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사랑하여 신의 성품에 물들어감으로
자비(慈悲)는 위에서부터 계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성품이며, 영원한 "빛"이 지상에 육신과 인격의 모습을 입고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실현이 곧 사랑이다. 다른 모든 진리들이 그러하지만, 특히나 "자비"에 관한 한, "사랑"에 관한 한, 그것은 결코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적인 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이나 자비가 대단히 "인간적인" 성품이라고 이해하는데, 애초에 인간 존재는 집단 무의식의 압도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에 의하여 철저하게 지배, 장악, 기만당하도록 구조지어진 존재이므로, 그 어두움 중심적인 체계 안에서는 "빛"스러운 것들이 일어날 수도, 일으킬 수도 없다. 1인칭 능동태의 의식 구조 안에서 현현된 모든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교만"한 것이다. 다만 선(善)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 실체를 감추고 있을 뿐. 따라서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깨뜨려야 할 것은 바로 언어와 관념이요, 이것이 깨어진다는 것은 곧 "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인식, 분별하고자 하는 아성(我性)의 의도를 알아차림이요, 또한 이것은 "내가 옳다"고 믿는 그 분별의 틀 안에 모든 것을 자기 발 아래에 두고서 통제, 억압하고자 하는 의도이며, 이것은 마침내 "통제되지 않는 것들은 위험하다"는 내면의 근원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으로 인한 것임을 직시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진 자는 결국 언젠가는 그 어두움의 실체 앞에서 넘어지게 되어 있다. 깨달음은 사람을 "넘어서는" 것이며, 자비는 온전히 넘어선 자리에서 다시 "되돌아와서" 어두움 가운데에서 그 빛을 나누고 공유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너머"의 빛은 오직 "넘어가지 못한" 세계에서만 가장 밝게 빛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비는 섬기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통치하는" 과정이다. 넘어선 자가, 넘어서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을 통치함으로써, 비추어 밝히는 것. "나-임"에 대한 착각, "나-다움"에 대한 망상, 그리고 이 개체의식이 집단성(인간 존재, 인류, 사회 등)과의 동일시에 의하여 특별히 "인간-임"과 "인간-다움"에 대한 망상과 단단히 결속되어져 있는, 바로 그 틀, 그것이 곧 "거대한 총체적인 망상적 실체"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특별히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형이상학적이지도 않고, 또한 "주장"도 아니다. 성선설도 성악설도 결국에는 그 망상 안에서의 분별에 불과하며, 오직 진리의 빛에 의하여 실체를 드러내 비추는 것, 그러니까 현상학적/해석학적 방법론과 그에 의하여 드러난 결과만이 사람의 유한한 인식의 한계 내에서 "유의미한" 결과일 따름이다. 언어로 말미암은 그 무엇도 이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쉽게 말해,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 그 자체로써 그저 서술하는 것일 뿐이고, "보여지는 것"을 보여지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는 "나"의 주장이 없다. 그저 드러난 것을 드러내는 것, 나를 넘어선 "무엇"이 그 자체로 자생(自生)하여 나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일 뿐이다. 본래 모든 깨달음의 실체가 다 그러하다.
