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진리로 삶이 다스려지다
운명과 운에 대한 오해가 있다. 운명이란 선형적-수평적 시간선 상에서 좌측 시작점부터 우측 끝점까지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건과 과정과 결과들이 이미 정해져 있다, 는 개념이다. 그러나 운(Fortune)이란 사건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차라리 "운세"나 "운의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드러내는 언어다. 수레바퀴 또한 "일정한 법칙과 원리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통치되는 것"을 의미하며, "법의 수레바퀴"라든가, 혹은 "에제키엘의 환시"에서도 동일한 원형상징으로서의 "바퀴"가 등장한다. 만약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이미 "창조"가 아니다. 창조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곧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 안에서 나타나고 실현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결코 기계적이고 형식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원리/법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존재의 수직선"의 신성한 의식 구조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하늘의 작품"이다(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공산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다). 따라서 운명론을 믿는다면, 이것은 곧 "과정을 생략하고 목적만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낳으며, 이것은 곧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모든 과정들을 허무하고 공허한 것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속된 말로, 사람이 그 본성상 "효율"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 바, 이것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이고 계산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을 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뭐하러 살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태어나자마자 자살하는 인간은 없다. 또 그렇게 하기에는 두려움, 공포, 불안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운명론이라는 것은 "통제, 억압"이라는 어두움에 지배당한 행동 원리에 속는 상태에서의 에고의 의식 구조가 만들어낸 망상적 실체이다. 즉, 자기 자신과, 타자와, 세계의 모든 존재, 현상, 사건들이 "계획된 완전한 질서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분별이 운명론적 세계관을 낳은 것이며, 이 통제/억압은 곧 "통제되지 않은 것은 위험하다"는 두려움, 공포, 불안에서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철학은 무의미한 헛소리라는 오쇼의 말에 나는 적극 공감한다. 철학자들은 "표면적인 의식"만을 다루느라, 그 의식이 드러나게 하는 "감추어진" 구조와 그 심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지하다. 절대 다수의 철학자들은 의식과 영혼의 현상학적, 해석학적 탐구라는 영적 과제에 대해서 무방비하다. 그들은 결국 언어, 지식, 관념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형적-수평적 시공간적 세계관"이라는 것 자체가, 곧 빛이 아닌 어두움에 의하여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의식 구조와 그 작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운명의 실체다. 운명이란 "신의 뜻"이 아니다. 운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운명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탄의 뜻"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정신과 의식과 의지(will)를 "어두움(부정, 회의, 의심, 거부 등)에 지배, 통제, 억압당하게 만드는" 것이 운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99.9% 이상의 개체의식(에고)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지배하는데 성공하게 만들었다. 집단성에 대한 동일시 안에 갇힌 결과, 영적 성장의 과정을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의 영혼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은 그들의 성장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어두움이 돌고 도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이요 숙명이요 하늘의 뜻인 줄로만 착각하면서, 거기서부터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로부터 조금이라도 저항하고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하여 종교를 갖지만, 유감스럽게도 종교에 관한 한, 오쇼의 입장의 상당수를 나는 계승한다. 종교 역시도 유감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각 사람들의 영과 영혼과 의식을 어두움으로부터 실질적으로 해방시키고 참된 자유를 되찾게 만드는데 별로 썩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나마도 나는 집단성의 힘을 이용하여 영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계승하고 체화하게 하는데 있어서 종교가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고 믿는 것이 오쇼와의 입장의 차이이기는 하겠으되, 이런 건 다 무의미한 말장난일 뿐이다. 결국, 종교로는 본질을 전환케 하지 못한다. 인간 존재를 운명론과 숙명론에서 자유케 하지 못한다.
