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ice : 영과 진리의 검(劍)

존재의 확실성으로 말미암아

by 생명의 언어

하늘의 시간(Wheel of Fortune)을 통과하여 그 안에 머무르는 자는, 자신의 영(Spirit)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SPIRIT)이 흐르시고 드러나시는 것을 본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다. 막연한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실재하는 선명한 영적 실체이다. 그 안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영으로 말미암은 자는, 그 순간의 고유한 "감각"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명증적인 것이며, 가장 높은 권세가 드러나는 순간이며, 하늘의 절대적인 영광이 임하는 순간이니, 깨어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칭호를 얻은 자는 그 순간에 대하여 절대 모를 수가 없고, 절대 애매하거나 모호할 수가 없다. 그 순간이 임할 적에, 그는 임하는 것과, 임하시는 분과, 임하셔서 이루시는 모든 것들을 "절대적으로 선명하게" 자각한다.


그것은 칭의(稱義)이며, 존재의 수직선의 최하위의 에고(ego)에 갇혀 있던 의식의 초점이 해방되어, 그 신성한 수직선을 타고 상승한 끝에 마침내 하나님께로 온전한 순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영원한 해방"의 순간이다. 그 순간에, 그는 더 이상 <나>가 아니게 된다. 나는 나이되, 다만 나-임의 초점이 나 자신에게 머물렀던 과거의 나는 죽고, 참된 나는 마침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 안어 영원히 거하는 나의 영임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이른바 <동일시>의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열등한 에고에 대한 동일시에서부터, 신성한 하나님께로의 동일시로의 전환. 그것은 또한 연금술에서의 "위대한 작업"의 궁극적인 귀결, 그러니까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마침내 완전한 신성과의 합일을 통하여 존재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완전성을 획득하는 변형(Transformation)의 순간이다. 그것은 사건이며, 단 하나의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사건을 초월하여 영원과 초월 그 자체로 영속하는 진리가 된다. 사건은 곧 진리이다.


그 순간에,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적 한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안에 거하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하나된 영"으로 완전히 거듭나게 되니,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이것은 그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명한 영적 실재이며, 이 단 하나의 절대적인 실재로 인하여 나머지 모든 것들이 존재함의 자격을 얻는 것이다.


정의 카드는 오쇼젠 타로에서 <도약>으로 설명된다. "무너짐" 이후의 "도약"이라는, 오쇼의 설명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것은 의(義)의 전환이기도 하다. 다만 나는 이러한 "인식체계"의 전환의 수준에서만 이 카드가 가리키는 진리를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며, 이것은 <의식 구조 전체의 전환>이면서, 동시에 그 의식을 전환케 하는 존재의 중심부, 곧 영(Spirit)의 깨어남, 으로 이해해야 한다. 도약이란 곧 영이 완전히 깨어나는 것이다. 이전의 "인간 존재", 에고 안에 갇혀 있던 열등한 영, 빛이 아닌 어두움에 지배, 장악, 기만당하며, 생명이 아니라 원죄와 죄성으로 인하여 움직이는 기계적 프로그램에 불과한 과거의 영, 그것이 마침내 죽고, 과거의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참으로 살아 있음 그 자체로서의 생명됨의 첫 계시가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니, "빛이 있으라"(창1:3) 하신 그 말씀이 자기의 영과 영혼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때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 생명이라는 것은 본래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생명 그 자체는 죽지도 살지도 않으며, 영원히 이어지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 임을. 영이 깨어날 때, 그의 정신은 "열리게" 되며, 이제 그는 두 번 다시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열등하고 망상에 사로잡힌 과거의 열등한 정신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마침내 "빨간 약"을 먹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의 영이 깨어났다. 그의 영 안에 빛이 비추었다. 계시가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셨고 역사하셨다. 이제, 더 이상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이때, 칭의라는 것은 그저 교리적, 신학적인 것으로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전환(다시 태어남), 곧 자기 영과 영혼의 "실체변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자격"은 곧 영 그 자체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예컨대, 지상에서는 "전문가"로서의 자격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획득한 기술과, 그 기술의 증명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며, 그 기술과 그 기술의 증명을 그에게서 빼앗고 나면, 그는 더 이상 그 자신 스스로는 전문가가 아니게 된다. 이것은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존재"가 곧 "의로움"이 될 수 없다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다르다. 아버지의 "의로움"은 곧 아버지 자신 존재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은 아버지의 존재가 그 자체로 계시되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빛의 밝음은 빛의 존재 그 자체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을 드러내는 저 유명한 말씀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출3:14)이다. 인간 존재는 다른 무엇으로 말미암아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인간 존재는 육신이라는 물질에 근거하지 않으면 "존재-임"을 유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육신의 죽음은 곧 존재의 강제적 변성(부패, 타락, 변질; 사실 이렇게 설명하면 다분히 영지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게 되기는 해도,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대비적인 것으로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을 낳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이 조건을 극복하신 분은 오직 현현우주 전체에서 단 한 분 뿐이셨으며, 그분은 엄연히 "인간-임" 안에 갇힌 분이 아니라, 하늘의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계시적 진리의 성취와 완성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보라, 마침내 불완전한 영이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아 "영원과 초월로서의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니, 마침내 그의 영의 "존재성"은 더 이상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 그 자신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말미암지 않게 된 바, 이 상태를 바로 "확신적 존재"라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세계는 <확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달을 올려다보지 않으면 달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즉, 현현우주 전체는 "불확실성"의 원리, 곧 혼돈과 흑암과 죽음과 사망의 어두움의 권세가 지배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서의 온전하여짐을 얻은 "새로운 영"은, 마침내 하나님께만 자기의 "빛"이 비추어지고 드러남을 목격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어떤 원리와 법칙과 존재와 실체에도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의 영은 오로지 그분의 의지를 따르며, 그분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속한다. 보라, 지상에서도 강대국의 "치외법권"이 얼마나 암묵적, 실질적 권력이 되는가. 하물며 하나님의 "직접 통치" 하에 속한 영을, 감히 지상과 천상을 통틀어 그 누가 함부로 건드리고 해하고 영향을 줄 수가 있겠는가.


