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순결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높아지려는 것"과, "나의 힘으로 정복하려는 것"은 당장은 성공할지언정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된다.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가 높아질 때보다는 낮아질 때가 더 많음이고, 자기의 힘과 능력이 강하고 굳셀 때보다는 힘이 약해지는 때가 삶 전체 중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나이가 늘수록, 나는 낮아지고 약해질 것이다. 앎이 나에게서 점점 떠나갈 것이다. 성취보다 실패가 더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외적인 것에 집착할 때, 힘은 갈수록 약해진다. 이것은 천명(天命),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다. 이것을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약해지고, 낮아지고, 비워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힘의 방향성에 관한 한, 외적인 것을 지향한다면 결국 이 자연스러운 순리 앞에서 더욱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만을 끊임없이 강화하게 된다. 이에, "하늘의 뜻"을 거슬러서 나이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높이려고 들고, 자기 힘을 키우고 강화하려고 들며, 앎과 지식과 분별에 더욱 집착하려고 든다. 그러한 모습을 볼 때, 우리 모두는 동일한 영혼의 직관을 공유한다 : "추하다, 못났다, 어리석다, 부질없다, 허망하다......" 그러나 반대로, 낮아져야 할 때, 비워져야 할 때, 약해져야 할 때를 알고, 스스로 낮아짐을 준비하고 예비하려는 마음을 품고 조용히 천명을 받드는 자를 볼 때, 우리는 역시나 동일한 영혼의 느낌을 공유한다 : "참되다, 진실하다, 평화롭다, 자유롭다, 고요하다, 지혜롭다......"
결국, 이것이 삶이다. 이것이 삶의 법칙이다. 삶에서, 화려한 승리는 잠시뿐이고, 인정받지 못한 채로 홀로 외롭게 견디어내야만 하는 시간은 매우 길다. 삶에서, 남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은 잠시뿐이고, 반대로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외면받고 거부당하는 순간은 길고 또한 많다. 삶에서, 거침없이 상승하여 올라가는 시기는 잠시뿐이고, 끊임없이 낮아지고 바닥을 향하여 처박는 시기는 길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상승과 하강의 영원한 순환.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불공평한 순환처럼 보이는 까닭은, 곧 우리들의 의식 구조 자체가 "분별심",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우리 자신의 욕망과 공포를 더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집착하여 소유하고, 나쁜 것은 제거하고 배제하려고 드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자아와 타자와 세계를 통제, 억압하려 들며, 내가 틀렸다고 믿는 것들은 자기 눈 앞에서 제거하고 죽여 없애려고 드는 것이다. 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원죄로 인하여, 그 어두움에 의해서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죄성의 의식 구조로 인하여, 사람은 끊임없이 삶의 순환 가운데에서 빛이 아닌 어두움만을 반복하여 경험한다. 상승할 때는 언젠가 하강할까봐 두려워하며, 하강할 때는 상승하지 못하여 불만스러워한다. 그러다가 평생을 불평하며 살다 한 번도 온전한 평화와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로 허망하게 죽는다. 결국, 우리들은 삶에서 단 하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 "내려오고 낮아지는 연습." 이것이 바로 내면의 힘(Strength)이다.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힘으로 목표를 정복하고 제압하려는 외적인 힘은, 결국 천명을 거스를 수가 없다. 온 천하를 다 자기 발 아래에 두었던 역사 속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들마저 결국에는 나이가 들고, 추해지고, 약해지고, 그러다 죽었다. 죽음은 공평하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다 평등하다. 이 앞에서, 외적인 힘은 결국 부질없고 허망하다. 그러나 내적인 힘이야말로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가장 지혜로운 힘이다. 이것은 곧 "자기 욕망과 공포대로 모든 것을 통제, 억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반대로 "올바르고 진실한 것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마음"이다. 곧, "빛을 사랑하는 영혼의 이끌림"이다. 이것이 바로 힘 카드의 본질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두움을 마주한다. 통제되지 않은 채로 태어났으니 불안하며, 또한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니 공포스럽다. 그리고 불안의 시작에서 불안의 끝으로의 이동, 곧 인생의 모든 과정들 역시 불확실성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매 순간을 그리 살아간다. 아, "외적인 힘"에 집착할 적에, 삶이란 이다지도 허망하고 또 허망한 것이다. 