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음 : 의식의 정렬(整列)

신성의 빛과 의식적으로 연합하기

by 생명의 언어

"깨어 있음(자각)"이라는 언어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비-그리스도적 언어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일 뿐 종교를 믿는 자가 아니기에, 여러 종교들의 장점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단점에도 기만당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라는 것은 의식의 상태를 가리키는 언어이며, 이것은 곧 낮은 의식에서 높은 의식으로의 전환을 가리키는 매우 기술적인 용어이다. 결코 형이상학적인 말장난이 아니다. 이 점은 다른 여러 카드들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이기는 하겠으되, 깨어 있음이란, 자각이란, 명확히 기술되어질 수 있고 설명되어질 수 있으며 특정되어질 수 있는 의식적-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확실성의 언어이다. 다만 그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길과 여정과 방법들에 관한 한, 철저히 홀로 찾고 이루어야 할 뿐. 결국 이 상태는 다음의 몇 가지를 가리키는 용어로써 이해된다 : 첫째, 자의식(ego)에 대한 집착, 망상이 내려놓아진 상태(기독교적인 언어로는 : 나의 주권을 내 안의 그리스도께로 이양하여 전환한 상태)이며, 둘째, 마음(mind)이 아닌 영혼(Soul)이 신과 교감하고 있는 상태이며, 셋째, 신성과 완전히 연합하여 하나된 상태("신성한 수동태")이다. 내가 이것을 기존의 기독교 신비주의적인 언어로써 기술하지 않는 까닭은, 훨씬 더 생리학적이고 실제적이고 현장중심적인 언어로써 영적 진리가 공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나는 "실천적" 신비주의자, 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각이란, 깨어 있음이란, "나" 중심의 존재에서 "신" 중심의 존재로의 완전한 전환, 혹은 그 전환이 이루어진 의식 상태를 뜻한다. 이 지점에서, 전환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존재 전체가 기도가 되고, 그의 삶 전체가 묵상이 되며, 그의 일상과 내면 전체가 예배이자 찬양이 된다. 그의 영혼은 성전이 되매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거하실 거룩하신 곳으로 변형되며, 따라서 그의 영혼이 온전히 드러나며 그 안의 그리스도와 교감하고 사랑을 나눌 적에 머무르는 모든 곳들은 바로 교회가 된다. 나는 이 점에서 훨씬 더 내밀하고 내재적인 교회론을 지향하는 사람이며, 또한 복음적 진리 역시도 내재적, 초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오쇼는 이 "깨어 있음"을 모던 타로의 전차 카드의 상징체계 하에 배치했다. 이 점에서, 전차 카드의 도상은 명백하게 하나의 기독교 신비주의 상징을 떠올리게 하는 바 : 아빌라의 테레사의 내면의 성이다. 그녀는 사람의 영혼은 투명한 수정으로 지어진 성과도 같다고 말하며, 그 내면의 성은 총 7단계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며, 마침내 가장 중앙의 일곱 번째 방에서 그리스도(신랑)와 자신의 영혼(신부)과의 완전하고 영원한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이 내면의 성의 상징이야말로 영혼이 신성과 연합하는데 대하여 가장 오래되고 깊은 원형적 관상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오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서, 굳이 "내면과 외면",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공간적 개념을 차용한 것은 진리의 중요한 측면을 왜곡할 위험이 농후하지만, 그럼에도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 다수의 군중, 집단들은 내면이 외부세계 전체보다 더 "넓고, 높고, 크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내면(의식)" 전체이시고, 각 개체의식들과 영과 혼들은 그 거대한 하나의 내면 안에 각자 자리를 잡고 머무르고 쉴 뿐이다. 결국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의식의 상승과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면에서의 여러 단계에 걸친 변환(Transformation)이 필요하며, 각 단계를 뛰어넘을 때마다 중대한 내면의 적들과 어두움들과 맞서 싸워서 승리하여야 하고, 마침내 최종적인 관문마저 완전히 돌파하였을 때, 그의 영혼은 "신성한 전차"를 타고 신과의 연합, 하나됨이라는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상승하게 된다, 는 것이다. 이것이 전차의 원형적 상징이다. 