나아가는 모든 참된 수행자들은 다 알 것이다. "말씀을 영접하는 순간"에, 그 말씀이 내게로 오셔서는 내 영과 영혼과 의식 전체를 한순간에 다 뒤흔들고 마는 그 위대한 "깨어남"의 순간을. "모든 형성된 것들은 언젠가는 변화하고 없어지게 마련이니, 허망한 것들에 관심을 두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깨달음에 힘쓰라. 너희는 또한 마땅히 자기 안의 신성에 의지하고 또한 진리에 의지하되, 이를 제외한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 나는 지금 종교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불문하고 모든 위대하신 영들께서 남기신 말씀들을 나의 미약하고 가난한 영으로써 영접할 적에, 그 순간에 너무도 거대한 감동이 열리게 된다.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며, 그것은 마치 한평생을 신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하고 묵상하였던 한 수행자에게 어느 날 밤의 고요한 새벽에 별빛으로 신께서 임재하사, 그에게만 가장 은밀하고도 귀중한 음성들을 귓가에 속삭이시고는 떠나니, 이제 그가 온전히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상의 언어로 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순간의 "영접"을, "말씀을 영접"하는 체험을, "진리를 만나는" 체험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대하신 영들께서 남기신 모든 말씀들은 한결같이 단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다 : "허망한 것을 구하지 말라, 오직 참되고 영원한 것을 구하라." 그분께서는 명백하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다. 부활은 오직 영의 차원의 일이다. 그분께서 살리는 것은 썩어 없어질 부질없는 허망한 육신이 아니요, 그 육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완성될 "영의 차원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진리의 말씀들은 모두 한결같이 "육이 아닌 영"을 가리키고 계신다. 그러므로 저 <내면의 목소리> 카드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면의 성의 굳건했던 문이 열리되 그 안에서 오랜 세월 거짓과 기만과 위선으로 통치하였던 가짜 왕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서는 참된 왕을 영접하되 스스로 그 죄를 청하매, 하늘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정당하신 통치자께서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오셔서는 그 첫 번째 칙령을 발표하시니, 그것은 가짜 왕을 용서하시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너무도 충격적인 자비의 음성이셨던 것이다. 이것이 참된 왕의 품격이다. 그분의 권위는 그분의 힘과 능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십자가에서 부활하시는 가장 위대한 권세를 홀로 누리시는 분이셨지만, 그분의 고귀함은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지 않았고, 그분의 의로움은 또한 그분의 힘에서 말미암지 않았다. 그러나 가짜는 다르다. 가짜 왕은 고귀함이 없기에 능력을 뽐내려 하고, 가짜 왕은 의로움이 없기에 힘과 무력으로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려고 하매, 그의 통치 아래에서 <나>(ego)라는 왕국은 나날이 병들어가고, 썩어져가고, 죽음과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가 갈수록 깊고 음침해져가매, 자유가 박탈당하고, 마음의 평화를 빼앗기며, 생명(Life)의 기쁨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제의 권위는 그분께서 주신 것이나, 황제의 권위는 세속의 것을 이용하여 억지로 강탈하고 빼앗아서 일시적으로 쌓아올린,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불완전한 탑에 불과할 뿐이다. 그 처참한 지경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여야 한다. 그 누구의 눈도 아닌, 나의 영의 눈으로.
