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창조이고, 창조된 것은 아름답고 완전하다
여제(Empress)와 황제(Emperor)에 관한 한, 가장 명확한 진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여성성은 신성하고 우주적인 권위인 한편, 남성성은 세속적인 권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제의 풍요는 신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황제의 권위는 강제력을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위태롭고 불완전한 세속적인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분명하며, 따라서 이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오래된 인간 존재의 무의식적 이원성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여성성은 남성성보다 더 높고 완전하다. 이때, 높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가깝다(친밀하다)는 것이고,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고 하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여성성 자체가 신성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하여 제 발 아래에 둘 수 없다. 오직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분 안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여성성은 근본적으로 그 본성상 "수용적인(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육체적, 정신적 성(性)과 무관하게, 여성성은 곧 영혼을 개화시키는 하나뿐인 열쇠이다. 그리고 남성성의 그것과는 달리, 여성성은 그 영적 본성이 육체적 형상과 이로 인한 삶의 체험과 직접 연결되는 굉장히 독특하고 매력적인 실재이다. 남성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남성성은 속된 말로 "세 살 먹은 어린애나 팔십 먹은 노인이나" 그 모습 그대로다. 남성(性)은 그 신체적 특성 자체가 달이 차오르고 저무는 자연의 순환과 변화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는 곧 그 자체로 "달이 차오르고 저물고 변화하는" 자연의 섭리와 매우 닮아 있으며, 이로 인하여 여성성으로 인한 삶의 직접적인(생물학적인) 경험 그 자체가 곧 남성성과는 달리 "자연(신성)과 연결되고 교감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 점에서, 여성성은 남성성보다 영적 성장의 여정의 출발선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애초에 신성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교감되어져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감성 그 자체도 신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성보다 감성이 신성에게 더 "친밀한"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쇼와 나의 관점이 매우 일치한다. 나는 그의 설명에 크게 공감한다. 감성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더라도, 이성보다 훨씬 나은 도구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은 그 신체적 특성이, (육의 체험으로 인하여 형성되는)정신과 의식의 구조와 연결되며, 이것이 다시 (그 정신과 의식을 통하여 열리고 드러나는)영혼의 생명력 그 자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서, 여성성은 "자연"적이며, 따라서 남성성에 비해서 "특별하다." 나는 이것을 밀접하게 느낀다. 자연을 "이해"하려 할 때에는 "내주하시는" 그분의 임재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라는 것 자체가 곧 "인간 중심적 의식 구조의 관념적 체계 안에 대상을 가두고 통제하려 드는" 죄성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 자체가 남성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남성성은 여성성보다 죄성에 더 가깝다. 남성성은 신성보다는 죄성에 더 가까운 속성이다. 그렇다. 남성성은 본성이 아니라 속성, 성질일 뿐이다. 왜냐하면 여성성의 "삼중(육, 정신, 영혼)의 연결성의 특별함"과 달리, 남성성은 육적 차원과 영적 차원이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육적인 남성성은 두려움, 공포, 불안이라는 원죄의 어두움이 곧 열등감과 죄의식을 형성하고, 이것이 다시 공포와 욕망을 낳으며, 욕망은 곧 자아와 타자와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무의식적 의도로써 현현하며, 이는 다시 통제의 수단, 즉 지식과 관념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며, 이 집착은 "내가 옳다"는 교만과 연결되고, 이 교만의 실체는 곧 두려움, 공포, 불안이니, 이것은 "집단성과의 동일시"로 귀결되며, 이 원죄 중심의 죄성의 구조 전체가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이고, 업이며, 까르마다. 그것들은 특별히 초자연적이거나 오컬트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저 "구조"의 문제일 따름이다. 반면, 남성성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저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을 통하여 드러내신 것, 곧 "나는...(I AM)"으로 시작되는, "아버지와의 하나됨"의 원형이다. 