인간이 운명론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곧 "결정되어 있다"는 것에서 기인하며, 이것은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즉, 반드시 일어나기로 결정된 사건, 현상들에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의미"가 그 자체로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앞에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불행한 일의 의미는 불행한 것으로 고정되어 변화하지 못한다. 소위 "성공하지 못하는 시기"에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봤자,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게끔 정해져 있는 그 시기의 삶의 의미"를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운명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운"에 대해서는, 사람은 또 다른 관점에서의 부정적인 인식을 공유한다.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이 다 운이다"라는 것으로써, 불확실성의 논리에 지배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과관계의 법칙에 따라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는 1인칭 능동태로서 살아가는 바, "내가 내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열심히 움직인 만큼 비례하여 결과가 있다"고 믿는데, "운"이라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1인칭 능동태"적 사고를 부정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경우,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의 결정적 요인은 운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 시기에 흐름이 따르지 않는다면 노력에 비해 보잘것없는 결과를 얻으며, 사람이 쏟을 수 있는 에너지와 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의 인생은 그대로 전성기를 놓쳐버린 채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노력을 기울였더라도 그 시기에 흐름이 적절히 맞아 떨어진 사람은 노력 대비 훨씬 큰 결실들을 비교적 쉽게 얻어내며, 그는 인생의 절정기를 성공적으로 보낼 것이다. 이때,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오직 "자기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서 이루어졌다"고 믿게 된다. 그것이 1인칭 능동태라는 인간의 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운과 운명에 관한 인간의 부정적인 인식과 분별의 한계이다. 즉, 운명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운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음으로 말미암아, 양자 모두에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박탈당하는" 상실과 불안과 고통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카드의 상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운명(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음)과 운(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음)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또한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두움과 빛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소위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한,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두움의 반복된 구조"이다. 각 종교나 영성 전통들에서 이것을 가리키는 이름은 제각기 다른데, 원죄나 죄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업이나 까르마라고 하기도 한다. 뭐라 부르든 이것은 곧 집단 무의식적인 어두움이 각 개체의식을 지배, 장악하며, 각 개체의식마다의 "특정한 패턴과 원리와 구조"대로 어두움에 지배당하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가장 낮은 힘으로서의 운명이다. 이때의 운명은 사실상 "노예의식"이다. 무방비한 채로 어두움에 속수무책으로 지배, 장악, 기만당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단계의 운명을 "하늘의 뜻"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파악하기 위하여 점술과 역학에 매달리지만,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내 안의 두려움, 공포, 불안이 곧 어두움에 속게 만들며, 어두움이 내 삶을 지배, 장악, 기만한 결과, 어두움의 윈과율이 작용하여 삶의 고통과 괴로움이 끊임없이 돌고 돌 뿐이다. 이 지점에 관한 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명심해야 한다. 삶에서 신앙을 "외부적 사건과 결과"와 연결짓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오류이다. 내 신앙이 깊고 올바르다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외부적인 축복과 은혜를 주실 것이고(소위 일이 잘 풀리게 해주실 것이고), 반대로 내 삶에서 불행한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내 "정성"이 모자라서 그런 것, 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외부적인 요소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하나님과의 깊고 충만한 교제와 교감과 연합과 동행을 경험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의 시작점은, "외부적 사건과 현상들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 안의 두려움, 공포, 불안이 외부적 사건/현상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틀린 것으로 나누게 한 후, 전자는 소유/집착하고, 후자는 제거/억압하려고 드는 것, 이것이 의식의 최하위 단계, 곧 외적인 것(육적인 것)과 자기를 동일시한 열등한 하위 의식의 표상이다. 물론, 외적인 결실과 성취는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중요하며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의 결실이, 곧 보이는 차원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어야 하지,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제쳐놓고서는 보이는 것(현상)에만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그저 자기 안의 공포와 욕망을 하나님에게 투사하고 뒤집어 씌우는 짓에 불과할 뿐,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기복신앙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에 관한 한 매우 단호하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하더라도 그에게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은 줄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주어질 수 없다. 기복신앙은 결코 "신앙"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축복은, "복을 받기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바라고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명심하라. 운명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 운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 인간이 만들어낸 점술과 역학이 읽을 수 있는 미래의 길흉화복 등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인류 집단의 거대한 무의식적인 어두움이며, 그 거대한 두려움, 공포, 불안의 에너지가 각 개체의식들을 특정한 방식대로 지배, 장악, 기만하는 원리일 뿐이다. 그것을 죄, 업, 까르마, 뭐라 부르든 간에, 결국 그 어두움에 기만당하는 것 자체가, 나의 의식이 빛(하나님)이 아닌 어두움(죄)을 더 우선시한다는 증거이다.
