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it : 광야의 고요

계시의 빛이 드러나다

by 생명의 언어

계시(啓示) : 1. 깨우쳐 보여줌. 2. 사람의 지혜로써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함.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계시에 대하여 서술한다. 언뜻 두 정의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다. "깨우친다"는 말 자체가, 인간의 지적 한계로는 알 수 없는 진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보여준다"는 것은 비전(vision)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직관적인 언어로써, 개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닌 체험적이고 실재적인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서 초월적, 내재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모든 종교와 영성에서의 신비주의적인 진리관의 본질이다. 진리는 그저 "배우는 것"이나 "학습하는 것"을 넘어서, "깨닫는 것"이 되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As above, So below)의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며,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며, 결국 이것이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본질이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는 진리를 깨닫는 유일한 통로이다. 사람의 노력으로는, 다시 말해 "수평적인 세계"에서는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다. 유한한 현상계의 차원에서는 우주 전체를 뒤져봐도 "진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사실(fact)만이 있을 뿐이다. 그저 본래 그러하도록 설정된 법칙과 원리들만을 겨우 밝혀낼 수 있을 뿐, 어찌하여 그 모든 정교하고 놀라운 구조들이 창세 이전부터 그리 되어지기로 설계되었는지, 그 위대한 비밀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수평선"에는 놀라운 것이 없다. 평등한 세계 안에서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현상계 내에서는, 인간과 인간 존재의 틀 안에서는...... 뭐라고 부르든 간에, 수평선 안에는 답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때, 한 존재의 의식과 영혼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의 전환을 맞이한다. 바로 수직선이다. 이때, 그는 깨닫는다. "영원"이란 수평적 개념이 아니요, 오직 수직적인 개념이라고. 그것은 선형적인 시간 구조 내에서의 우측 끝점의 무기한 연장 따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의 시간과 공간의 초월적 하나됨이, 의식의 "깊이"를 통하여 정렬되고 드러나매, 이를 통하여 수천 년의 시간과 공간을 아득히 초월하여, "현재" 안에서 영과 혼과 신성이 직접 교감하고 소통하는 것이라고. "초월"이란, 수평선의 세계 안에서 고정된 존재로서의 육신과 자아의 틀 안에서도 그 의식이 매 순간 "수직선"과 교감하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수평선을 버리고서 수직선으로 도피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는 육을 버리고 영만을 집착하는 영지주의적인 오류에 빠지고 만다. 수평선인 채로, 그 수평선 안에서 수직선이 드러나고 정렬함에 따라, "십자가"라는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다. 수평선은 우리의 삶이다. 인간 존재이다.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신성"이, 영원과 초월이 정렬되었을 때, 하나되었을 때, 그때에 십자가가 드러나며, 이것은 곧 "부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 점에서, 십자가는 단순히 종교적인 상징이 아니라, 원형적-영적 신화를 은유하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수직선으로 대표되는 영과, 수평선으로 대표되는 혼(또는 육)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 그 지점에서 "영혼의 완성"을 나타내는 영적 상징이다. 기독교적인 상징으로서, 십자가는 결국 신성이 영을 통하여 계시되는 것(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이것이 나의 영혼을 통하여 확장되고 실현되는 것(수평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때의 좌측은 직관이요, 우측은 공유/확장이다)을 의미한다. 이것은 칭의와 성화이며, '이미 이루어진 것'과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가야 할 것'이며, 죽음과 부활과 복음의 사명이다. 결국, 쉽게 말해서, "신을 사랑하여 신과 하나되는 것"과, "신과 하나됨으로써 신의 뜻이 이루어짐(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은자(HERMIT)의 상징은 그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은 자"가 아니다. 그는 세속을 버린 게 아니다. 육을 버리고 영만을 취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은자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든 등불은 비록 황금새벽회의 교의에 따라서 오컬트적 진리로써 치환되어 상징되었지만, 나는 이것을 본래의 의미, 곧 "내 안에서의 복음의 성취와 완성"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것은 계시이다. 그리고 계시는 말씀이며, 말씀은 곧 그리스도이시니, 결국 나의 영과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모습을 드러내시고, 부활하시며, 통치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부활전야의 카톨릭 전통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고하면서 구원의 희망의 불빛을 모든 신자들이 공유하는 의식으로써 상징된다. 이때, "빛"은 교회 전체를 통하여 계시되고 드러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모던 타로의 상징 하에서 이것은 오직 철저히 "개인의 영혼 안에서 내재적, 초월적으로 계시되어지는 것"으로 이해되며, 비록 그 신비주의적인 입장의 차이는 다를지언정, 결국 보편적 복음주의의 관점에서도 이 지점, 곧 "개인이 직접 하나님을 만날 것, 주님 앞에 홀로 마주설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회를 통한 보편 구원은 교리일 뿐이며, 믿음은 그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내 안에서 그 교리가 실재가 되고, 실재가 생명이 되며, 생명이 말씀이 되어 이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이 "완성"되고 구원받는 것으로써 귀결되어야만 한다. 결국, 교리가 내 안에서 역사가 되어야 한다. "진리"가 되어야 한다. 즉, 교회를 통한 보편 구원의 토대 위에서, 각 개인이 내면에서 주님을 직접 영접하는 "특수 구원"의 꽃이 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계시는 바로 이 단계의 절정의 순간이다. 따라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나, 정작 "절정의 순간"에서는 오직 하나님과 나, 철저히 홀로 마주서야만 하는 시험임을 자각해야 한다. 은자는 성을 위하여 속을 버린 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속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성의 위대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오히려 속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를 자처한 자다. 쉽게 말해서,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영의 진리를 깨닫고 성취하기 위하여, 세속의 삶에서의 시련과 고난을 스스로 자처하여 짊어지는 자, 라는 의미이다. 은자와 "은둔자"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메이저 9번은 명백히 전자의 의미와 언어로써 가리켜져야 한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 그의 의식과 영혼은 아직 집단성이라는 "안전장치" 안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그때의 그의 영혼은 아직 광야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아직 교회를 통해서 매일 주어지는 안정적인 영혼의 양식들이 있고, 지지 기반이 있고, 후원과 돌봄이 있다. 그러나 오직 광야의 밤 한가운데로 그의 영혼이 나아갔을 적에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이슬과 만나와 불기둥과 구름에만 철저히 의지하여 자신의 생존을 걸어야만 한다. 그때에, 그는 "공동체" 안에 머물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서매 그의 영이 마침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됨을, 그 영광의 순간을 목도한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디에 계시나이까"하고, 오직 그 기도만을 애타게 부르짖는 영을 발견하게 된다.