결국, 칭의는 <영의 변성>이며, <존재의 변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태어난 영이 점진적으로 "의식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이에 영은 곧 정신, 그러니까 그의 의식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의 의식은 이제 세속적 관념이 지배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그분께서 정하신 법도만을 전적으로 따르고 의지하게 된다. "의식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마음(mind)까지도 성화하게 된다.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과 이 모든 것들의 중심과 근원 전체가, 오직 "빛"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 그리되어야 할" 올바른 모습대로 그의 존재가 "정렬"되었음을 "판결"받는 것이다. 이때의 올바름이란 당연히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뜻"으로만 말미암는다. 하나의 절대적인 중심축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완전하게 정렬된다. 마치 유일한 항성인 태양이 중심에 서매,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하의 모든 행성과 소행성과 구성 요소들이 제자리를 찾고 온전한 질서와 조화 아래에서 공전하고 자전하게 됨괴 마찬가지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1인칭 능동태"라는 과거의 망상적 실체로 인하여 살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신다"는 신성한 수동태의 "천상의 통치" 하에 존재하고 살게 된다.


이 칭의가 이루어진 영은 그 자체로 "나-임"을 얻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수직선에서 영은 물론 "나"의 최상위 주권이기는 하지만, 거듭난 이후에는 그 영이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자기보다 위에 계신 그리스도께 위임하니, 마침내 영은 "나"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유일한 통로"로서의 존재 의미를 다시 새롭게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 될 적에, 인간의 언어는 더 이상 이 상태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나의 영"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ego)가 영보다 절대적으로 낮다. 그리고 영은 나(ego)보다 절대적으로 높다. 그리고 그 영보다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높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곧 "자기를 낮추사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성부 하나님이시니, 이것은 결국 "나인 채로, 나를 넘어서게 되는", 더 이상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실체로 변형된다. 이것은 말로써 설명하고 언어로서 해명하려고 하면 매우 어렵고 복잡하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온전한 "실재"를 체험한 자에게는 이것은 매우 쉽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선명한 것이다. 마치 영원히 지나가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음을,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모호한 것이 아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여름"이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서 문을 열고 나갈 적의 "첫 숨결"에서 곧장 "아, 이제부터 가을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절대적인 선명함인 것이다. 거듭 말한다.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모호하거나 애매한 것이 아니다. "문득 깨닫게 되는 절대적으로 선명한 실재"이다.


