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wer : 돈오(頓悟)

즉시, 단 한 번에, 영원히

by 생명의 언어

"점진적, 단계적 전환"은 없다. 깨달음은 오직 찰나에, 단 한 번에, 즉시, 완전하고 영원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것은 아성(我性)의 가장 교묘하고 교활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것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며,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듯이 번뜩이는 예리한 칼날에 모든 죄와 업과 까르마가 일격에 절단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칼날을 벼려온 끝에 대적출검(對敵出劍)의 예광이 번뜩이매, 망상과 환영이라는 어두움의 적이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이며,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평화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수행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 기도, 묵상, 명상, 참선, 혹은 종교와 전통을 불문하고 어떤 "행위"로서의 수행은 아무리 해봤자 그것으로는 깨달음, 각성, 전환에 단 1%의 영향도 주지 못한다. 마치 화면 바깥에서 아무리 소리쳐봤자 화면 안의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수행은 해야 한다. 깨어나지 못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절실한 자는 그것의 부질없음을 알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며, 간절한 자는 오히려 불가능하기에 더욱 메달린다. 그 시점에서, 이미 출발선은 다르다. 의지(Will)는 선천적인 것이며 타고나는 것이다. 의지라는 날카로운 칼이 예리하게 벼려져 있는 자는, 불가능과 시련과 고난을 앞두고서 그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세우는 법이며, 의지가 없는 자는 아무리 좋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고 불만한 끝에 결국 적당한 핑곗거리를 삼아서 타자에게 자기 죄를 덧씌우고는 도망치는 법이다.


깨달음은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런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애초에 "의식 구조 전체"가 한순간에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1층, 2층, 3층...... 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차원 평면세계의 존재가 어느 날 불현듯 3차원 입체세계를 체험한 후, 그의 세계관 전체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다. 그는 구(毬)를 보았다. 그런데 이전의 그가 살던 세계의 그 누구도 그가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설명할 길도 없다.




이것을 진실로 구하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구하지 않는다. 입만 벌리고 있으면 직접 떠서 먹여주겠다고 해도 그 누구도 관심을 두는 자가 없다. 화살 맞은 자가 의사 앞에서 더욱 교만해져서는, "당신의 자격과 실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내가 당신에게서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다. 자아라는 성(城)이 통째로 불타서 무너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하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 성의 화재를 진압하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탈출조차도 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불이 난 줄을 모른다.


구하지도 않는데 구해지기를 바라는가?

두드리지도 않는데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가?


나는 그러한 자들에게 이제 단 한 마디를 할 뿐이다 : 그냥 그대로 살아라. 나중에 죽음의 순간이 코앞으로 오면 그제서야 깨달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완벽하게 늦었으므로 후회 속에서 허망하게 죽을 뿐이다.




각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언제나 찰나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며, 뒤늦게서야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절대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제 그는 두번 다시 이전과 같이 되돌아갈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음(mind)이 주인 행세를 하며 의식 안에서 설쳐댈 때의 에너지는 거칠고, 투박하고, 불완전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끈적이고, 느리고, 불안정하며, 무겁다. 그것의 느낌은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영(Spirit)이 불현듯 깨어날 때, 마음은 행위함으로써 움직이려고 들지만, 영이라는 본래의 주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영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의식 안의 모든 것을 즉시 움직이게 만든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이다. 가짜 왕은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에고와 마음은 실체가 없는 망상이므로, 정지하는 순간 사라져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왕은 움직이지 않으며, 그저 권좌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모든 것을 한순간에 전환하게 만든다.


이것은 영의 차원의 신비이다. 더 이상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삶에서 한 번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을 무조건 끝까지 돌파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 때에,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온 세상이, 사회가, 그를 미쳤다 할 것이며, 제정신이 아니라 할 것이며, 가르치려고 들고 심판하려고 들고 재단하려고 들 것이며, 그를 비웃고 모욕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의 옳음과 높음을 강화하려 할 것이다. 상관없다. 그들은 결국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깨어난 자만이 살 것이다.


어두움은 깊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며, 신은 끝끝내 "앎"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끝나는지,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 제일 중요한 것을 결코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 이해를 구하지 말라. 나의 시험의 정답은 오직 나의 영에게 있으며, 그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때로 그는 자신의 배움을 넘어서야만 하며, 자신의 지혜를 넘어서야만 한다. 가지고 소유한 모든 것들을 죄다 버린 채로 무모하게 칼자루 하나만 쥐고 돌격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죽음 따위가 두려운가? 그 단계를 넘어선지가 오래되었다. 다만 이 생에서 그 임계점을 돌파하여 넘어서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 그래도 상관없다, 이루지 못한 이상 다시 내려와서 반복할 것이다. 신은 자비로우므로.


주권이 전환될 적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선명한 것이며, 결코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은 "존재 안에서 영이라는 참된 주인이 실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대개의 경우, 각성 이전까지 존재 안에서 영은 실계 상의 중심일 뿐,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통치를 행사하지 못한다. 마치 입헌군주제와 같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통치는 에고라는 개체의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당연히 그 통치는 폭정과 폭압이 반복되어, 존재라는 왕국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더"와 "덜"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에고는 폭군이며, 모든 개체의식은 폭정이다. 부패하고 타락하여 살점이 썩어들어간 끝에 언제 고통스럽게 죽느냐, 만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각성 이후, 단지 설계상의 주인이었던 영은 실체화되기 시작한다. "진정한 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왕의 존재는 곧 왕의 통치이다. 왕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군림하며, 군림하는 것만으로도 통치한다. 이것은 왕을 영접하지 못한 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영이 이제 그의 존재 안에서, 보이지 않는 의식의 에너지로 넘실거리면서, 그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전히 개체의식은 존재한다. 에고는 있다. 그러나, 이제 에고는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정당한 왕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온전히 목격하여 부서졌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제 자기 안의 참된 주인인 영의 휘광과 예광과 섬광을 때때로 목격하고, 듣고, 침잠하고, 함께하며, 그렇게 행위자에서 관찰자로 전환된다.


영이 깨어나지 못하는 한, 모든 신앙은 다 부질없는 짓이며, 모든 수행은 다 사치스러운 취미에 불과할 뿐이다. 영은 수평적이지 않다, 영은 오직 수직선이다. 영은 단계적이지 않다, 영은 즉시, 한순간에, 절대적으로 이룬다. 영은 차원이 다르다. 영은 영혼이 아니다. 영혼보다 높은 것이며, 영혼을 "다스리는" 것이다.


오직 영만이, 아버지를 "직접" 볼 수 있다. 오직 영으로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에 관한 한, 더 이상 이를 것이 없다.


뛰어들어라. "더 깊이 빠져, 죽어도 되니까, 다시 한 번만."


이것은 그리 미쳐서 덤벼드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 이번 주말(~11/1일 토요일)까지 1:1 유료 영성 수업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브런치에 올라온 관련 공지(<생명의 언어> 1:1 영성 수업 신청자 모집 안내) 글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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