단, 중요한 것은 이 "위대한 작업"이 모든 영혼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영혼들이 정량적으로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가 함부로 영적 성장의 과정을 밟겠다고 자기 안의 각 단계의 장애물들과 적들과 부딪히는 순간, 그의 의식과 영혼은 어쩌면 파멸적인 재앙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절대 다수의 영혼들은 아직까지 미성숙한 까닭에 자기 안의 기초적인 장애물이나 적, 이를테면 "업보"나 "까르마"에게조차도 저항하지 못한 채로 오히려 이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여 몇 걸음을 내딛는 순간, 이전보다 더욱 더 내면의 어두움이 무장해재되고 활성화된 까닭에 오히려 "크게 악화"될 위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전차 카드의 상징은 "엄밀하게 깨어 있을 것, 중심을 잡을 것, 반드시 승리할 것"을 요구한다. 누구나 전차에만 올라타면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모든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여러 험난한 장애물들과 난관들과 시험들을 통과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중간의 어느 단계에서든 간에 파멸적인 위험을 맞이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신비주의가 복음주의를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집단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있다. 절대 다수의 개체의식들은 아직까지 "직접" 성지(聖地)에 발을 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 그들 대부분은 "존재의 수직선"의 최하위 단계, 에고(ego), 마음(mind)의 층위들에서조차도 길을 찾지 못한 채로 헤매고 있으며, 심지어 하위 차원의 의식들의 주인인 "집단-무의식의 어두움"(원죄)에 의하여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한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에게 그 영역으로 직접 발을 들여서 개인적인 성장을 시작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마치 훈련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연약한 민간인에게 다짜고짜 아무 장비도 교육도 시키지 않은 채로, 치다친 심연의 바닷속으로 밀어넣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크게 반대한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영혼들은 물론 존재한다. 그들은 그 어떤 안내자도 목회자도 스승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하나님만을 유일한 스승이자 인도자 삼아서 그리 홀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사실은, 그들은 "특별히 쓰임받기로 선택된" 영혼들이며, 이에 따라서 신은 그들에게 타고난 특별함만큼의 더욱 무거운 시련과 고난을 더하신다는 것이다. 절대 다수의 영혼들은 아직까지 "집단성과의 동일시"의 단계에서 깨어나지 못했으며, 이것이 인류 전체의 의식적, 영적 성장이 어느 단계쯤 머무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엄연한 실태이며, 이에 나는 아주 단순한 기초에서부터 차근차근 교육해나가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일주일 중 주일예배 하루라도 꾸준히 참석하고, 그곳에서 설교라도 열심히 듣고, 언어나 말이나 행위로라도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며, 그리 반복 훈련함으로써 천천히 점진적으로 의식과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것 자체가 "절대 다수의 군중들을 안전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존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교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히려 중심이 되어야 한다. 나와 같은 이들이 걷는 "신비주의적" 길들은, 다만 그 단계들의 초반부를 지나서 중반부 어느 즈음에서 더 깊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소수의 자격 있는 영혼들에게, "단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고 대인적인 길을 열기 위함일 뿐인 것이다. 결국, 인류 전체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신비주의는 복음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또한 내적인 영성은 외적인 영성을 제치고 주류가 될 수 없음이다. 이것은 인류의 집단적 의식 수준이 아직까지 낮고 열등함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양들에게는 "안전한" 목회자들이 필요로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만큼 이미 "위대한 작업"을 시작한 영혼들에게는 "보편론"이 통하지 않으며, 또한 보편론으로써 안내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소수 정예"만을 위한 특별한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의 본질일 것이다. 또한 각 종교들의 "비교, 밀교"의 본질일 것이다. 소위, "자신의 내면에서, 영혼 안에서, 직접 신성을 만나고 진리를 체험하는 것" 말이다. 