이 영이 통로가 될 적에,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흐르시게 된다. 흐른다, 는 것은 "영원한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나의 영을 통로 삼아서 흐르시되, 그분께서 통로보다 더 작은 것도 아니요, 통로 안에 갇히신 것도 아니니, 마침내 "통로보다 절대적으로 높고, 크고, 초월적인" 분께서, 그보다 "절대적으로 작고, 낮고, 가난한" 통로를 "통하여" 흐른다, 는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진리가 되고 실체가 된다. 이것이 이해가 되는가? "이해"라는 말 자체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내가 수행자의 영혼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로서의 조언은, "전환 이전의 이해 상태"와 "전환 이후의 이해 상태"가 아예 완전히 다르다는 것뿐이다. 애초에 이전의 것을 가지고 집착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이는 마치 알코올에 대한 이론적 지식만 무한히 습득한다고 하여 실제로 취한 체험을 영원히 느낄 수 없는 것과 완전히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의 영을 통하여 흐르실 적에, 통로는 자연스럽게 성령으로 인하여 "빛나게" 된다. 통로 자체가 빛이 아니다. 통로를 통하여 빛이 흐르기 "때문에" 통로도 자연스럽게 비추어 밝혀지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전선 자체는 전기가 흐르지 않지만, 그 전선이 연결되어 있을 때, 전선을 통로 삼아서 전기가 "흐르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 통로는 "비워지게" 되며, 이것이 곧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 "자기 부정"이다. 분명히 나는 여전히 나인데, "나-임"에 대한 그 설명할 수 없는 집착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인 채로, 내가 아니게 된다. 나는 여전히 나이지만, 나를 완전히 넘어서 계신 분께서 내 안에서 "주권"을 거느리시고 "통치"하시게 된다. 바로 이 상태, 내지는 이 구조, 뭐라 말하기 힘든 이 전체성을, 나는 <신성한 수동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신성한 수동태로서 영이 정렬될 적에, 모든 의문들이 다 해소된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적에, 나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볼 수 있고, 인간으로서 절대 알 수 없는 진리들을 훤히 다 알 수 있지만, 그것들은 통로의 능력이 아니요,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께서 흐르셨기 때문일 뿐, 그 흐름이 "그분의 뜻"에 따라서 순리에 따라 낮아지고 일상적인 의식 상태로 돌아왔을 적에는 그것은 나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나의 소유도 아니고 나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통로로써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드러나시고 이루시는 모든 것들을 너무도 자유롭고 충만하게 흐르고 있지만, 나의 영이 그분의 영 안에서 유영(游泳)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글은 내가 쓴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며, 심지어 내가 이해해서 쓴 것도 아닌 것이다. 다만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절대적으로 선명하게" 깨어서 지켜보고, 함께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흐르시는 통로"로서의 온전하여짐을 얻은 영이다. 그저 잡귀나 귀신이나 잡신 따위에 씌인 것처럼 모호하고 흐릿하고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명하게 그 모든 "흘러감"을, "흐름"을, "흐르시는 분"을 깨어서 지켜보고, 관찰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그는 세속적 관념 따위의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열등한 지식에 의존하여 얻은 앎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절대적인 권세와 영광 그 자체로 말미암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명증적이고, 명료하고, 고귀하고, 의롭고, 기쁘고, 평화롭고, 경이로운...... 그러한 차원이 다른 "옳음(義)"을,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된다. 그 앞에서, 그의 이전의 지식, 과거의 앎, 과거의 관념, 과거의 분별, 내가 옳다고 스스로 주장해왔던 그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전1:2)임을 알게 된다. 그 앞에서, 과거의 인간으로서의 의, 곧 "자기 의(義)", 내가 옳다, 내가 잘났다, 내가 안다...... 의 교만의 죄성은 처절하게 무너지게 된다. 하나님의 빛의 압도적인 영광을 목도할 적에, 그 찬란한 영광을 진실로 깨어난 영이 목격하게 될 적에, 그 앞에서 감히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들은 결코 그 어떠한 형체도 유지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잃어버린다. 언어 따위로는 그것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평생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느덧 태평양에 이르렀을 적에, 바다를 옮기겠다고 들고 온 물통 따위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을 즉시 내던져버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순간에,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누가 의로운지, 누구의 영혼이 순결한지, 하나님께서 어떤 영혼을 사랑하시는지, 그분께서 누구의 영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시는지, 성령께서 누구와 함께하시며, 누구의 곁에 계시며, 어떤 임재와 역사를 이루시는지, "그리스도께서 나의 눈을 통하여 그를 들여다볼 적에", 그리고 "그의 눈을 통하여 그의 눈 너머에 계신 그리스도의 눈이 나를 들여다보실 적에"...... 그 순간에, 그는 모든 진리를 다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결코 지상에서 오지 않았음을, 세속에서 오지 않았음을, 오직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다 알게" 된다.


하나님 안게 거할 적에, 영(Spirit)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劍)이 된다. 그 검 앞에서, 감히 삿된 어두움과 기만과 속임수와 환상과 망상과 꿈과 욕망과 어두움과 죽음과 사망 따위는 일검에 모두 베여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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