두번째는 바로 "에너지의 흐름"으로서의 운명이다. 이건 차라리 "운(Fortune)"이라고 불러야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쉽다. 요즈음 대다수의 사람들이 "끌어당김의 법칙"이니, "시크릿"이니, "트랜서핑의 원리"니, 소위 "내 안의 긍정적인 생각(에너지)이 외부세계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 자체는 별로 놀라운 발견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양 오컬트 및 신비주의 세계관의 대원칙이었고, 마법(Magic)이라 부르는 오컬트 영역 고유의 기술이자 능력이었다. 다만 이것을 상업적인 아이디어가 뛰어난 몇몇 사람들이 용어만 현대적으로 바꾼 후에 효율적으로 팔아먹었을 뿐이다. 그러나 묻겠다 : 이미 자기 자신의 의식 구조 자체가 어두움에 지배, 장악, 기만당한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 아무리 끌어당겨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즉, 자기 발에 이미 수천 톤짜리 쇠사슬이 묶여 있고, 자기 온 몸이 더러운 오물이 묻어서 지저분한 상태에서, 아무리 자기 힘으로 자유를 얻고 깨끗하게 정화되는 상상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냉정한 영적 현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이 헬스장에 가서 무작정 운동을 시작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건강해질 수 없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집단성이라는 것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의식과 정신을 다루고 통제하는 연습과 훈련은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주제에, 그저 책 한두 권 읽고 한두 달 정도 열심히 "상상"하면 곧바로 내 외부현실이 바뀔 거라고 믿는다. 참으로 어리석다. 의식과 정신은 나의 영적인 몸이다. 그리고 육적인 몸을 바꾸는데도 그토록 고통스러운 트레이닝 과정이 전제되는 바, 명상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보이지 않는 나의 정신과 의식을 다루고 훈련하는 연습은 몇 배, 몇십 배나 더 어렵다. 본질은, "표면적인 현상"으로서의 마음(mind)을 아무리 집착해봤자 무용하며, 그 본질적인 "구조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아이콘을 아무리 삭제해봤자, 프로그램 자체를 제거하지 않는 한, 눈속임과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방청소를 할 적에, 지저분한 먼지를 카펫이나 침대 밑으로 다 쓸어넣어서 감추어봤자, 지저분한 것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참으로 어리석은 짓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방을 정리할 적에, 필요없는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고 방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저장된 물건들의 위치만 바꾸고 겉으로 보기에 깔끔해 보이도록 정리해봤자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 그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간단한 이치를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내면의 차원에서는 이행하지 못하는 것인가. "본질"이 달라져야 한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바로 "에너지"이다. 나의 에너지는 나의 영혼(Soul)이다. 영혼 자체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흐르는 것이며, 고유한 빛과 향과 질감을 지닌 살아 있는 생동하는 것이다. 이 에너지로서의 영혼 자체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활성화되어 있고, 억압되어 있고, 빛보다는 어두움에 물들고 지배당하여 있으며, 에너지의 수준 자체도 낮고, 열등하고, 지저분하다. 이것은 평상시의 내가 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마음은 현상이다. 평상시에 그저 부질없고 허망한 육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갖는 바, 어찌하여 그 본질인 영혼이 깨끗하고 순수하고 맑고 깊을 수가 있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이 아무리 어둡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항상 신을 사랑하고, 신의 뜻을 열망하며, 기도하고 묵상하기를 즐겨하며,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신의 뜻을 믿고 따르며,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음성들에 귀를 기울이고, 오직 신과 신성과 진리만을 관심사에 두는 자라면, 그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너무도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건대, 왕도 따위는 없다. 끌어당김이든 줄다리기든 간에, 그런 "법칙과 원리와 기술" 따위로 잠시 간의 결과를 요행껏 얻어낼지언정, 보이지 않는 에너지(영혼)가 곧 보이는 현상(마음, 외부세계)을 창조하는 바, 자기의 영혼이 순결하고 깊고 진실하지 않다면 다른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이며, 자기 영혼의 어두움은 곧 자기 삶의 사건과 현상들로 인하여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당장의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속지 않고 좌절하지 아니하며 오직 자기 영혼의 성장에만 관심을 두고 부지런히 나아가는 자라면, 비록 지금은 남들보다 더 뒤처지고 늦어지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그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언젠가 그 "정화"의 시험이 끝나는 날, 그는 어마어마한 성취와 결실을 자연스럽게 약속받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길인지는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세번째는, 영의 "의지"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에고(ego)에게는 자유 의지 따위가 없다. 에고는 그저 시스템이고 기계고 컴퓨터고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곧 사전에 설계된 대로 움직이며, 일정한 구조와 체계 하에 입력값이 있으면 출력값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자유의지도 창조성도 가능성도 아무것도 없다. 어두움에 지배당한 의식 구조(자아)와, 그 구조의 작동(마음)이 돌고 돌 뿐이다. 이것이 윤회이다. 윤회는 어두움의 반복이다, 죄성의 반복이다. 죄가 돌고 돌아서, 원죄라는 어두움의 중심축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끔, 내 영과 영혼을 강력하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사망의 권세 하에 내가 놓여 있는 것이다. 