따라서, 자비는 공(空)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공이 "감추어진" 진리라면, 그것이 스스로 현상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자비이다. 따라서 공과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며, 흐름과 순환과 같은 것이며,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본래 그 자체 내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자비는 "인격"을 통하여 현현하기는 하지만, 그때의 인격은 결국 통로이자 매개일 뿐이며, 마침내 깨달음이란 "주체성"(내 언어로는, '주권')이 통로에게 있지 않음이요, 그 통로를 움직이는 주(主)에게 계심을 깨닫고, 그 주께서 통로를 통하여 스스로 자비로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을 깨어 있는 의식이 "비추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나 말한 바 있다. 성부 하나님은 인간이 직접 뵐 수 없는 분이라고. 그분은 초월과 영원 그 자체이시며, 인간의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인식과 존재의 틀과 한계 내에서는 결코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분께 대하여 알 수 없음을 아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에 대한 유일한 깨달음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아버지"를 그저 "초월적인/형이상학적인 원리나 법칙 따위"로 설명하는 것을 대단히 경계한다. 애초에 인간은 "비-인격적"인 실체를 그 자체로서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깨달은 자의 의식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인격"이라는 틀 안에서 존재와 세계를 비추어 드러내는 바, 결국 초월과 영원으로서의 아버지는 마땅히 "인격적"인 교제와 교감과 연합으로 계시고 움직이시고 현현하시는 것으로써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기독교의 관점,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이 나의 영적 정체성의 핵심과 정확히 공명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길은 절대적이지 않다. 길은 그저 문자 그대로의 길일 뿐이며, 목적지이자 목적 그 자체만이 영원하고 완전할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결국,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스스로 낮추셔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그리스도로서의 아버지께서 통로에 해당하는 우리들의 인격을 "넘어서" 계셔서 스스로의 의지와 뜻을 통하여 그분의 능력과 힘을 드러내시고 역사하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인격과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와 또한 초월과 영원으로서의 아버지를 온전히 하나되어 연합하게 하시며, 그 하나됨 안에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모든 과정들을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작동하는 신성"이 곧 성령이신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이시면서 동시에 명확히 독립적인 "위격"을 거느리신 채로 움직이시며, 또한 그 독립성이 하나됨을 해치지 않으니, 양태론과 삼신론 등은 이 심원한 진리와 지혜를 알지 못한 자들의 어리석음의 결과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인격을 완전히 넘어서 계신 분께서, 인격을 통하여 현현하신 것", 이것이 성육신의 진리의 본질이며,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것이 예수님이라는 역사 속 인물에 의하여, 그리고 십자가 부활이라는 역사적, 특수적 사건으로 인하여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인 바, 나는 "육은 그 자체로 무익한 것이며, 육은 오직 영에게로 이를 길로써만 의미를 갖는" 바,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그 자체 목적으로써 믿는 것은 결국 잘못된 신앙이며, 그것은 길에 해당하며, 그 길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됨의 영적 역사"가 이루어진 것과, 또한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써, 그것이 우리 안에서 실재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자비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면서, 또한 이루시는 것이면서,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그 자체이시기도 하다. 자비라는 말이 비-기독교적인 언어로 느껴진다면, '사랑'으로 대체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언어라는 것은 그 자체 실체가 아닐 뿐더러 표지의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결국 어떤 관념체계를 통하여 그것을 넘어선 대상을 은유케 할 것인가, 의 문제일 뿐이다. 쉽게 말해 어느 손가락을 써서 달을 가리키든 간에 달은 달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라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집착은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교적 수행의 방법론을 따르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무아(無我)라는 이름의 또 다른 아성(我性)"에 집착하고 있다. 공(空)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망상에 집착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실체가 그러한 것이다. 망상으로 구조지어진 것은 망상 그 자체에서 결국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집착, 동일시를 내려놓지 못하는 한, 깨달음은 항구히 열리지 않을 것이며, 열린다 한들 결국 그 망상을 강화하는 또 다른 교묘한 망상일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섬기기 위한 시종"이다. 따라서 신비 체험 그 자체가 결코 목적화될 수 없다. 그 어떤 화려한 신비 체험을 했든 간에, 진리 그 자체와 하나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부질없는 것일 뿐더러 교만의 죄성만 강화하는 꼴일 뿐이다. 사이비의 절대 다수는, 아니 "전부"는, 아버지께 계신 주권을 그 자신이 강탈하려는 반역의 의도에서 비롯한다. 그 어떤 사이비도 이 지점에서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으며,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지금 거듭해서 "관념이 아니라 관념 너머의 실재"를 볼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관념"을 볼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실제로 계시며 또한 일하시는 그분 자체를 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벽에 걸린 나무토막이 아니시다. 