이것이 신비주의 전통이며, 이 단계에 이른 한, 이미 그 영혼은 "집단성과의 동일시"라는 대중, 군중, 집단의 수준을 넘어서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나 메이저 카드들의 초입부 과정을 지나서, 전차 카드에 이르는 순간, 그는 이미 "보편적 영적 원리"를 넘어서 "개인적 내면적 영적 성장의 단계"를 밟게 된다. 교황 카드에서 연인 카드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순간, 이미 "집단적 교리는 개인적 영적 진리로의 체화" 과정이 이루어지게 되며, 뒤이어서 등장하는 전차 카드는 내면의 성의 여러 단계들을 통과하면서 자기 안의 어두움들과 맞서 싸워서 승리를 거두는 "내적, 영적 종심돌파"의 전쟁을 의미하게 된다. 그대, 내면의 성으로 진입한 영혼이여, 명심하라,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 이제는 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이제 그대에게 남은 것은 나머지 단계들이 얼마나 남아 있든 간에 모든 관문들과 시험들을 끝까지 돌파하여 이 성의 최상부, 최심층부로 도착하는 것뿐이다. 그곳에,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왕 중의 왕(KING OF KING)...... 그대 내면의 영혼 안에서 친히 자신을 낮추사 모습을 드러내신 "현현하신 하나님", 주(主)께서 그대가 그곳에 이르기만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그 시험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매 순간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때로는 드러난 적보다 드러나지 않고 모습을 감춘 교묘한 보이지 않는 적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성의 중심부에 다다를수록, 점점 더 적들은 교활해질 것이며, 영리해질 것인 바, 무의식적인 감추어진 교만과 욕망과 나태함과 오만함으로 그대의 의식과 영혼을 점령하고 지배, 장악, 기만하려 들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깨어 있으라. 각 단계들을 우직하게 돌파하라. 죽음을 겁내지 말라. 비록 이번 생에서 그 단계들을 온전히 돌파하지 못했더라도,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용기 있는 진실한 영혼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성령께서 친히 돌보실 것이니, 실패해도 우리들은 "재차 기화를 부여받을" 것이다. 이제, 배수진을 쳐야 할 때가 왔다. 내가 말하는 바, "모든 영혼들에게는 살면서 한 번은 반드시 자신에게만 주어진 시험을 무조건 끝까지 돌파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결정적 순간"(전차 카드의 키워드)이 언제인가? 이 전쟁의 절정, 가장 중요한 결정적 순간은 이미 지나갔는가, 아니면 지금 통과하고 있는가, 아직 오지 않았는가? 통과하여 지나가는 자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무너진 자세를 바로잡고, 전열을 정비하고, 무기를 점검하고, 칼날을 다시 세우며, 전의(戰意)를 불태울 것이다. 기사들이여, 나아가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전진뿐이니.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의 길을 걷는 영혼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대다수의 "기사들"(영적 성장의 길을 걷는 자들, 수행하는 자들을 총칭)은 디테일에 집착한다. 더 많은 영적 지식을 알기를 바라며, 각 영혼들의 서열과 위계와 구체적인 영적 단계들의 특징과 변화 등에 대해서 알기를 바란다. 물론 그러한 방식은 영리하다. 세속에서는 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세속에서는 무언가를 이루려면 그에 앞서 지식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명심하라, 영적 세계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반전된다. 알기 이전에 의지(Will)가 확실해야 한다. 의도가 바로서야 한다.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은 곧 "내 손으로 통제, 억압"하고자 하는 두려움, 공포, 불안의 숨겨진 의도이며, 따라서 영적 진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자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두움이라는 적이 자신을 교묘하고 교활하게 사로잡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내면의 성"의 종심을 향하여 돌파를 시도하는 기사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들의 실체이다. 이해가 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려고 하지 마라. 앎이란 영적 세계에서 부질없고 무용한 것이다. 다만 의도를 전환해라. "수동태"로, 이미 "신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다"는 바로 "믿음"으로! "내가 시험을 통과한다"의 1인칭 능동태가 아니라, "신께서 나를 통하여 시험을 건너게 하신다"는 신 중심의 능동적 수동태로 전환해라. 