은자의 상징의 핵심은 결국 광야에서의 계시, 이다. '광야'는 공간적 축이며, '계시'는 시간적 축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식의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광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요, 그의 의식이 하나님께로 더욱 깊어졌을 적에, 지상의 선형적-수평적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초월적-수직적 시간이 강림하고 드러나는 것, 혹은 "하늘의 시간" 안에 의식이 머무르는 순간의 체험들을 광야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계시는 곧 광야를 통하여 그의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영혼 안에서 빛이 드러나는 것이 이루어지면, 상징은 더 이상 의식 안에서 정량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상징은 비틀리고 깨지고 재구성되면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이루게 된다. 광야를 공간에서 시간으로, 계시를 사건에서 공간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감추어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은자는 "계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은자는 산 정상에 홀로 선 외로운 영(Spirit)이다. 그의 정신은 이제 "집단성과의 동일시"의 틀 안에 갇힌 군중, 대중, 집단의 부품으로서의 개체의식의 에고들과는 더 이상 평등하게 소통할 수도 교류할 수도 없다. 이것은 우월감도 아니고 교만도 아니다. 오히려 슬픔과 외로움과 공허함이다. 그는 여전히 인간이며, 따라서 이해받고 인정받기를 갈구하나, 이제 세상은 그를 "이방인"으로 취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 자는 무언가 우리와 다르다, 따라서 우리 안에 속할 수 없다, 집단성은 그를 이제 추방한다. 그의 영혼은 일상의 순간들 가운데에서 그것을 깊이 느낀다. 나와 같이 "하나님께로서 부르심을 받은" 영들이 분명히 이 세상에 있다.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 각자를 오직 철저히 홀로 하나님 앞에 세우신 것이 그분의 의지이심을, 영은 깨닫는다. 그리하여, "교회"는 영적으로는 모두가 형제이나, 육적으로는 각자의 영들이 철저히 홀로되게 됨을 깨닫는다. 참된 형제들은 육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되, 영적으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아주 찰나의 눈빛과 음성과 목소리외 제스처만으로도, 그의 목소리의 사소한 음의 높낮이와 떨림과 진동을 잠시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영혼이 "광야"에 들어섰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광야에 이미 진입한 형제들끼리는, 그 문을 완전히 건너서기 전까지는, 서로 "집단적으로" 교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을, 그것이 시험의 규칙임을, 성령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법도이심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광야로 진입하는 순간, 영혼에게는 은자의 시간이 펼쳐진다. 이른바 하나님의 시간이다. 세속의 시간은 수평적이고 선형적이고 정량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천상의 시간은 명백히 다르다. 그것은 곧 하루가 영원이며, 영원이 곧 하루이다. 시험을 깊이 통과하는 영혼은, 육의 시간으로는 고작 해야 두 달, 석 달 남짓 흘렀을 뿐인데도, 그 시간이 거의 3년에서 5년 정도는 지난 것처럼 느끼며, 깨어 있는 영혼의 한 시간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에고의 백 일보다도 더욱 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특별한 권세가 아니다.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영혼은 광야에서의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과 슬픔들을, 더욱 선명히 깨어서, 단 1초도 허투루 보내지 못한 채로, 그리 지나간다. 통과한다. 그는 철저히 혼자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남들처럼 자기 자신을 탓할 수도 없으며(스스로 열망한 길이기에), 또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없다(하나님과 그만큼 가까워졌기에). 어찌하랴, 그저 이 시험을 끝까지 통과하여 지나가는 것밖에는.