수직선의 위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그 수직선의 아래에는 내가 있으니, 그것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바로 그 신성의 영원하고 고귀한 빛, 이것이 남성성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하늘에서는 완전히 드러날 수 있으되, 유한하고 불완전한 현상계적 차원에서는 거의 드러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완전하고 높게 드러내신" 예수님의 인성 역시도 그분의 신성 못지않게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애초에, 그분께서 "왜" 육을 입으셨을 때 (여성성에 비하여)열등하고 불완전하고 죄성에 가까운 남성의 옷을 입으셨겠는가. 이 점은 깊이 묵상해볼 만한 주제다. 여성성은 "길"이지만, 남성성은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렀을 때 곧 "하나됨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은 결국 생명을 잉태(창조)하고, 품에 안아 보호하고, 기르고, 생육하며, 성장시키는, 곧 "신의 일"을 수행하는 가장 은밀하고 신성한 힘(POWER)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본성으로서의 여성성은 신체적 성도 정신적 성도 아닌 오직 "영적인 본성"으로서의 여성성이라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자 한다. 무엇이 "중요한가"의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성성의 권위는 명백하게 신성한 권위이며, 이것은 "신의 일을 지상에서 대신 수행하는" 대리자로서의 지위까지도 획득 가능케 한다. 이 맥락에서, 여성성은 생(生)의 주기에 따라서 평생을 걸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변화"한다. 그 첫 단계는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의 여성성, 곧 소녀로 상징된다. 이것이 "열린 상태"가 되는 순간, 첫경험을 기준으로 하여 "여성"이 되며, 이 첫경험의 존재론적 전환은 곧 그보다 더 높은 존재론적 전환인 "결혼"을 통하여 "신부"로써 재탄생하게 된다. 이 점에서 결혼은 그저 종족 번식의 생물학적 욕구로 인한 행위가 아니다. 그런 거였더라면 결혼식이라는 의례 자체가 원형상징으로 남을 필요가 없다. 결혼식은 곧 여성성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되고 꽃을 피우는 신성한 순간이며, 이 점에서 결혼식의 주인공은 명백히 신부이다(다만, 이는 영적 차원에서의 결혼,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의식에서는 신랑이 주인공이고 신부는 이에 순종하는 영혼이지만, 사실 이 차원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에 이르는 신부가 주인공이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초점의 문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절정의 아름다움"으로부터 가장 신성한 마지막 전환이 이루어지니, 이것은 바로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어머니"의 영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 순간, 여성은 남성이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신성의 "성육신화"를 경험한다. 생명은 곧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 생명을 잉태하고 품을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매우 엄중하고도 귀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로써의 "자아"는 명백히 영적 정체성이며, 이것은 개인(ego)으로서의 여성성과 구별되며, 더 "높다." 어머니는 이제 늙어서 할머니가 된다. 할머니는 또한 "전승"을 통하여 삶의 체험적-신비적 지혜를 언어를 초월한 매개와 수단을 통하여 다음 세대로 전수하는, 말하자면 "정신과 영혼을 기르는 여성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부와 어머니와 할머니는 여성성의 "신성의 개화"의 세 단계이며, 이것은 삼위일체의 프렉탈 구조의 연속성으로써 이해된다. 나는 이것을 신체적 생물학적 특성을 보유한 특정 "종" 내에서의 집단군에만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하는 여성성"은 모든 영혼들에게 내재하는 것이며, 이 여성성을 일깨우고 "성장"시킴으로써, 그의 영혼은 실제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다 열린 가능성이요 진리요 길이다. 즉, 자기 안의 영적인 여성성을 개화하는 과정이 곧 영혼의 성장 그 자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모든 영혼들은 "신"(그리스도)이라는 유일한 신랑과 결혼하는 신부이다. 그리고 앞서 말하였듯이, 결혼식에서, 주인공은 신부다. 그 순간, 신부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느낀다. 경외를 느낀다. 존재 전체로써, 존재가 "열리는" 그 순간의 감동은 인간의 언어로 감히 함부로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영혼들이 "신랑"과 영원하게 하나될 적에 느끼는 감동의 원형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 "신부"의 원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열리기 전"의 여성성, 곧 "딸(소녀)"로서의 영혼이, "아버지(하나님)"의 품 안에서 사랑받고 보호받는 존재로써 관계 맺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곧 중요한 원형적-영적 신화 중 하나다. 지상에서는 딸은 성장하면 아버지를 떠나서 남편이라는 신랑을 찾게 되지만, 천상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남의 편"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곧 모든 생명들을 창조하시고, 품으시고, 기르시고,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그 아버지의 품 안에서 자라난 "딸"로서의 나의 영혼이, 곧 아버지와 "결혼"함으로써 신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의 일이다. 내가 책을 잘 읽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되, 이 원형에 대해서는 아마도 칼 융 등의 위인들이 이미 상세히 설명해놓았을 것이다.