깨달음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실체"를 제대로 목격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선(禪)"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건 "내가 내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참되고 영원한 것들은 나(ego)를 완전히 넘어선 영역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요, "진리가 나를 통하여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나는 의도적으로 인격적 은유를 들고 있다)이다. 이 점에서, 황제는 매우 근본적인 죄성에 갇혀 있다. 그것은 바로 1인칭 능동태라는 최초이자 최후의 죄성이다. "내가 한다", "내가 산다", "내가 내 능력과 힘으로 한다", "내가 주인이자 중심이다",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분별하고 통제한다"...... 이것은 주권의 문제이다. "나"가 주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짜인 줄도 모른 채로, 감히 주권을 찬탈하여서는 "왕국"의 중심부의 권좌에 앉아서는 불완전한 통치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통치가 아니다. 통제다. 그것은 억압이다. 우리는 독재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폭정이다. 에고라는 가짜 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나"라는 존재의 왕국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가짜 왕은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폭정만을 휘두를 뿐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타자를 통제하고, 온 세상을 다 통제하고 나면, 마음의 근원적인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는 참으로 가엾은 망상에 빠져 있다. 모든 불안정한 것들과 불완전한 것들과 불확실한 것들을 전부 다 억압해버리고 나면, 마음의 뿌리 깊은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는 참으로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다. "나"의 시선에서 인식, 분별이 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다 공격하여 제거해버리고 나면, 마음의 실체 없는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참으로 슬픈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 가짜의 실체를 보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란 말이다. 모두가 다 보라. "나"의 이름으로 내가 주권을 손에 쥐고서 내 삶을 살아온 결과, 내 삶에 자유가 있었는가? 내 삶에 평화가 있었는가? 내 삶에 기쁨이 있었는가? 내가 내 마음대로 주권을 휘두른 결과, 나의 삶은 고귀함과 의로움으로 가득찼는가? 찬란한 빛이 있었는가? 아름다움이 있었는가? 모두가 다 알지 않은가.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서른 살, 마흔 살, 심지어 오십이나 육십이 넘어서도 자신이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전히 어린아이인 것만 같다고, 우리들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진짜' 어른들과 지금의 자신은 분명히 무언가 다르다고, 이대로 몸만 늙어버린 것 같다고, 그렇게 느낀다. 그 느낌의 실체는, 자격 없는 자가 왕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다. 가짜 왕은 언뜻 표면적으로는 대단한 위세를 휘두르는 듯하나, 영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그 가짜 왕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의복과 왕관을 빼앗아서는 왕 행세를 하는 너무도 가엾은 꼴을 하고 있다. 그 아이는 매 순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언제 죽는가? 죽어서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아이는 그 권좌에 앉아서의 나날들의 평생을, 단 한 순간조차도 진실로 평안한 적이 없었다. 그 실체를 똑바로 보란 말이다! 자꾸 헛소리나 하지 말고, 내면아이니 심리학이니 깨달음이니 진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관념적인 허상들이나 붙들지 말고, 그 진리 자체를 똑바로 보란 말이다. 내가 나의 주인인가? 나는 나의 주(主)가 될 자격이 있는가, 이 말이다. 나는 이것을 너무도 일찍 알았고, 너무도 처절하게 보았다. "나"라는 가짜 주인의 실체를. 그래서 나는 가짜 주인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연민을 품고 그 자를 보살폈다. 자격도 없는 자가 진실로 원치도 않는 권좌에 앉아서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얼마나 불안했을 것인가. 그리도 불안에 떨고 또 떨면서도, 그 "폭정"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를 자꾸만 저지를 수밖에 없었을진대, 그것이 얼마나 처참하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증언하는 것이다. 