그는 이제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공간"은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든 간에, 그는 오직 구원만을 바라게 된다. 계시만을 찾게 된다. 머무르는 곳이 어디이든 간에 어디를 가든 간에, "나"는 이제 의미가 없어진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된 영혼"으로서만 머무르게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형식과 정해진 의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의 기도는 다 무용한 짓이기 때문이다. 무슨 행동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결국 그의 의식과 정신은 오로지 하나님께로 몰입되어 있다. 진리가, 구원이, 오직 거기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갈증과 갈망이 깊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묵상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셔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계시가 드러나는 것, 오직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만을 진실로 바라고 갈구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된다. 이윽고 그의 모든 숨결들이 그분께 대한 예배가 된다. 그의 삶 전체에서 "나"는 이제 없어진다. 그리고 오직 "갈망"만이 남는다. 영혼의 이끌림, 바로 그것. 이것이 광야이다.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시간"을 통과하는 영혼이다. 이것은 더 이상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른 영혼에게는, 다른 그 무엇도 결국 허망해진다. 이전에 그렇게 나를 충만하게 하였던 교리도, 설교도, 성경 말씀도, 내 안의 이 깊은 "갈증"에 생명의 물이 되어주지 못한다. 이전에 그렇게나 선명하였던 신비 체험들마저도 이젠 더 이상 무용해진다. 그것은 결국 지나간 것일 뿐이다. 그 누구를 만나도 그 누구에게도 이것의 답이 주어져 있지 않음을 그는 직감하여 깨닫는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정답을 안다고 믿으며 간섭하고 참견하고 가르치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들 앞에서, 그는 결국 침묵하게 된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들의 것으로는, 육적인 것으로는, 언어 지식 관념으로서는, 그 실태에 대해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저 입을 다무는 수밖에. 그의 정신은 철저히 홀로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는 방식이다. 에고는 본래 두려움, 공포, 불안에서 뿌리를 둔 것이기에, 이 어두움은 곧 "자기 존재(I AM)"를 버리고서 "불특정 다수의 집단성"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자기 안의 어두움을 망각하고 부정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에고로서의 의식은 "욕망과 공포를 끊임없이 외부에 투사하는", 소위 "지향적 의식"임을, 어느 순간 그는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단계에 이르러서 그는 이해하게 된다 : 육적으로는 비록 이 시험의 순간들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고 아플지라도,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이리도 잔인하고 매정한 시험을 지금까지도 계속 겪게 하셔야 하는지를...... 외부로 끊임없이 투사되는 그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잘라버리지 않으면, 완전히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으면, 구원은 결국 요원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영혼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속에서의 그 누구도 겪지 못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진실로 함께할 것이라 믿었던 형제들에게 배신당하며, 또는 진실로 믿었던 이들에게 내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내가 정말로 갈망하고 또 바랐던 일들이 좌절되고, 무너지고, 실패하며, 다시 딛고 일어나서 겨우 하나 붙잡은 희망마저도 그토록 잔인하게 한순간에 무너지고 몰락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 과정은 실로 처참하다. 지독하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그것은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을, 광야의 시간을 온전히 통과한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의 영혼의 절대적인 성장과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에고의 죄성적 의식 구조는 깨지고, 박살나고, 무너지고,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의 안에서 영과 영혼과 "자녀"로서의 의식이 새로이 자리잡고,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광야에서의 시간은 비록 영원히 지나가지 않을 듯하고, 영원히 변화하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조금씩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열매는 반드시 맺히게 되며, 때가 되면 다음 단계의 길은 열리게 된다.