나는 이것을 "신성한 수동태"라고 부른다. 의심 가운데에서도, 불안 가운데에서도, 더욱 믿음으로 고요히 정렬하라. 오직 살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날카로운 칼이자 유일한 무기는 이것 하나밖에 없으니, 바로 믿음이다. 오컬트 전통에서 초보 마법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지식은 무엇인지 아는가? 다름 아닌, "나의 마법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는 사실이다. 즉, 신께서 함께하심을 체험해야만 함께하심을 믿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인해서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순서가 반대이다. 이 모든 것들은 아주 간단한 "교전 수칙"을 형성한다 : 지식에 집착하지 마라, 단지 "의식"을 올바르게 정렬하는데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여라. 오직 그것이 전부이다. 나의 의식이야말로 영혼과 신성과 직접 연결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공부의 초입 단계에서나 통할 뿐이다. 그대가 이제 어엿한 한 명의 기사라면, 기사로서 자신의 싸움과 전투를 외면하지 않고 우직하게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난을 끝까지 지금까지 돌파하여 왔다면, 그대에게 이미 지식은 무용한 것이다. 이제는 오직 자기의 "의식"만을 올바르고 참되게 깨어 있게 하는데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을 가리키는 이름은 서로 다를 것이나, 기독교적 언어로써는, 오직 "믿음" 하나일 뿐이다. 이 믿음이란 무엇인가? 첫째, 더 이상 보이는 것(욕망)을 바라지 말되, 오직 보이지 않는 것(열망, 기쁨, 평화)만을 바랄 것. 둘째, 의심(체험해야만 믿는다)이 아닌 확신(이미 믿음으로 체험한다)으로 근본적인 의도를 전환하는 것. 셋째, "나"라는 주인의식을 내려놓고, 신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 는 신성한 수동태로 전환하는 것. 간단하고 쉽지 않은가. 이것을 단 하나의 기도로 치환한다면, 바로 그분께서 겟세마네에서 드린 저 유명한 기도 하나를 우리가 흉내내고 모방하면 되는 것이다 :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을 알 필요가 없다. 이미 깨어 있는 자는 이것을 아직 이루지 못한 자에게 설명하고 안내하기 위하여 갖가지 잡다한 말들과 언어들을 많이 동원하게 되지만, 정작 그 자신의 깨어 있음을 위해서는 이제 스스로 더 이상 아무런 언어도 말들도 심지어 진리 그 자체조차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복잡한 것들 가운데에서 오직 "가장 단순하고 절대적인 하나", 그 하나만을 예리하게 포착해내서 그 하나의 중심에 모든 것들을 다 정렬시켜야 한다. 공부는 이것이다. 공부는 수천만 개의 벽돌들을 쌓아올려서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성을 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일 중요한 중심 뼈대 하나만 남겨놓고 나머지 모든 벽돌들을 해체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선불교에서는 "화두"라고 불렀을 것이며, 기독교에서는 "칭의"라고 이름하였을 것이다. 내 안에서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곧 하나님께 나의 영혼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그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순간 말이다. 공부는 오직 "단 하나의 절대적인 중심"을 잡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을 다 이루었더라도 그 하나를 이루지 못한 한 다 부질없는 짓이며, 반대로 다른 모든 것들을 이루지 못했으나 그 단 하나만을 이루었더라면, 그로 말미암아 나머지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저절로 열리게 마련이니, 이미 이룬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수행자는 항상 명확해야 한다. 선명해야 한다. 절대적이어야 한다. 단순해야 한다. 진리는 그런 것이다. 선문답은 그 명료한 이해의 상태를 말로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다 보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면 : "하나님께서 실재하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실재하게 되신다." 이 말은 개념으로 들으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고, 체험으로 들으면 체험하지 못한 자는 절대 알 수 없는 말이다. 이 하나의 진리를 사도 요한도 증거하였고, 심지어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을 드러내 보이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거하실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개념의 언어가 아니다. 지식, 논리, 합리의 언어가 아니다. 오직 영혼의 언어이고, 실재의 언어이다.