외적인 힘을 추구할 적에, 삶은 지독히도 허망하다. 그토록 오랜 시간 자기계발을 거듭한 끝에 겨우 빛을 보려고 할 적에, 하필 내가 죽을 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젊어서 청춘을 다 바쳐 노후를 준비한 끝에 겨우 경제적 자유를 얻었는데, 불과 몇 년 누리지도 못한 채로 나머지 평생을 병상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억울한가? 그 억울함마저도 결국엔 부질없다. 그냥, 그게 삶이다. 삶의 법칙이다. 하늘의 뜻이다. 감히, 인간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 자격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역사상 단 한 분께만 허락되었던 유일한 권세와 영광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개, 남성성이 여성성보다 외적인 힘에 더욱 집착하는 바, 남성들이야말로 이 "여성적 힘"의 진정한 "권능(POWER)"을 일찍이 깨달아야 한다. 사자의 아가리를 찢어버릴 만큼 힘이 넘쳐흘렀던 영웅들도 결국에는 늙고, 병들고, 약해진 채로, 그리 죽었다. 그 앞에서, 힘을 자랑하려는가? 세월 앞에서, 넘치는 힘을 자랑해서 어디에 쓰면 좋겠는가? 넘치는 돈을 자랑하려는가? 그 돈, 죽어서 그분 앞에 섰을 적에 심판의 순간에 아무 부질없는 것이다. 반대로 돈이 없음을 변명삼고 핑계 삼으려는가? 그리 한평생 억울해만 하다가 죽어서 그분 앞에 섰을 때, 그제서야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죽음은 심판이지 구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넘치는 권력과 지위를 자랑하려는가? 온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 마침내 어찌하려는가? 그리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가? 늙음을, 병듦을, 약해짐을, 낮아짐을, 부정할 수 있는가? 부정한다손 치더라도, 그 다음은? 결국, 외적인 힘에 집착하는 한, "허망함"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불안의 영원한 윤회일 따름이다.
허망함을 부정하려는 자는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놀아나겠지만, 반대로 그 허망함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통과한 자는, 마침내 죽음 앞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것, 나아가 죽음 앞에서 더욱 빛을 내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말로는 어찌 다 밝히어질 수 없는 것이며, 언어로는 더 이상 규명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에게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내게는 이 허망함이 곧 "죽음"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내리신 질문(시험)은 이것이었다 : "인간과 인간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 결국에 허망할진대, 죽음을 영원히 이기는 힘은 무엇인가?" 나는 그 질문이 너무도 절실했다. 너무도 간절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가 그분 앞에서 답을 제출했음을 깨달았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서 하늘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신을 사랑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죽음 앞에서도 빛을 잃지 아니하며,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에, 나는 직감적으로 그분께서 내 응답을 들으시고는 크게 기뻐하셨음을, 침묵 속의 응답으로 들었다. 이것이 내면의 힘이다. 이것에 관한 한, 언어적이고 개념적이고 지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허망한 짓이다. 이것에 관한 한, 오직 증거와 고백만이 유효하다. 내게는 이러했다. 죽음은 여전히 에고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며, 또한 그럼에도 언젠가 반드시 겪어야 할 사건이며,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 신을 사랑할 때, 신과 사랑에 빠질 때, 바로 그 사랑의 힘이 죽음마저도 능히 이기는 힘이구나. 이것이 내가 한평생을 죽음을 예비해야 하는 기도와 묵상이로구나. "더욱 절실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오직 이것 하나만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자, 삶의 방향성이로구나. 내면의 힘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인 불안과 공포라는 근원적인 원죄(Original Sin)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바로 그것으로부터 현현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영혼 전체로서 응답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지식이나 관념이 아닌 실재로, 체험으로, 현존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어두움을 마주하라, 자기의 죄를 온전히 마주하라, 그리고 건너가라. 