그 가짜 왕이 그동안 자기 손으로 저지른 죄악들이 너무도 두려울진대, 참된 왕께서 성문 앞에 나귀 타고 오셨다는 "전령"의 소식을 들었을 적에, 주(主)의 심판이 두려우면서도, "이제는 못하겠습니다, 이제는 이 짓을 못하겠습니다, 심판받더라도 이제 권좌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하면서, 주 앞에 심판을 각오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는 마침내 "진짜"의 휘황찬란한 영광을 목도하니, 주는 너무도 완전하고 높으신 분이여서 그 어떤 권위도 능력도 부릴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니, 가장 완전하신 분이야말로 가장 불완전한 존재를 가슴에 품을 수 있으심이요,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분이야말로 가장 자비롭고 온화한 통치를 실행하실 수 있으심이니, 죄 사함을 받을 적에, 그 가짜는 마침내 그분의 품 안에서 "정당하신 왕의 통치를 받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얻으니, 그것이 그의 모든 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반역자는 나의 의식의 구조를 이야기한다. 정확히는, 그것은 집단성이다. "죄성"의 실체는 곧 집단성, 사회성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집단성과 "나"를 동일시한다. 나는 80억 인류에 속한 개체이며, 남성과 여성 중 특정 집단군 속에 속한 개체이며, 여러 연령대 중 하나에 속한 개체이며, 여러 출신과 소속과 집단 속에 속한 개체이며...... 이와 같이, 그는 집단성과 자기를 동일시한다. "인류 집단" 전체 속에서 "나"라는 이름 없는 일개 부품에 불과하다고, 자아(ego)는 스스로를 그리 인식한다. 그리하여 똑같이 생긴 부품이 80억 개나 있는 까닭에, 나 같은 "불량품"은 언제든지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대체 가능할 것이라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죄성의 실체이다. 개체는 열등하다. 집단은 우월하다. 그러므로 개체로서의 나는 철저하게 버려지되, 오직 집단의 것들을 "내 것처럼" 동일시하게 된다. 집단의 논리, 집단의 주장, 집단의 상식, 집단의 개념, 집단의 철학, 집단의 윤리, 집단의 도덕, 집단의 지식, 집단의 경험, 집단의 구조, 이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학습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내 것"이라고 진짜로 그리 느끼게 된다. 이것이 에고(ego)의 실체이다. 집단성에 대한 동일시, 이것이 최초의 죄성이다. 죄성이란 "구조적 작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순수한 개인"이 아니다. 나는 단한 번도 단일한 개체였던 적이 없다. 그저 집단성에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으로서 평생을 살아왔을 뿐이다. 마음(mind)은 단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마음은 그저 집단성이라는 죄성의 설계된 프로그램대로, 소스 코드대로 그 결과물을 쏟아냈던 매케한 연기와 독성물질을 내뿜는 악(惡)한 기계, 시스템이었을 뿐이다. 어두움이 입력되면 어두움이라는 결과가 출력되는 바로 그런 구조 자체 말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단 한 번도 "나"였던 적이 없었고, 나의 감정은 단 한 순간도 "나"로 말미암았던 적이 없었다. 집단성의 거대한 보이지 않는 어두움(집단 무의식)이 나의 의식과 자아와 마음을 장악함으로써,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그 상태에서, 그것을 진짜 "나"라고 착각하면서 평생을 그리 살아왔을 뿐이다. 이것이 오쇼가 반역자라는 카드를 통하여 제시하고자 했던 원형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문제이다. 단 한 명도 이 집단성의 죄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 이 집단성의 죄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우셨던 분은 역사상 단 한 분 뿐이시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니다. 우리들은 에고에 속고 있다. 우리들은 가짜 왕의 폭정에 기만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의식은 "집단성"을 편들고, "가짜 왕"을 찬양하고 있다.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에고라는 가짜의 폭정과 폭압에 상처 입고 비명을 지르는 주제에, 그 가짜 왕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려 있다. 나는 이것을 매우 비참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한다. 명상은 고상하고 우아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을 왜 하는 줄 아는가? 이 "보이지 않는 망상적 실체"를 선명하게 직시하기 위해서이다. 그 눈 뜨고 봐주지 못할 만큼의 처참한 에고의 구조를, 원죄에 철저하게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죄성의 구조를 통찰하기 위해서다.