나를 다스리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어두움 따위라는 것이 부끄러울 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형제들은 이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아, 나의 무의식이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어두움을 더 우상 숭배하고 있구나. 그 사실에 뼈저리게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꿈에서도 오직 아버지만을 바라고 또 바라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하지 못한 채로, 즉 "더러운 구조 자체"는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고작해야 허황된 껍데기에 불과한 마음을 붙잡고서는 그것도 얼마 시도해보지도 않은 채로 지레 포기하고서는, 다시 어두움의 통치 아래로 돌아간다. "의지"라는 것은 영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은 에고보다 "높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마음을 움직인다고 느낀다. 나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감정을 느낀다고 그렇게 믿는다. 천만에. 그렇더라면 지상이 곧 천국이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시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문제가 아닌가. 이럴진대, 에고보다도 한참 더 높은 나의 "영(Spirit)"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은 나의 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외려, 영을 섬기는 시종 중의 하나가 바로 에고, 즉 "나"라고 부르는 그 개념 자체이다. 그때의 나는 개체의식이며, 이것은 영을 담는 그릇일 뿐, 영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주인은 곧 영이다. 그리고 그 영이 어두움에 지배당하며, 열등하고, 어리석고, 오만하고, 교만한 상태에 머무를 적에, 유감스럽게도 에고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의 삶은 끊임없이 불행해지고 또 불행해지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영이 깨어나고 변화하고 "다시 태어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앙의 목표이자, 유일한 "살 길", 구원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사,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모든 자녀들의 "영"을 죄로부터 영원히 구원케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영의 차원의 구원이 "에고의 어리석음"이라는 어두움에 억압당한 채로 제대로 그 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이는 그만큼 하나님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인간들의 죄가 깊기 때문이다. 내 삶은 내 맘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영이 "의지"(Will)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각자의 영의 의지는 운명 따위보다 더 위이다. 심지어 에너지로서의 영혼보다도 더 위이다. 그의 영이 결심한다면, 운명을 초월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 단계, 즉 영의 의지가 열리기 위해서는 보통의 노력 따위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때, 영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은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 영을 애초에 "내가 내 능력으로 바꾼다"는 인식 자체가, 이제 지겹도록 말해왔듯이, 1인칭 능동태적인 죄성에 속수무책으로 기만당하는 결과만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의 신성"이자, "성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셔서 내 영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외아들(로서의 하나님)"이시다. 더 쉽게 말해 "내 안의 신성"이다. 그 신성과의 인격적 교제와 만남과 하나됨을 가능케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의 현현이시다. 이것을 주의하라 : 나는 내 힘으로 나를 바꿀 수 없다. "나"라는 구조물 자체가 이미 죄에 철저하게 종속당해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걸레로 열심히 바닥을 닦아봤자, 슬프게도 노력할 수록 더욱 더러워지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내 마음을 내가 닦는다고 착각해봤자, 결국 끝에 가서는 더욱 기만당하고 또 농락당할 뿐이다. 한 영혼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그리도 평생을 어두움에 속고 살았는데,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그 어두움에 농락당하는 자기의 꼴을 보라, 얼마나 처참한가, 부끄럽지 않은가. 그러므로 마침내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교만의 죄성이 낮아지고, 회개하며, 내 안의 그리스도를 나의 영이 영접할 적에, 마침내 내 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사, 그분의 죽음과 함께 과거의 나도 이제 죽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나의 새로운 영도 부활하니, 그때의 영은 오직 그분 자신께서 십자가를 지신 결과로서의 죄 사함을 받은 "깨끗한 영"인 것이다. 이때, 그의 영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허락받으며, 매 순간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감하고, 어두움이 아닌 오직 빛을, 하나님의 법도만을 따르고 기뻐하고 열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육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오히려 신앙을 가진 대가로서 외부적인 시련과 고난이 더 찾아온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나를 잠시 고통스럽게 하시더라도 나의 영과 영혼을 완전히 거듭나고 정화하게 하셔서, 그 이후에 영원토록 생명의 빛 안에서 거하게끔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심을 알아야 한다. 아니,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과 하나된 자는 자연스럽게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된다.