그것이 곧, 외적인 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내면의 힘을 깨닫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두움과 빛의 관계성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먼저, 이것은 "어두움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클래식 타로에서 원래 힘 카드는 그러한 상징성이었다. 군인이나 전사의 "용기", 곧, 자기 안의 어두움(두려움, 공포, 불안) 앞에서도 의지의 굳건함을 잃지 아니하는 그러한 남성적인 용기를 뜻했다. 그러나 모던 타로에서, 황금새벽회의 교의 아래에서 이것은 여성적인 힘(Strength)으로 재탄생했다. 완전한 전환이었다. 그림에서, 여성은 무방비하다. 흰 옷을 입고 꽃으로 된 관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흉포한 사자(내면의 어두움)는 마치 온순한 양과 같이 다루어진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 마치, "절대적으로 길들여져 있음"을 자각하기라도 한 듯이. 이것이 위대한 비밀이다. 남성적 힘으로는 99%를 통제하더라도 결국 1%의 통제되지 않음에 대한 불안정성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여성적 힘으로는, 100%를 넘어서 "온전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즉,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통제한다, 는 역설의 진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성적 힘은 통제하지 않는다. 그저 수용하고, 바라보고, 함께하고, 손잡고, 돌보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찬양하고,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고, 그리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여성성은 "(남성성에 비해)신에게 더 가까운" 것이기에, 내면의 여성성이 깨어날 적에, 신께서 내 영혼 안에서 더욱 "친밀하게" 모습을 드러내시게 된다. 이에 남성적 힘(에고의 주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대로 "마치 그리 되어지기로 예정된 것처럼"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때에 그는 마침내 깨닫는다. "자기 이름으로, 자기 의지로,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들었던 1인칭 능동태의 어리석음을 온전히 깨닫고, 내려놓고, "신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신성한 수동태야말로 완전한 진리임을, 자기의 존재 전체로 항복(Surrender)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토록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온 탕아가 아버지의 질책과 꾸중과 심판을 각오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적에, 오히려 아버지께서 더욱 크게 기뻐하시며 그에게 모든 축복과 선물들을 다 주시는 기적을 목도한다. 명심하라, 애초에 내면의 어두움(사자)은 나(에고)보다 "더 강하다." 나는 사자를 이길 수가 없다. 사자를 통제하고 억압하려고 드는 순간, 사자에게 잡아먹힐 뿐이다. 그저 잡아먹히다 뿐인가? 매 순간 사자와 함께 살아야 할 터이니, 내면의 어두움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나의 존재는 단 한 순간도 온전한 안식을 허락받지 못할 것이다. 이 자체가 지옥이다. 달리 지옥이 있겠는가. 내면의 어두움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이 다시 어두움을 강화하니, 더욱 커진 어두움에 대하여 더욱 크게 두려워하게 되는...... "죄의 영원한 반복"인 것이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As above, So below)", 하늘의 영광은 곧 땅의 평화이다. 이것은 빛과 어두움의 참된 관계를 은유한다. 지상에서, 어두움과 빛은 서로 영원히 대립하며, 서로를 죽이려고 드나, 정작 서로가 서로를 영원히 죽이지 못한 채로 끝없이 투쟁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 세계이기도 하다. 명상은 그저 그럴듯한 자세로 앉아서는 적당히 눈 감고 쉬는 척 쇼(Show)하는 게 아니다. 명상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의 첫 단계는 "에고(ego)와 마음(mind)의 의식 구조"가 얼마나 처참한 실태인지를 직접 목격하는 것에서 진행될 것이다. 아, 이토록 모순적이고 오류 투성이인 것이 바로 나의 정신세계였구나. 처참한 지경이로구나. 그러므로 생각과 관념과 언어와 지식과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구나. 그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원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형성된 정신 구조는 박살이 난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본래 그러했던 진리의 세계"가 드러난다. 그 세계에서, 빛은 위이며, 어두움은 아래이다. "수직선"인 것이다. 어두움은 빛을 영원히 이길 수 없다. 빛은 단 1%만으로도 나머지 99% 전체를 능히 밝히는 것이며, 이러한 "위계", 곧 빛의 권세와 영광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빛은 완전하고 영원하기에, 어두움을 "정복"하지 않는다. 빛은 빛으로써 어두움을 "비추어 밝힐" 뿐이다. 빛은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어두움을 올바른 질서대로 통합하고, 정렬시키고, 순환케 하며, "통치"한다. 