오쇼가 이러한 여제의 상징성을 "창조성"으로 설명한 까닭은, 곧 두 가지의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첫번째는, 창조 그 자체는 곧 "신적 권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창조는 성부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애초에 하나님 그 자체의 현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사람이 감히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초월적인 영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창조"는 신성이다. 다만, "창조성"이라고 부를 적에 우리는 두 번째로 예술적인 무언가, 로 느끼고 받아들인다. 즉 영감을 받아서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써 표현하고 드러내는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후자로서의 창조는 곧 여성성이다. 오쇼는 아마도 이를 의도적으로 명확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권세와 영광으로서의 창조가, 곧 여성성이라는 "변화하고 전환되고 완성되는 자연의 섭리 그 자체와 닮아 있는" 신적인 본성을 매개로 하여 현현되고 꽃을 피우는 것, 이것이 오쇼가 진실로 말하고자 했던 창조성의 실재이다. 이 점에서, 창조는 단지 "예술"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의 여성성을 통하여 "신성"을 드러내는 것 전체가 곧 창조이다. 이때, 창조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여성성을 통하여 드러난 것(애초에 여성성 자체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평생에 걸쳐서 변화하는 자연의 섭리 그 자체', 그러니까 변화 그 자체가 여성성이다)은 창조되어진 것, 곧 피조물이며, 이 여성성은 자연에도 영혼에도 존재하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여성성은 보다 "비인격적인" 순수한(나는 이때의 순수함을 수직적-다층적 존재론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권위'와는 다른 수평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다) 존재에 가까운 반면, 영혼을 통하여 드러나는 여성성은 "영적 권위"와 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격적인" 신성에 가깝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의식과 정신과 내면의 차원에서의 일이기도 하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이란 "비추는 것"이고, 정신이란 영의 표면이며, 내면이란 영혼(Soul)이 드러나는 무대로써 제각각 특별하기는 하되, 결국 뭉뚱그려서 "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창조의 핵심은 결국 내적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상태는 오직 "수직선"이며, 그 수직선의 어느 층위와 자신의 '의식'을 정렬시킬 것인가(동일시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존재 카드에서 설명했던 바로 그 본질이, 창조성을 드러내는 "열쇠"이자 핵심 코드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단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성사만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깊어진" 수직선의 높은 층위와 정렬된 의식 상태를 통하여 그 영혼 안의 여성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신성이 함께할 적에, 그것과 연결된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과, 이와 연결된 시간과 공간들은 "성화"됨으로써 성사가 신성한 바와 거의 같은 수준의 무언가를 획득 가능하게 한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가짐"으로써 일상 속의 평범한 일들에 정성을 다한다면, 그 일 자체로 인하여 "신성"이 실제적으로 권세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김밥을 짓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하신 그 말씀에 깊이 묵상함으로써 생명을 나누고 공유하는 마음가짐으로 행하였을 적에, 그 김밥은 단지 육의 생물학적인 영양소뿐 아니라, 그의 영혼 안의 여성성을 통하여 발현된 신성이 김밥이라는 육적 매개를 통하여 그것을 먹고 받아들이는 다른 이에게 실제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놀라운 영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결국 기도와 묵상은 "나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요, 내가 성화됨으로써 나를 통로로 하여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것 그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로서의 신앙이다. 