"깨어 있음"에 관한 한, 단 세 가지만을 기억하라. 첫째, "주권 전환"이다. "나"가 주인이라는 망상을 완전히 깨뜨리고, 내 안의 "신성"(그리스도)께로 나의 주권을 넘겨드리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나의 내면이라는 왕국(내면의 성)의 중심부의 권좌에 내가 앉아 있었으되, 나는 가짜 주인이었으므로 무능력하였고, 무능력함으로 말미암아 왕국의 통치는 엉망진창이었으며, 그 결과 나의 내면은 매 순간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과 고통과 괴로움만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제 "내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매 그곳에 정당하신 왕께서 통치를 시작하시니, 내가 그분께 엎드려 충성하고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수동태적" 자리로 인하여 내 영혼이 마치 "태양 중심의 절대적인 질서 안에 완전히 자리한 행성들의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묻겠으니 :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지구의 실패인가? 태양의 절대적인 주권을 지구가 인정하고 그 질서 안에 순종하여 하나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지구의 굴복인가? 누구도 그리 말하지 않는다. 태양계에서 태양은 단 하나뿐인 "항성"이며, 항성은 본래 특별하였으므로, 누구도 "왜 항성이 특별한가"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항성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만이 유효한 질문인 것이다. 이해되는가? 질문의 관점 자체가, "의도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앎을 버려라. 오직 체험하여 실제적으로 거듭나고 변화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어라.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항성이시다. 절대적인 태양이시다. 그리고 나는 항성(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항성급도 되지 못한다, 항성은 나의 영혼을 가리킨다)이거나, 위성이거나, 소행성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하나됨의 질서 안에 들어가 연합하는 것" 이 하나일 뿐이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매 순간 선명히 깨어 있으라.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나머지 모든 것들을 다 던져버려라. 누군가 쓰잘데기 없는 관념과 지식을 붙잡고서 말씨름을 한다면, 겉으로는 그를 예의 있게 대하되, 속으로는 그와의 모든 관계를 다 잘라서 정리해버려라. 그리고서는 오직 중요한 것 단 하나의 목적에만 온전히 몰입하라 : "주님, 당신께서 내 안에서 권좌에 앉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당신께서 내 안에서 정당하신 통치를 시작하시기를 절실히 바라나이다, 내가 당신 앞에 엎드려 스스로 주권을 내려놓고 넘겨드리기를 애타게 소망하나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해라. 어차피 관문을 통과하여 끝까지 나아가야만 할진대,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잃을 게 없는 놈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법이다. 신을 만나는 것, 신과 하나되는 것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내던져버린 미친놈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놈이 되는 법이다. "나"를 자꾸만 높이려고 드는 내 의식과 내면과 마음과 무의식의 교만과 욕망을 계속해서 들여다보아라. 끊임없이 관찰해라. 매 순간 회개하라.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깨뜨려 부숴라. "아, 내가 꽃을 바라보는 이 사소한 체험 하나에서조차도, 이 꽃의 이름을 알려고 하고, 이 꽃의 특성을 알려고 하는구나. 이것은 지식과 분별을 통하여 이 꽃을 내가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드는 교만함이구나. 내 안의 죄성이 아직도 이토록 처참한 지경이구나." 매 순간 간절하게,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자기가 낮아지고 또 낮아진 끝에, 온 세상에서 가장 마지막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에고는 낮아지고, 영혼이 높아지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mind)의 차원만을 경험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 두려움, 공포, 불안, 슬픔, 외로움, 쓸쓸함, 원망, 분노, 질투, 열등감, 죄의식, 교만, 욕망, 분별심...... 등.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난 모든 생각, 감정들은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어두움"이 일으킨 어두운 결과이다. 그 결과는 다시 어두움으로 저장되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마음은 화면이요, 에고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본체이다. 마음은 컴퓨터요, 에고는 프로그램이다. 둘 모두 "참된 나"가 아니다. 그저 그렇게 설계된 대로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 자의식이라는 함정을, "나"라는 개념, 인식 자체의 함정을 유심히 잘 들여다보라. 그리하여, 매 순간 의식의 초점을 에고와 마음에 두지 말고, 의식적으로 내 안의 "영혼"이 드러나도록 하라. 처음에 당연히 잘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되든 안 되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어차피 "원래도 안됐었다." 