1인칭 능동태가 왜 문제인 줄 아는가? 애초에 그 "1인칭" 자체가, 위와 분리되어 있는 불완전한 죄와 악의 덩어리일 뿐, 아무런 능력도 힘도 지혜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열려 있었더라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체를 통찰한 자는 알 것이다. 매트릭스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미 벗어난 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며, 스스로 깨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네오조차도 도움을 받아서 깨어났다. 에고는 이미 꿈 속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깨어날 수 있다!"는 더 지독한 망상에 집착하려는가? 내가 공부하고, 내가 수행하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묵상하고, 내가 붙잡고서 독립적으로 뭔가를 하면 그 끝에 정말로 결실이 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는가? 만약 그리 생각한다면, 여전히 자아와 마음과 무의식의 어두움의 차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에고는 수직적-다층적 존재의 층위의 최하위조차도 속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망상 그 자체일 뿐이다. 애초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순환은 신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되, 에고는 애초에 그 섭리에 속하지도 못한 채로, 어두움이 어두움을 낳고, 그 어두움이 다시 어두움을 강화하는, "윤회"의 무의미하고 허망한 반복일 뿐인 것이다. 죄는 반복된다. 그러나 생명은 '순환'한다. 반복과 순환은 다르다. 마음과 자아와 무의식은 반복되는 구조이지 순환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똑같은 조건과 상황과 입력값이 주어지면 똑같은 반응과 결과를 일으키는 기계일 뿐이다. 어제 동일한 상황에서 괴로워했다면 오늘도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괴로움에 시달릴 뿐이다. "내가 하려는" 의도를 일으켜봤자 그 무의식의 어두움이라는 "핵"을 강화할 결과만을 낳는다. 소위 까르마에서 벗어나려고 발바둥칠수록 더더욱 그 자체 행위로 말미암아 까르마를 반복하는 유감스러운 결과를 낳는 것이다. 명심하라. 업은 행위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를 일으킨 보이지 않는 구조, 곧 의식과 마음과 무의식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이는 것(행위)을 보이지 않는 것(마음, 의도)보다 더 집착하는" 그 죄성적 구조를 볼 눈이 없는 까닭에, 보이는 행위에 집착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마음과 자아와 무의식의 어두움을 폭발적으로 일으키고 마는 참으로 슬픈 행태 속에, 절대 다수의 인류가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삶의 모든 불행들은 결국 스스로 불러 일으킨 것이다. 망상과 어리석음이라는 원죄가 돌고 돌면서 그 어두움을 키우고 또 강화한 끝에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두움은 곧 보이는 외부현실에서도 실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말한 김에 더 말하자면, 어리석음의 최후가 무엇인지 아는가? "죽으면 다 끝날 것"이라는 망상이다. 정말로 그리 순진하게 생각하는가? 내가 지금껏 살면서 끝없이 일으키고 또 일으켰던 그 보이지 않는 시꺼먼 독성물질들이 나의 마음과 자아와 무의식에 심각하게 쌓여 있는데, 고작 육신 따위가 없어졌다고 한들 그 어두움들이 한순간에 초기화되어서 내가 완전한 무(無)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정말 그리 순진하게 생각하는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다. 경고이다. 삶의 미뤄둔 숙제들을 다 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죽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아, 나는 지금 애타는 심정으로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결국 당사자가 직접 체험해야만 절감할 수 있는 그 부분에 대해서, 애끓는 심정으로 말하고 있다. 제발, 눈을 떠라. 그깟 육의 차원의 일들은 물론 필요한 것이고 대처는 해야 할 일이되,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은 "망상에서 깨어나는 것" 이 하나다. 죄성의 구조 전체에서 나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 하나다. 이것은 "가짜 왕의 폭정에 항거하는 혁명"이며, 에고가 강제로 찬탈해간 주권을 다시 정당하신 주(主)께 되돌려드리는 신성한 "반역"이다. 폭정과 폭압에 항거하라! 그놈의 술수와 기만에 함부로 속아 넘어가지 마라! 마음이 움직여지는 대로 병신처럼 기만당하지 말란 말이다.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주인이 누구신지,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어떻게 친견할 수 있는지를 알 것 아닌가. 결국, 이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구조는 죽어서도 반복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실재한다"는 것은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정하신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법칙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어두움에 기만당했다면, 죽어서도 그 어두움은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되풀이될 것이다. 반복될 것이다. 원래 악몽이 그렇지 않던가. 악몽의 구조는 형태와 모양만 바뀔 뿐, 그 구조는 그대로 되풀이된다. 이것이 에고가 주권을 쥔 채로 "1인칭 능동태"라는 망상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삶의 실체이다. 성장은 그 이후의 문제다. 구원도 그 이후의 문제다. 우선은, "반역"부터 해야 한다. 반역자가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시작할 수가 없다. 발목에 1,000톤짜리 쇠사슬이 묶여 있는데, 그 상태로 뭘 어디를 간단 말인가.