그리스도는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의 외벽에 새겨진 장식물이 아니시라는 말이다. 그분은 거대하고 웅장한 "조각상"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너무 간단한 이치인데도, 결국 그분을 "영으로 직접 영접"하지 못하는 한, "보이는 실체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최후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저 빌립조차도 결국 그리 질문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을 내 눈 앞에 보여달라"고 말이다. 그것이 비록 우리들의 눈에서는 매우 유치한 질문이었을지 몰라도, 빌립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매우 간절하고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들의 스승은 곧 하늘로 돌아가실 것이다. 승천하셔서 하나님 곁에 계시다가 마지막 날에 돌아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직접 뵙고 질문드릴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에 그는 "열두 제자"라는 명예와 체면조차도 다 버린 채로, 그 자신의 가슴 안에서 너무도 절실한 문제를 질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로운" 응답이 어떠했는가? "네가 나를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도 본 것이다." 결국, 아버지라는 어떤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실체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곧 공과 자비의 관계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일 뿐인 것이다. 육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다. 육은 영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영은 육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며, 이렇게 육을 통하여 온전히 드러난 영 그 자체가 본질이다. 육과 분리되어 있는 그 자체의 어떤 독립적 실체로서의 영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 그건 있다 한들, 육신을 입고 있는 현상계 내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다. 이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명백히 "이단화"되는 것이다. 나는 이단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결국 이단이 추구하는 진리는 "올바르지" 않고, "온전하지" 못하다(이것은 사실 정통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결국, "영으로 직접 영접한다"는 것은, 육신으로부터 나의 영이 유체이탈이라도 해서 초자연적인 어떤 것으로써(즉, 일상적인 삶의 체험으로부터 분리된 특별한 신비 체험으로써) 그분을 만나라는 뜻이 아니다. 애초에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는 분이다. 더 정확히는, "여기를 완전히 넘어선 채로, 여기 안에" 계신다. 이 지점에서 "육"은 우리들의 마음, 곧 내적 체험이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 그러나 그 마음이 "실체"라는 착각만 온전히 내려놓고 나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분을 영접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해되는가? "보이는 것"과 분리된 그 자체 실체로서의 보이지 않는 것, 은 없다.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원래 그대로의 육", 원죄와 죄성에 의해 분리/단절/왜곡/변질/타락된 통로가 아닌 온전한 순수한 통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육의 차원, 그 자체를 통해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자체만을 우리가 만나뵐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물론 에고적이라는 의미가 아니지만, "육의 차원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신 영으로서의 하나님을, 육의 차원 안에서, 육적인 교감으로 연합하는 것"으로써 지지하는 것이다. 육을 버리고 영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순간, 그 모든 시도들은 결국 이단화되고, 솔직히 말해서, 이단화된 것들은 사이비화 된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신성 그 자체이시며, 이것이 온전한 육의 차원에서 현현하신 것이 "예수님"의 인격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이 "역사적 사건"을 기점으로(이건 종교적 믿음에 해당한다) 모든 인간 내면에서도 동일하게 "인격화된 신성"이 계시고 드러나신다, 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바로 이 인격화된 신성이 스스로 움직이시는 것을 "말씀"이라고 부른다. "자비"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상위 감정"의 코드이다. 엄밀히는 그리스도는 초월과 영원과 하나되어 계시니만큼 자비에 "갇혀" 계시진 않으시지만,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그분 자체는 "자비"로써 이해되고, 또한 그렇게 현현하신다. 마찬가지로 엄밀히 말하자면, "성부 하나님" 자체는 "영원하고 완전한 빛"이시며, 이 빛 자체는 (초월계에서는)딱히 "자비로운" 속성이 없다. 그저 완전한 빛 그 자체이시다. 다만 이것이 유한한 현상계적 차원에서 인격을 통로로 하여 현현되었을 때, 비로소 "자비"라는 실체적 현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상계에는 애초에 하나님께 "대적"할 어두움이 전혀 없기 때문이며, 그와 달리 현상계에서는 어두움이라는 무대 안에서 그 빛이 드러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들의 인격은 또한 마땅히 "죄"스러운 것이어야 한다(물론 죄의 지배에서는 벗어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온전히 "드러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카드는 메이저 아르카나 6번이며, 이는 교황 카드와 연결되는 의미와 맥락을 지닌다. 교황은 곧 "최초로 현현된 신성의 힘"을 목격한 자로써, 이것을 교리화, 체계화하여 "교육"하고 계승하며 인도하는 존재다. 즉, 교황 그 자체는 "여사제가 아니다." 신을 "직접" 영접한 것은 여사제이지 교황이 아니다. 교황은 신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신 것을 "목격"한 증인이다. 배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배드로가 주님을 만났다고 하여 배드로 자신이 부활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교리"가 곧 "내면화"되는 단계가 연인 카드에 해당하며, 이는 원죄와 대속과 구원이라는 "신성한 삼각형"이 최초로 형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즉, 우리 안에서 원죄는 어두움에 해당하며, 구원은 빛에 해당하며, 그리스도께서 대속자, 중보자로서 이를 "완성"하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의 진리를 보이는 차원에서 최초로 "현현"케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교리는 "공적인" 것도 아니고 "집단적인" 것도 아니다. 