같은 예시로써, 어떤 사람이 잡화나 물건을 판매할 적에, 그것들 안에 "정성"을 담아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구매하는 모든 이들에게 은밀히 "마음"을 전할 적에, 나는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성사"가 됨을, 나의 영으로써 목격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는 너희 중 가장 가난한 이를 대할 적에 나를 영접하듯이 하라"(마25:40)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창조"의 가장 위대한 비밀을 드러내신 것이다. "가난함", 곧 육적으로 비워진 상태의 일상적 요소가 매개가 되어, 그 안에 가장 높은 차원의 신성이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아의 특별한 육 안에는 어설픈 영이 담기나, 반대로 진실한 자아의 가난한 육 안에는 가장 높고 고귀한 성령께서 임하시는 법이다. 나는 이것을 결코 가벼운 심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 경고에 가깝게 말하고 있다. 명심하라. 길을 지나가는 평범한 어느 이름 없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한 행위가 성령을 영접할 수도, 성령을 모독할 수도 있다(마12:31-32)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교만한 자에게는 가장 엄한 심판관으로 나타나시되, 가난하고 절실한 자에게는 따뜻한 어머니로 나타나셔서 위로하시고 품에 안으시니, 나는 그것을 일찍이 겪었고 또한 지금도 겪고 있으되, 이를 증거하고 싶다 : 사랑, 이 하나로, 하나됨에 이를 것이라고.
결국, "나"라는 존재 자체가 신께서 빚으신 작품이다. 그리고 내 삶이 곧 신께서 창조하신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나의 존재와 내 삶은 결코 우연적 확률 따위로 드러난 유한하고 상대적인 현상계적인 것이 아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창조하신 분을 닮아 있으되, 그분께로서 지음받은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이 그분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아름답고, 고귀하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고 이것을 "현현"케 하는 유일한 열쇠는 곧 "마음"(Heart, 절대 mind가 아니다)이다. 내 안의 여성성이다. 상인이 그의 가게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마음으로, 그의 어두움을 내가 다 짊어질 터이니 내게 주실 복을 그들에게 다 나누어주시라고 그분께 기도하면서, 그리 물건을 판매할 적에, 그 물건은 성화되어 성령의 표증이 되며, 그것을 간직한 모든 영혼들을 성령께서 지키고 보호하실 것이다. 단, 그러한 "심정" 자체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육의 차원에서 성화가 일어나려면 물론 그의 영과 영혼과 의식이 실제로 상당한 경지까지 성장해 올라야 하겠지만, 그러한 성장 자체가 곧 내면의 여성성으로 인한 것이고, 그 여성성을 열리게 하는 힘은 곧 "마음"(heart)이니, 정성을 다하고 진실하게 몰입하는 것 하나, 사랑 하나가 결국 중요한 것임을 나는 강조하는 것이다. 창조는 질료와 형상으로 나뉘어진 이원론적 세계에서, 마음(heart)이 부재하는 기계적인 형상 따위가 질료 안으로 들어오는 그런 "공산품"적인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나는 그의 형이상학이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놓쳤다고 보며,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 역시도 "감각적이고 체험적이고 실재적인" 사랑이라는 "실재성"을 그의 이데아론에서 놓쳤거나, 혹은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본다. 아름다움은 단지 추상이 아니요, 실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기계적인 작동"이 아니요, "창조"가 되게 하는 것.
나의 존재가 그저 우연적 확률의 연속으로 인한 허망한 것이 아니요, 신성으로 인하여 지음받게 되는 것.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 그 자체이신 분과 "닮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창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