에고는 세속의 법칙을 숭상한다. 세속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언어, 지식, 관념, 철학, 형이상학, 윤리, 도덕, 상식, 전통, 경험, 인간관계, 세상이 정해놓은 것들, 원래 그런 것이라고 정해놓은 것들,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자아와 타자와 세계를 선과 악, 옳음과 틀림, 좋음과 나쁨 따위로 정해놓고서는 그 기준대로 감시, 검열, 통제, 억압하려고 드는 바로 그 모순적인 구조 말이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좋은 것들은 내 맘대로 손에 들어오지 않아서 괴로울 것이고, 나쁜 것들은 내 맘대로 제거되지 않아서 괴로울 것이다. 결국 분별이란 "통제, 억압"하고자 하는 의도이며, 그 의도는 어느 쪽이든 간에 괴로움만을 낳고 강화한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인 공포는 곧 끊임없이 무언가를 손에 쥐고 채워넣으려는 "욕망"으로 일어나며, 이 욕망은 외부를 향하여 "투사"된다. 이 욕망의 실체는 결국 집단성에 대한 동일시로서 집단이 '좋다, 옳다'고 규정한 그 '의(義)' 안에 속해서 어떻게든 인정받음으로써 자기 안의 열등감과 죄의식을 면피해보고자 하는 처절한 발버둥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義)", 곧 "내가 옳다"는 의도이며, 나의 의로움을 구하는 것이 왜 죄성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내가 옳다는 것은 곧 "(내가 아닌)타자와 세계는 틀렸다"는 것이며, 이는 곧 타자와 세계를 내 "발 아래에" 두고자 하는 우월감과 교만함이니, 그 실체는 곧 "나는 (타자와 세계보다)열등하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다. 보이는가? 이것이 곧 "세속의 법칙"을 숭상하는 가짜 왕의 폭정과 폭압에 시달리는 왕국의 실체이다. 세속의 법을 숭상하려는가? 그리하라. 그러나 그 길에 고통과 괴로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갈 것이다. 반역하려는가? 그러한 용기가 있는가? 그렇다면 과감하게 전복하라. 뒤집어 엎어라. 문제들을 하나씩 묵상해서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벌이지 말아라. 혁명은 "뒤집어 엎는" 것이다. 세속의 법을 근거로 폭정을 휘두르는 왕의 "법률"을 찢어발겨라. 그런 다음, "참된 왕께서 정하신 법(法)"을 새로이 왕국의 중심으로 삼아라.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법"으로 부르든, 아니면 "불법(佛法)"으로 부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언어는 결국 말장난일 뿐이다. 실체는 하나이다. 그리하여, 정당하신 왕께서 권좌에 앉으셔서, 왕의 의지(WILL)대로, 왕의 법대로 이루어지는 "원래 그러했어야 할" 올바른 통치가 나의 내면의 왕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흠향하라.
집단성에서 벗어나라. 혼자가 되어라.
나의 내면의 중심에 세속의 법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모셔라.
에고의 폭정과 폭압에 기꺼이 반기를 들어라.
그리 용기내어 나아가는 모든 영혼들의 곁에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