교리는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교리는 "나"를 위한 것이다. 만약 믿는 자가 오직 "공적이고 집단적인 것"으로서의 교리만을 믿는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속하려면, 성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화되기 위해서는, 교리를 통해서 계시된 가르침(아직 내 안에서 진리가 되지 못했다)이 "내면화"됨으로써 "신성한 삼각형"이 온전히 형성되고 드러나야만 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교리, 십자가 부활의 교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 이 모든 것들이 집단적인 것, 이론적인 것, 관념적인 것으로써 남아 있는 한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는 교황의 인도를 받는 초기 과정에 불과할 뿐, 거기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리는 명백히 "내 안에서 영적 역사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이 교리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영적 역사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영혼이 원죄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얻는 것", 그러니까 오컬트적인 표현을 쓴다면 "원죄와 그리스도와 구원의 마법의 삼각형"이 내 안에서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이 삼각형은 당연히 정삼각형이며, 최상위 꼭지점은 그리스도이시다(참고로 원죄와 구원을 왼쪽과 오른쪽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 의미와 해석이 달라질 것이다, 다만 서로 다른 두 해석이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로 연합한다). 믿는 자가 교리를 학습하는데 성공했다면, 그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되어야 한다. 신앙은 절대 형식에서 그치면 안 된다. 형식 그 자체는 필요하며 매우 중요하다. 다만, "목적"이 아닐 뿐이다. 목적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것, 그리고 주권을 거느리시고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 그분을 통하여 내 안에서도 "구원의 영적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 신앙의 참된 목적이자 "본게임"인 것이다.
이것은 성화이다. 어느 순간, 믿는 자는 정말로 "믿기" 시작한다. 성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써 보이지 않는 영원과 초월로 계신다는 것을 "믿으며", 또한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감하며 연합하는 이 모든 과정들을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매 순간 정말로 "체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절대 애매하거나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관념적, 지적, 교리적 사색 같은 게 아니다. 말씀은 관념이 아니다. 말씀은 실재이다. 내 안에서 실제로 움직이시고 현현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나-임"이라는 개념이 내 안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하며, "나-다움"이라는 말이 어색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인칭 능동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의 신성한 수동태로 전환된다. 이제는 나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존재하게 된다. 중심에 "나"는 없다. 여전히 "개체의식"은 존재하며, 에고로서의 나는 존재하지만, 이제 그 자는 더 이상 권좌에 앉아 있지 않다. 오히려 에고로서의 나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들이 일상 전체 중에서 유의미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며, 에고로서 존재할 때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에고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점점 더 내 안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하며, 그 대신 그리스도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그리스도의 귀를 통하여 세상을 듣고, 그리스도로서 살고 살아가고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로서의 나, 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기며(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곧 '크리스천'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님의 제자이자 형제!), 에고로서의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에게 순종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는 당연히 주권을 거느리시고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한다. 내면에서, 이 "체제 전환"이 어느 순간 정말로 실체화된다. 성령께서 내 육신과 영혼과 의식을 변화시키시되, 언제 변화한 것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리 변화되어 있다. 그 이후부터 성화는 "의식적인" 과정이 아니게 된다. 그저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뿐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살아갈 뿐이며, 이 삶을 사랑하고, 이 삶의 방식을 사랑할 뿐인데, 그저 자연스럽게 신의 성품에 물들어가며 그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다. 성화는 칭의가 이루어진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연속적 과정이지, "의도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교황 카드와 연인 카드는 "교리가 내 안에서 실재가 되는 과정"이며, 오쇼젠 타로에서 이것은 "공의 진리가 자비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결국, 신을 사랑하면 신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신의 품 안에 거하면, 나를 통하여 신께서 드러나시게 된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닌 실재이며, 이 실재 안에 거하는 삶이 곧 생명(Lif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