이 통치라는 단어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란다. 빛이 어두움 가운데에서 드러날 적에,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빛을 중심으로 하여 정렬될 뿐이다. "다스림을 받을" 뿐이다. 이때에, 어두움은 빛의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어두움 가운데에서 더욱 빛이 빛나고, 또한 빛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비추어 밝히어지는, 상호관계성의 "연합", "하나됨"을 이루게 된다. 여성적 힘의 원리는 그저 "나약하고 섬세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높은 힘(빛)으로, 보다 낮은 힘(어두움)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통치자는 그 자신의 불완전성을 감추기 위하여 더욱 흉포하고 폭력적인 통제와 억압을 행하지만, 완전한 통치자는 그 자신이 완전하기에 오히려 더욱 온화하고 따뜻하고 은혜로운 "통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어두움에 의하여 해를 입을 수가 없으되, 오히려 아주 미약한 빛이라고 하더라도 능히 나머지 전체의 어두움을 비추어 밝히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본래 그러한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높음에서 자비와 선이 나온다. 낮음에서 폭력과 죄와 악이 나온다.
이것은 힘의 위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낮은 차원의 힘"은 곧 남성성이다. 외적인 힘이며, 강제성이고 배타성이며, 통제와 억압의 원리이며, 곧 방어기제이며, 두려움, 공포, 불안의 집단 무의식적인 어두움의 진동수와 공명한다. 이것은 어두움이다. 마음은 바로 이 어두움에서부터 일어난 것이다. 자아는 이 어두움의 구조이다. 따라서 "나"와 "나의 마음"은 딱히 "나다운 것"이 아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 "낮은 힘"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서 "죄성"이 살아 있는 고로, 이 죄성은 곧 "빛보다 어두움을 더 따르도록" 설정되어 있는 초기 설정값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뜨리고 무장해제하고 전환하기 위해서는 길고 고통스러운 영적 성장의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먹고 자고 놀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성장은 매 순간 고통을 낳는다. 그러나 성장통이 크고 깊은 만큼 반드시 성장 또한 크고 깊을 것, 이것이 모든 시험을 통과하는 영혼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언약이시다. 결국, 의식이 깊어질수록, 선명해질수록, 그는 점점 더 "감추어진" 어두움을 직관하기 시작한다. "거의 보이지 않고 거의 드러나지 않는" 교묘하고 교활하게 숨기어진 죄성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때에, 그의 의식은 점점 더 낮은 힘들의 영향권에서부터 벗어난다. 더 이상 죽음과 사망의 권세에 흔들리지 않는다. 비록 여전히 그의 마음은 그것에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을 느끼더라도, 그 자체에 집착하지도, 통제당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안에서 새로운 힘, "높은 힘"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거의 들릴지 않는 아주 미약한 "불빛"에서 시작하지만, 시험의 과정을 통과할수록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영원히 타오르는 내면의 불꽃"이 된다. 그 불꽃이 나의 영혼을 인도하고 이끄는 바,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어두움에 속지 않게 하며, 오히려 더욱 간절히 빛을 사랑하고 빛을 열망하며 빛에 가까워지고자 내 영혼을 움직이게 하며,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앞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되 이것이 오직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진실로 믿고, 감동받고, 따르고, 순종하게 만든다. 이것이 "높은 힘"의 진정한 권세와 영광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말씀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담대하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것은 그저 언어가 아니다. 내 안에서 영원히 실재하시며 나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시는 "상위의 힘", 곧 "하나님 자체"이시다. 이 서열을 이해하게 된다면, 어느 순간 나의 의식은 낮은 힘에 대한 동일시가 해체되고, 높은 힘에 대한 새로운 동일시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곧, "나"(에고)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며, 자아와 마음과 육신은 그저 때가 되면 없어지고 사라지고 썩어질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되, 자기 안의 "보다 높은 에너지", 곧 영혼이 진정한 실체이며, 또한 그 영혼을 이끌고 인도하는 힘, 곧 "신성"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임을 알게 된다.