그런데 백번 천번 만번 시도한 끝에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그것으로 이미 "본전치기"가 아닌가. 그러한 자세로, 마음과 자아에 초점을 두지 말라. 영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일단 "마음과 자아를 낮추는 것"이라도 시도해보라.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아무리 수치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그저 신께서 내게 허락하신 "자기를 낮추는 것"을 도와주시기 위해 내리시는 은총이라고 믿고, 지독한 슬픔과 아픔과 눈물 가운데에서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러다가 정말로 죽을 것 같거든, 그분 앞으로 나아가서 기도하라. 그 기도는 반드시 천상에 닿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결코 그리 눈물로 당신을 부르짖는 영혼을 모른체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기 안에서, "익숙한 것(마음, 자아)"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꽃을 볼 적에, 나뭇잎을 볼 적에, 햇빛을 느낄 적에,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다. 이전에는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 이유 없이 남을 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마음이 "불편함, 분노, 화, 비웃음" 따위의 감정들이 올라왔더라면, 어느 순간 이유 없이 그리도 가난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어쩌자고 저리도 선한 마음을 품고 행동하려 하는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끄러움"이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그러한 모습들에 내 안에서 "감동"이, "기쁨"이 일어남을 볼 것이다...... 아, 그리고 그대는 뒤늦게서야 알아차릴 것이다. "어라, 이것은 원래의 나는 절대로 흉내낼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내 안에서 무언가 나를 넘어선 것이 일어나고 있구나." 바로 그것이 영혼이다. 그대의 에고는 이제 낮아지고, 그대 안의 영혼이 높아져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의 감각과 영혼의 느낌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에고는 세상을 공포와 욕망의 눈으로 본다. 그러나 영혼은 세상을 오직 사랑의 눈으로, 기쁨의 눈으로, 감동의 눈으로, 경외와 경이로움과 열망의 눈으로 본다. 양자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에고가 아닌 영혼이 바로 "참된 나"이며, "진정한 나"이자,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사는" 나이며,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서 영속하도록 그분과 동행하는 "구원받은 나"이다.


셋째, "신과의 연합"이다. 이것은 매우 간단하다. 매 순간 신을 사랑하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간단한 이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보다 "높으신" 분이기에, 낮은 자가 높은 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내 몸의 세포나 바이러스 하나가 나를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이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하나님과 나는 본래는 "사랑"이라는 관계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인하여 마침내 그 길이 열리었으니, 우리 모두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직접 연합하여 하나될" 수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매우 쉽지 않은가? 직접 시도해보라. 그렇다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신성)를 어떻게 만나는가? 이것은 더욱 쉽고 단순하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짐작하며, 대신 행하는 것"이다. 이해되는가?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분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또한 그분이라면 마땅히 행하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들을 대신하여 행하라. 인정을 구하지 말라. 이해를 구하지 말라. 오히려 내가 그리하는 것들을 온 세상이 비웃고 모욕하고 비난하고 곡해하고 모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셨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마음은 고통스럽겠지만, 영혼은 기뻐할 것이다. 그 과정, 곧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일을 대신 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분과 만날 수 있고, 그분과 사랑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되는가? 복잡할 필요가 없다. 매 순간을 하나님과 함께하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 마침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행하여라. 이것에만 나의 모든 순간들을 집중하고 몰입하라. 그리하다 보면 그대의 내면에서는 어느덧 에고는 낮아지고 영혼이 높아질 것이며, 그 영혼이 신성과 정렬하여 마침내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됨"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때의 의식이 바로 "깨어 있음"이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나된" 영혼의 의식.