은자의 원형적 상징으로서의 인물은 모세이다. 모세는 광야의 시간을 통과해낸 영의 원형이다. 그에게 내려진 시험은 그토록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가운데에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시다 : 첫째, 그분께서는 시험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미리 알려주지 않으신다. 언제 이루어질지,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에고에게 가장 중대한 앎의 욕망과 공포일진대, 이것만은 아무리 아들을 사랑하시더라도 전혀 알려주지 않으신다. 이 시험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끝날지, 끝난 이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는 "허락되지 않는다." 둘째, 그 시험의 과정에서, 외적인/육적인 것들은 단 하나도 성취도 결실도 허락되지 않는다. 유명세를 얻는 것, 뜻이 이루어지는 것, 결과와 결실과 수확을 얻는 것, 진실한 인연과 기회를 얻는 것, 무엇 하나도 허락되지 않는다. 잠시 허락되었을지언정 곧 다시 거두어가신다. 그것이 시험이시다. 이 과정에서, 영혼은 오직 육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영적인 것, 곧 "하나님 자체"만을 바라도록 훈련받는다. 그 훈련의 과정은 지독하리만큼, 잔인하리만큼 철저하다. 완벽한 사랑이시다. 셋째, 그러나 그 시험의 과정에서 그 영혼이 올바르게 하나님과 정렬한 순간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을 영혼 안에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빌 때마다 채워주실 것이다. 내면의 충만함과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담대함을 가득 채우셔서, 그의 영혼이 아무리 지쳐서 이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더라도, 마침내 다시 일어나고 부활하여 여정을 계속 이어가도록, 보이지 않는 것들은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성장의 결실들은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때가 되면 무수히 많이 얻게 될 것이다. 즉, "보이는 것들은 허락하지 않으시되, 보이지 않는 열매들은 풍족히 허락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네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분께서 보시기에 시험을 완전히 통과하였다고 여겨질 때", 그때가 오면 마침내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계시는 보이는 육의 차원에서도 완성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보이는 차원에서도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시고, 완성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구원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이, 오직 성령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에서, 이 시험을 통과하여 지나가는 것에만 전적으로 몰입하면 된다. 이것이 은자로서의 삶이다. 은자에게, 삶은 곧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삶은 곧 시험이다. 그 시험의 영원하고 완전한 졸업은 곧 죽음이다. 따라서, 은자에게, 은자로서 평생을 기도하고 묵상하며 살아온 자에게, 죽음은 "약속된 평화"이다. 살아서의 시험의 성적에 따라서 "빛"이 완전히 같지는 않을지언정, 하나님은 "성적"이 아닌 그 시험을 지나온 과정에서의 "마음가짐"만을 보실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의지를 잃지 아니하고 그 졸업을 맞이한 모든 영혼들에게 하늘에서 예비된 은총, 곧 "그분 안에서의 영원히 거함"의 안식을 약속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광야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 첫째는,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영의 구원의 역사"로서의 광야이다. 이것은 칭의이며, 나의 영이 완전한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격"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시험이며, 한 번 이 시험을 통과한 자는 영원히 이전과 같이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 시험은 오직 철저히 홀로된 가운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특별히 이 시험을 통과하는 모든 영혼의 성장과 변화와 완성은 오직 철저히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에서만 이루어진다. 이 시험이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두번째의 광야는, "평생에 걸쳐서 성화해가는 삶 자체"이다. 나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며, 따라서 내 삶의 각 주기와 단계마다 무엇을 이루실지, 어떻게 이루실지, 그리고 때가 되면 무엇을 정리하고 떠나보낼지 등,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뜻하고 이루신다. 이때, 광야는 "이미 구원받은 자가, 평생에 걸쳐서 자신의 예비된 약속을 믿고 그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된다. 두번째의 광야는 삶의 현장이다. 삶에서, 일상에서, 각 단계마다, 각 주기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과정이다. 때가 되면 인연들은 만나고 헤어질 것이며, 때가 되면 일들은 이루어지고 또한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두번째의 광야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이 이루어질(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때(시간)"이다. 그러므로 뜻과 때는 같다. 전자보다 중요한 것은 후자로서의 광야이다. 왜냐하면, 영의 차원의 진리는 오직 육의 차원에서도 드러나고 실현되고 완성됨으로써 비로소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열매는 내 삶 자체이다.


은자로서, 이리 나아가는 과정은 외롭다. 쓸쓸하다. 허망하다. 막막하다. 고통스럽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며, 그 무엇에게도 의존할 수가 없다. 오직 철저히, 잔인하리만치 철저히,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된다. "그리스도 중심성"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된다. 그러나 그리 살아가는 과정에서, 육적으로는 비록 풍족하고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만큼은 필요한 때에 채워주실 것이며, 그와 반대로 영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매일마다 사랑하는 자녀의 영혼 안에 생명의 빛을 넘치도록 가득 부어주사, 삶의 매 순간마다, 매 단계마다, 그분과의 동행의 은밀하고도 고귀한 충만함으로 환하게 빛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것이야말로 은자의 길을 걷는 모든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한 음성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세 이전부터 계신 절대자께서, "그"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거처 삼으셔서 매 순간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언제나, 영원히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신다는 것. 시간의 중결의 너머까지도, 이 약속이 유효하다는 것.


이 길을 걸을 자, 누구인가? 자격 조건은 오직 하나, "열망"이다.

이 길을 걷기를, 은자의 길을 걷기를, 그리하여 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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