내면에서 이 "힘의 주권의 전환"이 이루어질 적에, 그는 더 이상 낮은 힘에 속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육신과 자아와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써, 시련 앞에서 슬퍼하고, 고난 앞에서 괴로워하며, 영혼의 어두운 밤의 깊은 새벽들을 지날 적에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이제 어두움을 넘어선다. 비록 시련 앞에서 슬퍼할지언정, 그의 영혼은 그 슬픔으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고난 앞에서 괴로워할지언정 그의 영혼은 그 아픔으로 말미암아 더욱 하나님의 뜻을 열망하게 된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들이 그의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마침내, 그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적에, 평생에 걸쳐 이 힘의 주권의 전환을 기도하고 묵상해온 바,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죽음과 사망이 더 이상 그의 영혼을 감히 차지하지도 침범하지도 해하지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과 손잡고 함께하실 것이며, 그는 태어나서 처음 체험하는 깊은 평화와 기쁨 속에서 마침내 그 문을 건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승리"이다. 내면에서, 빛이 어두움을 영원히 이긴 것이다. 그리고 빛이 어두움을 영원히 통치하는 것이다. 낮은 것이 죽고, 높은 것이 "주권"을 거느리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죽고, 신성이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권좌에 오르시는 것이다. 이때에, 전환이 이루어진 자, 곧 영혼은, 이제 더 이상 어두움의 원리로 움직이지 아니하며, 빛의 원리, 곧 "사랑"으로 인하여 살고, 움직이게 된다. 사랑의 동역학이 그의 영혼을 지배한다. 이전에는 목표를 정복하고 달성하기 위함이었다면, 이후에는 오직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기뻐하시기를 바라는 순결한 "신부된 영혼"의 사랑이 그의 존재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두렵고 무서운 순간에서도, 그 두려움 한가운데에서도 그분을 믿고, 그분의 임재하심을 믿고, 그분의 역사하심을 믿으니, 마침내 내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그분께서 나를 끝내 버리지 않으실 것이요,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실 것임을, 돌아오셔서 가장 위대한 뜻을 이루실 것임을 온전히 믿게 되는 것이다. 영혼은 이제 어두움이 아닌 빛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빛으로 말미암아 살기 시작한다. 그 빛은 사랑이다. 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과의 사랑.