결국,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의 개체의식은 에고의 의식 수준에 갇혀 있으며, 이때의 그의 의식은 "세속의 법칙과 원리", 곧 어두움의 지배 하에 놓인다. 그의 정신과 의식은 오직 운명과 숙명과 운 따위가 지배하며, 그는 단 한 시도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깨어 있지 못하다. 에고의 의식 구조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하고 설명하는 짓은 이제 무용하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만 깨달으면 된다,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만을 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이다. 변화하는 것이다. 성장하는 것이다. 변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다른 그 어떤 지식도 앎도 다 무용하고 부질없고 허망할 뿐이다. 이때에, 그의 어두움은 곧 자아와 마음의 구조를 통하여 어두움의 결과를 내뿜으며, 그렇게 내뿜어진 어두움들은 다시 마음과 자아의 구조를 통하여 자기 안으로 쌓이며, 다시 강화된 어두움은 구조를 따라 돌고 돌아서는 어두움의 지배력을 끊임없이 높이게 된다. 이 처참한 실태가 바로 지옥이요, "윤회"이다. 별도의 지옥은 따로 없다. 이 자체가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정교하고 완벽한 지옥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 어두움의 주인이 노예(개체의식, 자아)를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때가 되면 다른 벌을 받고, 때가 되면 다른 학대를 당하고, 때가 되면 다른 일을 강제로 떠맡겠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들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임은 분명한 진실인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자, 혹은 거듭나기를 희망하여 그 길을 걷는 자의 의식은, 이제 어두움의 중력에서 영향력에서 지배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때, 어두움은 끊임없이 다시 그의 의식을 이전처럼 노예 상태로 되돌리려 한다. 자기 안의 죄가 미쳐서 날뛰며, 자기 안의 업과 까르마가 미쳐 발악하면서 온갖 처참한 사건과 결과들을 일으켜서 나를 다시 어두움의 고리 안에 되돌리고자 한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며,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니, 그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요16:33)이다. 담대하여라! 이 길을 걷는 영혼이여! 그대가 올바른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이 길을 걷는 한, 모든 순간마다 성령께서 보호하실 것이다. 성령이 곧 하나님의 영이시니, 감히 그분의 권세와 영광 앞에서 저항할 어두움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미 승리하였고, 또한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험이 완전히 통과되기까지는, 이 여정이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때를 믿고 따라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법도"이다. 그리고 세속의 시간이 아닌, "천상의 시간", 하늘나라의 시간이다. 의식은 시간을 따라서 흐른다. 그러나 어느 시간에 정렬되어 흐르는지가 문제이다. 무의미하고 허망한 죄의 반복에 불과한 세속의 시간에 자기의 의식을 정렬하려는가? 그리하라. 그러나 그 길에 구원은 없다. 다만 지금은 잠시 시험을 치르는 고통과 아픔을 감내할지언정, 이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과 그분의 시간을 따르기를 열망하는가? 그 과정이 결코 녹록치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는 내가 먼저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구원의 약속이 주어질 것이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약속받을 것이다. 그 문의 너머에서, 우리들은 그분의 나라에 들 것이다.
결국, "어두움의 지배력"에 의해서 세속의 현상적인 시간에 나의 의식이 지배당할 것인가, 아니면 "빛의 통치"에 의하여 하나님의 시간에 나의 의식이 인도받을 것인가, 의 차이이다. 전자는 성장은커녕 정체와 퇴보만을 낳을 것이고, 후자는 비록 현상적으로는 잠시 고통스러울지언정 매 순간 성장과 진보와 전진을 낳을 것이며, 끝에서는 반드시 구원과 영생과 천국에 드는 것을 약속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과 정렬하라 : 오직 그것만이 영원히 사는 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