깨어 있음에 관한 한, 몇 가지 실천적인 지침을 밝힐 것이 있다.


첫째, 깨어 있음 앞에 "나"가 붙으면 안 된다. 나의 깨어 있음, 나의 자각, 이렇게 이해하는 순간, 그것은 자의식의 또 다른 발현일 뿐, 진정한 자각이 아니다. 의식은 애초에 "나"보다 더 높은 것이다. 나를 넘어선 것이, 나를 통하여, 그 자신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둘째, "내 노력"으로 이룬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깊은 무의식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의 의도이다. 대신에, "나를 넘어서 있는 것"이 스스로 내 안에서 일을 하고 변화하고 깨어나고 성장하도록 내맡기고 허용하고 "빈 공간"을 허락한 채로 나는 물러서 있으라. 이 물러섬을 능숙히 잘하는 자만이 곧 "하나님 나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상태에 집착하지 말고 의도에 집중하라. "깨끗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은 욕심이다. "밝고 선하고 충만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 역시도 욕망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하나님께서는 상태를 보지 않으시되, 그 중심의 의도만을 보신다. 의도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어디에 이르고자 하는가, 이다. 마음이 어둡더라도 이를 변명 삼지 않고, 더욱 절실히 빛을 사랑하고, 빛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 나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변명하지 않고, 오직 그것을 통하여 더욱 배우고 공부하고 성장하고자 마음을 내는 것. 나의 오만함과 교만함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되, 그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더욱 겸손과 순종과 낮아짐을 열망하는 것. 중요한 것은 상태가 아닌 의도이다.


넷째, 자각이란 "내가 상상하는 특정한 형상"이 아니다. 그건 망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것도 관념적인 것도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것도 아니며, 오쇼의 표현대로라면 "거의 보일 수 있고 거의 만져질 수 있는 절대적으로 명확한 그 무엇"이다. 생명이란, 실재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에 집착하지 말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아라. 어느 순간, 나는 여전히 나이되, 내 안에서 나를 넘어선 무엇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에 그는 알게 될 것이다. 지혜는 애초에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흐르는 것임을.


다섯째, 욕망이 아니라 기쁨의 의도로 움직여라. 내가 내 힘으로 노력하여 수행의 성취, 결과를 얻어내겠다는 마음은 결국 욕망이다. 어리석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결과에 집착하지만, 지헤로운 자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을 구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전자가 아닌 후자의 "의식 상태"가 곧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결과와 상관없이 "신을 사랑하여 신과 동행하는 것"에만 기뻐하라.


여섯째, 마음의 게으름과 나태함과 안일함을 경계하라. 치열하라. 매 순간 온 신경을 곤두세우라. 진리와 신과 영혼에 관한 한 그 무엇이라도 함부로 안일한 마음과 자세로 대하지 말라. 누군가 진리에 대해서 말하거든, 가서 목숨을 걸고 그의 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의 말을 비웃더라도, "신께서 반드시 그를 통해서만 전하시고자 하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서 배우라. 매 순간 신을 경외하라. 신 앞에서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라. 태산처럼 무겁고 진중한 마음으로, "하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라. 이것이 곧 자각에 이르게 하는 왕도이다. 절대 다수의 수행자들은 "태산처럼 진중한 마음"이 없다. 절대 다수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절실히 사랑하는 마음"이 뭔지 모른다. 행동에 집착하지 말고, 매 순간 "진실로 경외하고 열망하는 마음"만을 내어라.


결국, 의지(Will)가 명확한 자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이 이 카드의 메시지들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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