힘과 에너지는 다소 다르다. 힘은 곧 "역사를 이루는 지배력"이며, 이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내 안에서 이루시기 위함"이다. 권세는 곧 통치를 위한 것이다. 반면, 에너지는 "존재 자체"이다. 바로 영혼이 에너지이며, 에너지가 곧 영혼이다. 이 에너지는 실재적인 것이고, 체험되어지고 교감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감정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주로 상위 감정들 : 경외, 경이로움, 감동, 자유, 평화, 기쁨, 열망...... 등이 되되, 그 중에서 단 하나만을 정하라고 한다면 바로 "사랑"이 된다. 이 사랑은 세속적인 욕망으로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빛"이며, 이것은 곧 "신의 성품"으로서의 자비이다. 나를 완전히 넘어서는 "힘"이, 나를 "통치하고 다스리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통치 아래에서 내가 거듭나고, 변화하고, 물들어가며,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칭의란, 곧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사건"이며, 이것은 곧 "내 안에서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반드시 에고의 죽음을 통과해야만 한다. 에고는 자기 아닌 다른 존재에게 자기의 주권을 넘기는 짓은 곧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 불안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존재적인 불안을 건너가는 것, 이것이 죽음이며, 또한 이 존재적 불안을 넘어서 마침내 "정당하신 왕께서 내 안에서 권좌에 앉으사,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 곧 "존재 변환"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것"이다. 이때에,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은 단지 교리가 아니라 내 안의 영원한 생명(본질)이자 말씀(통치)이 된다. 중요한 것은 "힘 - 에너지의 정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두운 에너지는 낮은 힘과 정렬된다. 따라서 나의 의식과 마음이 낮은 차원의 힘, 곧 공포, 욕망 등에 지배당할 적에, 그 자체로 이미 나의 존재는 어두운 에너지에 "점령당한" 상태다. 이 상태에서는 "내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곧 타락이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된다. 반대로, 밝은 에너지는 높은 힘과 정렬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밝은 에너지는 곧 영혼이요, 영혼이 올바르게 깨어나고 높아지고 모습을 드러낼 적에, 그 안에서 높은 힘(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이 "내려오신다." 따라서, 나의 영혼이 올바르게 정렬되는 것은 곧 부활을 예비하는 결정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정렬되는 것은 오직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영혼이 정렬된다는 것은, 곧 "정화"를 의미하며, 이것은 단 하나, 곧 "1인칭 능동태"의 자의식 중심적인 존재의 구조가 완전히 깨지고, "신성한 수동태"의 순종 중심적인 존재의 구조로의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에고의 주권이 낮아지고, 내려놓고, 넘겨지는 것"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것이 곧 에고의 죽음을 의미한다. 에고가 낮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이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하여 나의 에고에 "의도된 고통"을 허락하신다. 이것이 곧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에게 왜 시련과 고난이 허락되는지"에 대한 비밀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 첫째, 이것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으로써 명백히 의도된 어두움이며, 결코 나와 내 영혼을 실제로 해치거나 다치게 할 수는 없다. 둘째, 어떠한 경우에도 내 영혼은 반드시 어두움 가운데에서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것이다. 즉, "시험"에서는 실제로 다치고 상하고 죽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그분의 품 안에서 마음껏 시험을 치르면 된다. 이 고통들이 찾아올 적에, 우리의 자세는 곧 "순종"이 첫번째이며, 이는 곧 "이것이 나를 벌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내 영혼을 영원히 살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을 믿고,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곧 "받아들임, 내맡김"이며, 이 어두움을 내멋대로 판단하고 정의하려 하지 않고, 통제하고 억압하려 하지 않은 채로, 그분의 때가 될 때까지 그저 이것과 손잡고 깊은 밤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주권의 전환"이며, 이것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로 귀결된다. 즉, 이 모든 과정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아니하며, 오직 그분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고 열망하고 바라는 것이다. 이 과정들은 지독히 고통스럽다. 이것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밤들을 통과하면서, 영혼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순결해지고, 밝아지고, 정결해지고, 고귀해지며, 의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그의 영혼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해질" 것이며,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거처 삼으셔서 그의 안에서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나의 의식을 "어떤 에너지 - 힘에 정렬시킬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더욱이 평상시가 아니라, 삶의 시련과 고난 앞에서 이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미 일은 일어났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내 힘으로는, 내 능력으로는 눈앞의 어두움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어두움 앞에서, 낮은 힘에 집착하여 어두운 에너지에 기만당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내 안의 밝은 에너지를 신뢰함으로써 높으신 힘께 전적으로 내맡길 것인가? 이것은 그저 한두 번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 개월, 수 년,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험난하고 지난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자의 길을 걷는 한 결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만이 기다릴 뿐이나, 후자의 길을 걷는 한,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성령께서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요, 나의 영혼을 끝까지 이 길을 걷도록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이끄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곧, "구원의 약속"이다.
내 안에서, 빛이 어두움을 다스리시는 것을 받아들여라.
나의 주권을 내려놓고, "높은 힘"께 전적으로 내맡겨라.
그 순간, 가장 위대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